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 이종석의 말, 윤균상의 칼

 

자신의 실제 이름을 숨긴 채 기자가 되어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과 거짓보도를 한 기자들을 밝히려는 최달포(이종석). 그리고 거짓말을 한 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그의 형 기재명(윤균상). 이 두 사람의 교차편집으로 이뤄진 <피노키오> 5회의 마지막 몇 분은 팽팽함과 절절함이 극에 달한 시간들이었다.

 

'피노키오(사진출처:SBS)'

거짓말로 자신의 가족을 파탄 낸 세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 한 사람은 펜()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칼을 들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기자라는 존재는 최달포에게는 결국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반드시 되어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한편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알게 된 그의 형 기재명에게 남은 건 복수뿐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헤어진 형제라는 사실은 이들의 또 다른 비극을 예고한다. 최달포가 사회부 기자라는 점은 그가 앞으로 기자가 되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범죄자가 된 자신의 형을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예상케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세상에 칼을 꺼내든 형 앞에서 과연 최달포는 진실의 말만을 전할 수 있을까.

 

<피노키오>가 세상에 문제의식을 던지는 방식은 이처럼 새롭다. 이 드라마는 한 가족의 비극을 처절하게 바닥까지 보여줌으로써 왜 누군가의 거짓말이, 또 그것을 받아 제 멋대로 과장한 언론의 거짓말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드러낸다. 억울하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형마저 복수의 삶을 살아가게 된데다 자신은 신분조차 숨기며 살아야 하는 최달포라는 주인공은 아마도 최근 드라마 속 주인공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다.

 

<피노키오>는 현실의 비극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신문 사회면 사건을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로 단순히 구분되어 보이지만 <피노키오>는 그 겉으로 보이는 면이 아닌 그들이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 이면에 숨겨진 진짜 부조리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파헤친다.

 

이것은 박혜련-조수원 콤비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세계이기도 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역시 사건 이면의 이야기를 듣는 주인공을 통해 비극의 진짜 실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던가. <피노키오>는 그래서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피노키오>의 기저에 깔린 감정이 분노라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왜 이들은 이렇게 분노하는가. 그들이 분노하는 그 이유를 찾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잘못 흘러가는 시스템의 현실과 마주한다. 그 현실은 MSC의 송차옥(진경) 같은 인물로 드러나기도 하고, 이 가족을 한 순간에 파탄으로 몰고 간 거짓말을 한 화재현장의 작업반장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분노라는 감정은 어쩌면 지금 현재 대중들이 세상에 막연히 품고 있는 어떤 정서일지도 모른다. 왜 그저 열심히 살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런 지독한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게 되었던가.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것처럼 <피노키오>는 우리 앞에 그 감춰진 부조리의 얼굴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던져지는 질문. 과연 이 시대의 말과 칼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말과 칼은 정의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정의는 진실을 통해 실현되고 있을까. 이 드라마가 그토록 절절하게 우리의 마음에 닿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난무하는 말과 칼이 거꾸로 아무 죄도 없는 서민들을 향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말과 칼은 다시 제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피노키오>의 복수극이 그 어느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해지는 대목이다.

 

MC몽의 음원차트 장악, 정작 그의 목소리는 왜 안들릴까

 

MC몽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음악 외적인 것으로만 반복되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군 기피 의혹 문제가 계속 거론되었고, 앨범에 대한 이야기도 그 타이틀인 미스 미 오어 디스 미(Miss me or Diss me)’가 가진 도발에 집중되었다. 그 와중에 실종된 것은 정작 그가 낸 음악에 대한 평가다. 이번 앨범은 과연 성공적인 것일까. 아니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MC몽의 성과일까.

