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 1958’, 순수한 청년 형사라는 서민 영웅의 탄생

수사반장 1958

“파하-” 이제훈이 그렇게 웃는 모습에 최불암의 모습이 겹쳐진다. MBC ‘수사반장 1958’의 한 장면이다. 1971년부터 89년까지 방영됐던 레전드 드라마 ‘수사반장’. ‘수사반장 1958’은 그 리메이크작으로 극중 최불암이 연기했던 박영한 반장 역할을 이제훈이 맡았다. 당시 ‘수사반장’에 첫 출연했던 최불암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지만, 박반장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극중 연령은 좀더 많은 40세로 설정되어 있었다. 원작을 그대로 배경으로 가져왔다고 하면 이제훈이 맡아서 연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배역의 연령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간을 과거로 더 되돌렸다. 1958년. 박영한 반장의 이십대 시절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인물이 반장이 되었는가 하는 걸 다루는 프리퀄이다. 

 

그런데 1958년으로 굳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건, 이제훈에 걸맞는 이미지의 연령대를 찾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 시대상과 그것 때문에 도드라지는 이제훈의 돈키호테 같은 순수한 아웃사이더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불의에 굴복하거나 방관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시대라면, 순수함이란 그 자체로 ‘반항’의 의미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도 않은 1958년은 대혼돈의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범죄와 불의가 일상이던 치안 부재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상권을 폭력으로 접수해 돈을 뜯어가는 깡패들이 심지어 공권력과도 결탁해 돈과 권력을 구가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전국에서 소도둑을 가장 많이 때려잡은 형사로 알려진 황천시의 촌놈 형사 박영한이 서장마저 깡패의 눈치를 보는 서울 종남경찰서의 꼴통 형사로 떠오르게 되는 건 그저 형사로서의 본분을 지키려하는 것 때문이다.

 

최불암의 젊은 모습이 좀체 연상되지는 않지만 이제훈에게서 훗날 인간적인 수사반장의 씨앗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다. 그건 이 배우가 가진 순수한 청년 같은 이미지다. 이제훈은 ‘파수꾼’이라는 영화로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함으로써 ‘충무로의 신데렐라’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특유의 표현이 서투르고 그래서 반항기 가득한 아웃사이더 같은 청년 역할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제훈의 순수한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확고해진 건 영화 ‘건축학 개론’이다. 이 작품으로 상대역할이었던 수지가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것처럼 이제훈 역시 순수한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다. 특유의 동안에 무해함이 느껴지는 눈빛과 미소는 수지와 10살이나 많았지만 이제훈을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동갑내기 대학생으로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훈은 그 후에도 ‘파파로티’ 같은 영화나 ‘비밀의 문’ 같은 드라마로 새로운 영역의 역할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과정을 거쳐 김은희 작가의 ‘시그널’로 또다시 주목받았다. 미제전담팀의 프로파일러 역할로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무전기라는 판타지 설정 자체를 믿게 만들어주는 진지하고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다. 여기서도 이제훈 특유의 순수한 이미지는 미제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형사라는 배역과 맞물려 효과를 발휘했다. 이 캐릭터가 가진 간절함을 보다 절절하게 시청자들이 느끼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간절함은 영화 ‘박열’이나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불의의 시대에 목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펼쳐졌다. 이제훈의 순수한 청년 이미지는 이제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내 육체는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며 일제 앞에서 일갈하는 박열이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옥분 할머니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던 민재를 통해 이제훈은 시대에 저항하고 싸워나가는 청년의 이미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확장은 ‘모범택시’의 김도기라는 인물과 만남으로써 부정한 정의가 심판하지 않는 이들을 처단하는 서민영웅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모범택시’가 특히 이제훈에게 새겨넣은 정의의 페르소나가 강렬할 수 있었던 건, 그 판타지적 캐릭터의 밑그림으로 제공된 실제 현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사건들이 있어서였다. 신안염전노예사건, 위디스크에서 벌어진 갖가지 엽기적인 사건들, 김명철 실종사건,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등등 실제 신문 사회면에 나왔던 사건들이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했다. 현실에서 공분을 일으켰던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를 사적 보복이라는 판타지로 처리하는 김도기라는 인물에 대한 열광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제훈은 저 ‘건축학개론’의 그 풋풋하기만 했던 청년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는 서민 영웅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가 연기해온 역할들을 이처럼 하나씩 꿰어 들여다 보면, ‘수사반장 1958’의 박영한 형사 같은 레전드 캐릭터에 왜 그가 캐스팅되었는가가 이해된다. 당대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박영한 형사는 마치 의적 홍길동 같은 서민 영웅에, 돈키호테 같은 타협없는 이상주의자, 게다가 형사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지켜나가는 우직한 순수함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미지가 이제훈이 그간 해왔던 필모 안에서 발견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가 가진 서민 영웅적 면모에, ‘박열’의 주인공 같은 이상주의자가 더해지고 ‘시그널’의 순수한 열정을 가진 어떤 이미지의 결합체랄까. 

