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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터트린 해피모드, 오히려 불안감 키워

 

MBC <그녀는 예뻤다>는 너무 일찍 갈등 요소들을 해결해버렸다. 즉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갈등요소는 김혜진(황정음)이 지성준(박서준)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가짜 김혜진 역할을 해온 민하리(고준희)가 지성준을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친구인 김혜진과의 우정 때문에 갈등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고, 그 와중에 김신혁(최시원)의 김혜진에 대한 우정 같은 사랑이 들어갈 여지가 생겼다.

 


'그녀는 예뻤다(사진출처:MBC)'

하지만 너무 빨리 지성준이 김혜진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급물살을 타게 되면서 모든 갈등요소들은 사라져버렸다. 민하리는 그래서 일종의 자숙모드에 들어갔고 친구인 김혜진을 위해 뭐든 해줄 것 같은 우정을 과시하는 존재가 됐다. 김신혁은 김혜진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됐다.

 

그래서 이러한 갈등요소를 모두 일찍 해결해버린 드라마가 할 수 있는 건 지성준과 김혜진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밖에 없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애정을 과시하고 행복감을 드러낸다. 사실 해피엔딩을 그리려했다면 여기서 드라마가 끝나는 게 맞다. 본래 이야기란 위기와 절정을 넘으면 결말로 끝맺음을 하는 게 정해진 룰이다. 그런데 <그녀는 예뻤다>는 이 갈등 요소가 이미 11회에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16부작인 이 드라마는 앞으로도 3회가 더 남았다.

 

도대체 이 3회나 되는 분량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갈등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 두 사람의 애정행각만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이들이 만드는 잡지 더 모스트가 판매율 1위를 달성하지 못하면 폐간될 수 있다는 위기가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위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해피모드에서 결국은 더 모스트가 폐간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너무 튄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 갈등이 사라진 드라마가 할 수 있는 갈등요소란 해피엔딩을 새드엔딩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여겨지게 된다. ‘너무 행복한 모습이 불안하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은 드라마의 공식을 그만큼 잘 이해하고 있는데서 나오는 추측이다. 누군가 병에 걸리던지, 아니면 사고를 당하던지 하는 그런 위기요소가 억지로라도 들어가야 드라마가 남을 분량을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는 것이다.

 

조성희 작가가 새드엔딩으로 심지어 논란까지 있었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작가라는 사실은 그래서 시청자들의 불안요소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일종의 충격요법처럼 갑자기 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당하면서 끝나는 엔딩을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목격한 시청자들이라면 당연한 불안일 수밖에 없다.

 

초반에 그토록 짜임새 있게 흘러가던 드라마가 어쩌다 후반에 와서 이런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게 됐을까. 너무 일찍 해피모드로 흘러버린 감이 없지 않다. 결국 이 드라마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밋밋한 해피엔딩으로 끝내던가 아니면 충격적인 새드엔딩의 반전을 보이던가. 물론 그 어느 쪽도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하이킥', 왜 신세경을 추억할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신세경의 이 말이 주문이 되었던 것일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그 주문 같은 말을 남긴 채, 비극적인 엔딩으로 사라졌던 전작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을 부활시켰다. 너무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을 게다. 시트콤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그 엔딩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대중들은 신세경의 해피엔딩을 바랐다는 얘기다. 왜? 신세경이니까.

