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가 짠해지는 김병욱표 희비극의 묘미

 

<감자별>에서 홍혜성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여진구는 좀체 웃지 않는다. 늘 진지한 표정에 때로는 곧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돌아가시고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어쩌다 보니 노씨네 집안의 잃어버린 막내아들 행세를 하고 있다. 빈 집을 전전하며 떠돌던 그에게 생긴 인생 대역전이지만 착한 심성의 그는 늘 불편한 마음이다. 노씨 가족들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면 줄수록 그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 생각하며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감자별(사진출처:tvN)'

바로 이 홍혜성이라는 인물의 입장과 그래서 연기로 보여지는 여진구의 무표정은 <감자별>이라는 시트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김병욱 감독표 시트콤이 지금껏 줄기차게 보여줬던 희비극이 이 인물의 상황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웃을 때 웃지 못하는 상황이 있고, 모두가 심각해질 때 비로소 웃음이 터지는 상황도 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나타난다.

 

21년 만에 처음으로 해주는 생일이라며 온 가족이 준비한 특별한 생일파티에서 홍혜성은 좀체 웃지 못한다. 가족들은 모두 박수치고 좋아하지만 그는 그것이 과연 자신이 누려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 노송(이순재)이 준비한 슬픈 곡(?)잃어버린 30이 흘러나온다. 21년만의 생일파티라는 상황과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다소 과장된 상황이 부딪치면서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연출된다. 그들은 웃으면서도 어딘지 슬픈 정조를 동시에 보여준다.

 

아버지의 묘소에서 잃어버린 아들 홍혜성을 찾았다며 그를 안고 과거를 회상하다 눈물까지 흘리던 왕유정(금보라). 이 다소 진지한 상황에서 민망하게 터져 나온 방귀소리는 마치 우리네 삶의 무게를 비웃는 듯하다. 뭐 그리 심각할 필요 있느냐는 것. 하지만 이 민망한 상황 때문에 그녀가 껄끄러워하는 걸 알게 된 홍혜성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연달아 방귀를 뀌는 모습을 연출하고 그 진심을 알게 된 그녀가 감동하는 장면은 웃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걸 잘 보여준다.

 

집도 없어 노씨네 가족 주차장에서 살아가는 나진아(하연수)는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알바 인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늘 밝은 얼굴이다. 섹시댄스 경연대회 상금을 타기 위해 안되는 섹시댄스를 연습하는 나진아의 이야기는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또 꽃등심을 먹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녀에게 노수동(노주현)이 준 카드로 고기를 사주면서도 더 시킬 때마다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는 홍혜성의 모습 역시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웃음을 선사한다. 고기 한 점에 이토록 쩔쩔 매는 청춘이라니.

 

결혼기념일에 이벤트를 준비하는 김도상(김정민)이 눈치 빠른 아내를 속이기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하자, 응급실로 달려온 노보영(최송현)은 그것이 결국 이벤트였다는 걸 알고 나서도 결코 웃지 못한다. 응급실까지 달려오며 그녀가 느꼈을 끔찍함은 이벤트를 이벤트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결국 화가 난 노보영에게 쫓기던 김도상은 계단에서 굴러 진짜로 부상을 당하게 된다. 비극이었다가 희극이 되더니 이내 다시 비극으로 끝나는 이러한 희비극의 반복은 바로 김병욱 감독 시트콤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지점이다.

 

이번 <감자별>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는 장율(장기하)과 노수영(서예지) 커플의 에피소드에서도 이런 희비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모두가 고개를 젓지만 장율이 작곡한 CM송이 좋다며 이곳저곳 기획사를 전전하던 노수영이 카스테레오에서 그 음악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꺼버리는 장면이 그렇다. 장율의 예술가적인 삶과 잉여로서의 삶은 그렇게 순식간에 희극과 비극을 반복한다. 모두가 거품키스니 사탕키스니 하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며 쓰레기 국물 키스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래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쓸쓸함이 묻어난다.

