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화영의 <청춘시대>, 어째서 공감될까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에서 강이나(류화영)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다.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서 그녀는 다른 청춘들과는 삶 자체가 다르다. 일단 대학생이 아니고 그래서인지 연애와 일에 있어서도 다른 청춘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좋게 표현하면 연애를 일로서 하고 있고(스폰서를 받는다), 나쁘게 표현하면 그녀 스스로도 말하듯 몸을 팔아 살아간다. 그러니 청춘의 연애가 갖는 아픔이나 상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또 미래의 일자리를 위한 고군분투도 없다. 다만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청춘시대(사진출처:JTBC)'

그녀가 벨 에포크에서 일종의 왕따를 겪게 되는 건 대학생이 아니라는 걸 숨겼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쁜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예은(한승연)에게는 그녀의 자유로운 남성 관계(?)를 일종의 더러움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녀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강이나를 더럽다고 말함으로써 힘겨운 자신은 깨끗한 사랑을 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 결국 술에 취한 강이나가 같이 사는 친구들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게 되고 그것이 그녀가 다시 벨 에포크에서 살게 되는 이유가 되지만 그녀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예은과 강이나의 문제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예은의 그 나쁜 남자친구가 강이나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치자 그녀는 절망하며 강이나를 더러운 창녀로 몰아세운다. 예은은 강이나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못되게 굴지만, 결국 힘겨워 엇나가는 예은을 보호해주는 건 강이나다. ‘강언니로 불리는 강이나라는 캐릭터는 이 가녀린 청춘들 속에서 일종의 해결사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연애만이 아니다. 일에 있어서도 강이나는 청춘의 현실에 일종의 냉소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알바를 세 개나 하며 현실에 찌들어 살아가는 윤진명(한예리)에게 강이나는 왜 그렇게 어렵게 사냐쉽게 사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자체가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처럼 여기는 윤진명은 강이나의 삶이 잘못 됐다고 부정하지만, 매니저가 내미는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녀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이나는 이처럼 <청춘시대>라는 드라마에서 연애와 일에 걸쳐져 있으면서 때로는 해결사 역할을 때로는 현실에 대한 냉소를 보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 벨 에포크의 청춘들 사이에서 방외자 혹은 왕따 같은 존재이지만 그들을 걱정하고 때로는 문제를 해결해주려 노력하며 그들을 둘러싼 현실에 온 몸으로 냉소를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강이나를 연기하는 류화영이라는 배우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과거 왕따 사건으로 티아라에서 방출된 화영이란 이름의 가수가 이제는 어엿한 배우의 자리로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적어도 <청춘시대>에서 그녀는 류화영이 아니면 다른 누가 가능했을까 싶은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강이나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한 때 시련을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강이나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젊은 배우답지 않은 다채로운 얼굴들을 보여주고 있다. 섹시한 이미지에서 통쾌한 걸 크러시의 느낌은 물론이고 과거의 아픔을 트라우마처럼 갖고 있는 처연한 느낌까지 그 한 캐릭터를 통해 소화해내고 있는 것. 그녀에게 <청춘시대>는 그래서 남다른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티아라의 화영에서 이제 배우 류화영으로 돌아온.

화영을 퇴출하고 티아라는 괜찮을까

 

코어콘텐츠미디어 김광수 대표의 중대발표는 예상한대로 그간 왕따설로 논란이 되어 온 티아라의 화영이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약 해지를 선택한다면 화영의 잘못이 있다는 얘긴데,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한 김광수 대표의 입장을 적은 전문을 보면 그것이 참 애매하다. 표현대로라면 ‘돌출행동’이 문제였다는 것인가.

 

 

티아라(사진출처:KBS)

"단체 생활이란 누구 하나가 잘 났고 누구 하나가 돌출행동을 하면 팀의 색깔이 변하고 구성원 자체가 흔들린다." 돌출행동. 전문에 들어있는 이 표현은 기묘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군대에서나 쓰일 법한 이 말은 남과 똑같이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그 당사자를 ‘고문관’ 취급할 때도 흔히 쓰는 말이다. 만일 이런 상황이었더라도 과연 돌출행동을 한 ‘고문관’이 잘못한 걸까. 그렇게 누군가를 고문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조직과 시스템의 잘못은 아닐까.