캐릭터와 연기자가 제대로 만났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세경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의 신세경보다 더 돋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이 시트콤이 신세경이란 존재를 가장 먼저 알린 작품이라는 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이 작품 속에서 신세경이 워낙 도드라진 존재였다는 데도 이유가 있다.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식모라는 역할, 하지만 그 역할과 어딘지 반전을 이루는 '청순 글래머'라는 기묘한 판타지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으로 되살아난 신세경을 보고 강승윤이 음악적 영감이 떠오른다며 다름 아닌 '지붕 뚫고 하이킥'의 주제가를 부르는 것은 이 작품 속에서의 신세경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식모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경은 만약 이 시트콤에 수직적인 계급이 있었다면 그 맨 바닥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계급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 스스로 내뿜는 매력을 통해 이 계급적 관계를 무너뜨렸다. 이지훈(최다니엘)과 정준혁(윤시윤) 사이에서의 신세경의 멜로는 그래서 이 시트콤의 주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이었다.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보여주었던 신세경에게 닥친 비극적인 결말은 그래서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게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이 신세경의 새드 엔딩에 집착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시트콤 초반부에 이 새드 엔딩을 소재로 다뤄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백진희가 '바닥 뚫고 로우킥'의 결말을 고민하는 PD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준 것. 여기서 백진희가 말한 새드엔딩에 PD는 면박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자신의 말대로 시트콤 결말이 나간 걸 보게 된다. 이 소재는 김병욱 PD에게 '지붕 뚫고 하이킥'의 새드 엔딩 논란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신세경을 부활시켜 과거를 데자뷰하게 하면서 굳이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윤계상이 신세경을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세경은 마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멈췄으면 좋겠어..."하고 말한다. 그리고 마치 교통사고가 나는 것처럼 편집된 장면을 내보낸 후, 다시 시트콤으로 되돌린다. "멀미가 멈췄으면 좋겠어."하고. 그녀는 결국 본인이 바라던 대로 아버지와 동생의 품으로 돌아가고 윤계상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낸다. 모든 건 바라던 대로 해피엔딩이 되었다. 하지만 이 뒤에 남는 찜찜함은 뭘까.

과연 김병욱 PD는 신세경을 부활시켜 새드 엔딩의 부채감을 털어내려 한 것일까. 어쩌면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신세경이라는 자신의 시트콤이 탄생시킨 배우의 존재감을 이번 작품에도 적절히 활용하고픈 욕구가 더 컸을 것이다. 그렇게 대중들을 들끓게 했던 새드엔딩의 주인공이 다시 등장해 해피엔딩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 테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새드엔딩에서 해피엔딩으로 되돌려 보여주었지만 이 해피엔딩에 아무런 여운이 남지 않는다. 만일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세경이 지금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면 이토록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래서 다음편인 이번 작품에 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혹시 극중의 비극이 신세경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기폭제가 됐던 건 아닐까. 김병욱 PD가 다시 부활시킨 신세경의 해피엔딩 뒤집기는 그래서 새드엔딩이 만들어낸 힘을 다시 실감하게 만든다. 신세경의 시간까지 멈추고 되돌리게 만들었으니까.

Posted by 더키앙


신세경은 어떻게 '하이킥'을 넘어 '뿌리'로 왔나

'뿌리 깊은 나무'(사진출처:SBS)

'지붕 뚫고 하이킥'은 두 명의 신예를 발굴했다. 황정음과 신세경이다. 황정음은 특유의 발랄함이 돋보였고, 신세경은 수많은 오빠들의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청순가련의 마력이 있었다. 시트콤에서 두 인물이 주는 인상은 사뭇 달랐다. 황정음이 웃겼다면 신세경은 울렸다. 황정음이 말이 많았다면 신세경은 과묵했다. 거기에 논란을 일으킨 이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신세경이라는 배우를 그 이미지에 고착시켰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배우로서 신세경의 시간도 멈춰버렸다.

대중들의 과잉된 이미지를 갖게 된 신세경이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신세경이 짧은 광고를 통해 청순가련이 청순글래머로 포장되고 있을 때, 그녀는 황정음과 비교되었다. 황정음은 '자이언트'를 통해 시트콤이 아닌 정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내 마음이 들리니'를 통해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때도 신세경은 작품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동안 그녀는 침묵하고 있었다. 대중들에 의해 자신에게 얹어진 과잉된 이미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런 그녀가 돌아왔다. '뿌리 깊은 나무'의 소이라는 캐릭터는 그녀의 '연착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말을 잃어버린 소이라는 캐릭터가 신세경에게 두 가지 효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신비감을 되살려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기자로서의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대중들에게 허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세경이라는 연기자를 위해 설정된 것은 아니다. 다만 소이라는 특별한 캐릭터가 신세경이라는 배우와 제대로 만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소이는 '뿌리 깊은 나무'의 전반부에 그다지 중요한 인물처럼 보이지 않게 등장하지만, 사실은 이 사극의 중심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즉 세종 이도(한석규)의 한글 창제의 동인이 되는 인물이고, 그 말을 못한다는 상징적인 캐릭터는 그 자체로 (글을 모르는)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종 이도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강채윤(장혁)에게 유일하게 다른 삶을 꿈꾸게 하는 인물이다. 또한 모든 것을 기억해버리는 그녀의 능력은 마치 컴퓨터 같은 역할을 해내며 한글 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극의 대립구도인 밀본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캐릭터다. 한 마디로 소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뿌리 깊은 나무'의 캐릭터 구조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소이라는 캐릭터에서는 그간 신세경이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면모들이 드러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하는 세종에게 '전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를 외칠 때나 오랜 시간 그리워한 똘복을 만나는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는 좀 더 강인한 면모들이 드러난다. 임금과 물러나지 않고 대적하는 당참이 있고, 밀본 세력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면서도 방향과 발자국수를 세며 위치를 파악해내는 주도면밀함과 대담함이 엿보인다. 소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 보면 청순해 보이지만 결코 가련하지만은 않은 강한 인물이다.

