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해줘’, 이 멜로에 담긴 만만찮은 문제의식

사랑한다고 말해줘

“입시 미술도 지겹고 말 많은 애들도 질색인데 여긴 뭔가 좀 다를 거 같아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태호(한현준)는 차진우(정우성)가 아트센터에서 농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수업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수업을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말로 소통이 되지 않아 불편할 수 있는 수업을 굳이 태호가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말 많은 애들도 질색’이라는 이야기 속에는 그를 둘러싼 폭력적인 세상이 담겨 있어서다. 

 

태호는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일진들에게 당하는 피해학생을 보다못해 선생님에게 그들과 분리해달라는 이야기를 했다가 오히려 폭력의 대상이 됐다. 불의를 그냥 넘기지 못해 나선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불똥이 되어 돌아온 거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어른들이었다. 버스 안에서 자신이 일진들에게 갖은 폭언과 폭력을 당하는데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차진우는 이를 만류하려 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아 사실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가해학생들은 마치 들으라는 듯 비아냥 댔다. “역시 어른이셔. 봤냐? 실실 쪼개면서 쌩까는 성숙한 태도. 건들면 좆된다는 걸 아니까 어른인거야. 알겠냐? 남일에 나대다가 현생 좆망한 새끼야. 아우 우리 태호 언제 저런 훌륭한 어른 될래?” 그런 이야기에도 그냥 내리는 차진우를 그래서 태호는 오해했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해가 풀린 건 정모은(신현빈) 덕분이었다. 정모은이 태호에게 차진우의 인터뷰가 실린 아트센터 잡지를 보낸 것. 그걸 보고 태호는 차진우의 수업을 들으러 오게 된 거였다. 

 

그런데 태호가 농인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점점 회복되어가고 얼굴이 밝아지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만만찮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시끄럽고 폭력적인 말들이 오가는 세상. 그걸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오히려 농인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눌 때 더 잘 소통하고 진정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를 통해 현실을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듣지 못하는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고 연기하는 정모은의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시끄럽고 폭력적인 세상 앞에 그것과 대비되는 ‘침묵’과 ‘고요’의 세계가 마치 대결을 벌이는 듯한 치열한 문제의식 또한 담고 있다. 차진우의 벽화는 그런 세상에 대한 소리없는 대결이나 마찬가지다. 철거를 앞둔 지역에서 남몰래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애써 기억하려는 듯 그는 벽화를 그려넣는다. 그 그림은 세상에 침묵하는(혹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작고 가녀리며 소외된 존재들의 소리없는 외침인 셈이다.

 

시끄러운 세상에 묻혀진 작은 소리들을 들어주는 것. 그래서 그 소리에 담긴 작지만 큰 외침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주고 또 알려주는 것. 그것을 이 드라마는 차진우와 정모은이 서로의 진가를 알아가고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담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이 하고 있는 그림, 연기 그리고 음악(정모은의 친구 윤조한(이재균)이 하는)이 큰 소리 내지 않아도 그 무엇보다 크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려내려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장애라는 이름으로 치부하며 때론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하는 저들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메시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야 말로 진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좀 부럽기도 해요. 귀가 늘 열려 있다는게 괴로울 때도 많거든요. 들리는 모든 순간이 다 감사하진 않아요.” 태호의 그 말에 차진우도 공감한다. “그래 가끔은 못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떤 말은 듣지 못해서 새긴 상처보다 더 깊은 흉터를 남기니까.” 그러면서 태호의 등을 차진우가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이 드라마가 우리의 등을 토닥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사진 : 지니TV)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하려고 했던 이야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글 중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마히토가 화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화재가 왜 발생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이라는 시기는 그것이 그냥 발생한 화재라기보다 폭격의 여파라는 걸 상상하게 한다. 마히토는 그 불길을 향해 달려가지만 어머니는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 상황과 화재라는 충격,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은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판타지의 전제가 된다. 판타지는 결국 현실의 결핍이나 충격에 의해 촉발되어 이세계(異世界)로의 통로를 통과하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들이 장롱을 통해 나니아라는 곳으로 떨어지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전쟁이라는 충격, 장롱이라는 통로, 그리고 이세계의 모험. 이건 판타지의 중요한 구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판타지의 세계들을 보면 그래서 터널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도 무성한 수풀의 터널을 통과하면서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 역시 수상한 터널을 통과하면서였다. 터널은 일종의 판타지의 통과의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장치를 가져와 이세계로의 모험을 풀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어머니가 화염 속에서 죽는 충격을 겪은 마히토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와 말을 하는 왜가리의 인도를 받아 이세계로 넘어가는데 역시 터널을 통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서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아마도 실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거나 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회복시키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으로 그려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세계에서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 부모들을 구하려는 치히로의 절박함으로 그려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특이한 건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갖게 된 충격과 상실에 더해져 고향에서 만나게 되는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가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미 뱃속에 아이까지 가진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는 반가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렇다고 무감정한 건 아니다. 특히 금세 새엄마를 들인 아버지에 대해 갖는 마히토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예의를 다하지만 그 속에는 분노 또한 감춰져 있다. 

