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가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문을 열어 그들을 들이고, 밥 한 끼를 대접하고 나아가 하룻밤 지낼 잠자리를 제공하는가.

사극을 보면 '이리 오너라'하고 부르고,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하룻밤 묵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나그네를

선선히 재워주는 주인도 등장하지만

지금 그런 광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제 아파트를 들어가는 일도 주민이 아니면 갖가지 보안절차를 거쳐야 하는 일이 되지 않았나.

하나의 아파트 단지는 그래서 그들만의 요새처럼 여겨진다. 

누구도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는. 

오디세이

우리에게 트로이 목마로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이 관점으로 바라보면 흥미롭다. 

오디세우스의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벽의 단단히 닫힌 문 앞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트로이 목마라는 지략으로 드디어 문을 연다.

이로써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 되지만

과연 그가 한 행위는 영웅으로 칭송받을 일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칠 제물'이라는 거짓말로

문을 열고 트로이 목마를 받아들인 트로이 사람들을

약탈과 살상의 비극에 빠뜨린 장본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바로 이런 '환대'의 관점이 투영된 오디세이아를 그리고 있다. 

오디세이

영화가 시작되면 모두가 트로이 목마의 전쟁 영웅담이 먼저 펼쳐질 걸 기대하게 되지만

실상 영화는 이타카의 궁 연회장을 가득 메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이들은 승전 소식을 알려왔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오디세우스가 죽었을 거라고 단정한 채

페넬로페와 결혼하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에 따라

페넬로페의 환대를 받는 자들이지만

사실상 음식이나 축내는 걸인들과 다름 없고

페넬로페와 결혼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승냥이 같은 자들이다. 

즉 영화는 손님으로서 환대의 정신을 보여주지 않는 자들과

그럼에도 주인으로서 저들은 환대하는 이를 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로이 목마에 대한 스펙터클한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채 어느 섬에 갇힌 채 칼립소와 나누는 대화와

아버지를 찾아나선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 그려진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 목마에 타고 싸웠던 메넬라오스는 

그 전쟁을 영웅담으로 텔레마코스에게 전하지만

정작 오디세우스는 그 트로이 목마가 지우고 싶은 상처처럼 남아있다. 

그건 '대접 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을 어기고

트로이인들을 속여서 얻은 승리였고

그로 인해 무수한 트로이인들이 도륙당하고 도시가 불타는 지옥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오디세이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라는 고전이

10년 간의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을 그린 '일리아드'와

승전 후 무려 10년 간이나 걸린 귀향의 과정을 그린 '오디세이'를 담었다면

이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그 10년간의 귀향을 사실상 '참회의 시간'으로 그려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전쟁영웅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반성하는 참회자다. 

 

그래서 결국 그 트라우마처럼 깊은 상처를 남겨

지워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와 보여주는 건

손님을 가장한 채 주인행세를 꿈꾸는 자들에 대한 단죄다. 

오디세우스는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자신을 걸인으로 위장한 채

이타카성에 들어가는데, 저 걸인이나 다를 바 없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그를 환대하지 않는 걸 겪는다. 

자신이 깼던 '제우스의 법'으로 10년간 바다를 떠도는 형벌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오디세우스는

저 '제우스의 법'을 깬 자들을 도륙한다. 

오디세이

어째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디세이'라는 고전을 가져와

굳이 '환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했을까.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뭐든 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그 승리한 이를 영웅이라 일컫기도 하는 세상을 꼬집기 위함이다. 

오늘은 종전을 선언했다가 내일은 다시 '잔혹한 대가' 운운하며 협박을 일삼는

우리 시대의 비극을 저 수천 년 전 고전을 통해 상기 시키는 것.

우리는 과연 문밖의 낯선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사진:영화'오디세이')

20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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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넷', 영화의 많은 영상문법들을 깬 흥미로운 시각체험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난해하고 불편하다. 그런데 보다 보면 빨려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무려 2시간 반 동안의 적지 않은 런닝타임이지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몰입감이 있다. 물론 이 영화를 기존 방식으로 이해하려 애쓴다면 상당한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저런 상황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테고 그것은 오히려 영화를 즐길 수 없게 만들 테니 말이다.

