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변환이 중요한 리메이크, <내일도 칸타빌레>?

 

<노다메 칸타빌레>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KBS <내일도 칸타빌레>는 무거운 족쇄다. 리메이크의 효용가치는 결국 이미 성공한 원작의 힘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무언가 기발한 소재였거나, 아니면 아이디어가 좋거나, 구성이 탄탄하고 또 캐릭터가 톡톡 튄다든가 하는 점들이 일단 매력적이라면 리메이크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내일도 칸타빌레(사진출처:KBS)'

하지만 리메이크의 한계는 또한 바로 그 원작에서 나온다. 이미 원작이 너무 많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어 새로 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내일도 칸타빌레>가 딱 그렇다. 일드 마니아가 아니라도 이미 <노다메 칸타빌레>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드 열풍의 최전선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고, 심지어 국내에는 방영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비평까지 나왔던 작품이 바로 <노다메 칸타빌레>.

 

성공작을 가져오는 것이 리메이크의 관건이지만, 그 성공작이 세대나 혹은 국가적 장벽에 의해 상대적으로 대중들에게 덜 알려져 있어야 성공 가능성이 높은 리메이크작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지금껏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진 리메이크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성공적인 리메이크작인 <하얀거탑>이나 <직장의 신> 같은 작품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작품은 아니었다.

 

여기에 리메이크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것이 우리 식의 정서를 어떻게 집어넣는가 하는 점이다. 제 아무리 해외에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그 정서가 우리와 맞지 않으면 실패하는 사례를 우리는 자주 목격해왔다. <수상한 가정부><여왕의 교실> 같은 작품은 그 이질적인 정서 때문에 우리네 대중들에게는 낯선 드라마로 남았다. 반면 <하얀거탑>이나 <직장의 신>은 우리 식의 서열문화나 비정규직 문제 등을 건드림으로써 마치 리메이크가 아닌 우리네 드라마인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렇다면 <내일도 칸타빌레>는 어떨까.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 속에서 우리 식의 정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 만화적인 설정과 연출 그리고 연기는 그래서 이 리메이크의 핵심적인 재미지만, 오히려 너무 과장된 느낌으로 전달될 수 있다. 원작인 일드 <노다메 칸타빌레> 역시 만화적인 캐릭터와 연출, 연기를 가진 작품이지만 이것을 우리네 시청자들도 즐길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일드라는 걸 이미 수긍하고 드라마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도 칸타빌레>를 대하는 시청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그것은 리메이크라고 해도 주원과 심은경 주연의 우리드라마다. 일본 드라마의 흉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우리가 굳이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하는 이유나 근거가 들어가야 한다. 왜 그 리메이크를 우리의 대중들이 봐야 하는가에 대한 수긍할만한 답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은경의 연기가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연기력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또 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와의 비교도 아니다. 그것은 심은경이 연기하는 설내일이라는 캐릭터가 지금 우리네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만일 그 캐릭터의 과장이 어떤 의미를 준다면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하나의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떨까. 심은경에게 <내일도 칸타빌레>가 힘겨운 도전이 되는 것은 이 캐릭터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가 잘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연출의 문제이고 기획의 문제다.

 

김혜수, 고현정에 이어 최지우까지, 일드 캐릭터는 무표정?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이 몇 줄의 대사는 이 수상한 드라마의 가정부 박복녀(최지우)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최소한 <수상한 가정부> 첫 회에 그녀가 남긴 인상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라는 것이다. 이제 겨우 7살인 유치원생 은혜결(강지우)이 죽은 엄마의 49제가 뭐냐고 묻자 박복녀가 “사람이 죽고 49일이 지나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잊고 살기 위해 만든 날”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스타워즈>에서 루크를 따라다니는 알투디투를 연상케 할 정도다.

