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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결녀'와 '섹스 앤 더 시티'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우리는 무엇에 열광했을까. 그녀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절절한 공감일까. 아니면 뉴욕이라는 먼 거리에 있는 도시공간이 제공하는 로맨틱한 판타지일까.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뉴욕은 서울이라는 현실공간이 갖지 못하는 판타지를 준다. 화려하고 세련된 패션과, 파티와, 모닝 커피와 브런치. 그리고 당당한 여성들의 일자리와 능력있는 남자들과의 로맨스. 물론 그것은 완전한 현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역만리에서 매일매일 일과 결혼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공간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이하 아결녀)'는 '섹스 앤 더 시티'의 한국판이다. 서른 네 살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노처녀 셋이 일과 사랑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드라마. 거기에는 방송국 기자라는 선망의 직업을 가졌지만, 나이든 여자라는 이유로 퇴출 일순위로 몰리는 이신영(박진희)이 있고, 동시통역사로서 세계를 비행하며 능력을 보이지만 늘 남자에게 채이는 정다정(엄지원)이 있으며, 한 때 한 남자의 뒷바라지만을 하며 살아오다 문득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선회한 김부기(왕빛나)가 있다.

그녀들은 겉으로 바라보면 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어떤 판타지적인 동경의 대상들이다. 그들은 이미 전문직종에서 뛰고 있는 인물들이고, 그녀들의 라이프 스타일, 즉 패션이나 파티문화, 멋진 음식들 같은 것들은 보는 이를 충분히 설레게 만든다. 그녀들은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의 미혼이라는 사실이 외롭고 힘겨운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여유 있는 삶 속에서 여전히 로맨스를 꿈꾸는 배부른 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어 하지만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와 오히려 전문직 종사자라는 점이 그것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또래의 미혼 남자라면 능력 있는 나이 많은 커리어우먼보다는 그저 평범해도 더 젊은 여자를 원하기 마련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게다가 그 나이까지 버텨온 캐리어우먼의 직장생활이 그다지 순탄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겹다고 토로한다.

여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거리감이 존재한다. 보여지는 삶은 판타지인데, 그녀들은 현실이 힘겹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이런 거리가 생겨나는 걸까. 이것은 우리가 '섹스 앤 더 시티'를 바라보는 그 마음과 일치한다. 어쩜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동경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 한 구석에 그 판타지를 몰아내는 자신이 서 있는 서울이라는 현실 공간의 힘겨움. 뉴욕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부모들의 차가운 눈 아래 어쨌든 결정해야 하는 이 땅의 결혼이라는 현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안타깝게도 배경이 뉴욕이 아니다. 바로 현실 공간 서울이 그 배경이다. 그러니 그녀들이 꿈꾸는 판타지는 현실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아결녀'는 일과 사랑 사이에 서서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드라마지만, 뉴욕만큼의 거리를 둘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 판타지에 쉽게 빠져들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을 자꾸 떠올리다 보면, 심지어 '아결녀'의 전문직 여성들이 힘겹다고 토로하는 부분이 엄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들은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이고, 그녀들 주변에는 여전히 한의사, 파일럿, 가수같은 직업을 가진 잘난 남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래서 아마도 아직 결혼은 못했지만 결혼을 꿈꾼다는 의미의 이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는 제목은 몇 가지 다른 뉘앙스로도 읽힌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 혹은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아직도 결혼이라는 걸 굳이 하고 싶어하는 여자'.

이처럼 '아결녀'는 깊이 현실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공감하기가 어렵지만, 그저 하나의 판타지로서 바라보면 꽤 괜찮은 재미를 선사하는 드라마다. 문제는 작금의 취업난이나 정리해고 같은 직장의 현실이 너무 첨예해 언뜻 언뜻 그 판타지 속에서도 자꾸만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거리가 바로 우리네 성공한 커리어우먼들이 갖는 그대로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능력 있고 당당한 그녀들은 뉴욕의 삶을 꿈꾸지만 여전히 결혼이라는 틀 속에 가둬두는 현실.

