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가득 ‘황금빛 내 인생’과 ‘신과 함께’, 흥행하는 까닭

너무 신파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 누구도 눈물을 참기 힘든 상황 설정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방송 전체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이 그렇고, 개봉 5일 만에 350만 관객을 넘어서며 일간 관객 수 순위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과 함께-죄와 벌>이 그렇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각각 대중들의 가장 큰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두 작품에는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져 있다.

인사이트<황금빛 내 인생>은 서태수(천호진)의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의 한 풍경으로 시청자들을 울렸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 가장은 가족들에게는 원양어선을 탄다고 했지만 본래부터 삶을 정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 상태가 심상찮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곧 죽을 수도 있겠다고 느끼며 웃음을 터트린다. 크리스마스에 그는 자신이 맞이할 수도 있을 죽음을 ‘휴식’으로 받아들인다.

오랜만에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외투까지 하나 사 입은 이 가장은 자신이 죽었을 때 나올 사망보험을 보며 어차피 정리하려 했지만 이렇게 병으로 죽는 것이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는 방법이라며 좋아한다. 죽음을 오히려 휴식으로 받아들이고, 병사하는 것을 오히려 안도하는 가장의 모습은 아마도 동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나 그걸 바라보는 자식 세대들까지 가슴 먹먹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영화 <신과 함께>는 인명을 구조하다 죽음을 맞이한 소방관 김자홍(차태현)이 사후 49일 동안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거치면서 그가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후 세계의 모험담을 그린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에 판타지 블록버스터일 수밖에 없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김자홍이 가진 휴머니즘과 ‘효’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눈물을 참기가 어려운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김자홍 가족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실제 영화관을 여지없이 눈물의 도가니로 만들어놓는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만큼 감정을 격동시키는 것이 있을까. <신과 함께>는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일 수 있는 판타지를 그리면서도 이 눈물을 통해 현실의 무게감을 담보해낸다.

하지만 이 부분은 보는 이들에 따라서 지나치게 신파 코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비판적인 반응 또한 나오고 있다. 너무 익숙한 코드들이지만 어쨌든 가장 효과적인 코드로서 신파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는 것. 물론 그 장면들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가족 간에도 각박해진 현실에서 촉촉한 감정을 끄집어내는 대목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금빛 내 인생>과 <신과 함께>에 등장하는 이러한 신파적 코드에 대한 호불호는 이처럼 극명하게 나뉜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 두 작품을 통해 지금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일관된 정서가 바로 ‘울고 싶다’는 그 비감이라는 점이다. 최근 들어 많은 작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추락하는 주인공들’에 대한 대중적 호응과 공감에는 이런 정서가 깔려 있다. 이제 누군가가 잘되는 걸 보는 것보다는 잘 안 되는 걸 보면서 공감하는 측면이 더 강해졌다. 신파든 아니든, 대중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울고 있고 그래서 작품들을 통해서라도 그걸 풀어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사진:KBS)


‘블랙’, 소재는 독특한데 어째서 이리도 어색할까

비행기를 탄 강하람(고아라)이 갑자기 옆에 탄 아이의 뒤편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는 경악하고, 기내의 많은 승객들에게도 그림자들이 있는 걸 알고는 미친 듯이 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은 OCN <블랙>이라는 드라마에 시선을 집중시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죽음을 보는 소녀가 타인의 죽음을 알면서 막지 못하는 그 능력을 ‘저주’라고 여길 때 그의 앞에 나타난 형사 한무강(송승헌)이 그건 ‘축복’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에서는 이 두 사람이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며 벌어질 사건들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블랙(사진출처:OCN)'