 

물론 김병욱 감독의 희비극은 이미 <지붕 뚫고 하이킥>의 다소 충격적인 엔딩 논란에서부터 그 전조를 보인 바 있다. 시트콤을 정극의 하위 장르로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아마도 김병욱 감독은 깨고 싶었을 것이다. 즉 그가 보여주는 희비극적 상황은 희극과 비극이 늘 동전의 양면이라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희극이라고 해서 정극과 비교해 낮은 가치로 폄하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잘 보여준다.

 

아마도 <감자별>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 희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리라. 마치 보름달이 뜨면 그 기운 때문에 사람들이 로맨틱해지거나 멜랑콜리해진다고 하는 것처럼, 감자별이 뜬 상황 속에서 이 시트콤 속 인물들은 웃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웃게 되는 기묘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웃음과 눈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시트콤 <감자별>의 희비극은 이토록 정극이 절대 주지 못하는 지점에 닿아있다. 무표정한 여진구의 얼굴에서 우리는 이 희비극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병욱 감독조차 시트콤이 싫어진 건 아닐까

'하이킥3'(사진출처:MBC)

'하이킥3'는 시트콤이다. 물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이킥3'가 시트콤으로서 가져야할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태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임팩트 있게 살아나지 않는 '하이킥3'는 그래서 어떨 때는 청춘 멜로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지석과 박하선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애정행각'과 윤계상, 김지원, 안종석의 빗나간 큐피드 화살이 만들어내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랑이 이 시트콤의 중심축처럼 여겨진다.

시트콤이라고 해서 멜로가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잘 짜여진 멜로는 발랄한 코미디와 대비를 이루면서 시트콤의 새로운 재미를 덧붙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트콤으로서의 충분한 웃음을 담보했을 때 얘기다. 그게 아니라면 시트콤은 코미디라는 본질 자체를 흐리게 될 수도 있다. '하이킥3'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는 시청자는 분명 시트콤을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가슴이 먹먹해지는 안타까운 멜로를 접하게 된다면 어떨까?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신선하게 여겨지겠지만 그게 매번 반복적으로 보여진다면 '이거 시트콤 맞아?' 하는 의구심은 당연하게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르완다로 떠나려는 윤계상과, 그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김지원,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안종석의 관계는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그 안에 디테일들은 꽤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자신도 똑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안종석이 윤계상을 혼자 좋아하는 김지원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를 윤계상에게 데려다 주는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오토바이 사고로 정작 자신도 인대가 늘어나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기절한 그녀를 업고 응급실로 달려가는 장면은 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안타까운 사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킥3'가 시트콤으로서 주어야 할 웃음의 포인트는 이 자못 애절한 멜로만큼 강하지 못하다. 안내상은 윤유선에게 매 맞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어딘지 약한 느낌이다. '야동순재' 같은 뭔가 확실하게 캐릭터로 부각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계상이나 안종석 그리고 김지원은 멜로의 덫에 갇혀 심각한 캐릭터로 바뀌어 있고, 수정은 안하무인 캐릭터가 웃음을 주기보다는 불편함을 주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한 회에 한두 마디 정도 대사를 던지는 줄리엔이나 윤건이 이들보다 더 웃음을 주는 캐릭터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나마 웃음을 주는 캐릭터는 박하선 정도다. 그녀는 기존 이미지를 뒤엎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트콤다운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혹자는 '시트콤이 거의 정극 같다'는 것을 하나의 장점인 양 말한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본질이 시트콤인 '하이킥3'에는 맞지 않는 것일뿐더러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 시선 속에는 은연 중에 시트콤보다 정극이 우위라는 편견이 깔려 있다. 하지만 시트콤은 시트콤이다. 웃음을 주어야 하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정극에는 없는 시트콤만의 장점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시트콤을 하위장르로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한때 잘 나가던 시트콤 작가들이 정극으로 빠져나가게 된 것이 시트콤의 몰락을 부른 이유다. 웃음을 제조하던 작가들이 없으니 시트콤에 걸 맞는 웃음의 에피소드들이 풍성할 수가 없다. 김병욱 감독 혼자 이 많은 회차의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하지만 시트콤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낮다. 그래서일까. 김병욱 감독조차 시트콤이 싫어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자꾸 '하이킥3'에서(어쩌면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부터) 시트콤이 아닌 정극이 되고 싶은 욕구를 읽게 되는 건 왜일까.

