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현실 위로하는 '호텔 델루나'의 독특한 판타지

 

과연 구찬성(여진구)은 장만월(이지은)을 구원할 것인가. tvN 토일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장만월은 삶과 죽음을 벗어나 있는 존재다. 그는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에 묶여버린 채, 천년 넘게 죽지 못하고 살아왔다. 물론 살아있다고 해도 그것을 삶이라 부르기 어렵다. 오래 전 그가 사랑했던 고청명(이도현)이 오기를 그는 기다린다. 한 자리에 붙박여 고목이 되어 잎 하나 내놓지 못하는 나무는 그래서 장만월 자신이다.

 

그 나무가 있는 곳에 세워진 호텔 델루나 역시 장만월의 모습 그대로다. 그 곳은 억울하게 죽은 원귀들이 찾는 곳이다. 장만월은 그들을 ‘힐링’시키고 그렇게 이승의 원을 지워준 후 저 세상으로 보낸다. 그 곳은 실제 구청에 등록되어 있는 곳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걸쳐져 있는 곳.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죽어 있지만 살아있는 건, 고목이나 호텔 델루나나 장만월이나 마찬가지다.

 

그 곳에 구찬성이 들어온다. 그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장만월이 그에게 일종의 저주를 내린다. 귀신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 끔찍하게 죽은 귀신들의 형상은 가뜩이나 마음 약한 구찬성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그래서 호텔 델루나나 그 곳을 그대로 닮은 장만월, 그리고 어두운 곳에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고목 또한 구찬성에게는 공포로 다가온다.

 

하지만 구찬성은 그 평범한 인간이 가진 착한 심성으로 그 공포를 연민으로 끌어안는다. 그것은 이 곳을 찾는 원귀들의 무섭게 일그러진 형상 그 너머에 담겨진 저마다의 사연들을 듣기 시작하면서다. 두 눈이 없는 원귀는 그래서 공포로 다가오지만 그가 살아생전에는 차츰 앞이 보이지 않던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는 연민의 존재로 바뀐다.

 

그리고 그 눈이 없는 원귀가 저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던 손길을 기억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자 구찬성은 자신의 손을 빌려 그 손길을 준 사람을 찾아준다. 하지만 장만월은 그 ‘따뜻한 손길’이라는 것이 사실은 원귀가 그렇게 믿고 싶은 기억일 뿐, 실상은 살려 달라 내민 손을 뿌리친 뺑소니범의 손길이라는 걸 알려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원귀가 그 뺑소니범을 해코지하려 할 때 구찬성은 자신을 던져 그걸 막아준다. 그런 복수가 결국 원귀를 먼지처럼 사라지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건 뺑소니범을 뒤늦게 경찰에 넘기고 구찬성이 하는 이야기다. 원귀가 그 뺑소니범이 뿌리친 손길을 애써 ‘따뜻한 손길’로 기억하려 했던 건 바로 그 원귀 자신의 따뜻한 심성 때문이었다는 것. 현실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존재는 그렇게 구원받는다. 그 억울함은 물론이고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는가를 구찬성 같은 누군가가 기억해준다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호텔 델루나>는 죽은 공간에 피어나는 잎과 꽃을 이야기한다. 그 곳은 아무런 희망도 없고 원망과 아픔만을 떠안은 죽음들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네 현실을 에둘러 말하는 것일 게다. 판타지란 결국 현실의 결핍 위에 존재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 무엇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죽음 같은 현실 속에서 판타지적 존재로 서있는 건 그래서 장만월이 아니라 구찬성이다. 구찬성은 그 죽음 같은 현실 위에 따뜻한 온기를 하나씩 던져 넣는다.

 

고목에 잎이 피어나고, 장만월의 사막 같은 마음에 조금씩 촉촉함이 생겨나며, 호텔 델루나가 어둡고 칙칙한 죽음의 공간에서 밝은 삶의 에너지가 더해지는 과정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주는 기묘한 힐링 포인트다. 처음에는 공포의 존재로 귀신을 보며 화들짝 놀라기만 했던 구찬성이 이제 그 귀신들에게 다가가 “커피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하고 묻는 장면은 그래서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깨지고 망가진 형상을 가진 귀신들은 그래서 더 이상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대신 현실에서 어떤 억울한 사연들을 갖고 찾아온 아픈 존재들이다. 아마도 우울한 현실에 무엇 하나 희망을 찾기 어려운 대중들이라면 그 아픈 존재들에 이입할 수 있을 게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그 어정쩡한 공간에서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그 존재들을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듬어주는 구찬성이 구원의 존재처럼 보이는 이유다.(사진:tvN)

'SKY캐슬' 염정아가 그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저 괴물들 실체

안타깝게도 혜나(김보라)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혜나의 죽음으로 인해 JTBC 금토드라마 <SKY캐슬>은 본격적으로 이른바 대한민국 0.1%라는 이들의 겉만 번지르르한 실체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쳐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했지만, 병원장 손자의 수술을 해야 한다며 혜나를 타 병원으로 이송시키라 명령한 강준상(정준호). 그는 환자를 보는데 있어서도 권력이 우선이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잔뜩 위세를 떨고 있지만 그 실체는 당당하지 못한 욕망덩어리라는 것.

