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 중년의 깊이와 무게감으로 돌아온 송중기

로기완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 있는 거가?”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에서 탈북 청년 로기완 역할을 연기한 송중기는 그런 대사를 던진다. 특유의 북한 억양이 들어있는 그 목소리에는 그가 느끼는 행복감과 더불어 그런 행복을 자신이 누려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 거기에는 지독한 슬픔 같은 게 묻어난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탈북자라는 사실 때문에 공안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청년. 살기 위해 탈북한 이후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뿌리내릴 작은 땅조차 없이 살아야했던 그는 거의 유일한 마음의 터전이나 다름 없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어디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낯선 땅 벨기에까지 날아와 난민 지위를 얻어보려 하지만, 탈북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곳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에게 마리(최성은)라는 또 하나의 ‘흔들리는 청춘’이 나타난다. 벨기에 국적 한국인 사격 선수였지만 어머니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방황하며 함부로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쳐온 그녀는, 자신은 상상조차할 수 없는 생존 상황에도 끝까지 버텨내며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로기완을 보며 마음이 움직인다. 

 

‘로기완’은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탈북 청년과 이국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미래가 불안한 청춘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서사도 들어있다. 로기완의 인상적인 대사에 들어 있듯이, 청춘들이 느끼는 만만찮은 현실은 그들에게 ‘행복해질 자격’을 묻는다. 그런데 행복에 왜 자격 따위가 필요할까. 행복은 그냥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탈북청년 로기완의 이 질문은 왜 모든 청춘들이 그저 행복할 수는 없는 세상인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기완은 끝내 마리를 먼저 떠나보내면서 말한다. “너 붙잡아 줄 단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래서 꼭 만나러 가겠다고. 그건 세상이 흔들어 놓은 청춘들 모두의 마음 그대로다. 

 

또한 이건 아마도 배우 송중기의 마음이기도 했을 터다. 이제 3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이 배우 역시 ‘성균관 스캔들(2010)’ 같은 그를 스타덤에 올린 초창기 작품을 하면서 언젠가는 흔들리지 않는 보다 단단한 연기를 해내겠다 다짐했을 테니 말이다. 연기자라기보다는 ‘꽃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던 당시의 송중기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장여자 캐릭터의 개연성’이라고까지 이야기됐던 미모의 소년이었다. 박민영이 연기했던 남장여자 캐릭터가 성균관에 출입한다는 설정이 바로 이 송중기라는 꽃미남(여성이라고 해도 될 법한)에 의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성에 가까운 꽃미남 이미지로 소비되는 자신을 못견뎌했던 송중기는 그 후로 부단한 변신의 노력을 한다. 영화 ‘늑대소년(2012)’이 송중기에게는 가진 늑대의 야성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끄집어내는 도전이었다면, 드라마 ‘뿌리깊은나무(2011)’의 젊은 세종 역할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2012)’의 선과 악을 넘나드는 모습은 꽃미남 스타가 배우라는 이름에 걸맞는 필모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독특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여리디 여릴 것 같은 꽃미남의 외모를 갖고 있지만 앙다문 입술과 살짝 미간이 좁혀지면서 나오는 대사의 톤을 들어보면 강인한 내면이 느껴진다. 밝게 웃으면 착하디 착한 미소년의 모습이지만, 분노에 한껏 일그러진 얼굴은 순간 분노의 화신으로 그를 변신시킨다. 이러한 다면적인 이미지는 송중기를 그저 꽃미남에 머물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배우라는 무게에만 침잠하지 않게 해주는 스타와 배우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줬다.  

 