 

영화 <테넷>에는 '인버전'이라는 색다른 기술이 등장한다. 그것은 하나의 설정이다. 미래에서 현재로 던져진 이 기술은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것이란다. 그래서 인버전 된 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날아가는 게 아니라 날아간 총알이 다시 총으로 돌아온다. <테넷>의 포스터를 보면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과 저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동시에 겹쳐져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영화 속 장면 속에 점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된다.

 

<테넷>이 한번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건 근본적으로 이 영화가 시간의 예술인 영화의 문법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인과관계의 산물이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그래서 미래에 그 결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테넷>은 이 인과관계가 마구 꼬이고 뒤틀어져 있다. '인버전'이라는 설정으로 시간의 역순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일어난 결과를 되돌려 원인을 바꾸려는 인물들의 작전을 가능하게 한다. 시간은 앞으로도 흐르지만 의지에 의해 과거로 흘러가기도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버전 기계를 통해 가운데 유리막을 두고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이 서로의 행동들을 보는 장면은 <테넷>이 깨고 있는 영화문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가는 시간의 축과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의 축이 조금씩 겹쳐지면서 심지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격투를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뒤로 갈수록 영상문법의 파괴는 더 과감해지고 심지어 블록버스터의 성격을 띤다. 세상의 종말을 오게 할 수 있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그가 처음 이 인버전의 알고리즘을 갖게 됐던 과거 시간대로 옮겨가 벌어지는 전쟁에 가까운 장면은 우리가 봐왔던 영화 속 전쟁장면과 너무나 다른 영상을 연출해낸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 요원들이 있는 반면 뒤로 가는 요원들도 존재하고, 이들의 공격으로 건물이 폭파되는 장면과 이미 폭발로 인해 거대한 구멍이 난 곳이 거꾸로 원상태로 돌아가는 장면들이 겹쳐진다. 시간의 순방향과 역방향이 하나로 겹쳐진 곳에서의 전쟁 장면은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지만, 그 시각체험은 지금껏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주인공이 보호하려 애쓰는 사토르에게 거의 인질이 되다시피 붙잡혀 살아가는 그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이 세상의 종말을 막는 일에 일조하면서도 '자유'를 향해 나가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저 여자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던 미래의 캣이 나중에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대목은 시간의 역순이 만들어낸 인과관계를 뒤집어놓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래의 자신이 가진 어떤 욕망(원인)이 과거의 자신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테넷>은 난해하고 불편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역순이라는 '인버전'이라는 설정을 가져와 영화가 늘상 틀에 박혀 있던 '시간과 인과관계'라는 그 구조를 깨고 있는데서 생겨나는 난해함과 불편함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마치 캐치 프레이즈처럼 달아놓은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문구가 와 닿는 면이 있다. 어쩌면 그 시각체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으니.(사진:영화'테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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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밥 넘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약한 메시지

 

사실 배트맨이니 슈퍼맨이니 하는 슈퍼히어로들에게 대단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요구하는 건 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왕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으로 그려냈던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세계가 슈퍼히어로물이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심지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꼭 이런 세계관과 메시지에 대한 요구는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배트맨 대 슈퍼맨>

하도 오랫동안 예고편을 통해 떡밥을 던져놔서인지 <배트맨 대 슈퍼맨>에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제목대로만 보면 배트맨과 슈퍼맨이 대결하는 이 구도가 마치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같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슈퍼히어로물에 대해 철학적 세계관을 투영시켜 바라보는 시각이 생긴 지금, 이 대결구도는 다양한 의미와 메시지의 도출을 기대하게 만든다.

 

알다시피 배트맨은 인간이고 슈퍼맨은 외계인이다. 아니 슈퍼맨은 그저 외계인이 아니고 배트맨과 비교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다. 그러니 이 대결은 인간과 신의 대결로 보일 수 있고, 나아가 인간과 이종족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은 실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격화되어 있는 슈퍼맨은 과연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위협하는 존재인가. 슈퍼맨과 그를 쫓아 지구를 침공한 조드 장군과 일당과의 대결로 초토화되어버린 도시 속에서 배트맨은 그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과연 슈퍼맨은 믿을만한 존재인가. 아니 인간이 아닌 신은 과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인가.