 

이 모든 이제훈이 가진 페르소나의 가장 밑그림으로 놓여진 것은 결국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조금 서툴러도 올바르다 믿는 것을 순수하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청년의 모습. 어쩌면 이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다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누구나 첫 걸음은 다 그 청년의 모습이었을게다. 세파에 흘러가다 보니 조금씩 변하게 되었을 뿐. 어느 날 문득 너무 멀리 왔다 느껴질 때 순간 얼굴을 보여주는 저마다의 청년들이 있을 게다. 때론 그 순수한 청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도 복잡한 세상을 뚫고 나가는 길이라고 이제훈의 페르소나는 말해주는 듯하다. (글:국방일보, 사진:MBC)

‘전원일기2021’이 보여준 연기와 삶의 이중주

전원일기

오랜 세월 한 역할의 연기는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MBC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플렉스-전원일기 2021> 4부작이 막을 내렸다. 4부작의 분량으로 무려 22년간 방영됐던 <전원일기>가 남긴 발자취와 소회를 모두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게다. 하지만 이 짧은(?) 다큐를 통해 연기와 삶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건, 짧아도 충분한 가치를 증명했다 평가할 만하다.

 

이 가치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전원일기>의 김회장, 최불암이다. 최불암은 <전원일기>를 현재로 소환해낸 이 다큐의 시작을 열었고 마무리를 장식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라는 무거운 초상을 짊어진 채 김회장이라는 인물을 삼십대 후반의 나이부터 맡아 22년을 살아왔고, 그 후로도 그는 그 김회장으로 산 22년의 삶의 영향과 동력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 다큐를 통해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가 어느 날 갑자기 KBS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여전히 그의 가슴 한 켠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도시화가 이뤄지고, 모두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오고 있는 그 와중에 김회장은 마치 마음의 부채라도 있는 듯 여전히 농촌의 삶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시골의 아주머니들과 어르신들은 반갑게 그를 김회장으로 맞아주곤 했다. 

 

몇 차례의 고사 끝에 인터뷰를 하게 된 김혜자는 여전히 최불암을 ‘선생’이라고 지칭했다. “저는 최불암씨가 선생님 같았어요.... 나는 연극영화과가 아니라서 공부를 안했다고요. 그니까 그 연기 공부한 거를 말해주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고..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참 많이 ‘또 해줘 봐’ 그러면 인제 얘기해줘요.” 

 

지금껏 그저 최불암 하면 당연히 ‘국민 아버지’나 혹은 ‘최불암 시리즈’ 그리고 간간이 개그맨들이 “파-”하는 웃음으로 흉내 내곤 했던 그런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원일기 2021>은 최불암이 얼마나 노력하고 준비된 연기자였는가를 잘 보여줬다. 예를 들어 “파-”하는 그 웃음도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크게 하하 웃는 것보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웃는 게 김회장이라는 인물에 어울린다는 판단에서 나온 연기였다. 그 연기는 놀랍게도 습관이 되어 최불암의 웃음이 되어갔지만.