그 진가는 ‘태양의 후예(2016)’라는 작품으로 꽃을 피웠다. 테러리스트들과 맞서는 강인한 군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유시진이라는 캐릭터는 송중기의 이 균형잡힌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당시 군인이라는 직업을 이토록 판타지로 느껴지게 만들었던 건 다름아닌 송중기의 이미지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글로벌 스타로까지 떠올랐다고 해서 그가 젊은 날 꿈꿨던 그 단단한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그는 그 후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지옥섬 군함도에 끌려간 조선인(군함도 2017), 선사시대의 영웅(아스달 연대기 2019), 우주 SF의 히어로(승리호 2021), 이태리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빈센조 2021)까지 여러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했다. 또 시간을 되돌려 인생리셋을 꿈꾸는 1인2역(재벌집 막내아들 2022)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 ‘화란(2023)’과 ‘로기완’은, 꽃미남으로 등장해 그 껍질을 벗겨내려 흔들리면서도 무던 애를 쓰고 결국 스타덤에 올랐던 청춘의 나날을 지나 이제 30대 후반 중년기에 접어든 송중기의 출사표 같은 작품으로 다가온다. ‘화란’에서 아버지가 술독에 빠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죽음의 끝에서 자신을 구해준 조폭의 수족으로 살아가는 치건(송중기)이나, ‘로기완’에서 뿌리가 뽑혀져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부유하는 로기완이나 모두 모든 걸 잃은 채 살아가는 밑바닥의 삶을 보여준다. 치건이 아버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었다면, 로기완은 어머니 없는 세상 앞에 던져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연기하는 송중기는 ‘꽃미남’ 같은 수식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멍자국 핏자국의 상처들이 가득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건 마치 영화 ‘늑대소년’에서의 모습처럼 보인다. 다만 다른 건 ‘늑대소년’의 송중기가 미소년에서 야성 같은 새로운 이미지를 끄집어내려는 청춘의 도전이었다면, ‘화란’이나 ‘로기완’의 송중기는 보다 사회적 의미를 질문하기 시작하는 중년의 도전 같은 느낌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흔들리는 청춘을 연기하고 있지만 송중기의 연기는 중년의 무게감을 얻어가고 있다. 또한 그렇게 단단해져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건 어쩌면 청춘의 시기를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중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사진:넷플릭스)

이정은과 차승원으로 연 ‘우리들의 블루스’,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있나

우리들의 블루스

“성질 그 때 터프하고 어쩌다 웃을 때는 따뜻하고 밝고 뽀송뽀송 예뻤지개. 패기도 있고. 그 때 우리 다 그랬지개.” 깔깔 웃으며 바닷가에서 뛰놀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그 때 난 어떤 모습이었냐고 묻는 한수(차승원)에게 은희(이정은)는 그렇게 말한다. 은희의 그 말을 들으며 한수도 그 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그치? 가끔 너무 가난히 싫어서 괜히 울컥하긴 했어도 그 때 나 니들하고 놀 때 곧잘 웃기도 했어 그치? 지금처럼 재미없고 퍽퍽한 모습은 아니었어. 그치?”

 

하지만 이제 40대 후반, 오십 줄을 앞두고 있는 한수는 삶이 재미없고 퍽퍽하다. 빚에 허덕인다. 아내와 딸을 골프 유학을 보낸 기러기 아빠. 프로골퍼로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딸이지만 성적이 뚝 떨어져 2부 리그에서 뛰는 딸도 또 그를 뒷바라지하는 아내도 이제 더 이상 유학을 포기하고 싶어 한다. 은행 지점장이지만 집도 퇴직금도 다 딸 유학비로 날아갔다. 포기해야 맞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여 포기할 수도 없는 삶. 그의 삶은 발톱이 훌쩍 들려버려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속살 같다. 

 

잘 될 때는 수백 마리 이상 생선 대가리를 잘라가며 억척스럽게 일해 동생들 다 대학 보내고 장가 보내고 집도 사주며 살아온 은희. 그런 삶에 한수가 “대단하다”고 말하자 은희는 웃으며 자기 삶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한다. “이번 생은 가족들 다 뒤치다꺼리 하다가 나 인생 쫑나는 걸로.” 그의 삶은 생선 자르다 잘못 해 손에 달고 사는 상처를 닮았다. 그럼에도 대충 밴드를 붙이고는 계속 칼을 쥐고 생선 대가리를 치며 살아가는 삶. 

 

그런 은희의 상처에 한수가 밴드를 새로 붙여준다. 은희 역시 한수의 발톱이 빠진 걸 보고는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밴드도 붙여준다. 대놓고 “내 첫사랑!”하고 부르는 은희는 물론 한수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결혼해 살아가는 한수와 우정의 선을 지키려 한다. 한수는 물론 은희를 친구로서 좋아하지만, 퍽퍽해진 삶에 건물 몇 채씩 갖고 있는 은희에게 접근해 당장 필요한 돈을 빌리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별거 중이라 거짓말을 하고 두 사람이 첫 입맞춤을 했던 목포로 여행가자고 은희에게 제안한다. 

 

한수와 은희는 사는 모양이 너무나 다르지만 둘 다 그리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빚에 허덕이는 한수는 친구 은희에게 그런 나쁜 마음까지 먹게 된 자신의 처지에 더 절망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치기어린 학창시절 바다로 뛰어들었던 그 모습과, 이제 나이 들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느껴진다. 은희는 그 모습에서 한수의 절망을 슬쩍 알아차린다. 