 

'최지우,고현정,김혜수(사진출처:SBS,MBC,KBS)'

이처럼 예의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답을 말하고 심지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명령에 복종하는 수상한 가정부라는 설정은 흥미롭다. 그것은 뭐든 다 공유할 것 같은 한 가족 내에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숨겨진 속내와 갈등들을 이 로봇 같은 수상한 가정부라는 캐릭터로 모두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마치 잠잠한 시험관 속 액체 같은 은상철(이성재)네 가족 속으로 촉매제 같은 박복녀가 들어가 일대 화학작용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

 

이 설정만 두고 봐도 드라마의 원작인 일본 드라마 <가정부 미타>가 왜 그토록 일본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일본의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향(심지어 가족 내에서도)이 만들어내는 사회 전체의 억압 같은 것을 로봇 같은 가정부 미타가 마구 헤집어내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드러내지 않아 오히려 더 곪아갈 수 있는 가족의 환부를 드라마라는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수상한 가정부>의 박복녀처럼 올해 초부터 계속 되고 있는 일드 리메이크들 속 캐릭터들이 비슷비슷하다는 점이다.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은 자발적 비정규직으로 직장 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정규직들이 속으로 마음을 숨기는 것과 달리 뭐든 문제를 드러내놓고 부딪치는 캐릭터다. 이 무표정한 얼굴로 퇴근 시간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근해버리는 로봇 직장인(?)은 그래서 직장에 투입된 촉매제 캐릭터인 셈이다.

 

<여왕의 교실>의 마여진(고현정)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마치 마녀 같은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무표정으로 이제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꿈 따위를 얘기하기보다는 살벌한 현실을 또박또박 보여주는 수상한 선생 캐릭터. 마여진이라는 로봇 선생님은 그래서 아이라는 막연한 대상 때문에 허위의식에 빠지기도 하는 교육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물론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나, <여왕의 교실>의 마여진 캐릭터 모두 전반부의 한없이 스산한 무표정 로봇 캐릭터에서 후반부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로 변해간다. 그녀들이 로봇처럼 무표정해진 데는 자신들만의 상처가 있어서이고, 그 상처가 주변 인물들과의 접촉으로 치유되면서 비로소 그녀들의 표정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수상한 가정부>에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직장의 신>과 <여왕의 교실> 그리고 <수상한 가정부>는 한 세트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다만 직장과 학교와 가정이라는 상황만 달라졌을 뿐, 그 캐릭터나 전개 양상이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 드라마들의 원작이 가진 성공에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정서적 배경이 깔려 있다. 일본은 지금 사회적으로 조장되어 있는 집단의식 속에 억압된 개인적인 감정이나 속내들이 드라마라는 틀로서 표출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와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직장 문화나 교육 문화 그리고 가족 문화가 가진 경직성은 일본이나 우리나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혹자들은 일제의 잔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 그 경직된 문화를 사정없이 발로 차버리는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 그토록 통쾌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비슷하다고 해도 우리에게 특히 억압의 정도는 직장과 학교와 가정이 다르다. 아마도 가장 현실적으로 억압의 강도를 느끼는 것은 직장일 게다. 따라서 <직장의 신>이 나왔을 때 그것은 마치 우리 드라마 원작처럼 여겨질 정도의 반응이 생겼었다. 심지어 갑을정서까지 일어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학교 역시 억압의 강도가 높은 건 사실이다. <여왕의 교실>이 보여준 것처럼 초등학교부터 생기는 치열한 경쟁과 왕따나 폭력 사건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일이니까.

 

그렇다면 가정은 어떨까. 우리네 가정은 <수상한 가정부>가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의 속내를 숨기며 평탄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곪아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첫 회는 분명 이 은상철네 가족의 면면이 조금은 낯설게 다가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처음 드러나기 때문에 낯선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도 모르게 우리 가족 내에 무언가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수상한 드라마는 일종의 우리네 가족의 실상을 실험하는 리트머스지가 되었다. <직장의 신>의 김혜수,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에 이어 <수상한 가정부> 최지우가 얼마나 시청자들의 반향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그래서 우리네 가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말해주는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상함과 낯설음이 익숙함이 되어간다면 그 때 우리 가정의 또 다른 이면을 보게 될 지도.