 

4회에서 금동이 역할을 했던 임호나 영남이 역할을 했던 남성진은 모두 <전원일기>의 연기가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증언했다. 즉 당시만 해도 다소 과장된, 신파적인 연기가 많았다는 것. 하지만 <전원일기>는 그런 과장을 뺀 자연스러운 ‘메소드 연기’를 배우들이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최불암이 있었다. 남성진은 처음 녹화를 할 때 최불암이 세트에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건 세트 촬영이라도 모두 화면을 향해 있는 게 너무 ‘연극적’이라는 판단에 최불암이 보인 자연스러운 연기였다는 것이었다. 

 

당시를 술회하며 최불암은 <전원일기> 녹화하러 방송국을 찾았을 때 경비실에서 그를 보고는 “오늘 <전원일기> 녹화시네요?”라고 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멀리서 봐도 김회장이 오는 것 같아서 경비하시는 분이 딱 알아봤다고 했다는 것. 그만큼 그 인물에 대해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노력은 <전원일기>를 함께 했던 배우들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연기해낸 바 있다. 그런데 그 엄마의 또 다른 얼굴 또한 <전원일기> 안에 이미 있었던 걸 다시 꺼내 쓰는 것이 아니냐는 제작진의 말에 동의했다. 최불암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또 그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주변 배우들에게는 귀감이 되었을 터였다. 그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게다. 

 

<전원일기>는 거기 출연했던 배우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인물을 오래도록 연기하면서 그 인물의 모습과 습관과 생각 같은 것들이 삶으로 전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김혜정이나 이계인 같은 배우는 그래서 지금도 전원으로 내려가 그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 작품에서 티격태격 연인으로 만난 김지영과 남성진은 실제 부부가 되었다. 김수미는 이 작품을 통해 갖게 된 그 일용네 이미지가 지금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예능 프로그램으로 그 맥을 이어가게 됐다. 물론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응삼’이라는 인물로 더 기억된 박윤배는 실제로도 일찍 이혼해 혼자 사는 삶을 살다가 병으로 먼저 떠났다. 

 

흔히들 연기는 삶과 동떨어진 어떤 ‘역할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인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끄집어내 보여주는 게 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는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20년이 넘는 세월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게다. 최불암은 김회장이 금동이를 입양하는 그 연기를 한 후 시청자들이 상찬하는 바람에 진짜 ‘어린이 재단’ 후원 일을 앞장서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연기란 그런 것이다. “파-”하고 웃던 웃음이 진짜 자신의 웃음이 되기도 하는.

 

되돌려 말하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할 것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 연기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그래서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되기도 한다. <전원일기2021>은 놀랍게도 이러한 ‘연기의 실체’를 끄집어내 보여줬다. 20년 넘게 연기해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명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의외의 결과다. <전원일기>를 재조명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들의 삶을 통해 연기가 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에둘러 보여주게 된 것. 이것은 배우가 아닌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나는 어떤 연기를 선택했고 그걸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사진:MBC)

‘전원일기’ 신드롬에 담긴 대중들의 다양한 갈증들

 

때 아닌 <전원일기> 열풍이다. 여러 케이블 채널에서 다시금 <전원일기>를 방영하고 있고, OTT에서는 인기드라마 순위 톱10에 오르기도 했다. 2002년에 종영한 <전원일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대중들의 어떤 갈증들을 담고 있는 걸까. 