Posted by 더키앙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

‘공부의 신’이 가진 현 교육제도에 대한 태도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천하대(사실상 서울대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다)를 가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반은 전형적인 우리네 교육 정책의 엘리트주의를 그대로 답습한다. 특별반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은 그래도 선택받은 아이들이지만 나머지 병문고 아이들은 거꾸로 버려진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물론 천하대 특별반을 만드는 강석호(김수로) 변호사는, 늘 그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룰 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룰을 바꾸기 위해서 천하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위해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답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한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는 ‘공부’라는 말이 이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공부의 신’과 잘 어울리는지도 의문이다. 항간에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입시의 신’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입시를 위한 문제풀기의 방법을 익히는 과정을 주로 보여준다. 문제풀기와 실제 배움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논란거리들에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거꾸로 현실에서 찾아진다. 아마 드라마가 우리네 교육 현실을 실감나게 다루지 않고 그저 뜬구름 잡는 이상만 떠들어댔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이상적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교육현실은 한창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입시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이 참담한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교육을 다루는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부의 신’은 바로 그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드라마의 바탕으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는다. 만일 현실을 현실 그대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려냈다면 ‘공부의 신’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혹은 아이들 공부할 시간에 굳이 이 드라마를 보며 현실의 씁쓸함을 곱씹을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현실 상황 위에 그것을 넘어서는 판타지를 집어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이 현 교육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대리 체험하는 쾌감을 제공했다. 물론 ‘수학의 신’ 차기봉(변희봉) 선생이나, 춤과 노래를 하는 앤써니 양(이병준) 같은 영어 선생이 학교에서(아마 학원에서는 가능할 것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천하대 특별반에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고, 그 사연을 넘어서 도전하는 모습과 이를 도와주는 선생들의 이야기는 지친 수험생과 부모들에게 드라마가 주는 작은 위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공부의 신’은 보다 강력한 양념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판타지 위에 지극히 실용적인 공부의 방법(문제 푸는 방법이 더 많지만 이것이 더 실용적이다)들을 제공한 것. 영어문장을 독해할 때, “단어를 모르더라도 찾아보지 말고 일단 때려 맞춰라”라는 방법이나, 수학문제를 풀 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서로 문제를 내보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 이 실용적인 정보들은 판타지와 만나면서, 판타지를 더욱 강화하는 힘을 부여한다. 저렇게 공부하면 나도 천하대(사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다르지만.

‘공부의 신’의 성공방정식은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이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은 후, 추가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스토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힘은 이 드라마가 “기존 잘못된 교육정책을 결국은 인정하고 심지어는 부추기고 있다”는 그 논란의 불씨마저 압도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해 우리는 양가감정을 갖게 된다. 드라마의 내용에 강력히 공감하면서도(현실적인 공감),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그 마음. 드라마의 성공이 그만큼 현실의 실패를 말해주는 그 씁쓸한 상황, 이것이 ‘공부의 신’의 성공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그들로 와서 우리들로 끝난 ‘그사세’의 긍정론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 어찌 보면 그 답이 명징해보이는 이 질문에 이 드라마의 묘미가 숨겨져 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 그리고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연기자들이 만들어 가는 이 드라마에 관심이 쏠렸을 때, 우리는 그 제목 속 ‘그들’이 방송가, 특히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드라마를 만드는 그들의 이야기?
그것은 사실이었다. 준영(송혜교)은 펑크가 나버린 드라마 촬영 분을 채워 넣기 위해 현장에서 자동차 질주 신을 찍고 있었고, 지오(현빈)는 그 날 방영 분을 급하게 편집하고 있었다. 까칠하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는 현장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고, 양수경(최다니엘)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며 현장에서 굴렀다. 김민철(김갑수)은 데스크에 틀어 앉아 시청률표를 보고 있었고, 윤영(배종옥)은 촬영장 자신의 차량에서 로드 매니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또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와 준영과 지오처럼 헤어졌다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또 각자만의 이유로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며, 양수경처럼 저 혼자 사랑하다 상처받기도 하고, 윤영과 민철처럼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순정 어린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손규호와 장해진(서효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드라마와 현실을 비교하며 의견충돌을 할 때다. 그들은 삶이 드라마 같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 속에서처럼 쿨한 사랑과 쿨한 이별을 하지 못하고 구질구질하며 때로는 신파가 되고 때로는 상투적인 대사로 가득 채워지는 현실을 비교하면서 드라마 속 삶과 현실의 삶은 다르다는 것을 관조해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상상하는 판타지로 가득한 사랑이 현실적인 사랑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드라마와 현실을 관조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조금씩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러한 관조적 입장을 취하게 해주는 것은 두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지오와 준영이 자신들이 만드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을 관조한다면, 이 나레이션은 바로 한 차원 더 위에서 지오와 준영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과정들을 내려다본다. 즉 이것은 외부적인 시선이거나, 작가의 시선이거나, 어쩌면 모든 걸 다 겪고 난 지오와 준영이 후에 그 때의 상황을 돌아보는 시선 같은 것이다. ‘그사세’에서 지오와 준영은 드라마 밖에서 자신들이 삶을 관조한다 생각하지만, 이 나레이션으로 대변되는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결국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바로 이 지점은 드라마 밖과 드라마 안이 만나는 곳이 된다.