 

김광수 대표가 전문을 통해 왕따설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지만, 수많은 네티즌들의 증거사진은 넘쳐난다. 그 사진들을 보면 화영은 확실히 ‘돌출적’이다. 같은 팀원들과 어울리지 못한 기색이 역력하다. 김광수 대표의 말처럼 화영이 먼저 잘못 처신한 점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수가 한 사람을 마치 이방인처럼 대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방법은 아닐 것이다. 만일 이 많은 사진들이 모두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거라면.

 

사실 관계란 그 사이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그 실체를 보기가 어렵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김광수 대표의 대처방식이 과연 옳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를 떠나 그것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했어야 했다. 어쨌든 화영은 방출됨으로써 피해자가 됐고, 나머지 티아라 멤버들은 그로 인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되었다. 가해자의 이미지를 갖게 된 대중스타가 어떻게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김광수 대표는 문제의 소지를 잘라버리고 나머지를 살리는 방식으로 티아라를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티아라는 최근 들어 전성기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활동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방식이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대중들에게는 마치 왕따 당한 학생이 문제가 불거지자 그 당사자를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는 방식처럼 읽혔다는 점이다.

 

김광수 대표는 전문을 통해 화영이 잘못한 점이 있고 그래서 방출하게 됐다는 뜻을 분명히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대응은 내용과 상관없이 그 행동 자체가 대중들에게 정반대의 뉘앙스를 갖게 만들었다. 즉 힘 있는 이들이 힘 없는 한 사람을 몰아세운 인상을 만들었던 것. 구구절절하게 화영 방출의 변을 적은 김광수 대표의 전문보다 화영이 트위터에 적은 ‘진실 없는 사실’이라는 단 한 줄의 글이 더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상황은 벌어졌고, 티아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이상 티아라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티아라의 금번 사태로 인해 한류 팬들의 우리네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지고 있다. 기획사에 의해 인위적으로 팀이 꾸려지고 함께 합숙을 하며 연습을 통해 갈고 닦여지는 K팝의 그 장점들은 어쩌면 이번 문제로 인해서 단점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팀 내의 구성원 간의 소통은 물론이고, 대중들과의 소통에서도 티아라는 실패했다. 인위적으로 짜여진 팀이고 늘 같이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감정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획사에서는 개개인의 문제만큼 이제 함께 생활하는 아이돌들의 관계의 문제도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시점이다. 또 이런 문제를 갖고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식에서도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사태는 말해주고 있다.

화영이 보여주는 ‘내 남자의 여자’의 진실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지수(배종옥)만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드라마는 자극과 신파로만 치닫는 한심한 불륜드라마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지수의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화영(김희애)과 그들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준표(김상중)가 그 나머지 주인공들이다. 준표야 그렇다 쳐도 화영이란 캐릭터를 그저 멀쩡한 친구 남편 꼬드긴 ‘쳐죽일’ 불륜녀로만 생각하는 건 이 드라마의 나머지 축을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참 사랑하기 어려운 여자, 하지만 이해는 되는 화영이란 캐릭터가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떻게 지수는 화영을 이해하는 걸까
화영에 대해 지수는 “딱하다”고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자기 남편과 바람이 나 가정까지 버리게 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들의 관계를 준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받기만 했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줘본 기억이 별로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다르다. 입장이 서로를 반대쪽에 세우게 했을 뿐이지 그녀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몸을 던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수는 20년 간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화영은 준표를 얻기 위해 1년 동안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모를 겪었다. 이 공유점에서 지수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을 갖게 된다.

