<최후의 제국>이 대선주자들에게 건네는 말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을까.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단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주 작은 섬 아누타에서 촬영을 마치고 떠나는 제작진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 주변의 누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시인들에게 그저 이별이 아쉬워 통곡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최후의 제국'(사진출처:SBS)

아마도 제작진도,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들은 처음에는 멍해졌다가 차츰 그 통곡이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어느새 그 울림이 닿은 제작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본 시청자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이 오고갔던 것도 아닌 그저 진심을 담은 마음 하나만으로 그들은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최후의 제국>. 영어 제목은 <The Last Capitalism>으로 ‘최후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는 왜 그 멀고도 먼 외딴 섬 아누타까지 찾아갔을까. 그것은 아누타 섬이 자본주의에 의해 돈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되는 세상과 정반대되는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제작진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는 그들이 보여준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깊은 공감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그 공감의 가치는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세계는 아누타 섬과는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돈으로 가치 매겨지는 세상은 자신의 몸매 관리를 위해 대리 수유모를 사는 부자 엄마와 당장 벌이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 대신 남의 대리 수유모가 되는 가난한 엄마를 이어주었다. 급격한 자본의 물결이 몰아닥쳐 신흥 부자계급이 생겨난 데다,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모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중국의 새로운 풍경이다. <최후의 제국>은 이 풍경에 대해 묻는다. 과연 돈은 모성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는 수업에 빠지지 않고 숙제를 잘 해온 학생들에게 돈을 준다. 제 아무리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려는 학교의 고육지책이라고는 해도 이런 교육은 결국 학생들에게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 가치의 본말이 전도된 교육은 과연 이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이 34개 OECD 국가 중 빈곤율 4위라는 충격적인 보고에서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는 플로리다주의 모텔에서 살아가는 굶는 아이들을 조명하며 이 아이들이 왜 이런 불행에 처하게 됐는지를 꼬집는다.

 

아마도 그토록 멀리 떨어진 아누타 같은 외딴 섬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자본이 아닌 인간을 찾아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의 불행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1%의 부와 99%의 가난.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했던 그 유명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불편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과 이기심보다 중요한 공존의 가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돈이라는 번쩍거리는 괴물에 가려 바라보지 않던 그 불편한 진실을 우리 눈앞에 들춰냄으로써 급기야 공감하게 만드는 <최후의 제국>은 그래서 그 어떤 거창한 정상들의 회의나 연설보다 더 우리를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저 미국의 풍경이 어찌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선에 즈음하여 모든 대선 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면 안 될 것이다. <최후의 제국>은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들고 또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돈에 미친 세상에 던지는 다큐의 일침. 이것이 <최후의 제국>이라는 명품다큐가 보여주는 가치다.

<정글2>, 출연자의 진가를 찾아주는 예능

 

그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정글의 법칙2(이하 정글2)>가 발견한 건 야생의 정글만이 아니다. 그 야생의 환경 속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진가다. <정글2>에 출연한 이들은 그들이 이 프로그램에 나오기 전과 후에 확실한 이미지 변화를 갖는다. '이 사람에게 저런 면모가 있었어?' 하고 묻게 되는 예능, 바로 <정글2>다.

 

 

'정글의 법칙2'(사진출처:SBS)

김병만의 야생 적응력이 남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높은 야자수를 타고 올라가 야자를 따는 모습은 그렇다 치고,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뚝딱 뚝딱 만들어내는 야생 맥가이버 같은 면모는 달인과는 또 다른 풍모였다. 특히 <정글1>이 거의 모든 걸 김병만에 의지했던 것과 달리, <정글2>로 넘어와 추성훈 같은 인물이 투입되자 김병만만의 장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힘이 아니라 요령이 남다른 김병만은 추성훈과 비교해 '도구의 인간(?)'이었다. 물고기를 잡는 것도 처음에는 작살 같이 뾰족하게 만든 나무로 찌르다가 잘 안되자 이른바 퍼 올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빗물을 모으기 위해 특별한 기구를 고안해내기도 하고 매번 지형지물을 이용해 집을 짓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글2>가 보여준 김병만의 새로운 진가는 그가 묵묵하게 행동으로 가족(?)을 챙기는 모습이다. 그에게서는 어느새 족장의 풍모가 풍기고 있다.

 

추성훈은 몸이 앞서지만 특유의 매너로 똘똘 뭉쳐 있는 캐릭터다. 뭔가 일이 안될 때 신경질을 내기도 하지만 악의나 뒤끝은 없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강인해 보이는 단단한 몸 뒤편에 숨겨진 부드러운 면모를 추성훈은 <정글2>를 통해 보여주었다. 의외의 예능감의 소유자로 어색한 한국말은 그를 근육질의 초딩 같은 반전 캐릭터로 만들어주고 있다.