 

'MC몽(사진출처:웰메이드예당)'

거의 노이즈 마케팅에 가까운 행보들에 가려져, 그의 이번 앨범에 대한 음악적 성과는 차트 장악이 마치 모든 걸 설명해준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적인 성과인지 아니면 노이즈 마케팅에 의해 생겨난 주목 덕분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의 노래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평가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준에서 그런지는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거의 5년 간을 칩거하며 지냈다고 하지만 그의 이번 앨범은 5년 전과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곡들이 도입부에 MC몽의 랩이 들어가고 메인에 이르러 피처링으로 곡의 멜로디 라인을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사실 동시에 전곡이 발표되어서인지 그 곡이 그 곡 같은 느낌마저 준다. ‘미스 미 오어 디스 미라는 도발적인 제목은 좀 더 강렬한 힙합을 기대케 하지만 정작 곡은 자기 복제에 가깝다. 항간에는 그의 곡은 힙합이 아니라 힙합을 가장한 랩 발라드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 그것은 곡에 대한 집중도가 MC몽의 랩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피처링에서 생겨나고 있는 건인지 하는 점이다. 가사에 담긴 MC몽 자신의 처지가 귀에 먼저 들어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랩이 대단히 세련됐다거나 무언가 새롭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최근 들어 <쇼 미더 머니> 같은 힙합 오디션을 통해 세상에 나온 뮤지션들 때문인지 대중들의 힙합을 듣는 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바비 같은 천재적인 힙합 뮤지션의 노래를 듣다보면 노래는 역시 귀에만 꽂히는 게 아니라 가슴에 꽂힌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최근 육군 현역에 입대한 스윙스의 세련된 곡들을 들어보라. MC몽의 랩은 거기에 비하면 너무 안이하게 다가온다.

 

MC몽의 최고점은 여전히 과거 찬바람 불 때 내게 와줄래-”로 시작했던 서커스에 멈춰져 있다. 이번 앨범을 통해 5년 간 음악적인 성과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적 성취가 잘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음원 차트 장악 같은 현상은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음악적인 성취라기보다는 프로듀싱의 성취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싶다. 곡을 구성하고 배열하는 능력이나 적절한 지점에 적절한 멜로디 라인을 넣는 능력은 여전하다.

 

이것은 어쩌면 MC몽의 성과라기보다는 이단옆차기의 성과라고 보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또한 랩 파트가 가진 지루함을 상쇄시킨 다양한 피처링의 효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리웠니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진실이나, ‘마음 단단히 먹어에서 절정의 가창력을 보여주는 에일리, ‘도망가자의 린 같은 피처링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에 착착 감기는 힘을 발휘한다.

 

사실 MC몽의 일련의 곡 자체가 피처링에 의지하고 있다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같은 랩 파트라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대중들의 듣는 귀는 확실히 높아졌다. 기왕에 논란을 떠안고 굳이 가수로서 MC몽이 나서려 했다면 먼저 음악적인 면들을 진일보 시킬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MC몽은 이번 앨범을 발표하면서 노래 이외에 아무런 대중들과의 소통채널을 갖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직 노래를 통한 소통을 하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소통이 제대로 음악적으로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비교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근 발표된 에픽하이의 곡들을 들어보라. 그들이야말로 노래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비하면 MC몽의 곡은 진정성있는 소통보다는 상업성이 더 느껴진다. 노래는 들리지만 MC몽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건 실로 아쉬운 대목이다.

 

미화도 폄하도 없는 <오만과 편견>의 검찰

 

MBC <오만과 편견>이 다루고 있는 건 검찰이다. 흔히들 떡검같은 표현으로 얘기되듯 검찰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정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그곳은 왠지 권력형 비리가 연루된 것처럼 보이고, 때론 정치가 정의를 덮어버리는 곳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대중들의 이런 생각이 그리 틀린 것만도 아니다. 검찰은 대중들에게는 오만과 편견이 뭉뚱그려진 어떤 집단처럼 다가온다.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검사를 다루는 드라마가 많이 나오지 않고(변호사는 많다), 나온다고 해도 그리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건 그래서다. 자칫 검사들을 감싸주고 비호하는 이야기가 나왔다가는 시청자들의 비난만 사기 쉽다. 그렇다고 검사를 주인공으로 세워놓고 폄하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어렵다. 인간적인 매력이 없는 주인공을 세워서 드라마를 끌고 가겠다는 건 모험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 점은 <오만과 편견>의 놀라운 점이다. 이 드라마는 검사를 세워놓고 미화도 폄하도 하지 않고 있다.