이처럼 <블랙>은 최근 들어 특히 많아진, 타임리프 같은 장르적 장치를 가진(타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재의) 드라마의 참신한 변주처럼 다가왔다. 그 많은 타임리프들이 그러하고 최근 방영되고 있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예지몽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기 위한 노력을 담은 드라마들과는 또 다른 색깔을 가진 드라마. 게다가 한무강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다시 살아나는 대목은 향후 저승사자가 빙의된 그와 타인을 죽음을 보는 강하람과의 또 다른 모험담을 예고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살아난 한무강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속이 다 보이는 환자복에 잠바 하나를 걸친 채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은 그 장르적 애매함으로 인해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긴장감을 흩어 놓았다. 마치 속을 다 보이겠다는 듯 쩍벌을 하고 앉거나 롱코트만 걸친 채 바바리맨처럼 여자화장실에서 옷을 열어젖히는 장면은 코미디를 의도한 것이지만 죽음이라는 무게감을 가진 이 드라마의 장르적 긴장감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즉 어느 정도의 유머는 괜찮을 법 했지만 이런 식의 ‘화장실 유머’가 가진 가벼움은 드라마의 성격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니 가뜩이나 연기로 해석하기 힘든 이 낯선 캐릭터 역시 어색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연기 변신을 의도한 듯 작정하고 뛰어든 모습이 역력한 송승헌이지만 그 장면들이 어떤 매력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저 망가진 느낌을 준 건 아쉬운 대목이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고아라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비행기 신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고 오열하는 그 장면이 주는 충격파는 충분했지만, 그 후로 이 캐릭터는 너무 울거나 자책하는 장면들이 반복됐고, 때때로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응답하라 1994> 이후 늘 보였던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이건 연기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문제도 적지 않다. 한무강이나 강하람의 캐릭터가 시청자들이 몰입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블랙>이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소재가 독특할수록 캐릭터는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어야 시청자들에게 그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코미디와 스릴러가 상생하지 못하고 있는 장르적 혼재와 매력적인 캐릭터가 제시되지 못해 어색하게 느껴지는 연기. <블랙>이라는 괜찮은 소재의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해야할 숙제가 아닐까.

‘남한산성’이 촉발한 정치권 공방,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치욕적인 삶은 살지 말아야 한다. 살아야 비로소 대의도 명분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청의 대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당시 척화파였던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였던 최명길(이병헌)이 치열하게 벌인 논쟁을 다뤘다.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청군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판이었다. 청군들은 칸이 직접 오는 시기에 맞춰 남한산성을 총공격할 준비에 들어간다. 

사진출처 : 영화 <남한산성>

인조(박해일)는 김상헌의 주장도 최명길의 주장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쉽게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죽어가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대의명분을 따지며 버티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살 수 있는 ‘말의 길’을 항상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을 통해 청과의 화친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김상헌을 통해 청과 맞서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엿본다. 

공교롭게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가져온 역사의 한 대목이 지금의 북핵 위기에 놓여진 우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현 정치권의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상황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영화 <남한산성>을 빗대 벌인 공방은 당시나 지금이나 갈리진 여야의 대립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얼마든지 외교적 노력으로 사전에 전쟁을 예방하고 백성의 도탄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민족의 굴욕과 백성의 도륙을 초래한 자들은 역사 속의 죄인이 아닐 수 없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이 잘못된 현실 판단과 무대책의 명분에 사로잡혀 임진왜란에 이어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 것”이라고 영화 관람 후기를 남겼다. 

홍준표 대표는 “나라의 힘이 약하고 군주가 무능하면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됐다”며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전란의 참화를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무능과 신하들의 명분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원순 시장이 영화를 빗대 외교적 해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반면, 홍준표 대표는 이 영화를 통해 ‘안보무능’ 프레임을 꺼내든 것. 

같은 영화, 나아가 같은 역사지만 그걸 보는 관점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 물론 영화 속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 입장은 달라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은 최명길이 얘기한대로 칸 앞에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인조에게 김상헌 같은 충신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자신은 영원히 역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입장이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화 한 편을 놓고도 정치 공방을 벌이는 여야는 과연 어떨까. 영화 속 인물들처럼 저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런 서로 다른 논평들을 내놓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정치적 대결을 위해 영화 한 편을 두고도 ‘아전인수’의 입장을 내놓는 것일까. 

영화 속에는 그러나 흥미롭게도 역사에 남은 실존인물들만이 아닌 날쇠(고수)라는 민초가 등장한다. 남한산성 마을 안에 자리한 대장간의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날쇠는 이러한 외세의 침략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조정대신들의 날선 말의 대결들 속에서 결국 죽어가는 건 민초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다. 

