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요한’, 단순 사랑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사랑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에서 강시영(이세영)은 차요한(지성)에게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실제로 강시영은 차요한이 사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질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밤이고 낮이고 그를 걱정한다. 함께 데이트를 나와서도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혹여나 차요한에 부딪칠까를 걱정하고, 뜨거운 커피를 쏟을까를 걱정한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제 몸이 망가지고 있어도 그걸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차요한은 자신의 집에 대신 몸 상태를 체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매일 퇴근해서는 제 몸을 검사하고 잠을 잘 때도 카메라에 영상으로 그 모습을 일일이 기록해 혹여나 있을 수 있는 수면 중 행동의 위험성 또한 예방하려 한다.

 

그 질환에 걸린 이들이 손가락이 뜯기는 지도 모르고 손을 물어뜯거나, 각막이 손상되는 지도 모르고 눈을 비비는 그런 행동들을 하다 결국은 일찍 사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시영은 눈물을 쏟아낸다. 병원에 바이러스성 질환이 의심되는 환자가 들어오고 그 병동이 폐쇄 격리되자 강시영은 혹여나 그 곳으로 차요한이 들어오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하지만 강시영이 환자를 돌보다 쓰러지게 되자 차요한 역시 그를 걱정해 폐쇄 병동에 들어와 문제를 해결한다.

 

좋아한다 말하고,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상대방을 걱정하며, 데이트를 하면서도 혹여나 있을 위험을 피하려 하는 강시영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의학드라마 속에서도 보게 되는 멜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의사 요한>이 강시영을 통해 그려내는 멜로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그건 그가 사랑하는 차요한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강시영과 차요한의 멜로는 스킨십보다는 감정을 공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차요한의 상황을 애써 이해하려는 강시영에게 차요한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애써 그러지 말라고 하고, 그럼에도 강시영이 그걸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이들이 보여주는 멜로의 방식이다. 그건 남녀 간의 사랑으로 그려져 있지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의사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의 사랑으로도 보인다.

 

차요한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말하자 강시영이 그렇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사랑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보다 깊은 인간애에 대한 통찰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이해했다 생각하지만 착각인 경우가 많고,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서 오해 혹은 오역되기도 하는 문제. 우리는 공감한다 말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공감인가에 대한 질문. 그런 것들이 <의사 요한>에서는 멜로에서조차 담겨진다.

 

강시영의 차요한에 대한 애착은 그래서 함께 산을 오르다 사고를 당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겹쳐진다. 그래서 강시영이 차요한을 이해하려 애쓰는 건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아버지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차요한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병을 갖고 있어 환자의 고통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고통을 경감시키려 노력한다. 통증 그 자체가 아닌 그 사람을 들여다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무통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자신의 질환을 보여주면서 그래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다.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완벽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이 있어 타인의 그것을 미루어 이해하려 노력한다.

 

자신이 겪는 고통 혹은 우리가 갖게 되는 어떤 결핍이나 상실감. 그것이 있어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고통과 결핍, 상실감 같은 걸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통증은 그저 고통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해하게 만드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의사 요한>은 이처럼 통증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네 인간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그려내는 면이 있다.(사진:SBS)

‘의사요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메시지

 

이 드라마 어딘가 깊이가 다르다.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의학드라마의 접근이 상당히 표피적이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가 보여줬던 건 아픈 환자와 이를 우여곡절 끝에 고치는 의사의 이야기가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의사요한>은 그 환자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나아가 고통뿐인 삶이 과연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같은 지금껏 의학드라마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진다.

 

중증 근무력증을 앓는 격투기 선수의 사례는 이런 질문들을 다차원적으로 담아낸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까를 고민한다는 주형우(하도권)는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까를 고민하는 차요한(지성)에게 우리는 닮았다고 말한다. 주형우는 살아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살아있는 게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고 하지만, 차요한은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링에 올라 싸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 여기는 격투기 선수 주형우는 연명하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자신이 쓰러졌을 때 심폐소생술 같은 응급치료를 하지 말아 달라 요구한다. 그는 “죽음을 앞당기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한때 도저히 손 쓸 수 없어 고통만을 연장시키던 환자를 안락사 시킨 경험이 있는 차요한은 그러나 주형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차요한은 주형우가 말하는 “죽을 만큼 괴롭다”는 그 이야기가 보내는 시그널을 읽어낸다. 그래서 거기부터 시작해 그가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걸 알아내고 결국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이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시그널이라는 것.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는 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을 사전에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몸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차요한이 주형우가 말하는 그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해낸 것처럼.