무엇이 그녀들을 나쁜 언니로 만들었을까

 

이효리는 신곡 ‘배드걸’에서 “욕심이 남보다 좀 많은 여자. 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은 여자.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 있는”, 이른바 나쁜 여자가 ‘영화 속 천사 같은 여주인공’보다, ‘TV속 청순가련 여주인공’보다 더 끌린다고 노래했다. 그녀가 말하는 ‘배드걸’은 “독설을 날려도 빛이 나는 여자. 알면서 모른척하지 않는 여자.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 그런 여자다.

 

이효리와 김혜수(사진출처:MBC,KBS)

나쁜 여자라고 수식어를 달았지만 사실 여기서 나쁘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즉 흔히 사회적 통념이 요구하는, “화장은 치열하게 머리는 확실하게 허리는 조금 더 졸라매야” 하고 또 “표정은 알뜰하게 말투는 쫀득하게 행동은 조금 더 신경 써야” 하는 그런 여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나쁘다’는 표현일 뿐이다. 즉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이런 통념에 빠뜨리는 사회가 나쁘다는 뜻일 게다.

 

공교롭게도 씨엘이 솔로곡으로 발표한 신곡 ‘나쁜 기집애’에서도 나쁜 여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등장한다. 스스로를 ‘나쁜 기집애’라고 부르면서도 “당당한 지조, 고귀한 품위, 눈 웃음은 기본, 내 눈물은 무기”인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를 숨기지 않는다. 흥미로운 가사는 “남자들은 허니라” 부르고 “여자들은 언니라” 부른다는 대목이다. 걸그룹으로서는 특별하게 여성 팬층이 많은 2NE1에게 ‘언니’라는 지칭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른바 ‘나쁜 언니 전성시대’다. 이효리와 씨엘이 남성들은 물론이고 여성들에게도 어필하는 부분은 ‘멋있다’는 평판 덕분이다. 즉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여성이 아니라, 이들은 독립적인 여성 자신으로서의 매력을 주장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은 자연스럽게 기성 사회와의 긴장관계를 만들어낸다.

 

김혜수가 <직장의 신>에서 호평 받은 것은 그 캐릭터가 가진 이른바 ‘나쁜 언니 포스’ 덕분이다. 김혜수가 연기하는 미스 김이라는 캐릭터는 장규직(오지호)이라는 정규직 우월주의자와 부딪치면서 동시에 약자로 그려지는 정주리(정유미)를 보호하는 ‘언니’로 등장한다. 직장이라는 조직 속에서 미스 김이 취하는 과감한 행보들은 기존 통념들을 뒤집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를 보는 시청자들이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특히 여성들에게 미스 김은 호감 가는 포스 강한 ‘나쁜 언니’로서 자리 잡는다.

 

청순가련형 혹은 공주 스타일의 착한 여성캐릭터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는 과거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다. 대신 악녀나 독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주목도가 훨씬 높아졌다. <백년의 유산>에서 막장 시어머니에 대립하는 막장 며느리 역할로 주목을 받았던 심이영이나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대비의 갖은 악행에 맞서 악녀로 변신하는 장옥정 역할의 김태희가 새삼 주목받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독한 세상에 맞서는 독한 언니들에 대한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결국 나쁜 언니 전성시대는 편견과 통념, 심지어 금기로 꽉 막혀 있는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답답증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급기야 이효리가 ‘배드걸’에서 말하듯, ‘착하게 살아봤자 남는 거 하나도 없는’ 현실에 대해 ‘이젠 못 참겠다’고 나선다. 최근 트렌드처럼 쏟아져 나오는 ‘나쁜 언니들’ 속에는 그래서 그들을 나쁘게 만든 나쁜 세상이 어른거린다.

