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슬럼프’, 자존감 바닥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멜로

닥터 슬럼프

“너 잘못 산 적 없어. 네 잘못 아니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보다 위로와 응원은 아니었을까. 정우(박형식)가 하늘(박신혜)에게 건네는 말은 갈수록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말 같다. JTBC 토일드라마 <닥터슬럼프>가 건드리는 감정의 실체도 바로 그것일 게다. 겉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있지만 속은 밑바닥에 떨어져 울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드라마는 말한다. 네 잘못 아니라고. 

 

멜로드라마가 사랑 타령에 머무는 것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멀어진 건 그것이 현실과 너무나 유리되어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멜로는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 멜로드라마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건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뒷면을 들여다보면 현실에 지쳐 힘겨워 하는 우리들에 대한 응원과 위로의 목소리들이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닥터슬럼프>의 전작이었던 <웰컴투삼달리>를 떠올려 보라. 그 멜로드라마는 조삼달(신혜선)과 조용필(지창욱)의 멜로를 그렸지만, 드라마를 가득 채운 건 누명을 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제주도 삼달리로 내려온 조삼달이 변함없는 고향 같은 따뜻함을 지닌 조용필과 삼달리 사람들의 위로와 응원을 받고 회복해가는 이야기였다. 

 

tvN에서 방영됐던 <무인도의 디바>는 어떤가. 그 드라마 역시 목하(박은빈)와 기호(채종협)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운 건 가정폭력 피해자 혹은 세상이 소외시킨 이들에 대한 위로와 응원이었다. 목하의 노래와 사랑이 특히 우리의 가슴을 울렸던 건 거기서 무인도 같은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비춰져서다. 

 

<닥터슬럼프>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노력해 성공했고 유명해졌지만 의료사고가 터지면서 억울하게 그 사고의 책임까지 떠안고 모든 걸 잃게 된 정우에게 술에 취한 하늘이 “누명”이라고 말해주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에 대해서도 “너가 좀 유치하긴 하지만 나쁜 짓하고 뻔뻔하게 우길 놈은 아니니까”라고 말해주는 대목에서도 우리의 가슴은 촉촉해진다. 잘 나갈 땐 모두가 친구처럼 다가오지만, 한번 미끄러지면 모두가 등돌리는 현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주하던가.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변치않는 마음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건 각종 갑질들을 견디다 못해 선배를 들이받고 병원을 나오게 된 하늘이, 그 사실 때문에 어떤 병원에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자 “잘못 산 것 같다”고 말하자 “네 잘못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정우의 대사에서도 느껴진다. 어려움에 봉착해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어딘가 내가 잘못 산 거 같다고 여기곤 하지만, 그럴 때 잘못된 건 네가 아니라 비틀어진 현실이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가. 

 

<닥터슬럼프>와 더불어 최근의 멜로드라마들의 경향을 들여다 보면, 확실히 사랑보다 우리가 더 원하는 건 위로와 응원인 것 같다. 저마다의 이유로 인생 슬럼프에 빠져버린 정우와 하늘이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울며 때론 무너지는 그 서로의 어깨를 지지해주고, 어디서도 털어놓지 못하는 하소연들을 들어주는 장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설레고 흡족해지니 말이다. 물론 그 위로와 응원은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할 테지만.(사진:JTBC)

<무인도의 디바>로 우영우를 잇는 응원을 선사한 박은빈

무인도의 디바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늦깎이 바이올리니스트 역할을 연기하게 되면서 유튜브에 올린 ‘바이올린 연습일지’에서 박은빈은 전공생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를 연기해내야 하는 고충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몇 개월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바이올린 연습을 해 놀라울 정도의 연주를 보여준 그 영상에서 툭 튀어나온 이 말은 배우 박은빈의 명대사가 되었다. 그건 매번 도전적인 연기에 임하는 박은빈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대변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도 박은빈은 극중 가수로 성장해나가는 서목하를 연기하며 등장하는 노래들을 직접 모두 불렀다. 그 노래들(모두 11곡)은 OST에 담겨져 음반으로 출시됐는데(1월5일 발매), 이를 위해 박은빈은 6개월 간 3시간씩 43번의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역할에 맞게 기타도 배우고, 노래 발성 연습도 했다. 또 녹음실에서 적게는 4시간에서 많게는 10시간까지 녹음을 하며 음반 작업을 했다고 한다. 배우지만 거의 가수 데뷔 같은 도전적인 노력을 했던 거였다. 아마도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은빈은 역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그런데 이 말에는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청춘들에 대한 공감과 응원이 담겨있다. 즉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청춘들에게 그 힘겨움에 대한 공감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하지 않으면 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5살 때 아동복 모델로 시작해 연기를 하게 된 후 지금껏 쉬지 않고 그 길을 걸어온 박은빈이 그 실제 사례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매번 도전 아닌 연기가 없었을 정도로 쉽지 않은 역할을 하나하나 해내면서 결국 백상예술대상 대상에 빛나는 최고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지 않았던가. 