맛좋은 카푸치노 같은 퓨전드라마, '커피하우스'

커피 특유의 진한 맛에 부드러운 우유, 게다가 달콤함을 더하는 계피가루... 표민수 PD의 새 드라마 '커피하우스'는 그 여러 재료들이 잘 섞여 부드럽고 달콤 쌈싸름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한 잔의 카푸치노를 닮았다. 커피 특유의 향을 내는 정극의 분위기는 톡톡 튀는 계피가루 같은 시트콤과 만났고, 탄탄한 쓴맛을 내재한 드라마는 달콤한 맛의 만화를 곁들였다.

과장됨과 진지함이 넘나드는 연출은 깔끔하고 세련된 영상미 위에 코믹함을 덧붙였다. 티아라 함은정의 연기도전과 강지환의 4차원 연기는 가수와 배우가 벌이는 독특한 앙상블을 선보였다. '커피하우스'는 표민수PD와 '거침없이 하이킥'의 송재정 작가가 만났다는 점만 보더라도 시트콤과 정극을 넘나드는 퓨전의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을 쉬 짐작할 수 있다.

'커피하우스'의 승연(은정)은 궁전커피숍 집 딸. 그녀는 가슴 설레는 순정만화 속의 스토리를 꿈꾸지만 현실은 코믹만화의 너저분함으로 넘쳐난다. 취업도 못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그녀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캐릭터. 궁전커피숍의 망가진 출입문 벨소리처럼 청춘은 삐걱대고, 마치 고장 난 화장실 문 때문에 갇혀버린 신세다.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매너 있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못난 치부를 드러내보이게 되는 그녀의 삶은 멋진 드라마를 꿈꾸지만 현실은 한 편의 시트콤이다. 그녀에게 비서를 제안한 이진수(강지환)에게 일과 사랑의 판타지가 넘쳐나는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은 취직도 로맨스도 아닌 기분 나쁜 거짓이다.

"당신은 아마추어잖아." 아무리 빚진 후배의 부탁이지만 비서로 취직시켜놓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진수가 '웃으면서 회를 뜨는' 그 말에 승연은 현실로 내쳐진다. '궁전커피숍'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에 아마추어의 향기가 넘쳐나는 커피를 끓여대며 살아온 그녀의 삶. 이 드라마는 그 시트콤 같은 아마추어적인 삶을 살아온 승연이 이 '웃으면서 회를 뜨는' 재수 없는 프로페셔널을 만나 일과 사랑에서 성장해가는 드라마다.

로맨틱 코미디가 가진 웃음의 코드는 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대립과 성장을 만나면서 진지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시트콤에서 시작해 정극으로 향하고, 만화적인 설정에서 시작해 드라마로 변해가고, 과장된 웃음에서 시작해 진지함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승연이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어가는 성장과정과 맞닿아있다.

'커피하우스'를 흔히들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풀하우스'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즉 '커피 프린스 1호점'이 갖고 있는 달콤한 판타지와 '풀하우스' 특유의 순정만화적인 로맨틱 코미디가 뒤섞여 있다는 것. 이것은 일정 부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단지 그 두 작품의 접합이 '커피하우스'인 것은 아니다. '커피하우스'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형식들(예를 들면 시트콤과 정극, 만화와 드라마, 웃음과 진지함, 아마추어와 프로 같은)이 퓨전되어 경쾌하면서도 자못 진지한 이야기를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그 맛의 조화가 오묘한 한 잔의 카푸치노 같은 드라마를 맛보게 될 지도 모른다.

