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물은 상극이다. 쇠의 상극은 나무다. 그러니까 불타는 칼의 상극은 물에 젖은 나무다. 물은 불을 이기고 젖은 나무는 쇠보다 질기다.”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는 풍수사 상덕(최민식)이 ‘험한 것’과 마주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그런 말을 한다. 풍수사답게 음양오행의 불, 물, 쇠, 나무에 대한 해석으로 흙에서 튀어나온 험한 것과 대적하는 모습이다.
상덕이 말하듯 음양오행에서는 이들 요소들의 관계를 상극과 상생으로 표현한다. 즉 물은 나무를 키워주고 나무는 불의 연료가 되며 불은 흙을 만들고 흙에서 쇠가 만들어지며 쇠는 물을 담을 수 있게 한다. 즉 상생 관계다. 반면 물은 불을 꺼주고 불은 쇠를 녹이며 쇠는 나무를 베어버리고 나무는 흙의 양분을 가져가며 흙은 물을 빨아들이는 상극 관계다. 오행의 관계로 부면 쇠는 나무를 베어버리고 약화시키는 관계지만, 상덕은 이 나무에 물이라는 상생 요소를 더함으로써 ‘쇠보다 질긴’ 젖은 나무를 탄생시킨다. 두 요소의 상생이 상극을 이기는 것.
물론 여기서 ‘불타는 칼’과 ‘젖은 나무’는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와 우리나라를 상징한다. 장재현 감독은 “충격을 많이 받아도 참고야 말지 부러지지 않는 나무의 성향이 우리나라와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나무 중에서도 물(피)에 젖은 나무가 더 질기다는 말은 그래서 이러한 질긴 역사를 온전히 담고 있는 우리 땅의 민초(民草)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다. 반도 국가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외세의 침략이 끝이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무수한 불타는 칼들이 그 땅을 불타게 하고 피를 흘리게 했지만 그럴수록 더 질겨졌던 민초들의 저력이 있어 저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음양오행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관계를 통해 상극보다 상생이 힘이 세다는 걸 알고 있다. 제아무리 강한 이들이 함께 한다고 해도 그것이 상생이 아니라 상극일 때는 오히려 힘이 약해진다. 반대로 약하게 보여도 상생의 관계라면 더 강한 것도 이겨낸다. 이는 대결과 타협이 그 성질인 정치권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대목이다. 의료계와의 갈등이나 훌쩍 다가온 4.10 총선의 향방 또한 이 상생과 상극에서 판가름 날 수 있을 테니. (글:동아일보, 사진:영화'파묘')
“땅이야 땅. 우리 손주들이 밟고 살아가야 할 땅이라고!”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서 김상덕(최민식)은 그렇게 말한다. 9백만 관객을 넘기고(20일 현재) 1천만 관객 돌파가 거의 기정사실이 된 이 영화는, 상덕의 이 말에 담긴 뉘앙스처럼 공포 가득한 오컬트 영화에서 무언가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영화로의 확장을 꾀했다.
묘를 파낸다는 ‘파묘’의 의미는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집안에 생긴 우환의 원인으로 묫자리를 잘못 썼기 때문에 이를 파내서 이장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관객들 입장에서 보면 그저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묘를 파낸다는 그 상황이 주는 공포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사적인 차원에서 우환을 없애기 위한 파묘일 때 생기는 공포감이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 사적인 차원의 파묘는 보다 공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범의 형상을 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혈자리에 쇠말뚝을 꽂았다는 음모론을 상상력으로 확장한 이 작품은 바로 파묘를 하려는 이들에게 그 쇠말뚝을 뽑아내는 미션을 부여한다.
이들의 행위는 그래서 끊어졌던 민족 정기를 잇는 의미를 갖게 되고, 공포감과 맞서는 일 또한 우리 민족이 힘겨워도 마주하고 넘어서야 할 일제의 과거사 문제들이라는 은유를 담게 된다. ‘파묘’가 오컬트 장르라는 다소 마니아적 한계를 넘어 천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대중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작품에서 묫자리를 봐주고 잘못된 건 바로 잡아주는 풍수사 상덕은 사적인 동기로 시작했던 파묘를 공적인 동기로 넘어서게 해줌으로서, 사실상 두 개로 끊어져 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인물이다. 즉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에 담긴 것처럼, 범의 형상을 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에 꽂힌 쇠말뚝을 뽑아내는 이야기에 걸맞게, 앞뒤 두 개의 이야기가 끊어져 있는 것을 대사 한 마디로 이어내는 인물이다.
그건 풍수사라는 직업이 땅을 보고 다루는 전문영역을 갖고 있어서 가능해진 일이다. 전문적인 직업의 영역은 그래서 사적인 욕망이나 생계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경험들이 응축되어 무언가 뒤틀어진 것을 바로잡음으로서 모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공적인 역할이 되기도 한다. 상덕이 그러하듯이.