을의 반란, 더 이상 <직장의 신> 같은 판타지 아닌 이유

 

“혼자서는 못가. 시계가 어떻게 혼자서 가. 다 같이 가야 나 같은 고물도 돌아가는 거야. 그런데 김양은 맨날 혼자서 큰 바늘, 작은 바늘 다 돌리면 너무 외롭잖아. 내 시계는 멈출 날이 많아도 김양 시계는 가야 될 날이 더 많은데...” <직장의 신>의 만년 과장 고정도(김기천)의 이 대사는 늘 로봇 얼굴의 무표정했던 미스 김(김혜수)은 물론이고, 무수한 직장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거기에 권고사직, 정리해고로 점철된 우리네 파리 목숨 직장인들의 자화상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사진출처:KBS)

오죽하면 직장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로지 업무로만 무장하려는 미스 김 같은 캐릭터가 각광을 받겠는가.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한 그녀의 말대로 작금의 직장인들은 심지어 “회사의 노예”로 취급되는 을 중의 을이 아니던가. 그러니 <직장의 신> 같은 드라마에 대한 열광과 미스 김 신드롬에는 우리네 아픈 현실이 묻어난다.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백만 시대에 이제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된” 아픈 현실.

 

하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을의 반란’을 보면 이제 이런 현실을 그저 한탄하거나 감내하면서 잠시나마 드라마 같은 판타지로 아픈 속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른바 라면 상무와 빵 회장에 이어 이른바 조폭 우유(?) 사태까지. 그간 이른바 갑에게 짓눌려 왔던 을의 정서는 최근 인터넷과 SNS를 통해 폭발하는 인상이다. 이러한 정서의 폭발이 드라마 같은 대리충족 콘텐츠 안에서 소극적으로 벌어졌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실제 현실을 바꾸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 때 인터넷을 달궜던 ‘대나무 숲’ 열풍은 그래서 어쩌면 지금 같은 ‘을의 반란’의 전초전 같은 징후였을 지도 모른다. 이 누군지 이름을 숨긴 채 ‘대나무 숲’에 들어와 회사의 비리나 고충을 한껏 소리 지르고, 그 소리가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전파되는 그 소극적인 쾌감을 만끽했던 이 땅의 수많은 을들은 이제 현실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과 SNS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집결된 여론들은 이제 말에 머물지 않고 어떤 실행력을 갖추기 시작한 셈이다. 이제 공감하거나 공분할 수 있는 대중정서가 밑바탕 된다면 인터넷 여론은 그간 갑으로 군림하던 이들까지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항공기 승무원에게 폭언에 폭행을 한 상무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쓰게 되었고 호텔 종업원에게 장지갑으로 뺨을 때린 한 중소기업 회장은 결국 자신이 납품하던 코레일에 빵 납품을 못하게 되었다. 이 회장은 심지어 회사를 폐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터진 이른바 조폭 우유 사건은 회사 대표의 공식사과문이 발표됐고 현재 제품 강매가 있었는지에 대해 검찰이 조사 중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에서의 갑을관계는 이미 일상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 갑을관계를 다루는 풍자는 코미디의 단골소재가 되어오기도 했다. 일찍이 80년대 정치풍자 코미디의 대가였던 고 김형곤 개그맨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를 통해 회장님 말이 곧 법인 회사의 갑을관계를 풍자한 바 있다. “딸랑 딸랑”으로 대변되는 김학래의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라는 유행어는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한 모양이다. 최근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였던 ‘갑을컴퍼니’의 직장 내 풍경 역시 그다지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겉보기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으로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이른바 ‘대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갑을 관계를 깨는 진짜 힘은 ‘을’로 대변되는 대중들이 소비자의 위치를 넘어서 같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목소리를 점점 내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상품만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상품이 갖고 있는 기업이미지는 구매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며 군림해왔던 이들은 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갑이 누군가를 다시 바라봐야 할 시점이다. <직장의 신>에서 미스 김이나 고 과장 혹은 <무한도전> 무한상사의 정 과장 같은 존재를 만들어낸 시스템이 상정하고 있는 갑을관계는 이제 조금씩 역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중의 시대에 슈퍼 갑은 대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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