전원일기

<전원일기>를 소환시킨 매체 환경 변화

최근 MBC <다큐플렉스>는 MBC 60주년 특집으로 ‘전원일기 2021’ 4부작을 내놨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23년 간 방영됐던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이 드라마를 재조명한 ‘전원일기 2021’은 19년 전 종영하며 각자의 길로 돌아간 <전원일기> 가족들이 다시 하나둘 얼굴을 보이며 만남을 갖는 시간을 선보였다. 드라마의 중심축이었던 최불암, 김혜자를 위시해 고두심, 박순천, 김용건, 유인촌, 김수미, 김혜정, 박은수 같은 반가운 인물들이 당시의 <전원일기>를 회고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MBC 60주년 특집으로 <전원일기>를 현재로 소환해낸 걸까. 이것은 최근 이 19년 전 종영한 드라마에 대한 의외의 관심과 반응들이 일종의 ‘신드롬’을 만들고 있어서다. <전원일기>는 MBC ON, 엣지티비, 채널 유, KTV 등 7개 채널에서 내보내고 있는 인기 드라마이고, 최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웨이브와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는 인기드라마 톱10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이건 최근의 달라진 방송 시청 환경의 영향이 적지 않다. 즉 과거 ‘TV 시대’의 시청이란 방영시간대에 맞춰 ‘본방’을 보는 방식이었지만, ‘OTT 시대’의 시청은 원하는 방송을 원하는 시간에 선택해 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본방 시간대에 올라가는 ‘현재의 트렌디한 드라마’만이 아니라, 과거에 방영됐던 명작 드라마들을 ‘취향별’로 골라보는 시청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연령대가 높은 시청자들은 <전원일기> 같은 향수와 추억이 묻어나는 드라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OTT를 통해 해외에서 들어오는 자극적인 장르물들이 우리네 드라마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장르물들은 과거의 드라마들처럼, ‘콩나물 다듬으며’ 편안하게 보기에는 쉽지 않다. 더 큰 몰입을 요구하는 이들 장르물들은 연령대가 높은 시청자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데다, 드라마의 이야기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들 시청자들은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지나간 옛 드라마들을 보기 시작했다. <전원일기>만이 아니라 <야인시대>, <태조 왕건> 같은 드라마들을 연달아 방영해주는 케이블 채널의 소비층으로 부상한 것. 여기에 OTT처럼 아무 때나 다양한 옛 드라마들을 선택해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시청은 더 편리해졌다. <전원일기>가 2021년에 다시 현재로 소환된 배경에는 이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그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시청 패턴이 깔려 있다. 

 

<전원일기>, 젊은 세대들까지 끌어들인 마력

그런데 놀라운 건 <전원일기>에 대한 열광이 기성세대만이 아닌 젊은 세대들에게도 생겨났다는 점이다. ‘부모와 함께 보다가 빠져 들었다’는 이들 젊은 세대들은 <전원일기>의 무엇에 매료된 걸까. 여기서 주목되는 건 <전원일기>가 가진 ‘뉴트로적 매력’이다. 

 

레트로는 기성세대들이 과거에 겪었던 경험에 대한 추억이나 회고지만, 뉴트로는 그 과거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세대들이 그 옛 경험을 ‘힙하게(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즉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전원일기>의 다소 거칠고 때론 희미하게까지 보이는 영상들은 ‘빈티지적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가치’가 얹어진 것으로 재해석되는 것. 

 

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전원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런 외형적인 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은 없는 ‘농촌드라마’라는 장르가 가진 유니크함이 있고, 그 안에 담겨진 김회장(최불암)댁 가족들이나 일용이네 가족들이 겪는 서사의 특별함이 있어서다. 이미 농촌조차 ‘전원도시’가 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도시로 떠나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에서 ‘농촌의 이야기’는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 자체가 새롭고 특별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전원일기>의 굉장하지는 않아도 소박하면서 훈훈한 이야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힐링을 느낀다고 말한다. 마치 ‘불멍’, ‘물멍’ 같은 편안함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23년 간 방영된 이야기는 그 세월만큼 거기 등장한 가족들에 대한 유대감을 만들어주기 마련이다. 물론 <전원일기>를 보며 자라온 세대라면 그 드라마 속 가족들이 실제로 나이 들어가는 그 과정까지 공유함으로써 더 큰 세대적 유대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따뜻한 가족애가 주는 편안함은 요즘처럼 핵가족화되고 나아가 나홀로 가구들이 급증하고 있는 세태에 오히려 더욱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한다. 

 

대중들이 농촌, 자연에 갈증을 느낀다는 증거

<전원일기>가 2002년 종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바뀌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이들이 급증했고, 농촌조차 전원도시로 변모했다. 당연히 라이프스타일도 바뀌었다. 도시의 세련된 삶이 대중들이 보고픈 것들이었고, 그래서 당대에 드라마들은 이런 삶을 담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이 때 등장했던 트렌디 드라마들은 지금의 한류 드라마가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가치관도 바뀌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사고관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전원일기>의 가족 이야기들은, 물론 당대의 농촌의 삶을 리얼하게 담았던 것뿐이지만, 점점 개인이 중요해지는 도시적 삶의 방식 앞에 어딘지 구시대적인 느낌을 만들었다. 물론 <전원일기>도 이런 변해가는 세태를 반영해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농촌 가옥의 세트는 전원도시의 개량된 가옥으로 바뀌었고,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도 소재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전원일기> 특유의 정서를 계속 이어가게 해주지는 못했다. 너무 오래도록 출연했던 배우들마저 이제는 하차를 원하게 되자 결국 <전원일기>는 종영했다. 