강준상이 죽음에 이르게 만든 혜나는 그러나 다름 아닌 자신의 숨은 딸이었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런 선택을 한 강준상은 향후 이 진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이미 혜나가 강준상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아이러니한 선택을 보며 혀를 끌끌 찾을 게다. 제 욕망이 제 발등을 찍는 강준상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겉만 번지르르한 저들의 실체를 그려내는 인물은 다름 아닌 한서진(염정아)이다. 그는 잘 나가는 의사 아내에 전교 1등 하는 아이의 엄마지만, 그 실체는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욕망을 위해 뭐든 하는 인물이었다. 본명인 곽미향을 버리고 한서진이 된 것도 그런 이유. 그는 그렇게 속인 채 강준상이 사귀던 혜나의 엄마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한서진이 딸의 입시 코디네이터인 김주영(김서형)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경계하면서도 결국 전교 1등을 만들어내자 그를 믿는다고 말하는 모습에서도 그가 얼마나 표리부동하며 또 욕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인물인가를 잘 드러낸다. 그는 김주영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딸을 다시 맡아달라고 하고서, 그게 성사되자 나오며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인물이다.

혜나의 죽음은 한서진의 이런 면을 또다시 드러내게 만든다. 그 날 혜나가 딸 예서(김혜윤)와 다퉜다는 사실을 알고는 혹 딸이 혜나를 죽인 게 아닌가 의심하는 한서진은 증거가 될 수 있는 혜나의 핸드폰과 노트북을 망치로 때려 부숴 청소차에 버리는 ‘증거인멸’을 했다. 그리고 그 날 혜나가 이복자매라는 사실을 말하며 예서와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던 진진희(오나라)를 찾아가 괜스레 살갑게 굴며 그 사실을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게다가 김주영과 만난 한서진은 이 사건에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나누고, 엉뚱하게도 황우주(찬희)가 용의자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아이가 살 수 있다면 다른 아이의 희생은 당연한 듯 선택하는 한서진. 이 모습은 한 명의 어른이 아니라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의 모습이었다.

혜나의 사망 때문에 모인 SKY캐슬의 부모들이 모여 집단으로 머리끄댕이를 잡고 드잡이를 하는 풍경은 그 괴물의 실체를 제대로 드러낸 풍자적 장면이 되었다. 평소 근엄한 척, 우아한 척 했던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이만을 지키겠다는 이기심에 다른 집 아이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게 드잡이로 이어진다. 저만 살아남기 위해 하던 볼썽사나운 짓들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수임(이태란)이 “아이가 죽었는데...” 어른들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는 일갈은 그들의 실체를 실감하게 만드는 통쾌한 면이 있었다.

한서진은 필요하면 악마와도 손을 잡기도 하고, 다른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는 모습으로 <SKY캐슬>이 겨냥하고 있는 저들의 실체를 제대로 풍자하는 인물이다. 번지르르한 말들로 포장되지만 화가 나면 불쑥 튀어나오는 “아갈머리를 찢어버린다”는 상스러운 말이 그 실체인 괴물. 그가 어디까지 밑바닥을 보여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JTBC)

‘알쓸신잡3’, 소피스트도 울고 갈 이야기꾼 유시민과 김영하

“정치적 삶(공동체의 삶)은 오직 말과 행동으로 이뤄진다. 말을 통해서 공공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 tvN <알쓸신잡3>에서 앞서나가던 그리스가 왜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는가를 묻는 질문에 김영하는 한나 아렌트의 그 말을 꺼내놓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말과 정치의 참여를 죄의 근원으로 보고 ‘관조’를 중시하게 만들었다는 것. 공적인 삶이 아니라 사적인 삶으로서 기도하고 관조하는 삶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권력자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던 유시민은 당시 공공교육이 전혀 존재하지 않던 그리스에서 사설교육을 담당하던 소피스트들이 부당하게 폄하된 면이 있다고 했다. 말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던 당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태동을 소피스트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유시민은 “내가 그 때 태어났으면 나도 일타강사를 했을지 모른다.”는 농담을 던졌다.

사실 그리스가 그토록 서구 문명의 발상지라고 말할 만큼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가 고작 100년이 지난 후 스러지게 된 그 과정을 단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김영하나 유시민과 김영하의 이야기가 던지는 소피스트가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그리스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도 ‘일타강사’ 같은 표현으로 지금의 시각으로 풀어 이야기해주니 귀에 쏙쏙 박힐밖에.