농사를 짓기 위한 낫을 만들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낫을 무기로 들게 되지만 그의 말대로 민초들이 원하는 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봄에 씨 뿌려 가을에 거둬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으면 되는 평범한 삶일 뿐이다. 그 작은 민초들의 삶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저들의 치열한 논쟁들이 바로 이 날쇠라는 인물 앞에서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결국 전쟁 속에서도 또 치열한 정쟁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또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가장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았고 그 누구도 대단한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굶지 않고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삶을 원했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그래서 최명길과 김상헌의 팽팽한 설전만큼 날쇠라는 인물의 한 마디가 더 큰 울림으로 남는 영화다. 전쟁이니 화친이니를 주장하기 전에 날쇠 같은 보통의 서민들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는지.

‘다시 만난 세계’, 왜 첫사랑의 시간을 유예시켰을까

SBS 새 수목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는 주인공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시작한다. 고등학생이었던 성해성(여진구)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고 12년 후 학교 옥상에서 깨어나는 것. 그러니 이 드라마의 장치는 최근 들어 빈번히 장르물에서 활용되는 바로 그 타임슬립이다. 12년을 뛰어넘어 과거의 그녀 정정원(이연희)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을 다시 만남으로써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사진출처:SBS)'

물론 이 타임슬립이 갖는 장치적인 힘은 크다. 12년 전 죽었던 인물이 다시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 때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자책해온 그의 첫사랑 정정원이 갖게 될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반가움 같은 것들이 극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사랑뿐만 아니라 그토록 친했던 친구들과, 그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져버린 가족들과의 만남 또한. 

하지만 <다시 만난 세계>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건 그러한 특이한 타임슬립 설정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고교시절 성해성과 정정원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던 그 시골길에 담겨지던 푸르름과, 등하교하며 간간히 휴식을 취하던 넉넉한 품을 가진 나무 밑 평상이 주는 한가로움, 호젓한 강이 보이는 자그마한 마을이 주는 따뜻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수했던 시절 불쑥 핫도그를 뺏어먹는 소녀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소년 사이에 오가는 설렘 같은 것들이 더 시선을 끈다. 

그 풍경은 마치 <너의 이름은>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세계 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12년이 흘러 다시 마주친 성해성과 정정원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 듯한 기찻길 양편에 서서 기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그런 장면이나, 타임슬립이 벌어질 때 마치 로켓이 솟구치듯 무언가 하늘을 향해 긴 꼬리를 남기며 날아가는 그런 장면들은 <너의 이름은>에서 모티브를 얻은 느낌을 준다. 물론 그것은 그 첫사랑을 이제 막 느끼는 순수한 시간이 주는 낭만적이고 몽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시 만난 세계>의 타임슬립은 그래서 그 장치적인 극적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수했던 시절의 아름다움을 다시 되새기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여겨진다. 12년 후 나이 든 정정원이나 친구들은 저마다 그 세월만큼의 때가 묻어 있고 그래서 과거의 그 시점은 한 때의 추억일 뿐 돌아갈 수 없는 세계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세계 그 모습 그대로를 갖고 12년 후의 세계로 들어온 성해성으로 인해 어떤 변화를 겪지 않을까. 

특히 정정원의 삶에서는 과거 성해성의 죽음에 대한 자책이 묻어난다. 요리사가 꿈이었던 성해성 대신 그녀가 별 재능은 없어 보이는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다시 돌아온 성해성으로 인해 정정원은 그 자책의 삶을 벗어나 자신의 순수했던 삶의 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성해성과 정정원의 다시 시작되는 풋풋한 첫사랑의 과정들은 그래서 그 자체로 순수를 찾아가는 시간이 된다. 

흔히들 첫사랑은 각색된다고 말한다. 실제 벌어진 사건보다 더 미화된 채 기억에 담아진다는 것.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본래 갖고 있던 그 순수의 세계를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 경험이 얼마나 소소했던 간에(어쩌면 그렇게 소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첫사랑을 강렬하게 기억하는 건 그 때 실제로 모든 것들이 그토록 예민했을 정도로 순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만난 세계>는 그래서 12년 후로 돌아온 소년이 다시 만나게 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거꾸로 그 세계에서 이제는 나이 들어버린 이들이 12년 전의 순수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면서 누구나 더 강렬해지는 욕망은 바로 그 때의 그 시간들로 돌아가고픈 것일 게다. <다시 만난 세계>는 그 욕망을 첫사랑을 유예시키는 판타지로 재현해냄으로써 우리에게도 잊고 있던 그 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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