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은 어째서 청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천인은 그냥 짐승처럼 죽어야 하는 거야? 그깟 성문 좀 넘은 게 죽을 일인가.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건데!” 둘도 없는 친구 막문(이광수)의 죽음 앞에 무명(박서준)은 절규했다. 그 절규에 대해 막문의 아버지인 안지공(최원영)은 이렇게 얘기했다. “그게 이 신국의 구역질나는 질서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화랑(사진출처:KBS)'

KBS <화랑>은 이렇게 한 청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죽음을 맞은 막문이 원했던 건 그저 아버지와 누이를 만나는 것이었다. 천인 출신인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 망망촌에 버려졌고, 가족을 찾기 위해 넘어서는 안되는 왕경을 넘어 들어온 것이지만, 그는 삼맥종(박형식)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유일한 성골인 삼맥종은 자신을 죽이려는 살수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굴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인물. 막문이라는 한 청춘의 어이없는 죽음과 이를 목도한 무명의 절규는 <화랑>이라는 드라마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골품제라는 걸 명확하게 해준다. 무명은 막문의 죽음 앞에 각성하게 되고 이 무참한 신분제 속에서 현실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된다.

 

<화랑>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물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더 참혹한 신분사회다. 그래서 천인으로 태어나면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정해진다. 만일 왕경 같은 곳으로 마음대로 들어왔다가는 죽음을 맞이해도 항변할 길이 없다. 무명은 하지만 이런 한계와 경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막문이 왕경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귀족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무명은 말한다. “왕경에 들어온 천인을 베는 게 니들 법이면 이 선을 넘어온 귀족을 베는 건 내 법이다. 베고 싶으면 넘어와서 베. 다 상대해줄 테니까.”

 

무명이 주령구(지금으로 치면 16면체 주사위)를 던지는 인물이라는 건 그가 정해진 운명을 걷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성골이냐 진골이냐 아니면 반인이냐 천인이냐 같은 것들이 모두 운명을 결정해버리는 사회. 그 곳에서 이제 앞날이 창창한 청춘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태생으로 정해지는 사회에서 무명은 그걸 거부하고 주령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태후는 신라를 보다 강성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화랑을 모집하려 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위화공(성동일)화랑(花郞)’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냈다. “꽃같이 아름다운 사내. 지혜롭고 어진 제상. 아름답고 특별한 존재. 신국의 미래”. 그것은 아마도 청춘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수 있어야할 존재일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무명이나 막문 같은 청춘들에게 화랑이란 언감생심 꿈꿔서도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화랑>은 신라시대의 화랑이란 특수한 청춘들을 통해 현재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드라마다. 골품제라는 견고한 신분제도는 지금의 현실로서는 금수저 흙수저로 나뉘는 자본의 신분제로 재현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능력이 있어도 노력을 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보이는 현실. 이것이 골품제와 무엇이 다를까.

 

세상에는 너 따위가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이 있다. 네가 그 문 앞에 있다.” 삼맥종의 엄포에 무명은 말한다. “사람이 넘지 못하는 길, 가지 못하는 곳, 열어서 안 되는 문, 그딴 게 있어도 된다고 생각 하냐. 다 개소리라 생각한다.” 그가 던지는 일갈이 지금의 현실에도 귓가에 쟁쟁하다.

<도깨비> 신드롬, 그 밑바닥에 깔린 아재파탈의 실체

 

어쩌면 이건 아재파탈의 극점이 아닐까.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를 보다보면 한 회에 아저씨라는 말을 부지기수로 듣게 된다. 지은탁(김고은)은 함께 살아가는 도깨비 김신(공유)에게도 또 저승사자(이동욱)에게도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건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의식하지 않으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의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저씨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이미지를 아주 조금씩 깨겠다는 의도처럼 보인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도깨비는 나이가 무려 939. 사실 여기서 9백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가 아닐까. 오히려 남은 39살이라는 숫자는 그래서 현재의 김신이 보여주고 있는 육신의 나이처럼 보인다. 중년이고, 아저씨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는 나이. 하지만 이 중년의 아저씨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던 그 늙수그레한 모습이 아니다. 이른바 아재파탈의 면면을 바로 이 도깨비라는 캐릭터는 거의 극점으로까지 보여주고 있다.