준표가 화영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지수에게 “당신네 우정은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지수는 ‘경민의 엄마로서 고맙다’고 말한다. 화영을 절망에 빠뜨린 준표의 ‘아이거부’를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엄마로서는 또한 고맙기도 하다는 것. 이런 상반된 감정이 가능한 것은 지수에게도 이른바 관계의 역할이라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자로서 20년 동안 헌신한 대가로 돌아온 고통을 겪은 지수는, 1년 동안 자신을 버려가며 얻으려 했던 사랑이 무의미해진 화영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지수의 마음은, 또한 시청자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화영이란 캐릭터에 문득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수가 이해하고, 시청자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화영의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관계의 거미줄에 걸린 화영
화영은 관계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 그녀가 미국사회에서 생활하다 국내로 들어왔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토록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가족과 사회란 관계에 진저리를 칠만 할 것이다. 그녀 자신의 미국생활조차도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이란 개인적 존재는 없었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한 남자에게 빠져들고 그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일깨우는 것이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는 절실함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것,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다. 준표라는 남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관계의 거미줄들이 쳐져 있었다는 것. 화영은 먼저 친구인 지수와 연결된 거미줄을 잘라야 했고, 지수의 언니, 은수(하유미)와 아들 경민, 그리고 준표가 그다지도 끊기 어렵게 생각했던 부모와의 거미줄조차 잘라야 했다. 그렇게 준표를 거미줄로부터 떼어내어 둘만의 공간으로 오자, 이제는 준표의 속에 남아있는 거미줄의 기억과 습관이 그녀를 괴롭힌다. 준표는 지수의 밥에 끌리고, 경민에게 끌리고, 사회적 관계, 부자지간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문제는 준표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화영은 지수 같은 아버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화영을 옭아매고 있는 거미줄들은 그 둘의 관계를 자꾸만 뒤틀어버린다. 1년 동안 그녀가 해온 일은 바로 그 복잡한 관계의 거미줄들과의 사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자식을 원치 않는 준표는 그간의 관계를 부부관계가 아닌 정부관계로 돌려놓고, 그녀가 발견한 처리되지 않은 준표와 지수의 이혼서류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준표 속에 있는 관계의 거미줄은 여전히 튼튼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 게다가 결혼을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여기는 사회적 풍토와 그 풍토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준표에 화영은 더 이상 자신이 없어진다.

화영의 분노가 이해되는 것은
“내가 겁나는 건 당신부모도 당신도 아냐. 바로 내 자신이야. 조심해. 잠잘 때도. 내가 당신 목을 조를 지도 몰라. 밥에도 독을 탈지도 몰라.” 화영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녀가 겪었던 “모욕, 수치, 경멸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들어버린” 준표 때문이다. 그녀는 “내 사랑, 내 선택, 당신이란 남자, 당신 사랑의 의미를 찾는 중”이라 말한다. 살면서 보상해주겠다는 준표의 말에 그것은 “오히려 지긋지긋한 올가미가 아닐까”하고 쏘아댄다. 준표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친구처럼 연인처럼 사는 것이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그 관계의 거미줄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화영이 말한다. “당신 사랑은 비겁해. 아주 아주 비겁해.”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치 지수의 주부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준표의 사고를 깨버리는 화영의 존재다. “나를 지수로 만들려고 하는 게 화가 나. 나 자신도 지수처럼 되가는 거 싫어. 아내는 아내지 종이 아냐. 밥해주기 싫은 날이 있어. 그런데 해줬어. 그래서 지수가 되가는 거 같애.” 화영은 지수 같은 천사표 아내의 삶을 당연시 생각하는 이 시대 남성들의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냄비를 내주며 해장국을 사다달라고 한다. 준표 같은 남자가 평생 해보지 않았을 그 일을.

화영이 지수와 전화통화를 하는 내용은 한국이란 사회에서 결혼해 살아가는 여자들이 새로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당해야하는 관계의 부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이해 받지 못하면서 왜 이해해야하는 지 모르겠어. 네가 경탄스러워.” “나는 모자라잖아. 모자라서 그렇겠지.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 별거 아니잖아. 자꾸 파면 좋을 거 없잖아.” 그녀들이 공유하는 이 부당한 대접은 과거 가부장적 가족의 틀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관계와 서열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가족의 틀. 김수현 작가는 이 불륜극을 통해 바로 그 틀의 견고함과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불륜이란 두 가지 힘의 충돌을 말한다. 그 하나는 사회가 가진 규범, 틀의 힘이고, 또 하나는 그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이다. 김수현 작가는 이 두 힘의 충돌을 그리면서 그 화학작용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관계의 거미줄들을 잡아낸다. 비굴하고 치사하게 만드는 그 관계들 속에서 결국 그녀들이 얻은 것은, 관계 속에 매몰된 삶이 아닌 자신의 당당한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서 마주보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극에서 시작해 심리극으로 치닫다가 말미에 사회극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준표가 지수의 밥을 그리워하는 이유

‘내 남자의 여자’, 두 여자가 만난다. 남편과 눈맞은 여자, 아무리 한 때 절친한 친구라 해도 만나서 제일 먼저 하는 얘기는 생뚱맞게도 밥 얘기다. ‘그 남자’의 에고에 대해 얘기하자며 자연스레 밥 얘기를 꺼낸다. 지수(배종옥)는 어느 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밥을 챙겨먹지도 못하던 남편 준표 얘기를 한다. 그 때 이 후 그녀는 “밥 때는 거의 밖에 안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대해 화영은 “지금은 혼자서도 잘 차려먹더라”고 말한다.