이것은 소이가 말문을 열고, 강채윤과 함께 떠나라는 어명에도 불복하며 세종의 대의를 따르기로 소신을 밝히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극 여주인공들처럼 '오라버니'와의 소시민적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닫혀진 입을 열어주기 위해 한글을 창제하려는 임금의 대의를 따른다. 그러면서도 결코 강채윤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강채윤을 떠나면서도 그가 그녀를 따라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인 셈이다.

말 못하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오인되고 있다가 말문이 트이면서 숨겨진 능동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소이라는 이 절묘한 캐릭터는 그래서 신세경이라는 배우를 제 자리에 세워놓는 역할을 해준다. 청순하되 결코 가련하지 않은 이 당찬 배우는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멈춰진 시간' 속에 박제되었던 그 신세경이 아니다. 그녀는 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 봉인을 풀어냈고, 이제 우리 앞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한 명의 여배우로 서게 되었다. 한때 청순글래머라는 과잉된 이미지로 옴짝달싹할 수 없던 그녀. 그것을 깨버린 배우 신세경의 역습은 이제 시작되었다.

Posted by 더키앙


'하이킥', 짧은 다리로 어떻게 역습이 가능할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시리즈는 2006년부터 2011년 현재까지 방영되며 당대의 현실을 그린다. 시트콤이 시추에이션 코미디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지를 눈치 챌 것이다. 시트콤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대한 공감은 당대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과거의 하이킥 시리즈들과 비교해 어떤 현실의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

먼저 제목을 보자.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뚫고 하이킥(2009)',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2011)'.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하이킥'이란 동작은 밑에서 위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차는 행위다. 즉 이것은 밑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수직적인' 행위다. 즉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의 기본 바탕은 이 수직적인 사회가 갖고 있는 권위나 계층적이고 세대적인 갈등을 깔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이킥'의 캐릭터 설정은 이 수직적인 체계를 통해 시트콤이 만들어내는 웃음의 방식을 잘 설명해준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뚫고 하이킥'에는 이른바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이순재나 나문희, 그리고 김자옥 같은 캐릭터가 있었다. 그들을 거기 세워둔 이유는 분명하다. 이 가부장적인 수직적 체계의 캐릭터를 세워두고 그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무너뜨림으로써 웃음을 만들기 위함이다. '야동순재'는 바로 이 수직적 체계를 무너뜨리는 웃음의 코드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는 딱히 권위라고 할 수 있는 기성세대가 등장하지 않는다. 안내상이나 윤유선이 연장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트콤 내에서 어떤 권위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니다. 안내상이 어느 날 갑자기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서 윤계상의 눈치를 보고 가장의 자리를 버거워하고 쪼그라드는 모습에서는 그 어떤 권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대신 안내상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건 궁상 그 자체다. 이 시트콤에서 안내상은 청년백수 백진희와 거의 비슷한 수평적인 위치에 서 있다.