 

잘 생긴 외모에 도깨비 방망이만 휘두르면 금덩이를 척척 내놓을 수 있는 재력,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서 캐나다로 훌쩍 날아가 (스테이크)’ 한 접시 정도는 먹고 올 수 있는 능력... 김신은 도깨비라는 판타지 설정이지만 어찌 보면 아저씨라는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판타지의 극점이다. 잘 관리된 몸과 스타일 있는 외모, 재력, 능력 등등 그가 갖추지 못한 건 없어 보인다.

 

이건 도깨비와 함께 브로맨스의 짝패로 등장하고 있는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뭐든 원하면 다 할 수 있는 능력자에다 역시 조각 같은 외모에 스타일도 여성들의 눈을 잡아끌 만큼 독보적이다. 그들은 각각 저승사자 하면 떠오르던 갓 대신 멋진 모자를 쓰고 있고, 도깨비 하면 떠오르던 어딘지 투박해 보이는 도깨비방망이 대신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칼을 쥐고 있다.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아저씨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누가 봐도 아저씨라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 철철 아재파탈의 면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깨비>에서 더 흥미로운 건 이 아재파탈의 면면이 단지 외적인 것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도깨비 김신은 시를 읽는다.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란 시는 김신이 지은탁을 바라보며 깔리는 목소리로 흘러나오며 시청자들의 눈과 귀와 가슴을 사로잡았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 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 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김신이라는 아재는 이토록 감성적이다.

 

게다가 이 아재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 9백년을 넘게 살아온 자의 통찰이랄까. 그는 다가오는 지은탁을 멀리서부터 바라보며 생각한다. ‘생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죽음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생으로 사로 너는 지치지도 않고 걸어온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야 말하고 마는 것이다. 서럽지 않다. 이만하면 되었다. 된 것이다, 라고.’

 

<도깨비>라는 작품에 깔려있는 무게감은 바로 이 아재들이 가진 캐릭터에서 나온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삶과 죽음. 죽음을 옆구리 정도에 끼고 살아가기 때문에 동시에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아는 자들의 사랑. 가슴에 칼이 꽂혀 있는 존재는 그래서 이제 생이 그저 즐거움만으로 구성된 것도 또 그렇다고 고통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닌 그 두 가지가 섞여있어 살만하다는 것을 아는 성숙된 자를 캐릭터화 한다. 죽음을 끼고 살아가는 자(도깨비)와 누군가의 죽음을 인도하는 자(저승사자)의 삶은 그래서 청춘들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노년들과도 다르다.

 

사실 그간 아재파탈이라고 부르면 외적인 면면들이 가장 먼저 부각됐다. 즉 나이가 중년인데도 여전히 탱탱한 젊음을 유지하는 관리된 몸이나 그 나이에 걸맞는 부와 능력과 지위를 갖고 있는 이들을 먼저 떠올린 것. 하지만 <도깨비>가 공유와 이동욱을 통해 그려내는 아재파탈의 면면은 훨씬 더 철학적이다. 물론 잘 생긴 외모와 능력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 깔려 있는 내적인 성숙은 이들의 아재파탈이 다른 이들과는 다른 묵직한 느낌을 다가오는 이유다

<도깨비>, 희비극을 공유한 매력적인 캐릭터들

 

정말 제목처럼 도깨비 같은시청률이다.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의 시청률이 무려 12.471%(닐슨 코리아)까지 치솟았다. 첫 회 6.322%에서 단 3회만에 두 배로 치솟은 이 시청률은 아마도 케이블 사상 기록적인 수치일 게다. 이 수치는 <도깨비>에 대한 입소문과 열광적인 반응이 폭발적인 수준이라는 걸 말해준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어찌 보면 황당한 판타지다. 고려시대에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전장에서 전공을 쌓았던 무장이 왕의 질투를 사 가슴에 칼이 박히고, 들판에 버려지지만 그를 따르는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에 의해 부활하지만 그건 축복이자 저주. 영원히 죽지 못하고 그 아픈 기억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이 도깨비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칼을 빼내줄 도깨비 신부를 만나야 이 영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의 간절한 기도 앞에 그들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 도깨비는 죽어야할 운명이었던 지은탁(김고은)을 살게 해주고 그 과정에서 그를 거둬가야 할 저승사자(이동욱)와도 인연이 얽힌다. 도깨비의 집에 저승사자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되고, 도깨비는 도깨비신부라 여겨지는 지은탁과 얽히고, 저승사자는 삼신할매의 주선으로 써니(유인나)와 얽힌다. 도깨비와 저승사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멜로와 브로맨스라니.