 

그렇다면 종영 후 19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그런 시대의 변화 때문에 종영을 선택했지만 지금 다시 <전원일기>가 주목받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최근 몇 년 간 고도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과,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오히려 거꾸로 자연과 농촌에 대한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현 대중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전원일기> 종영 이후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로 그 명맥을 이었지만 이마저 종영된 후 농촌드라마(전원드라마에 가까웠다)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드라마가 농촌을 떠나버린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이 농촌과 자연을 찾아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박2일>부터 시작해 <삼시세끼> 같은 나영석표 예능 프로그램이 시골과 자연을 찾아 떠났고,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은 종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도시화될수록 대중들의 농촌과 자연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다. 

 

<전원일기>가 지금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된 건, 갈증은 커졌지만 이를 채워줄 농촌드라마가 부재한 현실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서 그 갈증이 채워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 달라진 농촌의 현실이 더 이상 저 <전원일기> 속 농촌 풍경이 주던 편안함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원일기>는 그렇게 더 이상 우리가 볼 수 없는 ‘사라진 농촌’을 담은 작품으로서 더더욱 아우라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됐다. 

 

자극적인 19금 콘텐츠의 시대, <전원일기>의 가치

“딴 드라마들은 그 갈등의 잔해들이 있잖아. 욕하고 막 미워하고 이런 걸 아주 자세히 보여줘요. 그럼 사람들이 재밌어가지고 어머나 이렇게 욕하면서 봐요. 근데 이 드라마는요, 엄마, 아버지 그 다음에 또 험한 말하는 일용엄마까지요. 그 (갈등의) 잔해들을 주워요.” ‘전원일기 2021’에 출연한 김혜자는 인터뷰에서 <전원일기>가 왜 다른 드라마들과는 다른가를 ‘갈등의 잔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이런 설명은 그가 <전원일기>를 ‘농촌드라마’가 아닌 ‘휴먼드라마’라고 강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갈등이 있지만 그래도 애써 화해하는 모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이 작품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드라마의 이런 ‘휴머니즘’은 심지어 배우들의 삶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전원일기 2021’에서 최불암은 드라마 속에서 금동이를 입양하는 김회장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그 후로 지금껏 어린이재단을 후원하는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즉 그건 드라마 속 김회장의 이야기였을 뿐이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실제로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작품이 가진 휴머니즘이 시청자들을 움직였고, 그 시청자들의 반응이 배우들을 움직여 현실의 온도를 조금은 높여주는 선순환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전원일기>는 그래서 현재 점점 자극적으로 치닫고 있는 드라마들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OTT가 열리면서 해외의 자극적인 19금 드라마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네 드라마도 이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중이다. 물론 19금 드라마가 그 자극의 수위로 문제가 있다 말할 수는 없지만, 주제의식과 상관없이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 치닫는 이른바 ‘막장드라마’들은 <전원일기>와는 확실한 비교점을 만든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예사로 일어나는 이들 막장드라마들 속에서, ‘갈등의 잔해를 줍는’ <전원일기>가 가진 가치가 새롭게 드러난다. 자극의 끝단을 담는 드라마들 속에서 <전원일기>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다. 