 

돈도 잘 벌고 건물도 몇 채나 갖고 있지만 은희 역시 삶이 즐겁지는 않다. 그는 학창시절 목포에 수학여행을 가서 대뜸 한수에게 입맞춤 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마치 그 기억이 있어 매일 손을 베여가면서도 이 일을 버텨내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그에게 보이는 한수의 절망은 자신에게도 아픔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4명의 인물들의 대한 이야기를 한수와 은희로부터 시작했다. 살짝 살짝 소개된 14명이 현재 살아가는 삶은 모두가 만만찮아 보인다. 마치 제주 바다의 그 거친 격랑 속에서 살아가는 삶들처럼 보인다. 드라마는 첫 회부터 제주도 바닷가와 어시장 사람들은 물론이고 곳곳을 떠돌며 물건을 파는 이들까지 거칠지만 무감한 듯 버텨내는 삶들을 담아낸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거칠지만, 드라마는 그 복작대는 삶이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은희는 어머니가 밭에서 일을 하다 일사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시장 한 켠에서 좌판을 하는 어머니들, 옥동(김혜자)이나 춘희(고두심)를 마치 친엄마 대하듯이 챙긴다. 동석(이병헌)은 마트 하나 없는 곳에 차로 물건을 가져다주는 만물상이지만, 이런 저런 물건들을 갖다달라는 그 곳의 주민들에게 툴툴 대면서도 가까운 이웃처럼 대하는 사람이다. 해녀로 물질을 하고 저녁에는 술을 파는 영옥(한지민)은 동네남자들에게 헤프다는 이유로 다른 해녀들에게 욕을 먹지만 진지한 관계를 원치 않는다. 진지하게 다가오는 정준(김우빈)에게 “그러다 다친다”며 거리를 두는 영옥에게서도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난다. 

 

제주바다는 아름답지만, 한 발 다가서면 무서울 정도로 거칠기도 하다. 그건 어쩌면 거친 풍파 속에서도 이를 맞으며 버텨낸 삶들이 녹아난 아름다움이 아닐까. 무섭게 목숨을 잡아먹기도 하지만, 해녀들에게 아낌없이 삶의 터전을 내주는 바다. 은희는 그래서 제주바다를 닮았다. 상처 가득한 손이 말해주는 그 거친 삶의 이면에는 자신을 희생해 가족들 챙긴 마음이 숨겨져 있어서다. 그 바다 속으로 절망적인 한수가 뛰어들고 있다. 과연 은희는 한수의 그 절망도 넉넉히 안아줄까. <우리들의 블루스>가 앞으로 그려나갈 14명의 삶이 마주한 바다와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그 삶이 전해줄 먹먹한 위로가 기대되는 지점이다. (사진:tvN)

김태리, 남주혁의 청춘멜로, 1998년을 소환한 까닭(‘스물다섯 스물하나’)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응답하라 1998’이 아닐까. tvN 토일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오프닝에 90년대 풍경과 더불어 당대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복고적 영상을 선보였다. 마치 옛날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은 톤 앤 매너를 연출적 포인트로 삼은 것. 신원호 감독의 <응답하라 1997>이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당시 <응답하라 1997>도 PC통신의 접속 장면과 신호음을 오프닝에 담아 당대의 추억 속으로 시청자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199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가져왔다. 이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건 IMF라는 사건(?)에 의해 여기 등장하는 청춘들, 나희도(김태리)와 백이진(남주혁)의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네 꿈을 뺏은 건 내가 아냐. 시대지.” 이렇게 말하는 코치의 말 속에 이 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나희도는 다니던 학교 펜싱부가 사라지게 되면서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펜싱을 더 이상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하고, 백이진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1998년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이 드라마 속에 담겨진다. IMF도 그렇지만, 만화 풀하우스, 미국 직배 영화에 맞서 스크린쿼터를 요구하는 영화인들의 시위, PC통신, 비디오 플레이어, 금 모으기 운동, 더블데크, 만화 대여점... 풍경만으로도 당대로 기억을 소환시키는 소품들과 광경들이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채워진다. 현재 너무 치열해진 경쟁사회에 코로나19까지 더해져 갑갑한 청춘들의 현실을 떠올려 보면 IMF가 막 터진 그 때가 오히려 좋았던 시절이라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여러모로 90년대, 그 중에서도 IMF를 전후한 시기는 복고를 담는 콘텐츠들에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걸 이 드라마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대가 주는 무게감과는 사뭇 상반되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청춘멜로가 갖는 풋풋함과 설렘,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 이유는 나희도가 당대의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 대해 던지는 대사 속에 담겨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어가나 보다. 그치만 나랑은 상관없는 어른들의 일이다. 난 뭔가를 잃기엔 너무 열여덟이니까. 내가 가진 것들은 잃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꿈, 동경.” 즉 이 나희도나 백이진 같은 청춘들은 시대의 무거움과 마치 정면승부를 펼치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발랄함을 보여준다. 