 

그렇다면 과거 차요한은 어째서 환자를 안락사 시킨 걸까. 그것은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고칠 수 있다는 희망자체가 사라졌을 때, 과연 통증의학과 의사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줄여줄 수 없는 고통을 없애주려 한 것이었다. 설령 그 선택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의사요한>은 이처럼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도 진지한 질문들을 담아내고 있다. 새로운 에피소드로 등장한 극단적인 두 환자의 사례는 그래서 더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선천적으로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아주 미세한 접촉에도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환자의 대비. 이 에피소드에서 통증은 다만 피하고픈 어떤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증명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을까. 겉보기엔 무통환자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아픔을 전제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의사요한>이 통증의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전하는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아가 병원 밖에서의 우리네 삶에도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삶에서 느끼는 힘겨움이나 아픔은 우리가 늘 피하고픈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살아있다는 증명이며 나아가 더 큰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기 위한 신호일 수 있다는 것. 의사 역할을 하는 사회가 힘겨움의 신호를 보내는 이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걸 <의사요한>이라는 의학드라마는 마치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사진:SBS)

고통과 안락사 사이, ‘의사요한’이 집어낸 새로운 지점

 

드디어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이 기존의 의학드라마와는 어떤 다른 지점을 갖고 있는가가 드러났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소재로 가져온 ‘통증의학과’와 관련이 있다. 흔히 마취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통증의학과. 하지만 통증을 관리한다는 의미는 이들이 하는 일이 가진 논쟁적 부분들을 끄집어낸다. 그것은 안락사와 관련된 이슈이기도 하다.

 

<의사요한>의 시작은 강시영(이세영) 통증의학과 레지던트가 자신의 환자가 죽는 경험을 한 후 의사직을 포기하고 마다가스카르로 떠나려던 지점부터다. 강시영은 삼촌이 교도소장으로 있는 교도소에 아르바이트로 잠깐 갔다가 거기서 환자를 죽게 했다는 사실로 복역 중인 차요한(지성)을 만나면서 조금씩 마음을 되돌린다.

 

당장 눈앞에 자신이 손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환자를 보고 외면하지 못하는 강시영은 자신이 결국 ‘의사’라는 직업을 벗어버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차요한은 그런 강시영을 통해 파브리병이 의심되는 환자의 생명을 구해내려 한다. 하지만 강시영은 차요한이 과거 환자를 죽게 했던 마취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갈등한다. 3년 전 말기 환자에게 치사량의 진통제를 투약해 죽게 했고 그래서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차요한의 정체를 알게 된 것.

 

하지만 자신을 살인자로 지칭하는 강시영에게 차요한은 반박한다. “환자를 살해한? 왜 그런 표현을 쓰지? 보통 안락사 했다고 하던데?” 강시영은 차요한에게 ‘환자를 포기하고, 버리고, 환자의 숨통을 멈춘 일’이 ‘살해’와 다를 게 없다고 했다. 그런 강시영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걸 알아차린 차요한은 되묻는다. “혹시 그 쪽도 해봤냐? 환자를 포기하고, 버리고, 환자의 숨통을 멈췄냐? 살릴 수 있는 환자였냐? 치료할 수 있는 환자였냐? 대답해! 살릴 수 있는 환자였냐?” 결국 강시영은 “아니다. 살릴 수 없었다. 살릴 수가 없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 장면은 향후 <의사요한>이 어떤 특별한 지점의 이야기를 다룰 것인가를 잘 드러낸다. 즉 살릴 수 없는 환자를 그 고통 속에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들 쉽게 안락사를 ‘살인’과 다를 바 없다고 치부하지만, 고통을 줄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통증의학과 전문의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통증을 없애주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고통을 멈추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의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의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차요한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가진 논쟁적 부분들을 끄집어낸다. 과연 이런 생각을 가진 차요한은 복귀한 병원의 다른 의사들과 얼마나 큰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지금까지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주로 환자를 살리는 일에만 집중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사요한>은 정반대로 환자의 ‘존엄’을 위해 그 고통을 없애주는 의사의 또 다른 고민의 지점을 다룬다. 과연 우리는 이 차요한이라는 의사의 선택에서 안락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공감할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부분이다.(사진:SBS)

