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스케7>, 더 다양해진 인물들의 이야기

 

인기가 점점 떨어진 것에 대한 것은 인정한다.” <슈퍼스타K7>의 김기웅 국장은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슈퍼스타K>의 물이 빠져서라기보다는 오디션 프로그램 전반에 대한 기대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즌7으로 돌아온 <슈퍼스타K>는 전혀 물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가자 하나하나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목소리와 스타일 그리고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 전하고 있었다.

 


'슈퍼스타K7(사진출처:Mnet)'

이제 18세의 싱어 송 라이터 유용민은 나이답게 엉뚱하고 장난기 많은 모습이었지만 막상 노래를 부르자 그 누구보다 애절하게 마음을 담은 노래를 들려줬다. 노래가 끝나고 나자 모두가 숙연해질 정도. 이 첫 무대로 편집해 보여준 반전의 모습은 <슈퍼스타K7>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 것이었다. 그저 노래가 아니라 그 노래를 부르는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어서 나온 18살 박수진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교복이 촌스럽다며 부끄러워했고, 본인이 잘한다는 엽사(엽기사진)를 보여주는 딱 그 나이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노래를 부르자 의외의 원숙한 감성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그녀가 불러준 James moody‘Moody’s mood for love’는 마치 재즈 싱어 같은 놀라운 감성이 묻어나는 노래였다. 에일리의 표현 그대로 외국 그루브가 있는 노래.

 

애틀란타에서 온 밝은 에너지가 가득한 클라라 홍 역시 그 무대는 반전이었다. 밝고 경쾌한 음악을 들려줄 거라 생각됐지만 그녀는 이문세의 사랑은 늘 도망가를 짙은 감성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불러주었다. 윤종신이 말했듯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클라라 홍에 의해 재발견된 곡처럼 느껴졌다.

 

뉴욕에서 온 케빈 오도 내성적인 성격이라 마음을 노래에 담아 전한다는 그의 표현대로 조근 조근 말을 건네듯 노래를 불러주었고, 미국에서 온 스티비 워너는 끼를 주체 못하는 밝은 모습으로 나와 특유의 댄스와 노래가 어우러진 그만의 무대를 선사했다. 자밀킴 같은 우리 가요계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색깔과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준 참가자는 <슈퍼스타K7>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19살 김민서의 노래는 그녀의 밝고 쾌활한 모습과는 상반되는 아픈 가정사가 담겨져 있어서 뭉클할 수밖에 없었던 무대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하나도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 청춘은 밝은 미소 속에 숨겨져 있는 그 그림자를 마치 노래를 통해 뽑아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노래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아낌없는 칭찬은 결국 그 쾌활한 얼굴에 기쁨의 눈물이 맺게 만들었다.

 

홍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밴드 중식이는 촌스러움을 추구하는 괴짜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노래만큼은 자신들의 진정성이 살아있었다. 이 밴드가 불러준 아기를 낳고 싶다니라는 곡은 그저 웃긴 것이 아니라 삼포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웃픈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냈다.

 

<슈퍼스타K>는 매 시즌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가수들을 배출할 때마다 다음 시즌에 도대체 더 이상 나올 사람들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새롭게 시즌이 시작되면 어디서 이런 인물들이 또 나왔는가 싶을 정도로 새롭다. 이게 가능한 건 <슈퍼스타K>가 그저 노래만을 들려주는 오디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노래하는 이들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던 그 속내와 마음이 담긴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있다.

 

어린 것처럼 보여도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듯한 목소리의 18세 소년이나, 교복이 불만인 고등학생처럼 보여도 의외로 깊은 감성을 가진 소녀, 밝은 에너지와 쾌활함 속에 감춰져 있는 아프고 깊은 감성들을 노래에 담아 불러주는 참가자들. <슈퍼스타K>가 시즌7까지 왔어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이고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다. <슈퍼스타K7>이 물이 빠졌다고? 천만에. 첫 방송부터 그런 편견을 깨주는 참가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화정>, 역사를 뛰어넘으려면 이야기가 흥미로워야한다

 

MBC 월화 사극 <화정>의 그 시작은 대단히 야심찼다. 사극이나 역사가 그러하듯 한 사람의 시각을 따라가기보다는 다양한 시각들을 욕망의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포부. 그래서 광해군 시절을 그리지만 거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그 좌절이 그려진다. 인목대비(신은정)는 자식들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에 외척 세력들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두 자식을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이한다.

 

'화정(사진출처:MBC)'

그 중 한 명인 정명공주(이연희)는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왜국으로 팔려가게 되고 거기서 유황을 다루는 기술을 배워 조선으로 돌아와 광해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한편 강주선(조성하)은 광해를 끌어내리기 위해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고, 김개시(김여진)나 이이첨(정웅인)은 광해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지만 그들 역시 광해를 등에 업고 권력을 욕망하는 자들이다.