 

전쟁 상황에 전투기 덮개를 제조해 납품하는 공장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아버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전쟁은 결국 그런 무기들의 개발, 제조와 관련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막부 시대가 저물고 메이지유신을 촉발시킨 쿠로후네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을 끌고 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새로운 무기 기술이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새 엄마를 들이고 심지어 동생까지 임신하게 된 데 대해 갖는 마이토의 복잡한 감정은, 그 개인서사를 넘어서 그 이면에 담긴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된다.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학교의 첫 등교 때부터 자동차를 끌고 가 시골 아이들의 기를 꺾으려는 아무 생각 없는 아버지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기술과 그걸로 갖게 되는 힘을 낙관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지만 마히토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만든 전투기 덮개를 보며 감탄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칼로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재능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상처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대사 없이 원거리 샷으로 동네 아이들과 마히토가 실랑이를 벌이다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건 당연히 아버지와 관계된 갈등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 동네의 유지지만 무기 제조를 해서 전쟁에 일조한다는 사실이나, 어머니가 죽고 곧바로 새엄마를 들인 사실은 마히토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나서 그 이유를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돌멩이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린다. 

 

마히토가 가진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새로운 기술과 그 혁신을 통해 만들려는 새로운 체제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는 양가적 감정 그대로다. 그것에 매혹되거나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파괴한 것들(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 감정은 마히토가 이제 사라진 새엄마를 찾아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탑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모험하게 되는 이세계의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마히토가 만나게 된 이세계는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다. 삶과 죽음이 겹쳐 있고, 인공과 자연이 뒤엉켜 있으며,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 세계를 인도하고 그 세계를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왜가리, 펠리컨, 잉꼬 같은 새들이라는 점도 그렇다. 새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오가는 은유적 동물이다. 마히토가 만나는 새들은 그래서 자유의 상징처럼 하늘을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먹을 것이 없어 저세계의 생명으로 변화할 와라와라까지 잡아먹는 생존에 구속된 존재로도 또 떼로 몰려다니며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로도 그려진다. 

 

와라와라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솟구치게 해 펠리컨을 공격하는 히미 역시 펠리컨만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들도 불타 죽게 되는 것. 불을 만들어내는 무기로도 활용되는 기술은 그렇게 무차별적이다. 심지어 선의조차 누군가에게는 악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세계로 표현되는 마히토의 감정은 그래서 아버지가 낙관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드러낸다. 

 

결국 그 세계로 들어간 새엄마와 뱃속의 동생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서, 마히토는 그 곳에서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그곳에서, 도형으로 된 블록을 쌓아 균형을 맞추려는 오랜 선조인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탑에 매혹되어 그 탑을 둘러싸는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사라진 인물이다. 아마도 막부 시절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등장은 서구 열강의 등장으로 서구의 과학기술과 사상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하려했던 그 혁신의 끝단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세계로 넘어와 서구의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여 완벽한 세계를 꿈꿨지만 그 결과는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균형 아래 놓여있다. 그걸 상징하듯 도형모양으로 쌓여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는 블록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제안한다. 자신이 실패한 것을 후대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펭귄 대왕이 휘두른 단칼에 그 블록이 무너져 내리고 그래서 이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망한 일인가를 드러낸다.