 

농촌마저 도시화를 꿈꾸는 요즘, 우리에게 원형적인 따뜻함으로 기억되어 있던 ‘고향’의 풍경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사라져간다. 그래서 그 사라져가는 정경에 대한 갈증이 커지듯이 <전원일기>는 2021년에 새로운 가치로 우리에게 재조명되고 있다. 세상은 변화하고 그 삶의 방식 또한 변해가지만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건(않아야 한다 여기는 건) 바로 우리네 인간이다. 그래서 <전원일기>를 통해 우리가 애써 찾고 있는 건 ‘인간의 온기’가 아닐까 싶다. (글:시사저널, 사진:MBC)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와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

“이거 궁예 아니신가?” 길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는 김영철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KBS 대하 사극 <태조 왕건>에서 김영철이 연기했던 그 궁예 역할이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은 탓일 게다. 이른바 ‘관심법’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캐릭터가 아니었던가. 그 궁예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동네사람들에게 다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그려내는 풍경이다.

늘상 지나던 동네이니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또 새롭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노포들과 그 곳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서는 그 세월만큼의 이야기들이 묻어난다. 콩나물 비빔밥 집에서의 점심 한 끼는 어머니처럼 푸짐하게 챙겨주는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새롭고, 60년 째 가업을 이어 이용원을 하고 계시다는 아저씨와의 대화 속에서는 젊은 날의 방황을 거쳐 돌아와 이제는 자부심까지 갖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서 만난 수제화 장인에게서는 그 손을 거쳐 얼마나 많은 분들이 불편함을 덜어냈을 지가 엿보이고,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동네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게서는 외국인들이 돌아가서도 그 아주머니를 통해 느꼈을 ‘한국의 정’이 느껴진다. 

이 프로그램은 제목에 들어가 있듯, 김영철이라는 배우가 아니면 담아내기 힘든 느낌 같은 것들도 들어있다. 1973년 극단에 입단하며 시작된 배우의 길은 현재까지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의 작품들로 이어져왔다. <태조 왕건>의 궁예, <야인시대>의 김두한, <아이리스>의 백산, 영화 <달콤한 인생>의 강사장 역할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줘 왔지만, <아버지가 이상해> 같은 드라마의 변한수 역할 같은 따뜻하고 헌신적인 역할도 보여줬다. 그러니 이 많은 역할을 해온 배우가 연기라는 세계 바깥으로 나와 동네를 걷는 그 장면 자체가 이체롭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많은 인물들을 연기해온 그가 바로 그 실제 인물들을 만나는 순간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제작발표회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그 구도가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있다. 그건 바로 2011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70여회가 넘게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그 곳의 밥상을 소개했던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이다. <한국인의 밥상>같은 장수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며 ‘동네 천 바퀴’를 돌고 싶다 포부를 밝혔던 데서도 드러나듯, 두 프로그램은 닮은 구석이 많다. 

먹방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 <한국인의 밥상>은 다소 진지한 접근으로 전국 각지에서 철마다 나오는 식재료들과 그것들을 특유의 방법으로 해먹은 요리법을 소개해왔다. 처음에는 너무 진지한 다큐 같은 느낌이 강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 깊이에 빠져들게 되는 프로그램. 마치 전국 각지에 존재하는 우리네 밥상을 마치 백과사전처럼 온전히 정리해내겠다는 그 포부도 좋지만, 그걸 현지에서 살아가는 분들의 소박한 삶과 이야기로 전하는 대목도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다. <한국인의 밥상>이라고 해서 ‘밥상’만 보일 줄 알았더니 ‘한국인’이 보이는 것.

이걸 가능하게 하는 인물은 역시 프로그램을 지금껏 이끌어온 최불암이다. 우리에게는 <수사반장>의 캐릭터가 더 강렬하게 남아 있지만, 어쩌면 이 프로그램과 더 어울리는 모습은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아닐까.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088회를 방영했던 진짜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이 드라마를 통해 김회장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로 자리 잡은 바 있다. 그러니 그가 지방을 찾아다니며 쉽지 않은 노동에 두툼해진 아주머니의 손을 잡는 장면은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맛깔나게 담아주는 내레이션 또한 빼놓을 수 없지만.

궁예의 김영철과 수사반장 최불암. 이들이 연기가 아닌 실제 현실 속 길을 걷게 된 건, 그들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름 모를 서민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며, 만만찮은 삶의 경험을 공감대로 그들과 나눌 수 있는 인물로 이들 만한 배우들이 있을까. 두 프로그램이 모두 그들의 필모그래피처럼 장수하는 프로그램이 되길.(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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