이건 최민식이라는 배우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가 걸어온 연기 인생을 들여다 보면 배우라는 전문영역에 그가 얼마나 일생을 던져 노력해왔는가가 엿보인다. 그는 엇나간 학생들을 엄하게 꾸짓는 선생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고, 조폭들과 맞짱뜨는 검사였으며(넘버3), 바람난 아내 때문에 분노하는 남편이자(해피엔드),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시골남자(서울의 달)였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역할들 또한 그는 연기했는데, 남파 공작원(쉬리), 장승업(취화선), 수십 년을 갇혀 지내다 복수를 꿈꾸는 인물(올드보이), 연쇄살인마(악마를 보았다), 정재계 인사들과 연결된 비리로 점철된 브로커(범죄와의 전쟁), 심지어 이순신(명량) 역할까지 소화했다.
그가 메소드 연기의 일인자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인물들을 진짜 그 인물이 되어 연기로 풀어냈는가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의 메소드 연기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래서 때때로 인터뷰를 통해 회자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악마를 보았다’에서 연쇄살인마 연기를 했을 때 있었던 일화다.
영화 촬영 중 동네 피트니스 센터 엘리베이터에서 평소 친근하게 다가오곤 했던 한 아저씨가 반말로 “어디 최씨냐”고 물어봤을 때 저도 모르게 “근데 이 XX가 왜 반말을 하지?”하는 생각이 들어 엘리베이터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최민식이 어떤 연기를 할 때 얼마나 그 인물 깊숙이 들어가는가를 잘 말해주는 일화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살인자의 ‘살’자도 다신 안하고 싶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또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을 할 때도 그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건 이 인물이 홀로 짊어졌을 무게가 고스란히 자신을 짓눌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메소드 연기는 최근 들어 배우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연기 방식이다. 진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 실제 생활을 해보는 등 완전히 그 사람이 되어 연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은 이렇게 빠져서 하는 연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하는 생활연기법이 많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최민식의 라이벌로 불리는 송강호가 바로 그런 스타일의 연기를 한다. 역할을 연구하는 건 같지만, 완전히 그 인물이 되어 연기하는 것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절제된 연기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다르다. 이 차이에 대해서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민식이 ‘고전주의자’라면 송강호는 ‘자연주의자’라고. 어느 쪽이 옳거나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스타일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최민식에게 연기란 끝없이 새로운 인물의 세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걸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는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작업이 죽어야 끝나는 작업이에요. 사람을 연구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인데 사람에 대해서 뭐 답이 있어요? 이 인생에 답이 있나요? 삶이 답이 있어요? 세상이 변하고 사고방식도 변하고 가치관도 달라지고 이게 졸업이 어디 있어요? 이걸 하나하나 알아나간다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이건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예요.”
그런데 그 공부에 임하는 태도가 흥미롭다.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하기 위해 우리는 뭐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일단 뛰어들라고 말한다. “그냥 뛰어들어서 하면 돼요. 아니 이게 냄비 솥이 뜨거운지 알려면 만져봐야 뜨겁죠. 그러니까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만져보지도 않고 뭐 어떻게 알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 않나요? 내가 좋아하고 호기심이 있고 하고 싶다 그러면 한번 해봐야지 알지. 뭐... 방법이 없죠.”
‘파묘’의 상덕이 그러하듯이 땅 속에 뭐가 있는지는 일단 파 봐야 안다. 무엇이 나올지 두렵기도 하지만 파보지 않으면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땅을 파보듯이 최민식은 여러 역할들을 팠을 게다. 그리고 그 역할들이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줬던 여러 감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다. 무언가를 파다 보면 전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건 때론 꽤 거창하고 의미있는 일들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걸, ‘파묘’의 상덕이 아니 그 역할을 연기하는 최민식이 우리 앞에 꺼내 보여주고 있다. (사진:영화 '파묘')
역시 최민식은 최민식이다. 3회까지 첫 공개된 디즈니+ <카지노>는 한 마디로 최민식의 아우라가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과, 깡패들 사이에서 보여주는 살벌함과 더불어, 최민식 특유의 쓸쓸하고 처연한 정서가 더해져 <카지노>의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은 종횡무진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툭하면 사고를 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깡패 아버지와 그에게 돈도 뜯기고 연일 두드려 맞으면서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 사이에서 거친 삶과 동시에 인간적인 연민도 가진 인물, 차무식. 그의 80년대와 2000년대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카지노>의 서사다. 그는 어쩌다 필리핀까지 가게 되어 그 곳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며 대부가 되는 인물로, 그 과정은 마치 인생이라는 도박판 위에서 그가 순간순간 던지는 레이스에 가깝다.
시청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 인생 도박 모험의 롤러코스터를 바로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체험하는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에 수백억씩 되는 돈을 주무르는 욕망의 레이스도 있지만, 돈과 연결된 범죄의 어두움과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살벌한 누아르적 분위기도 빠지지 않는다. 최민식이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에 입체적인 얼굴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친구들에게는 끈끈한 친구의 얼굴이지만, 여지없이 살벌한 범죄자의 얼굴이기도 하고 때론 어머니를 한없이 가엾게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가며 이 여러 얼굴을 프리즘처럼 보는 와중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험의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 그의 과거에 깃들인 복고적 풍경들과 사건들이 향수를 자극하고, 이미 그 시대를 겪었던 이들이라면 차무식이 하는 어떤 선택들이 일으킬 결과를 어느 정도는 예감하면서 보게 되는 기대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도박, 폭력이라는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지만 <카지노>에 감성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건 차무식의 이런 다차원적인 얼굴이다. 최민식의 아우라가 <카지노>를 쥐락펴락하며 끌고 가는 힘이 되는 이유다.