 

결국 판타지는 떠났던 자가 그 환상의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히토는 이세계의 대혼돈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새엄마를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마히토가 가졌던 그 복잡한 심경들은 이세계의 모험 과정을 통해 정답은 아니지만 어떤 해답을 찾아낸다. 새엄마를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선 모험이지만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소녀였던 엄마가 결국 훗날 화염 속에서 죽을 걸 알면서도 현실로 돌아가는 그 선택을 통해서다. 그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파괴하기도 하는 이 혼돈 속에서도 판타지라는 환상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들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수업자 아버지의 모습이나, 펠리컨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대목 등을 통해 이 작품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사적 경험들을 모티브로 해서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넘어오는 일본의 역사적 변화가 만들어낸 현재를 판타지를 통해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건 군국주의 미화보다는 그런 선택이 결국은 실패했고 그러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것에 가깝다. 친절한 작품이 아니고 은유와 상징이 많이 들어 있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도 호불호도 나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사적인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판타지의 세계까지 하나로 품어낸 야심작이 아닐 수 없다. (사진: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물다섯 스물하나’, 시대와 대결하는 이주명

스물다섯 스물하나

“내 친구가 또 맞았어. 학주가 내 친구 뺨을 때리고 머리를 때리고 결국 입술에 피가 터졌어. 구경하던 애들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어. 학주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모든 상황들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흘러갔고 나는 이 당연함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경찰을 불렀어. 근데 경찰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았어.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그럴 줄 알았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이 너무 자연스럽더라. 나는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꼭 말하고 싶어. 이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 일이 오늘 태양고등학교에서 일어났고 그 일을 반복하는 폭력교사 이름은 서영성이야.”

 

tvN 토일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지승완(이주명)은 자신이 하는 해적방송을 통해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교사의 폭력을 폭로했다. 지승완의 절친 문지웅(최현욱)이 신창원 티셔츠를 입고 와 생긴 사단이었다. 그건 물론 문지웅의 잘못일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교사의 상습적인 폭행이었다. 말로 타이르고 꾸짖을 수 있는 문제에 그는 당연한 듯 먼저 손을 들었다. 입술에 피가 터지는 문지웅을 보며 결국 참다못한 지승완이 “그만 두라!”고 소리쳤다.

 

전교 1등. 그리고 수능을 한 달여 남긴 고3. 폭력교사는 교칙을 내세워 지승완이 한 방송을 문제 삼는다. 그래서 방송을 금지하고, 반성문을 쓴 후 이를 공개 낭독한 후 자신에게도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시킨다. 하지만 지승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다. “지웅이한테는 사과하셨어요?” 폭력교사가 ‘징계’라고 한 표현을 ‘폭행’이라고 정정하고, ‘말조심’하라는 교사의 말 앞에 ‘손조심’ 하라고 되받는다.  

 

결국 굴복하지 않고 폭력교사와 맞선 지승완은 ‘자퇴’를 결정한다. 때론 부러지기보다는 구부러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그걸 알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엄마도 지승완의 그 뜻을 이해하고 딸을 꼭 껴안아줌으로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 해의 수능을 포기하고 대신 검정고시를 쳐야 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결코 굴복할 수 없는 뜻. 지승완의 이 행보는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그 시작점에서 내세웠던 “시대와 싸우는” 면면을 다시금 드러낸다. 

 

지금 돌아보면 당대의 체벌은 부당한 폭력이 분명했지만, 마치 당연한 교권인 양 받아들여지곤 했던 일들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멜로로서 이들이 당시 겪은 ‘시대의 문제’로서 체벌을 가져온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체벌과 싸우는 인물이 나희도(김태리)나 문지웅이 아니라 전교 1등이자, 반 아이들의 신뢰가 두터운 모범생 지승완이라는 점이다. 자퇴 같은 선택을 한다면 가장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인물. 그래서 그가 모든 걸 버리고 싸우는 모습은 이 ‘시대와의 대결’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낸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IMF라는 시대의 무게감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로 문을 연 바 있다. 나희도는 펜싱부가 사라졌고, 백이진(남주혁)은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 청춘들은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이와 맞선다. 나희도는 학교를 옮겨 다시 펜싱을 시작해 국가대표가 되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거머쥔다. 백이진은 고졸이지만 어렵게 방송사에 취업해 적응해나간다.

 

이들이 시대와 싸워 이렇게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준 응원과 위로 덕분이다. 물론 여기에는 폭력교사 같은 잘못된 어른들과는 사뭇 다른, 양찬미(김혜은) 코치나, 딸이 똑 닮은 지승완의 엄마 같은 어른들의 지지가 있어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담아내고 있는 시대와 대결하는 청춘들과 그 속에서의 어른들의 역할이, 현재의 청춘들과 기성세대에 대한 어떤 시사점을 제시하는 건 그래서다. 