 

<청춘시대>에서는 차분하고 단단한 자신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음주가무, 음담패설에 능수능란한 역할에 도전했고, <스토브리그>에서는 속이 뻥 뚫리는 걸크러시를 보여주는 주도적인 프로야구 프런트 오피스 유일의 여성 운영팀장 역할을 소화했다. 그러더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이 두 캐릭터와는 또 완전히 다른 청순하고 내셩적이며 수줍음 많은 늦깎이 대학생 역할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고 이제 활짝 피어난 박은빈의 시작이었다. <연모>에서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남자배우가 연기할 수밖에 없는 사극의 왕 역할을 연기했는데, 그건 액션부터 정치, 로맨스까지 넘나들어야 하는 난관을 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박은빈은 이제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라는 또 다른 산을 넘는다.

 

그런데 이들 작품 속 캐릭터들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위로와 응원이다. <청춘시대>에서 어디로 튀어도 청춘은 아름답다고 캐릭터 자체로 말해준 송지원이 그렇고, <스토브리그>에서 위태로운 야구단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승수(남궁민) 단장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이세영이 그러했으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평범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청춘들을 지지한다고 온몸으로 말해주는 듯한 채송아가 그랬다. 또 박은빈은 <연모>에서 여성이라는 정체를 숨긴 채 피 튀기는 궁중 생존기를 겪는 이휘를 통해 차별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여성들을 응원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장애를 갖고 있지만 변호사로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우영우를 통해 편견 없는 세상을 지지했다.

 

그래서였을까. <무인도의 디바>의 서목하는 극중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위로와 응원의 아이콘’으로서 박은빈 자체로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한 때는 디바로 불렸지만 지금은 한물 간 기성가수가 되어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윤란주(김효진)에게 서목하가 던지는 무한 응원이 그렇다. “시상에 언니 팬이 딱 하나 남았다고 하믄, 언니, 응? 그것은 서목하고요. 언니 팬이 없다고 하믄 그것은 이 서목하가 세상에 없어져 붓다 치면 돼요, 언니. 언니, 지는요 언니. 언니를 위한 것은 뭣이든 해요, 언니. 어 풍선 그깠거 불라믄 천 개, 만 개도 불어요, 언니. 일도 아니어요, 언니. 그니까요 언니 응? 힘내 불어요잉.” 그 말은 마치 저마다 힘겨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응원처럼 들렸다. 박은빈은 그렇게 서목하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를 위로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실로 박은빈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2020 SBS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받았을 때 자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극중 송아가 ‘음악을 하기로 선택했으니까 음악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대사는 했는데요. 저도 배우가 되기를 선택했으니까 제가 선택한 작품이 그리고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에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백상 예술 대상 대상을 받았을 때도 그의 수상소감에는 세상의 많은 다양하고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응원의 목소리가 실렸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있고 아름답습니다. 라는 대사였는데요. 영우를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나는 알아도 남들은 모르는, 또 남들은 알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그런 이상하고 별난 구석들을 영우가 가치있고 아름답게 생각하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아서 많이 배웠습니다.”  

 

도전적이고 경쟁적인 세상이다. 최후의 1인이 모든 걸 독식하는 현실 속에서 무수히 많은 소외되는 이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누군가의 응원이 절실해진다. 당신은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고, 힘겹지만 결국은 해낼 거라는 응원. 박은빈은 자신 또한 결코 쉽지 않았지만 결국은 해냈던 여러 역할들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를 응원한다. 그만큼 진정성이 담겨 있기에 그 역할의 대사들은 더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그녀는 이것이 배우로서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마치 <무인도의 디바>에서 변함없는 응원을 받았던 윤란주가 서목하에게 갖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나 아닌 누군가를 온전히 응원하는 건 정말 어려워. 아무 대가 없이 질투 없이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건 더 어렵고. 그게 목하 니가 대단한 이유야.”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박은빈처럼. (글:국방일보, 사진:tvN)

코다 소년 려운에 담은 청춘들에 대한 ‘반짝이는 워터멜론’의 응원

반짝이는 워터멜론

“제가 문제를 일으키면 부모님이 욕을 먹어요.” 은결은 비바 할아버지(천호진)에게 숨겼던 자신의 속 얘기를 꺼내놓는다. “장애인이라 애를 제대로 못 키웠다고. 두 분 다 농인이시거든요. 제가 잘못하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욕을 들으세요. 그래서 제가 잘해야 돼요.” 은결은 농인 부모의 청인 자녀인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모는 물론이고 형 은호의 입과 귀가 되는 보호자 역할을 해왔다. 