또 다른 장면, 준표의 어머니의 호출로 화영과 외출하려는 준표에게 지수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저녁 집에 와서 먹어. 해줄게.’ 만나서 할 얘기가 있는 지수는 만나자는 말도 밥 얘기로 시작한다. 준표의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화영은 준표에게 묻는다. “저녁 뭐 먹고 싶어?” 그러자 준표는 6시 반이 넘었다며 그냥 시켜먹자고 한다. 그러자 화영이 발끈해서 말한다. “꼭 6시 반에 저녁 먹어야 해? 한 시간쯤 늦게 먹으면 안돼?” 결국 냉면에 떡갈비를 시켜먹는 그들. 준표가 말한다. “좀 불었다.” 화영의 대꾸, “나도 알아. 그냥 좀 먹어. 지금 음식 투정하게 생겼어?” 잘못했다며 그래도 좀 먹으라는 준표에게 화영은 쏘아댄다. “돼지야? 혼자 많이 먹어!” 결국 준표는 남은 음식을 버린다.

‘내 남자의 여자’는 유난히 식사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실생활에서라면 그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드라마 상에서라면 말이 다르다. 김수현 드라마의 묘미가 대사에 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그냥 대사를 주고받으면 되지 왜 굳이 ‘밥을 먹으며’ 대사를 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밥’이 가진 일상의 무게감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첫 회에서 준표와 화영의 외도가 발각되는 장면에서도 역시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비큐 파티를 하는 중에 잠시 집안으로 들어간 둘은 애정행각을 벌이다 은수(하유미)에게 덜미를 잡힌다. 화영과 살림을 차리기 전 지수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준표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하지만 준표는 화영과 살면서 감자 하나 제대로 찌지 못하는 그녀를 타박하고, 지수가 해주는 밥을 그리워한다. 시켜먹고 대충 때우는 화영의 부엌에서 잠시 해방(?)된 준표는 허겁지겁 지수가 해주는 밥을 두 그릇씩 뚝딱 해치우고 생전 안 해보던 고맙다는 말을 한다.

지수가 홀로 서기 위해 찾은 자신만의 일은 다름 아닌 ‘먹는 장사’다. 샌드위치는 바로 만들어 먹어야 제 맛이라는 그녀는 미리 만들어 대량으로 팔 수 있는 기회도 저버린다. 장삿속으로 장사를 하는 게 아니고 진짜 사람들이 먹을 걸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밥을 해주고 먹을 걸 차려주는 행위는 그녀의 존재 이유 그 자체다. 준표를 지겹게 만든 것은 바로 그녀가 밥을 차려주는 행위로서 고착된 모든 걸 챙겨주는 심성에서 비롯되었다. 준표는 그런 그녀가 자신을 숨막히게 한다고 말하고, 반면 화영은 자신을 남자이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밥이 가진 이중성을 보여준다. 매일 먹는 밥은 때론 지겹지만 그 밥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집에서 해먹는 밥이 질려 외식을 하고 나면 먹을 땐 좋았는데 꼭 속이 좋지 않다. 조미료가 가득 든 음식이 입에는 달아도 몸에는 영 맞지 않아서이다. 밥으로 얘기한다면 준표가 하고 있는 외도는 꼭 외식과 닮았다. 자극적인 맛에 정말 맛있어 먹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막상 먹고 나면 소화시키기 어려운 음식.

준표가 지수를 떠나오기 전 그 밥해주는 행위를 무시했던 것처럼, 화영이 밥 먹으라는 사람에게 “돼지냐”고 쏘아붙이듯, 사람들은 밥을 무시한다. 하지만 밥은 오히려 숭고하다. 늘 필요한 곳에 있어 칠뜨기에 밥순이로 무시됐던 지수가 점차 숭고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내 남자의 여자’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다른 부엌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대부분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가족이 해체되는 것은 그 중심에 선 부엌으로 상징되는 모성애에 대한 무시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는 것만 같다. 부엌에서 된장국 하나 제대로 끓여내는 일은 입으로 조잘대는 사랑보다 더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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