 

검찰이라는 존재가 늘 정치와 권력에 휘둘리는 모습으로 굳어져 있어서인지 지금 세상의 꼴은 한 마디로 형편없다. 비리가 판을 치고 정의는 돈 앞에 무릎 꿇기 일쑤다. 이런 비리들은 무수한 사건사고를 만들어낸다. 정의 없는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니 생기는 사회의 증상들이다. 이 정의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은 너무나 크지만 그걸 해결해주리라 기대하는 건 검찰이 아니다. 그래서 나쁜 놈들 잡는 나쁜 놈들이 오히려 더 대중들의 마음에 다가온다. 많은 우리네 영화, 드라마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건 어딘지 삐딱하게 되어버린 서민들이다.

 

<오만과 편견>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인천지검 중수부장 검사 문희만(최민수)이다. 그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우리가 검찰하면 떠올리는 그 이미지와 그걸 배반하는 이미지 양면을 동시에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결코 바른 검사는 아니다. 상부에서 덮으라면 사건을 덮는 검사고 무엇보다 자신의 실적과 안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검사다. 덮으라는 사건을 구동치 수석검사(최진혁)가 계속 수사하겠다고 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막아도 구동치가 계속 수사를 할 것을 알고 있다. 내심은 자신도 수사를 원하지만 자신은 만일 잘못됐을 때의 책임에서조차 한 발을 빼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문희만은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나쁜 놈들을 잡으려는 마음이 깊지만, 오랜 검사 생활을 통해 검찰이라는 조직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다. 그 바위에 무모하게 계란을 던져봐야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상처만 입는다는 것을. 그래서 문희만은 보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 외부에 패를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수습검사 한열무(백진희)에게 말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구동치와 한열무 역시 그 위치에서 검사로서의 모습을 개연성 있게 그려낸다. 한열무는 수습이기 때문에 순수한 열정이 가장 큰 무기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으로 사건을 그르치기도 한다. 또 구동치나 문희만이 하는 일종의 페이크를 실제로 알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 구동치는 한열무와 문희만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그는 문희만이 알고 있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고 동시에 한열무 때 자신도 가졌을 그 순수한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고 있다. 즉 이들 역시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들은 또한 검찰 내부 시스템과도 갈등을 일으킨다.

 

문희만이라는 인물이 중요해지는 건 범인을 알고 있어도 수사를 더 펼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는 이 검찰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면서 동시에 사건을 해결해나가는가의 키를 그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검찰을 다루는 꽤 괜찮은 방식이다. 일방적인 미화도 폄하도 아닌 한 직업인으로서의 고민들이 거기에는 묻어난다.

 

무엇보다 문희만이라는 역할을 최민수라는 베테랑 연기자가 맡게 됐다는 건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민수는 문희만이라는 인물을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로 세워놓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은 이 드라마에서 검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문희만의 감춰진 속내는, 진실과 정의를 원할 수도 있고, 사실은 현실을 원할 수도 있다. 그 우물대는 대사 속에는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한 직업인의 여러 면들이 유추된다.

 

<오만과 편견>은 그래서 검찰과 범죄를 그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와는 걸맞지 않아 보이는 제목처럼 우리가 흔히 무언가를 바라볼 때 단순화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만과 편견을 다루는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사가 어디 그렇게 간단한가. 물론 자칫 잘못하면 검찰을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기 딱 좋은 이 드라마가, 그래도 괜찮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 건 미화나 폄하 같은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서 무게를 딱 잡아주고 있는 인물이 바로 최민수다. 실로 그가 있어 <오만과 편견>으로서는 천만 다행이다.

 

<비밀의 문>이 현실에 던지는 날선 문제의식

 

어떤 진실 말인가. 아비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아들에게 살인을 청부했다. 헌데 쓸모없어지니 버리려 한다. 국청에서 보여준 아비노릇은 가증스러운 연희에 불과했다. 이런 진실을 말인가?” 김택(김창완)의 숨겨진 아들 김무(곽희성)는 세자 이선(이제훈)의 추궁에 이렇게 답한다. 결국 김무는 아비인 김택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하지만 안다고 해도 자신 같은 놈을 아들이라 당당히 말해준아비의 추억이라도 갖고 죽겠다는 것이다.