'지붕킥'이 열어놓은 시트콤만의 가능성

그 누구도 시트콤을 하위 장르라 내놓고 얘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시트콤을 보는 시선은 늘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시트콤 작가들이 정극으로 빠져나가고, 새로운 작가들도 시트콤에 도전하려 하지 않게 된 건 그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대접받지 못하는 시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을 통해서 시트콤은 더 이상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지 일일극과의 대결에서 거둔 그 대중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붕킥'은 시트콤의 웃음이 힘겨운 현실과 결합해 어떻게 재미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지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시트콤이 웃음은 물론이고 멜로도 그릴 수 있으며 때론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트콤이라서' 낮게 보던 그 시선은, '시트콤이어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시트콤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시트콤의 강점은 정극의 허구성을 뒤틀었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보석과 현경이 눈밭에서 싸우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부부가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며, "우리도 젊었을 때 저랬었지"하고 말하는 장면은 이미 클리쉐화 되어버린 정극의 멜로 장면을 뒤튼다. 웃음은 바로 그 허구가 드러났을 때 터지게 되는데, 따라서 장르를 패러디하는 시트콤은 정극이 갖는 허구나 판타지를 리얼하게 폭로해내는 경향을 갖게 된다. 김자옥을 위해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하는 이순재는 정극이라면 감동으로 끝났을 장면을, 노래를 하다 혼절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는 짓을 질책하는 속마음을 드러냄으로서 웃음으로 바꾼다.

클리쉐화되어 버린 정극은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의 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일일드라마가 대표적인 경우. 늘 똑같은 설정과 늘 똑같은 흐름이 몇 년째 계속 되고 있지만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에 여전히 대중들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시청한다. 따라서 일일극이 장악한 저녁 시간대에 그것과 차별화를 이루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장르로 시트콤만한 것도 없다. 시트콤은 일일극이 가진 그 클리쉐를 부수는 것으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트콤의 '현실 폭로(?)' 경향은 정극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 마치 진짜 현실인 양 웃고 있는 사회의 얼굴 그 이면을 뒤틀어 보여주기도 한다. 서운대생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정음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우습지만 깊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어찌 보면 세경과 지훈(최다니엘)의 만남으로 시작해 그들이 함께 시간이 멈추는(?) 그 장면으로 끝나는 것은, 지훈이라는 도시인의 메마른 감성과 세경이라는 산골의 따뜻한 감성이 부딪쳐 한 자락 촉촉한 비로 내리는 것으로, 도시와 시골, 디지털과 아날로그, 현재와 추억으로 나뉘어지고 변해가는 세태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트콤은 이처럼 웃음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정극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웃음에 충실하다면 대부분의 장르 실험도 허용된다.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추리적인 요소나 멜로적인 요소, 휴먼드라마적인 요소, 심지어는 신파적인 요소까지 아무런 부담감 없이 즐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시트콤은 정극이 가지는 견고한 장르적 틀에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훨씬 다채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 풍자의 가벼움과 정극의 진지함 같은 요소들을 균형 있게 잘 연출해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그 성공적인 실험을 경험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시트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시트콤을 여전히 웃음만 주면 되는 그런 장르로 낮춰본다면 시트콤은 늘 하위 장르에 머물면서 그 가능성의 싹을 틔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제작자든 시청자든 좀 더 확장된 마인드로 시트콤을 바라볼 때, 시트콤은 정극이 주지 못하는 재미와 의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시트콤이라서 안 된다는 생각은 바꾸어야 한다. 시트콤이어서 되는 것이 더 많다. 이것이 '지붕킥'은 끝났지만 앞으로도 이어질 시트콤에 대해 갖게 되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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