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부터 드라마까지, tvN에 대한 너무 높은 기대치들

 

tvN <치즈 인 더 트랩>이 드라마 후반부에 이르러 겪은 갖가지 논란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역시 최고의 시청률과 화제를 이끌었던 <응답하라 1988>이 엔딩에 이르러 누가 누구와 결혼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뜨거운 논쟁들은? <꽃보다 할배>부터 <삼시세끼>, <꽃보다 청춘>까지 내놓기만 하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던 나영석 PD표 예능에 대해 최근 들어 힘이 빠졌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치즈 인 더 트랩(사진출처:tvN)'

사실 tvN은 작년 한 해 동안만도 어마어마한 성장을 만들었다. 그 전면에 섰던 건 나영석 PD와 신원호 PD였다. 나영석 PD<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로 케이블로서는 그간 넘지 못할 벽이라 여겼던 두 자릿수 시청률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면, 신원호 PD는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거푸 성공시키며 대표적인 tvN표 드라마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나영석 PD와 신원호 PD의 콜라보레이션은 지금 방영되고 있는 <꽃보다 청춘> 나미비아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확실한 시너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명의 블록버스터급 프로그램들의 성공에 힘입어 <집밥 백선생>이나 <수요미식회> 같은 레귤러 프로그램들 역시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렇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형국이 만들어졌고, 이제는 두 사람이 아니라도 <미생>에 이어 <시그널>까지 대박을 낸 김원석 PD표 드라마가 또 한 축의 성공을 만들어내며 tvN의 브랜드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지상파 드라마에 식상해했던 시청자들은 이제 tvN의 영화 같은 장르드라마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연전연승과 승승장구에는 그만한 고민거리도 생기기 마련이다. <치즈 인 더 트랩><응답하라 1988>의 멜로를 두고 벌어진 설전이 말해주는 것처럼 tvN 드라마들은 비상한 대중들의 관심만큼 그것이 엉뚱하게도 논란으로 이어지거나 심지어 스포일러로 이어져 제작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이런 승승장구하는 대박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들은 높아진 기대치 때문에 부담감도 그만큼 늘어났다. <치즈 인 더 트랩>에 이어 그 바톤을 이어받은 <피리부는 사나이>가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2회만에 3.6%(닐슨 코리아)라는 꽤 괜찮은 시청률로 순항하고 있지만 이런 흐름은 또 이어질 후속작에 대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CJ로 와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작을 내지 않은 나영석 PD의 부담감은 그 누구보다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여전히 뜨겁지만 <꽃보다 청춘> 시리즈가 과거만큼 흥미진진하지 않다는 반응들 역시 적지 않게 등장하는 건 여러 차례 반복된 시리즈의 피로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다시 <삼시세끼>로 돌아가는 것도 그다지 좋은 선택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 CP급이 된 나영석 PD는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후배 PD들을 지원해주고 밀어주는 역할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은 1년에 하나 정도 천천히 준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당연한 선택이고 또 바람직한 선택이다. 너무 많은 기대감으로 인해 나영석 PD가 큰 부담감을 갖는 건 방송사로서도 또 그의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시청자들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일이다.

 

지상파와 비교해 소소한 시청률을 기록했던 몇 년 전이라면 tvN의 이런 성과는 부담이라기보다는 축하할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상파와 본격적인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높아진 위상만큼 그걸 지켜내기 위한 고민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그 흐름이 지속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피리부는 사나이>, 시청자와의 협상 성공하려면

 

의문의 피리부는 사나이와 협상전문가의 대결. tvN <피리부는 사나이>의 첫 회는 독일의 전래동화인 피리부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로 피리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어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펼쳐지는 광경은 무슨 일인지 건물을 점거하고 투쟁하는 사람들과 진압하는 전경들의 모습이다.

 


'피리부는 사나이(사진출처:tvN)'

이 한 장면은 이 드라마의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피리부는 사나이가 어떤 존재인가를. 그는 우리 사회 현실 속에 존재하는 부조리가 잉태한 괴물이다. 그는 피리를 불어 아이들을 조종(?)했던 것처럼 그 부조리한 현실 앞에 분노하는 사람들을 조종해 테러를 자행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스스로도 그 잘못된 현실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인물일 것이다.

 

그와 대결하는 협상전문가 주성찬(신하균)피리부는 사나이가 그의 연인을 인질로 삼게 만든 후 자신의 실체를 밝히라는 요구에 스스로를 영웅이 아니라 사기꾼이자 협잡꾼이라고 말한다. 필리핀에 억류된 인질들을 협상을 통해 구해내는 과정에서 한 사람을 희생하게 만들었던 사실을 토로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숫자로 봐왔던 자신을 털어놓으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인질극을 벌인 테러범에 의해 주성찬의 연인과 또 한명의 협상전문가가 될 여명하(조윤희)의 삼촌(그를 거둬 키워준)이 희생당한다. <피리부는 사나이>의 첫 회가 보여준 건 결국 자신의 연인이 협상 과정에서 죽음을 맞게 되면서 각성하게 될 주성찬과 삼촌의 죽음을 통해 협상전문가로 다시 태어날 여명하의 등장이다.