 

<배트맨 대 슈퍼맨>이 그리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가 저 성서의 이야기를 따왔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슈퍼맨은 신적 존재이지만 그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위대한 사랑은 지구로 떨어진 아기를 키워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이런 인물 캐릭터에서 우리는 성서의 많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의 구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지한 질문보다는 간단한 해결과 블록버스터 볼거리에 더 치중한다. 물론 그 볼거리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충분히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 끌만큼 매력적이다. 게다가 향후 쏟아져 나올 DC 코믹스의 히어로들 이야기에 대한 떡밥들도 넘쳐난다. 아마도 이 작품으로 인해 앞으로 나올 저스티스 리그의 슈퍼히어로 각각의 이야기들 역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입부분의 진중한 메시지가 후반부에서 흐지부지되는 과정은 기대한 만큼 큰 실망감을 남긴다. 그래서 <배트맨 대 슈퍼맨>이 차용한 신과 인간의 이야기 같은 철학적 주제가 앞부분에 강조된 것은 후반부의 말도 안 되게 기막힌 볼거리들을 그저 만화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만일 앞부분의 진중한 질문들이 없었다면 영화 후반부의 많은 장면들은 너무 과도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영화는 재밌다. 적당히 진지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이 넘쳐난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은 진중한 메시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그만큼 큰 기대감 때문일 수 있다. 어차피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만한 메시지를 담아냈어야 한다는 그 기대. 혹평이 쏟아진 건 이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철학적 주제를 기대하게 된 그 달라진 시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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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광풍에 가려진 <카트>의 현실

 

영화 <카트> 상영관이 팍 죽었어요. <인터스텔라> 흥행 광풍에 직격탄을 맞고 휘청이다가 빌빌거리는 중입니다. 제작자로서 뼈가 아프네요. 가늘고 길게라도 오래 가고 싶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 절박한 맘으로 만든 영화, 많이 봐주세요. 힘이 돼주세요.”

 

'카트(사진출처:명필름)'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마치 <카트>라는 영화의 처지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외된 노동자의 처지처럼 다가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지금 우주 스펙터클의 광풍 속에서 들리지 않는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감독의 이름처럼(?) 놀라운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토록 우주로 날아가 심지어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었던가. 심지어 작은 스크린에서 본 관객들은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아니라며 아이맥스 영화관에 줄을 서는 기현상이 벌어질 정도다. 이 정도면 스펙터클의 새 장을 연 것이나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이 대단한 것은 이 우주적인 스펙터클을 다시 가족애와 같은 인간적인 끈으로 묶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잡한 과학 지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우주 반대편에서 모니터 하나를 통해 저 편에서 날아온 자식의 메시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복잡하고 신비한 우주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게 된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당장 처한 현실만큼 중요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카트>의 제작자 심재명 대표가 최근 상영관 축소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은 그래서다. 비정규직의 문제. 어찌 보면 지나는 길에 누구나 한 번쯤을 봤을 지도 모르나 내 현실이 더 급박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던 그네들의 이야기.

 

<카트>는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걸 들려주는 영화다. 대단한 주장을 하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념적인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옆집 아줌마가 어느 날 갑자기 겪게 된 이야기를 어떤 편향 없이 담담히 보여주는 그런 영화. 그래서 그것이 누구나의 코앞에 닥칠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영화.

 

물론 영화가 어떤 당위에 의해 봐야 하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카트>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고 또 의미도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그걸 통한 각성을 일깨워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광풍 속에 가려져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기회조차 조금씩 박탈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우주의 스펙터클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펙터클이 주는 잠시 간의 마취적인 매혹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이 자칫 가려버릴 우리네 현실은 저 여전히 존재하는 비정규직들의 절규조차 들리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듣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될 그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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