 

'비밀의 문(사진출처:SBS)'

이 장면은 SBS <비밀의 문>이 다루고 있는 영조(한석규)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의 복선이자 데자뷰인 셈이다.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아들을 이용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이 김택과 김무의 이야기는 앞으로 펼쳐질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선은 김택이 적어도 아들의 진심조차 계산에 넣은 것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김택은 잔인하게도 이런 바람마저 깨버린다. “천한 것들은 원래 잔정에 약하다는 말로.

 

<비밀의 문>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과거 이야기를 빌어, 현 대중들이 갖고 있는 진실에 대한 갈증을 다루고 있다는 건 이미 드라마 초반부터 드러난 바 있다. 이선이 점점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버지 영조와 노론이 결탁한 사실에 근접하게 되고, 영조는 이것이 밝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끝없이 노론의 수장인 김택과 거래를 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세계가 부딪친다. 하나는 정치꾼들처럼 권력을 유지하고 쟁취하기 위해 끝없이 거래하는 어른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순진하지만 오로지 백성을 위해 또 진실을 밝히기 위해 눈빛을 반짝이는 아이의 세계다. 어른들이 아비의 세계라면 아이는 아들의 세계다. 이것은 심지어 소론이면서 이선을 남모르게 도우려는 박문수(이원종)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이의 그 순수함을 지켜내고 싶지만 어른들의 세계가 가진 거래의 무서움을 알고 있다.

 

<비밀의 문>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이야기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껏 알던 것과는 달리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이야기가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게다가 여기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권력을 쥐기 위해 아들에게 살인을 청부하거나(김택), 아들을 살인용의자로 지목해 의금부 감옥에 가두는(영조) 인물들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아들을 죽게 만들고 그 아버지와의 정이라는 진심마저도 이용하는 인물들이다.

 

조선시대의 궁이라는 역사적 시공간을 떼어놓고 보면 이 사극은 살벌한 가족극에 가깝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하고 며느리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남편을 구하기 위해 네 살 박이 아들을 무릎 꿇여 시아버지 앞에서 시위를 한다. 장인은 진실을 밝히려는 사위와 뜻을 함께 하기보다는 정치적인 이득을 놓고 모든 사건을 덮는데 앞장선다. 실로 비정한 가족(?)이 아닌가. 그리고 그 끝은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비밀의 문>은 굳이 조선시대의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까지 끌고 와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도 역사적 기록과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나라라는 표현은 살벌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우리네 현실 그대로다. 아버지를 어른으로, 아들을 아이로, 또 아버지를 기득권층으로 아들을 서민들로, 또 아버지를 기성세대로 아들을 청춘들로 바꿔 바라보면 그 몇 백 년의 세월을 훌쩍 넘은 현재까지 또다시 재연되고 있는 비극을 실감할 수 있다.

 

각종 사건 사고 속에서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한창 피어날 청춘들이 경제적 볼모가 되어 잉여의 세상에 버려지는 곳. 어버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정마저 정치적 쇼로 활용되는 나라, 그 곳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야합과 결탁의 결과로 정통성의 부족 때문에 생겨난 이 비극은 우리의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고 있는 아픔의 정체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로 대변되는 세대 간의 대립은 그래서 더 아프다.

 

모진 아비 만나 고생이구만.” 아비 때문에 죽음을 앞둔 김무가 이선에게 체념한 듯 던지는 이 말은 그래서 비수처럼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아비와 아들, 어미와 자식들, 형제와 자매 그리고 친구. 삶은 그들로 인해 따뜻하지만 때론 모순된다.” 김무의 체념을 보고 발길을 돌리며 이선이 던지는 나직한 이 말 속에는 지금의 청춘들이 어른들에게 갖고 있는 양가적이고 모순된 마음이 아프게도 드러난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나라라니. <비밀의 문>이 던지는 날선 문제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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