판타지보다는 꿈꿀 수 있는 현실을 선택하다
마지막회에서 준영의 나레이션은 지오가 했던 “모든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말을 얘기하면서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가의 다짐과 같다. ‘그사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삶은 드라마처럼 달콤하고 쿨하지 않지만 어떤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는 노희경 작가의 다짐. 노희경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판타지와는 다른,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그리고 그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얘기하려 했다. 함께 싸우고 만나면서 드라마와 현실의 괴리를 체험한 지오와 준영이 함께 드라마를 찍으며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키스신에서 자신들의 키스를 상상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드라마 밖에서 여전히 현실에 치이지만 드라마 속의 세상을 꿈꾸는 그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는 만들 수 없을 거다.” 이 나레이션처럼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결국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판타지로 가장된 현실도 아니고, 그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쿨하지 못한 삶 속에서 허우적되는 그런 현실도 아니다. 그것은 어려워도 꿈꿀 수 있는 현실이다. 매일 밤샘촬영에 추위와 싸워가며 버텨내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드라마를 꿈꾸는 그들처럼, 실제는 7%의 시청률이 나온 드라마지만, 그 속에서 27%의 시청률을 받아 쥔 주인공들이 킥킥대며 웃게 해주는 그 꿈꿀 수 있는 현실. 우리가 이 드라마를 보며 어떤 따뜻한 위안 같은 것을 받았다면 바로 이 노희경 작가가 우리에게 전해준, ‘어려워도 꿈꿀 수 있는 현실’을 그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더키앙

현실에서 드라마를 꿈꾸거나 드라마를 현실처럼 만들거나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의 9,10회의 부제인 ‘드라마처럼 살아라’는 말은 정지오(현빈)가 주준영(송혜교)에게 무심코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두고 있다. 드라마 PD로서 무언가 멋지게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당장 초짜 작가와 함께 단막극을 만들어야 하는 정지오는 까칠하고 인간미 없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에게 자격지심까지 느낀다.

그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래도 사랑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오픈카를 타고 멋지게 차려입고는 어딘가로 주준영과 드라이브를 가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드라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초라한 현실을 갖고 있는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저 건물이 내 거야”하고 말하는 주준영의 어머니를 만나고는 심지어 자신이 만나고 있는 주준영 마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주준영에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만신창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같이 쿨해 보이던 그녀의 삶은 사실은 참 구질구질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당장 발을 디디고 철야를 밥먹듯 하며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하는 현장과, 그 속에서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애인 정지오 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바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은 또한 좋은 드라마와 인기 있는 드라마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정지오와 손규호로 대립되는 이 시청률은 낮아도 좋은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아도 늘 그게 그거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과의 괴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정지오가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드라마는 도피처”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끄집어내는 드라마와,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드라마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선택한다. 이것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선택은 무엇일까. 표민수 PD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반(半)다큐멘터리적인 드라마다. 즉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만일 이 드라마가 판타지를 만들려 했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좀더 치열하게 극화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애인 정지오에 대한 주준영의 그리움이 절절할 테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온에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장면이 담담할 정도로 스케치에 머무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판타지보다는 현실 선택’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현실인 그들이 전혀 드라마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환상) 같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어쩌면 거꾸로 현실성보다는 판타지에 몰두하는 드라마들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만일 현실 같은 드라마가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적어도 이 현실 가득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처럼 사는’ 셈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을 그리며, 이것은 노희경 작가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드라마를 보는 이들까지 드라마처럼 살게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Posted by 더키앙