 

은결의 아버지는 가족이 모두 위험에 처하면 가장 먼저 은결이를 구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는 가족 모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아빠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될 수도 있다”며 은결이는 분명 “뛰어가서 아빠를 도와줄 누군가를 반드시 불러올 것”이라고 했다. 어린 은결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아빠가 말한 것이지만, 그것이 은결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자 책임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tvN 월화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은 코다로 살아오며 누구보다 더 가족을 위해 노력해온 은결이 비바 할아버지를 통해 기타를 알게 되고 배우는 이야기로 문을 열었다. 수화를 통해 침묵의 세계에 살아가는 가족과 소리의 세계인 세상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온 은결에게 불쑥 등장한 기타라는 음악의 세계. 비바 할아버지는 음악의 세계가 수화와 비슷하다며 “손으로 말을 걸고 음으로 돌려받는 것”이라고 했다. 

 

또 코드의 세계는 인생과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코드에는 메이저 코드와 마이너 코드라는 게 있는데, 메이저 코드가 밝은 느낌을 준다면 마이너 코드는 좀 슬프고 우울한 느낌을 내지. 메이저와 마이너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비로소 멋진 곡이 완성된단다. 인생도 마찬가지야. 시련도 있고 기쁨도 있어야 비로소 반짝이는 인생이 완성되는 법이지.”

 

하지만 음악의 세계 깊숙이 빠져들던 은결은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화재가 나는 사건을 겪으며 기타를 내려놓는다. 그 화재로 형과 아버지가 죽을 뻔 하고 집은 잿더미가 됐다. 은결이 그 안에 있다 생각한 아버지가 무작정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은결은 알았을 게다. 아버지가 아니 나아가 이 가족이 얼마나 자신을 의지하는가를. 

 

<반짝이는 워터멜론>은 알쏭달쏭한 제목에도 담겨 있지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청춘의 반짝임을 응원하는 드라마다. 그 이야기를 은결이라는 코다 소년으로부터 시작하는 건,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접어두고 살아가는 삶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건, 가끔 마스크를 쓰고 길거리에서 기타 버스킹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을 하는 것이다. 음악을 선택하는 것이 가족을 버리는 것처럼 여기는 이 청춘은 이 족쇄를 벗어나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까. 

 

그 단서는 이미 비바 할아버지가 어린 은결에게 코다를 설명하며 전한 바 있다. 그는 은결이 가족 중에서 혼자서만 듣고 말할 수 있는 코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코다가 하는 수화와 음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말해줬기 때문이다.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를 이어주는 사람들이지. 말과 손으로. 그리고 때로는 너처럼 음악으로.” 

 

간만에 느껴지는 따뜻함과 청량함이 있는 드라마다. <반짝이는 워터멜론>은 비바 할아버지가 은결에게 전하는 음악처럼, 그가 해온 코다로서의 삶이 음악인으로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가족만이 아닌 세상을 향한 존재가 되기를 응원한다. 그 책임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고 등을 두드려준다. 청춘들에게 뭐든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어른의 시선이 있고, 그게 뭐라도 반짝반짝 빛나는 청량한 청춘들이 있다. 이 드라마가 첫 회부터 꺼내놓은 진심은 그래서 이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사진:tvN)

‘황금가면’, 조우진 가면 쓴 김동률의 응원이라 더 신난다

'황금가면' 뮤직비디오

치약, 칫솔, 커피가 남은 종이컵, 전화기 그리고 뭔가 숫자로 채워져 있는 모니터와 볼펜, 명함... 전형적인 사무실 책상 위 풍경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샐러리맨의 일상을 상상하게 한다. 그 주인공은 영업관리 2팀 조우진 차장. 환율 그래프를 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피로하다. 그 풍경들을 훑어가며 빠른 템포의 발랄하지만 빈티지한 연주와 함께 김동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김동률의 신곡 ‘황금가면’ 뮤직비디오의 시작 장면이다. 