 

그런데 이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에 볼수록 빠져든다. 가벼울 수 있는 이야기가 진중한 느낌마저 준다. 그건 이 판타지의 비현실이 현실의 아픔과 슬픔 같은 것들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도깨비의 캐릭터를 보라. 그는 불사의 존재지만 가슴에 자신의 검이 박혀져 있다. 즉 불사라는 능력은 어쩌면 그 가슴에 검이 박혀 있다는 고통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건 축복이자 저주가 된다. 그를 사랑하는 도깨비신부가 나타나 가슴의 검을 뽑아 주어야 그 저주가 끝나지만, 그건 또한 그의 영원한 죽음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희비극이 이처럼 캐릭터 하나에 온전히 얹어져 있기 때문에 이 캐릭터는 비현실적 판타지라고 해도 현실감을 준다. 즉 아픔이나 고통, 상처 같은 인간적 감각들이 신적 캐릭터에게서도 비춰지는 것.

 

그러고 보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희비극을 공유한 캐릭터들이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떤 슬픔 같은 게 느껴지는 저승사자의 면면을 보라. 이 캐릭터는 써니를 마주하는 순간 느닷없이 눈물을 흘린다. 저승사자의 눈물이라니. 그리고 써니가 손을 내밀고 다가오려 하자 그 손을 피한다. 혹여나 그녀에게 죽음의 기운이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내미는 손을 피해야 하는 존재. 저승사자가 갖고 있는 놀라운 능력과는 상반되는 비극성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스스로를 도깨비신부라 부르는 지은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들을 보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건 능력이 아니라 그녀를 특이한 사람으로 만들어 왕따 시키는 저주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저주는 아무 것도 아닌 더 큰 고통을 신탁으로 받고 있다. 그것은 점점 사랑하게 되는 도깨비의 가슴에 꽂힌 검을 스스로 뽑아내야 하는 고통이다. 그것이 그의 저주를 풀어주는 것이지만 자신은 사랑을 잃게 되는 일.

 

이 희비극을 공유한 캐릭터들은 그래서 그 운명으로만 보면 엄청난 비극의 무게감을 갖지만 <도깨비>는 그 비극 속에서도 희극적 상황들을 연출한다. 부모가 죽고 이모집에 얹혀살며 신데렐라처럼 구박받는 삶을 살아가는 지은탁은 도깨비의 보호를 받으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간절한 기도와 촛불로 도깨비를 부른다는 설정이 오징어를 굽다 불이 붙어 그걸 끄자 나타나는 도깨비의 에피소드로 그려질 때 그 기도와 촛불의 절절함은 슬쩍 희극 속에 감춰진다.

 

무슨 과거의 인연인지 알 수 없으나 삼신할매가 내놓은 반지를 집으려는 순간 나타난 써니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저승사자의 그 장면은 어떤 슬픔이 깃들지만, 그 순간 써니가 던지는 반지 하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냐는 말 한 마디는 그 슬픔을 희극으로 감춰준다. 마법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며 진중하게 말하는 도깨비에게 지은탁은 그런데 왜 말투가 사극 톤이에요?”라고 묻는 것처럼 드라마는 판타지를 현실과 버무린다. 드라마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런 희극적인 순간순간의 반짝임들이 있어 <도깨비>는 결코 그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는다.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좋은 면들을 끄집어낸다. <부산행>에 이어 <밀정>으로 조금씩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공유는 <도깨비>로 과거 <커피 프린스 1호점> 이후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난 느낌이다. 비극적인 신의 모습이면서도 때론 너무나 지질한 모습까지 담겨진 인간적인 캐릭터는 공유라는 배우의 조각 같은 면과 털털한 면을 모두 포착해낸다. 이동욱의 차가우면서도 쓸쓸한 이미지는 저승사자란 캐릭터와 만나 독특한 매력으로 피어나고, 유인나는 그 당찬 이미지 그대로 멋진 언니캐릭터로 거듭난다. 평범해 보이지만 소녀 감성이 묻어나는 김고은의 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건 이 희비극을 담은 캐릭터들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캐릭터 속에 상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삶이란 희비극이다. 살아가는 건 즐거운 일일 수 있지만 또한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또한 영겁의 고통스런 삶을 상정해보면 오히려 행복일 수 있다. 결국 그래서 의미는 그 순간에 남는다. 삶의 희비극 속에서도 마법처럼 다가오는 어느 짧은 순간이 주는 의미. 그래서 쓸쓸하고도 찬란할 수밖에 없는.