‘아는 와이프’, 불편한 판타지와 공감 가는 현실

“티격태격, 아웅다웅, 미운 정 고운 정 쌓아가면서 같이 나아갈 것.” “우리만의 전우애도 싹틀 것.”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아는 와이프>는 결국 불편한 판타지를 돌고 돌아 공감 가는 현실 속에서의 대안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삶의 현실이 제아무리 부부를 지치게 만들어도 서로가 지지해주고 다독이는 것으로 하나하나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회에서 특히 주목됐던 건 ‘육아문제’였다. 맞벌이를 하는 우진(한지민)과 주혁(지성)은 두 아이의 부모로서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이 외치듯 “전쟁‘을 치르며 살아갔다. 이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은 <아는 와이프>의 시작 부분에서 그려졌던 풍경이다. 하지만 같은 전쟁이라도 그 전쟁을 대하는 이 부부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 때는 홀로 ’독박육아‘를 하는 우진과 현실에 치인 주혁이 서로 너무 힘들어 자신의 힘든 것들만을 들여다보며 상대방에게 비수가 되는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줬다면, 이제는 함께 하는 육아로 그 전쟁을 현명하게 이겨나갔다. 

첫 회의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 상황은 물론 그 입장은 정반대가 되었지만 마지막 회에도 똑같이 벌어졌다. 교육과 시험을 봐야하는 주혁에게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오고, 마침 아이를 픽업해야할 우진이 은행에서 쓰러진 고객을 응급실까지 데려다주느라 가지 못하게 되자, 교육장을 벗어나 어린이집으로 달려가는 주혁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론 주혁은 우진과 마치 <미션 임파서블>의 ‘불가능한 도전’을 해나가듯 함께 공조(?)해 아이도 챙기고 간신히 시험장에도 도착할 수 있었다. ‘독박육아’가 ‘전우애’로 바뀌는 변화를 드라마는 보여줬다.

사실 <아는 와이프>가 하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너무 상식적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현실이 힘들어도 부부가 함께 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말과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는 와이프>는 그래서 과거를 돌려 현재를 바꿔본다는 가상의 설정을 통해 그렇게 막연한 판타지로 바꿔놓은 현실이 얼마나 불편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또 나아가 그 힘든 현실들 속에서 상대방을 잘 들여다보지 못했던 일들을 반성하게 만든다. 

드라마가 초반에 그토록 많은 시청자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던 건, 주혁의 철없는 선택이 불러온 불편한 현실들 때문이었다. 첫사랑에 성공해 이혜원(강한나)과 살게 되지만 그것이 막연히 생각되던 판타지였을 뿐,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는 걸 주혁은 깨닫는다. 그러면서 우진을 점점 다시 바라보게 되고 자신이 못해줬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달라진 현실 속에서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시청자들의 저항감이 워낙 커서 드라마는 개연성 부분에 많은 흠집을 남기면서까지 이를 되돌리려 안간힘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주혁이 사실은 우진과 부부사이였다는 걸 고백하고, 우진이 그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여러모로 개연성이 부족했고, 두 사람이 함께 과거로 되돌아가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새로이 다시 만나는 과정도 그럴 듯하게 그려지지는 못했다. 또 이 가상의 설정을 되돌림으로써 거기 등장했던 이혜원이나 윤종후(장승조)가 들러리가 되는 부분도 남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여곡절을 통해 다시 돌아온 곳이 바로 그 드라마 초반과 똑같은 현실이라는 건 곱씹어볼만한 부분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막연한 판타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겪는 치열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전우애’처럼 피어나는 것이라는 걸 드라마는 먼 길을 돌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다소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꽉 채워준 건 연기자들이었다. 철부지 같은 선택을 함으로써 비난받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차츰 참회하며 돌아옴으로써 그 매력을 잃지 않게 했던 주혁을 연기한 지성이나, 1인3역 정도는 한 것처럼 이 드라마에 기분 좋은 생기를 불어넣은 우진 역할의 한지민은 물론이고, 들러리가 될 위치에서도 친구로서의 따뜻한 우정을 공감하게 해준 윤종후 역할의 장승조나, 판타지 설정의 부족한 개연성마저 메워주는 따뜻함을 보여준 우진 어머니 역할의 이정은, 그리고 은행식구들과 주혁의 친구들 역할을 한 배우들까지 연기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단단한 매력들이 뭉쳐져 <아는 와이프>는 초반의 불편한 설정들이 만들어낸 위험요소들을 상당부분 걷어내며 끝까지 시청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주목되는 건 시종일관 7%대(닐슨 코리아)를 유지함으로써 tvN의 수목드라마 시간대가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나름 성과도 적지 않은 <아는 와이프>였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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