 

tvN 장르 드라마가 그래왔듯이 <피리부는 사나이>는 영화적인 스케일의 영상과 빠른 스토리 전개를 보여준다. 협상전문가라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인물군의 소재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딘지 깊은 몰입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시그널>이 만들었던 그 몰입감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무언가가 빠져 있는 듯한 인상이 짙다. 도대체 그 빠진 한 조각은 무엇일까.

 

첫 회여서 주인공인 주성찬과 여명하의 캐릭터에 집중하다 보니 테러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들의 면면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다. 필리핀에 억류되어 협상과정에서 죽게 된 희생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그 희생자의 동생은 어떤 사람인지가 첫 회의 내용 중에는 빠져있다. 그저 전형화된 억류된 인물들과 테러범 정도로 그려진 것. 마치 주성찬이 협상 과정에서 인물을 숫자로 바라보는 것처럼, 첫 회의 희생자들은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주인공들을 설명하기 위해 내세워진 숫자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아마도 첫 회이고 도입부이기 때문에 희생자들까지 그 세세한 스토리를 그려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그널>이 그랬던 것처럼 <피리부는 사나이>가 더 깊은 몰입감을 만들어내려면 주인공들인 주성찬과 여명하의 협상전문가로의 면면만큼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대가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협상전문가의 영웅담에 그칠 수 있다.

 

사실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주인공보다 더 주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은 악역인 피리부는 사나이거나 그로 인해 희생되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또 다른 희생자들일 수 있다. 그 한 조각이 좀 더 극명하게 채워져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는 거기서부터 다시금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손님>, 타자에 대한 폭력은 어떻게 일어날까

 

<손님>은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다. 유명한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갖고 있지만 1950년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겹쳐지면서 무국적성의 이야기는 특수한 우리네 상황의 이야기로 전화된다. 공포를 다루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판타지가 있고 그 안에는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이 은유적으로 담겨져 있다. 중요한 건 공포가 갖고 있는 장르적 속성 따위가 아니다. 대신 그 공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진출처:영화 <손님>

이 공포의 연원은 제목에 이미 들어가 있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이 제 집처럼 생각하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다. 그런데 만일 주인들이 손님을 철저히 타자로 바라보고 낯선 이방인으로 경계를 그어버린다면 어떨까. <손님>의 피리 부는 사나이 우룡(유승룡)이 아들 영남(구승현)과 들어가게 된 마을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마을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그 마을사람들이 외부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우룡은 아들 영남의 이름을 설명하며 호남에서 태어났지만 이름은 영남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호남과 영남으로 대변되는 오랜 세월동안 반복된 지역갈등과 경계, 타자화를 적어도 우룡과 그 아들은 뛰어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자신들을 타자로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건 그래서 오로지 이 우룡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우룡이 가까워지는 걸 탐탁찮게 바라보는 이도 있다. 그것은 이 배타적이고 고립된 마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촌장(이성민)이다.

 

마을 사람들이 촌장과 공동운명체가 된 이유로 원죄가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네 불행한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짓밟은 땅 위에 세워진 공동운명체는 그래서 공포를 기반으로 유지된다. 쿠데타의 이미지와 그로 인해 권력을 쥐게 된 권력자의 이미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전쟁의 이미지 그리고 고양이를 잡아먹는 쥐의 공포는 두렵지만 이 마을이 유지되는 이유다. 공포로서 유지되는 마을과 지도자가 독재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와 이 마을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를 신비로운 피리소리로 물러나게 만드는 악사는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권력 유지 기반을 지워내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촌장과 악사는 약속으로 맺어지지만 그 약속이 파기되면서 죽고 죽이는 비극은 시작된다. 공포는 이미 주인과 손님,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이미 심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구분이 비정상적인 이 마을의 권력체계를 유지하는 기반이었으며, 따라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그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것이다.

 

<손님>이 놀라운 건 이 작은 마을의 가상의 이야기 속에 우리네 현대사의 비극들을 대부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대적 배경으로 한국전쟁의 상황을 두고 있다는 건 이처럼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시선이 바로 그 비극적인 전쟁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공포와 권력의 이중주는 우리네 비극적인 현대사를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손님>은 그러나 이러한 사뭇 현대사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판타지와 영상 미학 또한 담아내고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가진 그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그림들은 그래서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우룡이라는 주인공을 악사이자 광대로 세워놓은 것은 그래서 이런 영화 미학과 맞물려 잘못된 권력의 악순환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예술의 힘을 에둘러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은 이처럼 그 미적인 장치를 통해서 현실과 대적한다.

 

<손님>은 한 가지로만 해석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상징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어떤 주석을 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네 현실이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들이 권력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이어야 마땅한 우리들이 어쩐지 늘 손님으로만 대해져 왔다는 그 불편함 때문이 아닐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