스타일로 보면 <카지노>에는 여러 결들이 겹쳐져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 같은 누아르적 분위기가 묻어나고, 마치 <나르코스> 같은 다큐 영상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연출이 더해져 있다. 또 80년대와 2천 년대를 오가며 당대의 시대적 풍경을 담아내는 지점에서는 <파친코>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카지노>를 <카지노>로 만드는 건 역시 최민식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칠면서도 감성적인 정조가 <카지노>만의 차별적인 색깔을 부여한다.
물론 최민식 이외에도 <카지노>에는 벌써부터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배우들이 즐비하다. 무식의 아버지 역할의 김뢰하는 물론이고 무식의 청년시절을 연기한 이규형, 필리핀에서 무식과 카지노 동업을 시작하는 민석준 역할의 김홍파, 국세청 조사 팀장 강민정 역할의 류현경, 무식의 진정한 은사로 짧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진선규 등등 조연들의 활약이 빛난다. 그 누구보다 무식이 필리핀에서 만난 상구 역할의 홍기준은 <카지노>가 발견해낸 보석같은 배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본 게임에 들어올 배우들은 아직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동휘, 손석구, 허성태, 김주령 같은 향후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3회만 먼저 공개되었지만 이미 서사의 몰입감은 다음 주를 못내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촘촘하게 쌓였다. <범죄도시>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은 액션 연출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인물의 감정을 촘촘히 그려내면서 서사를 쌓아가는 실력도 만만찮다는 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작품으로서는 분명 모두가 기대할만한 수작이다. 과연 디즈니+가 가장 기대했던 만큼, 그만한 파장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작품이라는 건 분명해졌다. 그간 좋은 작품을 내고도 생각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디즈니+가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디즈니+)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끈끈했던 관계를 브로맨스에 가깝게 그린 작품이다. 브로맨스를 넘어 로맨스에 가깝다는 관객들 반응처럼 이들이 보여주는 서로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우정과 신의 그 이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여성 출연자가 거의 없고 중년을 훌쩍 넘긴 남성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지지만 때론 가슴이 설레고 때론 먹먹해지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영화.
관노로 태어나 하늘과 별을 보는 걸 좋아했지만 고개 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 땅만 보고 살았던 장영실의 천재성을 한 눈에 알아보고 세종은 함께 누워 하늘과 별을 보자고 한다. 세종은 왕의 자리가 늘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해야 하는 자리라서 올려다볼 수 있는 하늘이 좋았다고 한다. 가장 빛나는 별 북극성을 세종의 별이라고 말하며 천민으로서 자신의 별은 없다는 장영실에게 세종은 북극성 바로 옆에 있는 별을 “너의 별”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세종은 하늘의 별이 백성들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백성을 올려다보는 애민정신이 드러나는 대사다.
하지만 왕이 관노인 장영실을 면천하게 해주고 나아가 관직까지 주며 총애하면서 사대부들은 반발하기 시작한다. 백성들이 모두 잘 살고 또 스스로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세종은 그것이 이뤄지기 위해서 장영실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한다. 중화 사대에 젖어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중국의 시간을 강요하던 시대. 조선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자격루와 간의 같은 천문기구를 만들기를 꿈꾸고 장영실은 그 꿈을 현실화해준다.
세종과 장영실의 끈끈한 브로맨스가 관객들을 설레게 하고 또 먹먹하게 울리는 이유는 단지 그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 같은 관계 때문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함께 꿈을 꾸고 실현해간다는 그 과정들이 주는 설렘과 먹먹함이 더해져 있다. 장영실은 세종이 그런 꿈을 꾸었기에 자신의 재주가 그런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하고, 세종은 장영실이 만든 그런 기구들이 있어 자신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세상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허진호 감독은 역시 멜로의 대가답게 함께 꿈을 꾸고 그것을 이뤄나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촘촘한 감정 선을 이어 그려나간다. 세종이 한 마디 그저 던진 말을 실현해내기 위해 장영실은 쉬지 않고 손을 놀리고, 세종은 그렇게 거칠어진 장영실의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 그 마음이 전해진다. 비 오는 날 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는 세종을 위해 장영실이 처소에 마련하는 ‘밤하늘(?)’은 마치 이들의 서사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그려진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함께 하늘과 별을 꿈꾸는 장면으로.
브로맨스가 이토록 가슴을 먹먹하게 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무언가를 쉽게 꿈꾸거나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제는 허망해진 현실의 판타지가 어른거린다. 꿈꾸고 노력한다고 그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 세상. 태생으로 결정된 대로 미래가 주어지는 세상. 그래서 더 이상 하늘을 보지 않게 된 우리네 청춘들이 처한 현실들이 저 세종 시절 장영실의 서사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남다른 울림을 만든다. 영화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진 건, 도대체 하늘을 쳐다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사진:영화'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