과거 수직적인 체계에 대한 조롱이나 해체를 다루던 시기의 '하이킥'은 그래도 어떤 희망이 엿보였다. 적어도 그 동작이 '거침없었고', 심지어 '지붕을 뚫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저 위를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다. 적어도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바로 눈앞에 도래하는 하루하루를 생존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현실은 태생적으로 고착된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다. '짧은 다리'라는 태생적 한계는 제 아무리 하이킥을 날리려 해도 당도하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우울한 시트콤이 다루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저 위를 바라보며 희망하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 '짧은 다리'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이 현실 속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캐릭터 구성은 수직적인 체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 고만고만한 캐릭터들이 양적으로도 더 많이 포진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다. 그들은 상승을 꿈꾸기보다는 하루하루 교사생활을 버티며 그저 그런 고시생 남자친구와 만나면서 그럭저럭 부딪치며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유일하게 이 우울한 세계에서 하나의 희망을 만들어주는 건 바로 '땅굴'로 표상되는 일종의 소통체계다. 한없이 바닥을 치고 결국은 땅굴로 주저앉은 그들이 그 밑바닥에서 서로와 서로를 연결시키는 이 밑그림은 처절하지만 '짧은 다리'들이 역습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 마치 출구 없는 청춘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묶여지고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때로는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우울한 제목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읽고 싶어진다. 다리가 발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그 다리였으면 하는 생각. 그것이 비록 짧게 느껴지더라도 그 수평적인 연결고리들이, 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듯 구축되어 있는 저들만의 수직적인 세상을 지반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Posted by 더키앙

지붕 뚫던 '하이킥', 바닥 뚫은 이유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먼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시트콤의 화자가 이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는 대장항문과 의사로 줄곧 항문만 바라보면서 살아온 인물. 이 설정은 이 시트콤의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때론 더럽고 때론 힘겨운 현실을 마치 항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기가 막힌 시점인가! 아마도 작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항문을 바라보듯 지독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극 초반에 주목된 두 캐릭터, 백진희와 안내상은 이 현실을 잘 말해주는 캐릭터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청년백수에, 등록금 때문에 진 빚에 허덕이며 고시원을 전전하는 백진희는 이 시대 암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악몽 같은 현실은 꿈에서조차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서 윤계상이 면접관으로 나와 그녀를 면접하는 '취집시험(취업+시집)'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로망인 일과 사랑, 그 무엇에서도(이 둘은 사실 연결되어 있다) 철저히 루저가 되어버린 청춘의 한 단상을 그려낸다.

백진희가 이 시대 청춘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라면, 안내상은 이 시대 가장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다. 친구의 야반도주로 하루아침에 파산해버린 그는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처남인 윤계상 집에 얹혀살면서도 여전히 반찬 투정을 하는 옛 삶에 머물러 있다. 그의 자화상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왜 파산했고 왜 그런 처지에 있게 되었느냐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가 아무런 변화나 노력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시대에 갑자기 권위를 잃어버린 가장들처럼.

물론 그렇게 각박한 세상에 각박한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박하선과 윤계상은 이 시트콤에서 천사표 캐릭터다. 그런데 이 시트콤이 바라보는 이들 천사표들은 착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늘 당하는 존재거나, 아예 현실을 잘 모르는 존재다. 박하선이 그 착한 캐릭터로 이 시트콤에서 웃음을 주는 방식은 한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녀는 선의로 한 일이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눈물짓게 만든다. 윤계상은 물론 망가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인물이다. 착하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웃으면서 회 뜨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 각박한 현실이 그저 '착하게 산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한방병원 원장이었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학교에 급식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어느 정도 잘 사는 가족이 이 시트콤들의 배경이었던 것. 물론 힘겨운 현실을 반영한 캐릭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빈둥빈둥 백수가 되어버린 가장 이준하(정준하)가 등장하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이순재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온 신세경과 신신애(서신애) 자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두 시트콤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끌어안는 가족애 같은 것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집을 잃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안내상네 가족이나 청년 실업으로 오갈 데 없는 백진희를 안아주는 건 그런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상황에 의해 파탄 나버린 채, 너무 착하거나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박하선 혹은 윤계상의 집에서 불안한 더부살이를 해나간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인물들이 그래도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때로는 신데렐라를) 상승하는 캐릭터들이었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인물들은 현실에 짓눌려 한없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캐릭터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한때는 거침없었고, 한때는 지붕을 뚫던 '하이킥'은 왜 바닥을 뚫기 시작한 걸까. 빚쟁이들에게 몰려 우연히 발견된 지하 땅굴이라는 특이한 공간은 지금의 '하이킥'이 바라보는 지독한 현실을 그대로 상징한다. 기껏 탈출구라고 뚫은 것이 옆집 화장실이었다는 시퀀스 역시 이들의 우습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뿐일까. 바로 그 바닥을 뚫고 들어간 지하 땅굴이 그동안 소통되지 않던 힘겨운 자들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이 되고, 때로는 '실크로드'가 되는 장면은 이 시트콤의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짧은 다리의 역습은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가 되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이 될 수도 있겠지만.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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