 

리키 김은 <정글2>를 통해 재발견된 캐릭터. <출발 드림팀>을 통해 그 강인한 승부욕은 정평이 나 있었지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바른 모습과 의외로 넘치는 정은 그의 새롭게 발견된 면모다. 파도에 제작진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바다로 뛰어든 리키 김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가족에 대한 정서를 갖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노우진은 <정글>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달인의 보조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이 프로그램이 예능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줄 정도였다. 또 상대방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역시 달인이 있기 위해서는 노우진 같은 인물이 옆에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불을 피울 때 김병만과 추성훈이 정작 대결하듯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 나무를 모기를 물려가면서도 놓지 않고 버텼던 것은 바로 그였다.

 

포기의 아이콘이라는 캐릭터를 갖게 된 광희 역시 <정글>로 인해 존재가치를 한껏 높인 인물이다. 그저 개념 없이 웃기려고만 하는 아이돌이라고 여겨졌었지만, <정글>은 그런 막내 같은 광희를 한 차원 성숙되게 만든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사실 모두가 김병만이나 추성훈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아마도 광희 같은 어찌 보면 우리를 닮은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가진 야생성은 더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글2>에 새롭게 투입된 유일한 여성 출연자인 박시은은 의외의 털털한 모습과 때론 누나 같고 때론 엄마 같은 편안함을 보여주었다. 여성으로서 정글이라는 환경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성만이 가진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박시은은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위기의 순간에 가봐야 그 사람의 진가가 비로소 보인다고 한다. 정글이라는 야생의 환경은 그래서 그 속에 던져진 인물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김병만의 성실성이나 추성훈의 매너, 리키 김의 정이나 노우진의 배려심 그리고 황광희의 성장과 박시은의 편안함은 그렇게 발견된 것들이다. <정글2>는 그래서 야생의 적응과정이 주는 재미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견되는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프로그램이다.


'해품달' 성공이 중견작가들에게 시사하는 것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이 시청률 37%를 넘어섰다. 이런 기세면 40%도 손쉽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한 때 사극이란 장르가 첫 회부터 20% 시청률로 시작해 통상 40%를 넘기는 것이 다반사였던 걸 떠올려보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드라마들의 시청률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해는 사극마저 20% 넘기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항간에는 대신 예능이 드라마의 권좌를 빼앗았다는 얘기마저 돌았다. 그러니 '해를 품은 달'이 첫 회에 18%의 시청률을 기록했을 때 심지어 제작진마저 깜짝 놀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은 그저 한 작품의 성공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즉 이 작품은 똑같은 패턴을 반복함으로써 침체됐던 사극의 부활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과정에는 '역사로부터의 탈피'라는 과감한 선택이 있었다. 역사 바깥으로 나와, 완전한 허구가 된 사극은 그 장르적 특성이 가진 장점만을 취한 셈이다. 하지만 '해를 품은 달'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역사적 배경만 떼어놓고 보면 전형적인 청춘 멜로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은 그간 침체기를 겪은 멜로 장르가 사극이라는 틀을 접목시켜 부활한 작품으로도 평가될 수 있다. 그만큼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작년 한 해 우리의 주목을 끈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면 그 핵심에 바로 이 '참신한 시도'가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주의 남자'가 본래 역사를 재구성하여 팩션 사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의 한글 창제라는 소재 속에서도 전혀 다른 장르적 재미를 덧붙인 팩션 사극의 새로운 실험을 완성했다고 평가된다. 작년 초 '현빈 앓이'를 만들었던 '시크릿 가든'은 영혼 체인지라는 판타지를 덧붙여 멜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독고진 현상'을 만든 '최고의 사랑' 역시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 대중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보기 드물게 법의학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 '싸인', 의학드라마의 틀 안에서 심지어 컬트적인 시도를 보인 '브레인'도 그 참신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반면 작년 두드러진 현상은 중견작가들의 저조한 성적이다. 김정수 작가가 쓴 '내일이 오면'은 10%대 초반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문영남 작가의 '폼나게 살거야'도 시청률 10%를 못 넘기고 있다. 그나마 임성한 작가가 '신기생뎐'으로 24%의 시청률을 올렸지만, 이 작품은 시청률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졸작이었다. 유령에 빙의되고 심지어 눈에서 레이저광선을 쏘는 장면들은 이 작품을 막장 중의 막장으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알츠하이머라는 기억의 문제를 덧붙여 절절한 멜로를 만들어냈던 김수현 작가의 '천일의 약속'은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지만 그 명성에 비해 저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중견작가들이 써내는 거의 비슷비슷한 도돌이표의 작품들에 대중들이 시선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것. 가족드라마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것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중견작가들이 주로 써온 가족드라마들은 인물 구성만 달리했지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굳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또한 중견작가들의 작품들이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거나 연구해서 나온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한 마인드 게임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점도 대중들의 외면을 가져온 이유 중 하나다.