 

세상은 어떻게 나아지는가. 그건 어쩌면 부당한 것들에 굴복하기보다는 싸워 바꾸려는 젊은 세대들의 대결로 시작되는 일일 게다. 물론 거기에는 지승완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용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청춘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기성세대들이 필요하다.

 

지승완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 건 이 역할을 찰떡 같이 소화해낸 이주명이라는 배우의 연기 덕분이다. 전면에 선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변 친구 역할로서 분명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것.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낸 지승완이라는 인물처럼 이 배우 역시 자기 색깔을 앞으로의 필모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내기를 기대한다.(사진:tvN)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디스토피아에 담아낸 것

지옥

인간은 왜 지옥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만들어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논쟁적이다. 지옥의 실재를 믿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의심이 그 질문 안에 담겨 있어서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은 논쟁적이다. 미리 말해두면 이 드라마에 흔히 불길이 치솟는 아비규환으로 그려지곤 하는 그런 진짜 지옥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지옥의 사자’라 불리는 괴 존재들이 등장한다. 갑자기 유령처럼 어떤 차원을 뛰어넘어 나타난 이들은 사전에 ‘지옥행’을 ‘고지’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다짜고짜 폭력을 가해 피와 살점이 튀는 처참한 광경을 마치 보여주려 작정한 것처럼 ‘시연’한 후, 손을 모아 만들어내는 빛 속에서 순식간에 뼈의 형상 정도만 남겨놓는 재로 만들어버린다. 그건 물론 괴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광경이지만,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면 일종의 ‘재난’에 가까운 일이다. 즉 어느 날 길을 가다 갑자기 날아온 벼락에 맞아 온몸이 타버리며 죽는 그런 일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재난이 지옥이 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걸 사전에 고지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한 시간 후에 어떤 이들은 일주일 후 혹은 10년 후에 지옥행을 고지 받는다. 자신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도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는 건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도 그렇지만,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은 그의 삶조차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재난이 더더욱 견디지 못할 지옥이 되는 건,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다. 재난 자체가 무슨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을까. 갑자기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아무 의미 없고 맥락도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지옥을 창조한다. 그가 죽은 건 그냥 벌어진 일이 아니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생전 나쁜 짓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정반대로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서사도 만들어진다. 결국 지옥이란 불가항력의 운명이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수 있는 인간이 살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일 수 있다. 

 

<지옥>에서 새진리회라는 신흥 종교를 만들어낸 정진수(유아인)는 그 자신도 10년 전 지옥행 고지를 받은 자로서 이런 일들이 ‘죄’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재난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지옥행을 ‘신의 의지’라 설파하면서 사람들을 새진리회로 끌어들인다. “신이 왜 그런 기괴한 일을 벌이는 걸까요? 저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근데 그걸 알 수가 없었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으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아마 엄청난 폭동과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올 거예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이런 기괴한 일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다...” 정진수는 그렇게 신과 종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는 과연 인간을 구원했을까. 지옥행이 벌어지는 그 끔찍한 장면들은 ‘시연’이라는 이름으로 생중계되고, 이런 공포를 이용해 새진리회는 세력을 키워간다. 지옥행을 당한 이들은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그 가족들의 신상마저 공개되어 새진리회 광신도 단체인 화살촉 단원들의 테러를 당한다. 하지만 거짓의 증거들이 곳곳에서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자(죄가 없는데도 지옥행 고지를 받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진실을 가리기 위해 새진리회는 유지사제(류경수) 같은 행동대장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종교전쟁이나, 종교를 내세운 폭력의 공포로 세력을 키워가는 급진 무장단체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진짜 지옥은 저 갑자기 나타나 무작위로 사람들을 죽이는(이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은유하는 것일 게다) 그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할 수 없어 만들어낸 거짓으로부터 탄생한다는 걸 <지옥>은 보여준다. 물론 종교는 삶의 또 다른 선택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내세워 인간을 미혹하는 사이비들이 판치는 세상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종교만이 아닌 정치나 경제에서도 똑같이 해당하는 이야기일 게다.(글:PD저널,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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