환타지 시대극 ‘에덴의 동쪽’, 역사왜곡보다 위험하다

‘에덴의 동쪽’의 기획의도에는 아무런 시대극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질 않는다. 거기에는 대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사랑, 심지어 영혼(정말?)까지를 되찾는 휴머니즘의 이야기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가 어떤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타지가 어떤 시대를 그릴 때는 신중해져야 한다. 드라마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은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재해석이 시대정신 자체까지 변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60년대 사북 탄광촌에서부터 시작된 두 가족의 애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역사는 탄광업주인 신태환(조민기)과 노조위원장인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신태환의 사주로 이기철이 죽게되면서 양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아들이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복수극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의 한 동력이 신태환의 이기철 살해에서 비롯된다면, 그 복수극과 동시에 진행되는 화해극은 이미 시청자들이 이 철천지 원수들의 두 아들이 바뀐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복수와 화해가 교차하는 그 운명의 쌍곡선은 이 드라마에 극적인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획의도에도 없는 시대극에 대한 징후들이 이 두 가족의 역사 속에 무차별로 끼여든다는 점이다. 탄광촌의 노사분규와 건설회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학생운동과 고문통치, 전투기 도입과 로비스트 이야기 등등. 그것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무작위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시대풍경의 꼭지점 위에는 신태환 혹은 신명훈(박해진)이 한 축을, 그리고 나머지 꼭지점 위에는 이동욱의 아들 이동철(송승헌)과 이동욱(연정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마치 그 시대에 벌어졌던 대립을 표징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 밑그림 위에 얹어진 인물들의 관계가 심상치가 않다. 먼저 이 뒤바뀌어진 아들들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그것이 지속되고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파국(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회한)을 예고하게 만든다. 이미 그 엇갈린 운명을 알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대립은 안타까운 운명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의 대립이 결국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식의 이런 스토리 구조는 그 밑그림에 깔려있는 시대의 문제 또한 너무나 간단하게 화해의 장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양산했던 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혹은 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적인 핏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 두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난히 많은 이 드라마 속 원수지간의 사랑은 이동욱과 언론재벌 대한일보 민회장의 딸인 혜린으로 이어지고, 신명훈에게 겁탈 당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는 지현(한지혜)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이동철의 여동생인 기순(전소민)은 자신을 납치한 왕건(김형민)을 오히려 살려주고 점점 가까워진다. 이들에게도 보이는 것은 원수가 저지른 사회적인 문제들(범법행위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가 연거푸 외쳐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혹은 상투적인 종교적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이상한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동철의 아버지 이기철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고 남긴 그 애매한 말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자식이나 아버지라도 응당 그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지점에서 “그래도 핏줄인데...”하고 우리네 혈연 중심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신태환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한다”는 그 논리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생존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시대의 아픔을 조장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정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론 역사왜곡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Posted by 더키앙

‘비몽’,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김기덕 감독의 ‘비몽’은 이 단순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오다기리죠)이 꾸는 꿈은 란(이나영)의 현실이 된다. 즉 진이 꾸는 꿈을 란은 몽유병 상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영화의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진은 꿈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집착적으로 찾아가고, 바로 그 순간 란은 이미 헤어져 만나는 것조차 끔찍한 남자친구를 몽유병상태에서 찾아가게 된다.

의사인지 심령술사인지 모호한 여자(장미희)는 이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문양, 즉 하얀 색과 검정 색이 서로 선과 바탕으로 이어진 글씨를 보여주며 알쏭달쏭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입니다.” 문양을 하얀 색으로도 검정 색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음각과 양각이 요철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인 것처럼, 진과 란은 그것이 꿈과 현실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장자몽을 연상케 하는 나비와, 중간에 진과 란이 찾아가는 절에서 드러나는 불교의 연기설과의 조합이다. 란만 떼어내서 본다면 그녀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진)의 꿈일 뿐이다. 연기설로 본다면 꿈꾸는 진은 어쩌면 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진은 또 다른 삶 속(란)에서는 누군가를 버리는 것으로 악연이 이어진다. 바로 이 연기설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이지만 반복적인 두 인물을 영화는 동시공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추상적인 메시지를 생생하게 구상화하는 영상 미학에 있다. 꿈을 통해 두 인물이 만나는 과정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의 꿈에 의해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과정, 이 끝없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충분히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도 이 관념적 상상을 형상화해낸다. 김기덕 감독은 이 무거운 관념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곳곳에 특유의 유머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진이 입고 나오는 검은 색 계열의 의상과 란이 입고 나오는 흰 색 계열의 의상은 저 의사가 말한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이라는 관념적인 말을 색채의 어울림으로 보여준다.

불교적으로 보면 이 끝없는 환생은 덧없는 꿈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기 위해(해탈) 정진하게 된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목각을 하는 진이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불교적 색채 때문이다. 그는 마치 생(生)이라는 나무토막에 어떤 집착적인 욕망을 가지고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면은 이 끝없는 욕망으로 생에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행위가 결국은 끝없는 자신의 고통(환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표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을 아무런 소통의 장치 없이 영화 속에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진의 일본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또 우리의 한국말을 진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 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목은 어쩌면 이 영화가 또한 김기덕 감독이 꾼 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김기덕 감독은 ‘비몽’을 통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끝없는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바탕 나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어쩌면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몽’은 당신이 꾸는 꿈(욕망)이 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또한 덧없는 슬픈 꿈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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