소피스트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리스가 몰락하게 되는 징후로서 파악하고 있는 유시민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천박한 표현인가를 강변한다. 자신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독배를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죽음의 일화는 ‘잘못된 법도 법이니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폴리스가 절차에 따라 결정한 일을 내가 억울하다는 이유로 피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게 하면 폴리스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굉장한 비극적 정조를 상상하지만 유시민도 김영하도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 의연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태도도 보였다고 했다.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우는 제자들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며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시오?”라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는 것.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라는 말은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오피스를 거론하며, 육체가 주는 병에서 벗어나는 것을 죽음으로 바라봤던 그의 생각이 담긴 말이었다. 유시민은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산 것”이고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죽는 행위가 아니고 사는 행위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시민이 소크라테스 덕후를 자처하며 내놓은 이야기들이 그리스의 흥망성쇠를 이해할 수 있는 쉽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면, 김영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통해 그리스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던가를 흥미롭게 추론해냈다. 그는 <일리아스>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리스가 승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헥토르의 아버지 트로이의 프리아모스왕이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손에 입을 맞추며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화해를 신청했고, 그 모습에서 아킬레우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 김영하는 그래서 <일리아스>가 그리스의 승리가 아니라 프리아모스왕이 보여준 ‘인간성’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러한 “적조차 포용하는 자세”가 그리스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그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주는 건 다른 문제다. 제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알쓸신잡3>에서 유독 유시민과 김영하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건 같은 지식이라도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한 번 곱씹어져 나온 것이라,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져 있어서다. 당대의 일타강사 역할을 했을 소피스트들도 울고 갈 이야기꾼의 면모가 이들에게는 느껴진다.(사진:tvN)

'미션'이 말하는 "사랑하라"와 "살아남아라"의 의미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이병헌)는 빵집 테이블 밀가루 위에 L, V, E를 쓰고 L과 V 사이에 반지를 놓아 ‘LOVE’라는 글자를 만들어 고애신(김태리)에게 건넨다. 그는 반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고애신의 손에 끼워주며 말했다. “이 반지의 의미는, 이 여인은 사랑하는 나의 아내란 표식이오.” 그런데 유진 초이가 반지를 손으로 집을 때 L과 V 사이에 O 대신 I라는 선이 그어진다. 그래서 ‘LOVE’는 ‘LIVE’가 된다.

이 짧은 장면 속에 <미스터 션샤인>이 담아내려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고애신은 유진 초이에게 미국으로 함께 가자고 속여 일본에 들어가 무신회에 붙잡힌 이정문(강신일)을 구하려고 한다. 고애신은 유진 초이를 사랑하지만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이 갈 길이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이려 한다.

하지만 유진 초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진짜 미국에 함께 가려 했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애신에게 기꺼이 속아주겠다 말한다. “당신이 나를 꺾고, 나를 건너, 제 나라 조선을 구하려 한다면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당신의 손에 꺾이겠구나...”라고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에둘러 토로한다.

고애신은 일본행 배를 타기 위해 제물포항으로 가는 기차에서 유진 초이에게 드디어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드러낸다. 마치 애써 숨기고 있는 사랑처럼 유진 초이가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반지를 고애신은 그의 손에 끼워준다. 그러며 고애신은 “사랑하오. 사랑하고 있었소.”라고 말한다.

어쩌면 죽음의 불꽃이 될 수 있는 그 일본행에 부부행세를 하며 함께하는 유진 초이와 고애신에게는 그래서 사랑(LOVE)과 삶(LIVE)이 겹쳐진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고, 살아남고 싶지만 자꾸만 불꽃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삶. 유진 초이는 고사홍(이호재)의 유언을 받아들여 자신이 타카시(김남희)를 처단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다. 미국인 신분이어야 가능한 그 일은 고애신과 영영 멀어질 수 있는 길일 테니 말이다.

결국 미국행 배를 포기하고 고애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유진 초이는 무신회의 낭인들에게 쫓긴다. 그런데 그 짧은 동반도주 속에서 하늘 위로 마치 이들의 사랑과 삶에 축포를 내리듯 불꽃놀이의 불꽃들이 솟아오른다. 도주 중이고 그 도주의 끝에 그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 짧은 순간 유진 초이는 웃고 있다. “낭인들을 보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달리고 있었소. 불꽃 속으로.”라며.

과연 이 불꽃같은 사랑과 삶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 끝에서 어떤 장면을 만날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미스터 션샤인>이 말하는 두 가지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사랑하라”와 “살아남아라”다. 개화기의 그 혼돈 속에서 초개 같이 목숨을 내던졌던 의병들이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개인적 사랑이든, 조선에 대한 사랑이든, 아니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런 어려운 불꽃의 길을 걸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더라도 “살아남으라” 말해주는 이들의 애틋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것은 진짜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생존의 의미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짧았어도 불꽃같은 뜨거움을 향해 달려간 그 삶이야말로 진정 ‘살아남는’ 길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반복되어 여전히 그 뜨거움이 전해지는 그들의 삶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으니. 그들의 ‘LOVE’는 그래서 ‘LIVE’가 되었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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