 

나희도의 이런 발랄함과 생기 넘치는 에너지는 빵빵 터지는 코믹한 상황들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유쾌하게 전해진다. 백이진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부터가 그렇다. 생계를 위해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백이진이 던진 신문에 오줌 누는 소년상의 성기 부문이 잘려나가자 따지는 나희도의 대사는 빵빵 터지는 웃음과 더불어 이 엉뚱발랄한 캐릭터를 잘 드러낸다. “신문사절 안보여? 신문을 사절한다는데 왜 사절을 안 해서 가만있는 애를 고자로 만드냐고?”

 

펜싱부가 사라지자 자신이 동경하는 고유림(보나) 선수가 있는 태양고로 전학을 가고픈 나희도가 사고를 쳐서 강제전학을 하려던 계획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는 에피소드들도 큰 웃음을 선사한다. 패싸움에 뛰어들어 펜싱 실력으로 남자들까지 제압하지만, 정작 자신이 붙잡히게 되길 원해 부른 경찰들이 자신은 놔두고 도망치는 친구들만 뒤쫓자 툭 던지는 한 마디가 그렇다. “잡히려면 도망가야 되는구나.”

 

또 펜싱을 고집하는 나희도와 말다툼을 하다 대여점에서 빌려온 풀하우스를 엄마가 찢어 버리자 찢겨진 부분을 손으로 그려 붙여 대여점에 몰래 되돌려주려다 백이진에게 딱 걸리는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백이진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알 수 없게 우는 나희도의 모습도 우습지만, 그가 그려놓은 엉성한 그림과 ‘외않되...?’라고 잘못 쓴 대사에 키득키득 웃는 백이진의 모습도 빵빵 터진다. 

 

하지만 백이진에게 드리워진 ‘시대의 그늘’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겁다.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피해를 입은 업체 아저씨들이 찾아와 그에게 아버지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토로할 때 백이진은 이렇게 말한다.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 게요. 아저씨들 고통들 생각하면서 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떤 순간에도 정말, 어떤 순간에도 정말 행복하지 않을 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마침 그 순간 우연히 그 광경을 보게 된 나희도는 슈퍼 앞 평상에 앉아 ‘함부로’ 백이진의 그 무거운 현실을 툭툭 꺼내놓으며 과거 학창시절 방송반에서 잘 나가던 그 백이진과 너무 다르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무례할 수 있는 그 ‘함부로’ 던지는 발언을 그러나 백이진은 좋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나희도를 통해 자신에게도 있었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다. “너 보면 내 생각이 나. 열여덟의 나 같애.” 그는 그 때로 절실히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는 심지어 그 때의 ‘걱정들’이 그립다고 한다. “뭐 숙제가 너무 많고, 방송부 선배들이 너무 무섭고 축제 때 무대에서 실수할까봐 뭐 좋아하는 여자애가 나 안 좋아할까봐 뭐 그런 걱정.”

 

당대에는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힘들게 느껴졌지만 지나고 나면 그 때의 ‘걱정들’조차 그리워지는 어떤 시기가 온다는 것.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스물둘이 열여덟을 만나 위로를 받는 이야기다. 그건 장차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그 때를 이야기하며 그 걱정들조차 그리워하는 어떤 순간들을 불러올 거라는 예감을 만든다. 

 

“우리 가끔 이렇게 놀자. 싫어도 해. 선택지 없어 해야 돼. 네가 그 아저씨들한테 그랬잖아. 앞으로 어떤 순간도 행복하지 않겠다고. 난 그 말에 반대야.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근데 넌 이미 그 아저씨들하고 약속했으니까. 이렇게 하자.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해지는 거야.”

 

즉 1998년의 IMF 상황이라는 무거운 시대의 분위기를 가져왔지만 드라마는 청춘의 풋풋함으로 그 ‘시대와 대결하는’ 듯한 건강함을 보여준다. 이 청춘멜로가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코로나19로 인해 가뜩이나 힘겨운 현실에 잠시 동안이나마 시간을 되돌려 숨 쉴 틈을 제공하고 있어서다. 그런데 왜 하필 1998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었을까. 