 

어찌 보면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가진 저마다의 욕망과 그 부딪침이 만들어가는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다는 건 대단한 야심이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화정>은 초반 시작은 그래서 광해의 이야기를 축으로 그려졌다. 그가 아버지 선조(박영규)를 밀어내고 또 형인 임해군(최종환)은 물론이고 정명공주의 아우인 어린 영창대군(전진서)까지 제거할 수밖에 없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다뤄졌다. 거기에는 왕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인간적인 아픔이 교차되는 광해가 그려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야기의 축이 이제 광해에서 정명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에서 그 극의 힘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보통의 사극은 한 인물이 중심에 서면 그 인물을 통한 다양한 갈등과 긴장감으로 극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이야기의 축이 바뀌니 정명이 다시 그 극적 긴장감을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왜국까지 넘어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정명의 이야기는 다채롭긴 해도 생각만큼 시청자들의 몰입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정명의 이야기가 너무 상상력에 의존한 허구에 기반한다는 점 때문이다. 광해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들이 재해석된다고 볼 수 있지만 정명의 이야기는 마치 이 <화정>이라는 사극을 위해 맞춰진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사극은 화기도감의 유황을 다루는 기술을 정명이 가져온 것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기술을 전파한 김충선(본명 사야가)이나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비격진천뢰를 만들었던 우리네 화포 기술의 이야기는 빼놓고 있다.

 

물론 이것은 정명이라는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한 극적 선택일 것이다. 요즘처럼 역사적 사료보다는 상상력에 더 집중하는 사극의 시대에 이런 정도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런 이야기를 위한 선택이 더 효과적으로 다가왔을 때의 이야기다. 굳이 역사적 사실을 달리 해석하고 이야기하면서 극적 효과가 떨어진다면 도대체 그런 왜곡을 왜 시도한단 말인가.

 

어찌 보면 화기도감에 대한 광해의 집착은 정명이라는 인물이 왜국을 통해 다시 궁궐로 들어오는 드라마적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은 지금 현재 <화정>이 초반의 집중력과 달리 지리멸렬해지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 얹어진 멜로는 그래서 더더욱 사극을 힘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사건이 극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얹어지는 멜로는 힘을 부가할 수 있지만 거꾸로 그렇지 못했을 때 들어간 멜로는 본래 극적 이야기마저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큰 문제는 인물들의 사적인 욕망들이 역사적 사건들과 부딪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부담이다. <왕좌의 게임> 같은 미드는 역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이 저마다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나름의 역사를 구성하는 건 오히려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 하지만 <화정>은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는 사극이다. 이 인물들이 취하는 사적인 행동들이 실제 역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화정>의 개개인의 욕망을 다루는 시각은 정교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역사를 너무 비루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야심이 너무 컸던 것일까. <화정>이 본래의 의도대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들을 다루겠다면 그 인물들을 매력적으로 그려낼 필요가 있다. 허무하게 초반에 죽어간 이덕형(이성민)을 떠올려보라. 그의 죽음이 시청자들에게 어떤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잘 모르겠다. 김개시가 초반에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지금껏 별로 활용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의문이다. 심지어 주인공인 정명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건 치명적이다.

 

이것은 이연희의 연기력 문제가 아니다. 사극이 그저 흘러가듯이 이야기 흐름에만 급급하다보니 정작 재미의 강조점들을 놓쳐버리면서 생기는 문제다. 지금 <화정>에게 필요한 건 그 집중력이 흩어진 인물들의 매력을 되살리는 것이다. 역사를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하고 뛰어넘으려면 그 새로운 이야기가 흥미롭고 그 안의 인물들이 그만큼 매력적이어야 한다.

 

<풍문>, 드라마에 조명이 왜 필요한가를 묻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답답하다? SBS 수목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화면이 너무 어둡다는 시청자 의견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조도는 여타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볼 때 확실히 낮다. 무언가 명확하게 보고자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이처럼 조도를 낮춰 피사체를 불명확하게 만들어내는 조명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하지만 이 조명을 단지 어둡다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거기에 담겨진 많은 미학적 의미들이 상쇄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제작진이 밝힌 것처럼 어둡다기보다는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조명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운 게 우리가 실제로 현실에서 느끼는 밤의 풍경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조명은 리얼리티를 추구할 뿐, 그저 어둡게 보이려고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 조명에는 그만한 작품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대부분 그 이야기가 한정호(유준상)의 집에서 전개된다. 그러니 이 집이 가진 흡인력이 드라마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즉 모든 걸 다 드러내 보여주는 집은 더 이상 흡인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잘 드러나지 않고 문으로 겹겹이 막혀 있어 그 안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계속 궁금하게 여겨질 때 이 집은 계속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소 흐릿한 조명이 주는 효과는 지대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수군대고 벌어지고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드라마가 8회를 지났지만 한정호의 집이 여전히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건 그래서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집은 마치 RPG게임의 던전처럼 저 앞으로 걸어 나가야 비로소 거기 무언가가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흐릿한 조명은 그 던전 효과(?)’를 만들어낸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이러한 보통 드라마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조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사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 우리네 드라마가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실 조명이 이렇게 화제가 되는 건 거꾸로 말하면 그간 드라마에서 조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조차 생각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신기한 일이지만 드라마 제작에는 조명 감독이 있기 마련이다. 조명 감독이라면 단순히 빛을 쏘아 피사체들을 잘 보이도록 하는 것만이 그 역할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결국은 빛의 예술이다. 그 빛이 어떻게 음영을 만들고 그 음영이 입체감을 만들어내 작품의 이야기와 맞닿게 하는가는 조명감독이라면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드라마들을 보라. 거기 어디 조명이 존재하는가. 그저 노출 과다처럼 보일 정도로 확연히 드러내는 조명만 있을 뿐, 무언가를 가리거나 감추거나 음영을 만들어 그것이 하나의 영상을 통한 이야기가 되는 조명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런 조명은 마치 포르노처럼 피사체의 구석구석을 드러내기만 할 뿐 거기에 빛의 언어를 담아내지 못한다. 막장드라마에서 조명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저 환하게 비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안타까운 건 이러한 막장드라마의 포르노적인 조명에 점점 시청자들이 적응되어 간다는 점이다. 뭐든 잘 안보이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정도라면 막장드라마의 조명이 얼마나 우리의 성급한 감각을 자극해왔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다소 흐릿한 조명에 대한 반응들은 그래서 지금 현재 막장드라마들이 얼마나 드라마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이 큰가를 에둘러 말해주기도 한다.