<공항 가는 길>이 불륜을 다루는 특별한 방식

 

어느 낯선 도시에서 잠깐 3,40분 정도 사부작 걷는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복잡한 생각이 스르르 사라지고 인생 별거 있나 잠시 이렇게 좋으면 되는 거지... 3,40분 같아. 도우씨 보고 있으면.”

 

'공항가는 길(사진출처:KBS)'

최수아(김하늘)가 하는 이 한 마디의 대사는 <공항 가는 길>이라는 드라마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도우(이상윤)와 함께 있으면 좋다는 이야기지만, 그래서 기혼자들끼리 마음이 오고간다는 걸 뜻하고 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륜의 정서를 담지는 않는다.

 

그것은 잠깐 동안의 일탈이다. 늘 가던 길에서 잠깐 멈춰서거나 어느 날 살짝 자신도 모르게 다른 길을 걷다가 느끼는 잠시 동안의 일탈. 고작 3,40분에 불과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일탈이 어쩌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경험.

 

이 드라마의 제목이 <공항 가는 길>인 것은 그래서 단순히 그 길에서 최수아와 서도우가 만났다는 걸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우리가 공항을 갈 때 느끼는 그 설렘과 낯섦 그리고 여행의 의미만큼 더해지는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감이나 일탈의 느낌에서 오는 살짝 현실을 벗어난 듯한 그 해방감 같은 정서를 이 제목은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다고 함부로 일탈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인연이 어느 길에서 갑자기 등장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이나 떨림 같은 세세한 감정들을 잡아낸다. “공항, , 새벽. 몇 시간 전인데 벌써 까마득하다는 최수아의 말은 공항에서 서도우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에 대해 그녀가 현실감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서도우 역시 딸의 죽음으로 그 유해를 갖고 돌아올 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최수아와의 공항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비가 내리고 그래서 잠시 딸의 유해가 들어있는 가방을 최수아에게 맡긴 채 차를 끌고 오는 서도우의 눈에 마치 자신의 딸이라도 되는 듯 그 가방을 꼭 껴안고 있는 그녀에게서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건 어떤 따뜻함과 위로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런 좋은 감정들은 조금씩 쌓여가며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만들어낸다. 딸의 유해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사진을 붙이던 서도우가 어린 나이에 해외생활을 했던 딸 때문에 어렸을 적 사진 밖에 없는 걸 확인했을 때, 마침 그녀와 함께 살았던 자신의 딸이 갖고 있던 사진을 발견한 최수아가 그걸 서도우에게 보내주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인연이 어떻게 이어져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은 정성스럽게 이어져 있어요. 한 올 한 올. 인연이란 건 소중한 겁니다.” 서도우의 어머니인 고은희(예수정)는 도우에게 딸의 유품을 챙겨준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라며 조각보를 내민다. 그녀는 인간문화재 매듭장이다. 매듭은 인연의 또 다른 상징이다. <공항 가는 길>의 관계들은 그래서 이 고은희가 말하는 것처럼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이어져 있다.

 

마치 그 잠깐 동안의 일탈이 주는 좋은 감정. 서도우가 그 3,40분 같다고 고백한 최수아에게 그는 생애 최고의 찬사예요.”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그저 좋아하는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위로나 휴식 같은 특별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주는 인간적인 뿌듯함 같은 느낌이 들어가 있다.

 

최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서도우의 집으로 향한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위스키 한 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런데 그 독한 위스키의 느낌에서 기내 일식을 떠올린다. 마치 거대한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그 강렬함. 하지만 그 느낌은 타버릴 것 같은데 멀쩡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마도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공항 가는 길>이 만들어내는 정서일 게다. ‘온 몸이 타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강렬하지만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얽혀진 인연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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