 

그것은 IMF로 인해 암울하기 그지없었던 그 시대 역시 결국 잘 지나왔다는 사실을 통해 현재에 던지는 위로가 크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그것만큼 의미 있어 보이는 건, 마치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던 청춘의 시대를 거쳐 이제 중년으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제 그 시기를 되돌아보고픈 청춘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래서 지금의 청춘들에게 어려운 시기는 어느 때나 지나간다는 위로를 건네고, 지금의 중년들에게는 잊고 있던 그 때의 에너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고 있다. (사진:tvN)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가 툭툭 건드리는 추억의 의미

 

'지난여름 바닷가 너와 나 단둘이 파도에 취해서 노래하며 같은 꿈을 꾸었지.' 혼성그룹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는 누구나 한번쯤 갔었던 젊은 날의 여름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과거형의 회고는 '다시 여기 바닷가'로 이어지며 현재진행형으로 바뀐다. 이미 지나간 청춘의 뜨거운 나날들과 함께 꾼 꿈이 이제는 서랍 속에 꼭꼭 넣어뒀던 추억인 줄 알았는데 다시 여기 바닷가에서 만나니 그가 더욱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있어 자신이 별처럼 빛났다는 걸.

 

MBC 예능 <놀면 뭐하니?>가 드디어 공개한 싹쓰리(유두래곤, 린다G, 비룡)의 '다시 여기 바닷가'의 뮤직비디오는 린다G가 바닷가에 앉아 다소 쓸쓸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밝은 분위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원색 톤의 컬러가 뜨거운 여름과 청춘의 풋풋함을 드러내고, 발랄한 춤과 그 춤을 추는 싹쓰리의 환한 표정들이 어깨춤을 추게 만들 정도로 기분을 고조시킨다.

 

특히 "다시 여기 바닷가-"라는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후크 부분에서 파도를 형상화한 듯한 간단하면서도 흥겨운 손동작으로 표현된 춤은 군무로 표현될 때 시원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여름 바다를 겨냥한 곡답게 바닷가에 흘러나오면 저도 모르게 입으로 흥얼댈 것 같은 귀에 착착 붙는 멜로디다.

 

그런데 이 곡은 그 밝은 뮤직비디오의 상큼발랄한 느낌과는 정반대로 듣고 있으면 어딘지 슬픈 정조 같은 게 느껴지는 곡이기도 하다. 그건 아마도 젊은 날의 추억을 들여다볼 때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대비되며 느껴지는 어떤 쓸쓸함 같은 것 때문일 게다. 그 때는 그렇게 열정이 넘쳤지만 지금은 조금 나이 들어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현실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정조는 이 곡을 쓴 이상순의 어쿠스틱 버전을 들어보면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상순이 단출하게 기타 하나를 튕겨가며 부르는 어쿠스틱 버전은 더더욱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 때에 대한 그리움이 추억을 회상하는 목소리로 담겨져 있어서다. 물론 이 곡은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 때 젊은 날에서 한참 멀어져 왔지만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바닷가에 있고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해 지금도 빛난다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다시 여기 바닷가'가 음원차트를 말 그래도 싹쓸이하고, <놀면 뭐하니?>가 탄생시킨 싹쓰리가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 곡이 전하는 메시지와 싹쓰리라는 팀의 캐릭터들이 일관된 스토리를 담고 있어서다. 특히 1990년대를 회고하는 중년들이라면 싹쓰리라는 팀의 유두래곤과 린다G 그리고 비룡이 <놀면 뭐하니?>를 통해 보여준 일련의 행보들을 보며 어떤 로망에 대한 대리충족을 느꼈을 법하다.

 

유두래곤이 중년이라고 해도 여전히 흥과 끼가 넘치는 자신의 숨겨진 면모들을 싹쓰리 프로젝트를 통해 하나하나 꺼내놓고 있었다면, 린다G는 결혼 후 경력 단절을 느끼는 중년여성들에게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제주 소길댁에서 린다라는 새로운 이름을 꺼내놓고 거침없으며 열정 넘치는 자신을 마음껏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나이 들어서도 막내가 되어 마음껏 앙탈을 부리며 구박을 받아도 즐거운 비룡이 더해지니 이만큼 중년들의 로망을 건드리는 캐릭터들이 있을까.

 

'다시 여기 바닷가'라는 곡은 그래서 중년이 된 이들이 부르는 추억이면서 그 추억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재가 빛난다는 쓸쓸하지만 담담한 미소 같은 곡으로 다가온다. 신나지만 적당히 슬프고, 슬프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그런 감정들이 곡 곳곳에 묻어난다. 우리가 추억을 떠올릴 때면 그러한 것처럼.(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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