'해를 품은 달'의 진수완 작가, '공주의 남자'의 조정주 작가, '무사 백동수'의 권순규 작가, '싸인'의 김은희 작가, '브레인'의 윤경아 작가 등등, 사실상 신진작가들이 작년 대거 주목을 받은 반면, 중견작가들의 성적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 제작진들의 시선도 바꾸고 있다. 그래서 벌써부터 드라마 업계에는 작가의 '세대교체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이다. 신진작가들에 비해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비싸면서도 그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중견작가를 굳이 쓸 이유가 없다는 것. 게다가 시청률이 나온다 해도 매번 비슷한 패턴에 머물러 있는 드라마에 대한 대중들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시청률이 좋아도 이런 작품에 광고가 잘 붙을 리도 없다.

물론 이렇게 중견작가들의 몸값이 성적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아진 데는 방송사의 책임이 있다. 시청률을 담보하기 위해 참신한 신진작가들의 실험보다는, 안정적인(?) 중견작가를 너나 할 것 없이 모시다 보니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사실 극성이 높아 시청률은 잘 나오지만 드라마의 완성도는 떨어지기 마련인 막장드라마의 양산은, 바로 이런 몸값에 걸 맞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중견작가들의 안간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시청자들이 이런 작품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방송사 입장에서도 그런 작가를 기용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같은 패턴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중견작가라고 해도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만큼 작품은 쏟아져 나오고 드라마가 아니어도 점점 볼 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중견작가들은 이제 스스로도 연구하고 실험하는 작품을 고민해야 될 시기다. 중견작가로서 '뿌리 깊은 나무'를 쓴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그런 점에서 모든 중견작가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자기 스타일이 있고 글 잘 쓰는 중견작가라고 해도 이제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해를 품은 달'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 속에는 그 참신함에 대한 갈증이 느껴진다.


'1박2일'이 강호동의 공백을 느껴야 하는 이유

'1박2일'(사진출처:KBS)

그는 떠났어도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1박2일'이 강호동을 보낸 마음이 그렇다. 강호동 없이 5인 체제로 꾸려지는 '1박2일'로서는 그 커다란 공백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이상, 뒤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남은 5인들이 어떻게 '1박2일'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어쩌면 이 위기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니까.

위기를 기회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강호동이라는 큰 산이 '1박2일'에 미친 영향만큼 그 산의 그림자에 가려서 못한 것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즉 강호동이 있기 때문에 제작진과 멤버들 사이에 팽팽한 대결구도가 만들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 대결구도는 물론 '1박2일'을 재밌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스텝들과 멤버들이 야외취침이나 전원 입수를 놓고 경기를 벌이는 장관은 이 대결에서 나온 것이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제작진과 멤버들 간의 대결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매력적인 구도지만 반복되다 보면 이것도 언젠가는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호동이 없는 상황은 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바꿔줄 수 있다. 즉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고 제작진이 멤버들을 압박할 수도 있다. 나영석 PD는 이미 '1박2일'의 한 멤버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권력의 이동(?)은 의외의 재미로 만들어질 수 있다.

사실 더 기대되는 부분은 강호동 없는 팀에 누가 리더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나이 순으로 보면 엄태웅이 가장 연장자지만, 어디 사회생활(?)의 위아래가 나이 순으로 정해질까. 군대도 짬밥(?) 순이라지 않은가. '1박2일'의 야전경험이 많은 은지원이나 이수근, 이승기 그 누구도 이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이는 없다. 따라서 강호동이 빠지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1박2일'에서 멤버들 간의 미묘한 헤게모니 싸움은 그 자체로 예능의 웃음 코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서열 싸움만큼 예능에서 재미있는 건 없다.

어쩌면 서로 리더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리더 자리의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올 수도 있다. 그 리더라는 것이 제 맘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부담 있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피하려는 모습이나 서로 가지려는 모습 그 어느 것이든 강호동의 공백으로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의도되고 기획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1박2일'은 억지로 캐릭터를 만들어내서 이야기를 만드는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이수근이 제 캐릭터를 찾기까지 1년이 걸렸던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저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다 보면 당연히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어쩌면 강호동이 작별인사조차 없이 떠나가며 '1박2일'에 남겨놓은 선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빈자리마저 또 하나의 재미로 전화될 수 있게 한 그 묵직했던 존재감 말이다.

또 이것은 '1박2일'이 강호동을 떠나보내고도 강호동과 함께 하는 법이기도 하다. 빈 자리를 놓고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거나 혹은 그 자리의 무게감을 책임으로 느끼는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강호동을 계속 추억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떠났어도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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