 

사실 막장드라마는 조명뿐만 아니라 스토리도 포르노적이다. 그 안에 어떤 문학적인 뉘앙스나 상징적인 의미 같은 걸 담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극적인 대사들만 오갈 뿐이다. 결국 막장드라마의 시퀀스란 만나면 드잡이하듯 한 판 붙는 것이 대부분이 아닌가. 가려지거나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사라지고 그저 직설적으로 툭툭 뱉어내기만 하는 대사들의 연속은 그 포르노적 속성으로 시청자들의 조급증만 점점 키워놓는다. 빠른 전개에 대한 강박은 바로 거기서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건 단지 포르노적인 자극만을 얻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 세계를 발견하고 싶어 하고 또 우리가 사는 삶과 현실을 공감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출만이 아닌 감춤의 미학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 사실 막장드라마 같은 노출증 양상을 보이는 드라마에는 조명이 필요 없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다소 흐릿한 조명은 그래서 거꾸로 조명이 왜 드라마에 필요한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 죽음이 대수인가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조로증에 걸려 몸은 이미 팔십 세 노인이 다 된 아름이의 나이는 열여섯 살. 공교롭게도 그의 부모인 대수(강동원)와 미라(송혜교)가 아름이를 갖게 된 나이도 열여섯이다. 열일곱에 낳았지만 그들이 만나 서로에게 두근대는 마음을 가졌던 건 열여섯. 이른바 우리가 흔히 이팔청춘이라고 말하는 나이다.

 

'사진출처:영화<두근두근 내인생>'

왜 하필 이팔청춘일까. 부모는 그 나이에 사랑을 했고, 한 번도 이성과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아름이는 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바로 이 이팔청춘이라는 설정은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에 중요한 메시지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팔청춘의 나이에 맞닥뜨리는 죽음이라니.

 

대개 병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것도 아이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파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음만 먹는다면 영화는 관객들을 눈물 쏙 빼는 경험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웃집 할아버지 장씨(백일섭)에게 조로증 소년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라고 말하듯이, 울기보다는 웃으려는 노력을 더 많이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음을 실감하기 때문일까. 아름이는 어찌 보면 부모와 어르신들까지 오히려 다독이는 어른의 심성을 보여준다. 엄마가 일하는 것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신은 싫을 수 있는 방송을 선선히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다. 영 상태가 안 좋아져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아이처럼 발끈하는 건 칠순의 이웃집 장씨다.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기분 좋은 훈훈함으로 깨버린다. 아직도 게임기에 집착하는 대수는 여전히 아이 같고, 그 앞에서 아름이는 부모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웃집 장씨에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PD가 아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묻자 친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수십 년의 나이를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는 뭉클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름이 앞에서 짐짓 아이인 척 구는 대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이팔청춘의 목소리로 대하는 미라나 모두 아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들이 아름이 앞에서 눈물을 숨기는 것은 신파 구조로 눈물샘을 더욱 자극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다가오는 미래의 슬픔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함께 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억들이다.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는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 역설한다. 나이 열여섯에 죽음을 맞이하든 아니면 팔십에 죽음을 맞이하든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열여섯 이팔청춘에 가슴 설렘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편안히 누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수와 미라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단 한 번도 이성과의 두근대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던 아름이는 아마도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부모가 느꼈던 그 이팔청춘의 설렘을 처음으로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사라져도 이야기는 영원히 남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결국 이 영화가 신파로 흐르지 않고 잔잔하게 우리네 삶을 얘기해줄 수 있었던 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눈물이 아닌 웃음의 기억으로 채워주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름이의 기억 속에는 부모의 모습이 여전히 아이 같은 아빠 대수와 당찬 엄마 미라의 이팔청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죽음? 그게 대수인가. 당장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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