 

제목만 들어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은 이 노래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을 ‘황금가면’을 쓴 슈퍼히어로에 대한 이야기다. 황금가면을 쓰고 나쁜 사람 벌벌 떨게 만들고 착한 사람 지키는 슈퍼히어로. 그 때는 고무장갑 끼고 빗자루를 검 삼아 휘둘러도 뭐든 이겨낼 수 있을 듯 의기양양 했었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러 일에 지쳐가는 이 샐러리맨의 축 처진 어깨는 우리의 자화상이 되었다. 

 

김동률의 ‘황금가면’은 이처럼 한때는 누구나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우리들이 현실에 치여 약해져만 가는 모습이 된 현재로 시작한다. 숫자들만 가득하던 모니터에서 갑자기 노랗고 빨간 타이즈를 차려 입은 우스꽝스럽지만 거침없어 보이는 황금가면을 상상하고, 화장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낀 고무장갑과 빗자루에서도 황금가면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김동률의 잔잔한 목소리로 시작했던 노래는 조금씩 시동을 건다. 

 

야근에 지쳐 책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조우진 차장이 퇴근길을 걷기 시작하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오며 고조되는 노래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다 지쳐 숨을 헐떡일 때, 저 편 거리 곳곳의 일단의 무리들이 모니터에서 잠깐 상상 속에 등장했던 황금가면들의 춤동작을 따라한다. 그 모습이 마치 지친 조우진 차장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황금가면’은 김동률이 지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응원가라는 걸 이 장면이 말해준다. 

 

빠른 템포로 잔잔히 흘러가던 곡이 갈수록 고조되고 급기야 황금가면이 날아가듯 클라이맥스를 향해 빵빵 터져나가는 이 노래는 듣는 이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김동률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비트감 있고 세련되면서도 빈티지한 목소리가 잔잔하게 시작해 우리 안에 숨겨진 그 무언가를 울컥 울컥 꺼내 올리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저마다 가졌었지만 잊혀졌던 ‘황금가면’이 아닐까. 

 

이 노래는 특히 조우진을 주인공으로 세워 놓은 뮤직비디오가 걸작이다. 조우진은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단박에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배우다. <수리남> 같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마지막회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잔상으로 남은 건 다름 아닌 조우진의 압도적인 아우라를 담은 그 얼굴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황금가면’ 뮤직비디오에서 조우진은 샐러리맨이 가진 억눌린 감정과, 이를 터트려내는 과정들을 너무나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앉아 있다가, 달리기 시작하고 급기야 답답한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풀어 제치고 춤을 추는 그 변화들은 보는 이들을 몰입시켜 저마다의 억압된 감정을 풀어내고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또 처음에는 김동률의 목소리로만 들리던 노래에, 조우진이 입을 맞춰 립씽크를 해 노래를 부르며 군무를 하는 장면은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건 내면에 숨겨졌던 ‘황금가면’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연출되어 기묘한 쾌감을 준다. 

 

조우진의 립씽크에 맞춰 흘러나오는 김동률의 노래는, 마치 조우진 가면을 쓴 김동률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세상이 정해준 내 역할이 맘에 안 들어”라는 가사는 그래서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인 조우진 차장의 목소리 그대로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김동률이라는 가수가 하고픈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물론 다양한 장르들을 실험해온 김동률이지만 대중들에게는 발라드 가수로만 여겨져 온 게 사실이 아닌가. 그 역시 그 틀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이 곡에서는 느껴진다. 그래서 이 관점으로 보면 김동률이 조우진이라는 가면을 쓰고 마음껏 하고픈 음악과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도 읽힌다. 

 

본래 가면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했던가. 그 하나가 진짜를 가리는 가짜라는 의미라면, 다른 하나는 얼굴을 가림으로써 오히려 진면목을 드러내는 장치의 의미다. 전자가 가면을 벗어 진짜 나를 찾는 것이라면, 후자는 가면을 씀으로써 진짜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황금가면’은 이 두 의미를 동시에 담아낸다. 조우진이 본질이 아닌 것 같은 가면의 삶 속에서 그걸 벗어버리고 내면의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을 통해 전자의 의미를 담는다면, 김동률은 조우진이라는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이 하고픈 음악적 세계를 마음껏 펼친다는 후자의 의미를 담는다. 이러니 이 응원가가 더 신날 수밖에. 잊었던 진짜 나를 조우진과 김동률이 저마다의 가면의 방식으로 응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황금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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