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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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출생이 로또?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라

D.H.Jung 2011. 4. 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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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에 목매는 드라마들과 자기 운명 극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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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사진출처:MBC)

자기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출생이다. 그런데 이 출생이 운명을 결정해버린다면 너무나 허무하지 않을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출생의 비밀' 코드를 담은 이야기들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이목을 붙잡아 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재벌가의 회장쯤 되는 인물이 찾아와 당신이 사실은 자신의 자식이라고 말할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아주 없진 않겠지만 확률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작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만 오면 이 확률은 한없이 커져서 거의 100%에 근접한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망의 불꽃', '웃어라 동해야', '호박꽃 순정', '신기생뎐', '폭풍의 연인', '마이 프린세스', '드림하이', '프레지던트' 같은 현재도 방영중이거나 아니면 최근 방영되었던 드라마들에는 어김없이 출생의 비밀 코드가 들어가 있다. 물론 사극이나 심지어 시트콤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짝패'는 같은 날 양반의 자제와 천민의 자제가 동시에 태어나는데, 양반 자제의 모친이 죽게 되자 천민 자제의 모친이 양반 자제의 유모가 된다. 그 유모가 자신의 아들과 양반 자제를 바꿔치기 하면서 서로 엇갈리는 운명이 펼쳐진다. 시트콤, '몽땅 내 사랑'에도 잃어버린 딸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김원장(김갑수)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출생이 로또가 된 이유, 혈연과 연루된 신분상승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설정이지만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점점 드라마 전체에 사용되게 된 것은 이만큼 시청률을 끌어올리는데 좋은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던 '제빵왕 김탁구'는 대표적이다. 회장님의 아들이지만 어린 시절 내쳐져 스스로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다뤘다. '자이언트'는 물론 출생의 비밀을 그대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변형된 형태의 이 코드가 등장한다. 즉 어린 시절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성장한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가족이 상봉하는 그 지점부터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 코드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흩어졌던 가족의 만남'이다. 즉 '출생의 비밀' 코드 밑에는 우리네 특유의 혈연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혈연과 함께 깊게 연루되어 있는 것이 신분상승이다.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는 공주병을 가진 이설(김태희)이 사실은 조선 마지막 공주였다는 게 밝혀지고 궁으로 들어와 공주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폭풍의 연인'에서 별녀(최은서)는 우도에서 자라난 장애까지 가진 여자로 서울 부잣집에 얹혀사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굴지의 재벌기업 회장인 유대권(정보석)의 숨겨진 딸로 밝혀지면서 하루아침에 삶이 바뀌어버린다.

물론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는 스토리텔링의 역사에서 거의 본연적이다. 유리왕이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가는 이야기, 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 스토리의 원형이 우리 유전자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각인된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작금의 우후죽순 생겨나는 '출생의 비밀' 코드들은 이것을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현재의 현실과 맞물리는 사회적인 맥락이 읽혀진다. 즉 가족 같은 혈연에 대한 집착, 마치 로또처럼 출생 하나로 인생을 역전시키겠다는 욕망, 그만큼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이런 것들이 그 속에서는 꿈틀거린다.

'출생의 비밀' 아닌 '성장스토리'를 꿈꿔라
'출생의 비밀' 코드에 가장 핵심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운명 속에 허우적대고 있지만, 그걸 시청자들은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신적인 시선'이다. 저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운명. 이 시점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쥔 듯한 권력을 부여한다. '출생의 비밀' 코드는 이처럼 달콤하다. 누구든 전혀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자기 운명이 어느 순간 단번에 바뀌어진다는 그 쾌감은 강력한 판타지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드라마인가.

최근 들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출생의 비밀' 코드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들이 많은 것은 이 코드가 가진 지나친 삶에 대한 냉소적 시선 때문이다. 결국 태생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뿐, 내가 운명을 개척하는 것 따위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패배주의적 시선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다. 왜 아닐까. 작금의 냉혹한 현실은 실제로 태생에서부터 삶이 판가름 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왜 바꿀 수 있는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출생)을 바꾸려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은 남는다. 어찌 보면 이 전해 내려오는 스토리들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라며 교육시켜온 사회 시스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머금고 있는 메시지들, 그것들의 싸움이 그저 스토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출생의 비밀' 코드 속에 숨겨진 지배 시스템의 비밀을 바라봐야 될 시점이 아닐까.

드라마에는 '출생의 비밀'이 아닌 '성장스토리'도 있다. 전자가 이미 정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후자는 적극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가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출생의 비밀'이 수동적인 판타지라면, '성장스토리'는 능동적인 판타지다. 수동적으로 로또 같은 '출생의 비밀'이 내포하는 허황된 인생역전을 꿈꾸기보다는, 어려운 현실에도 스스로 운명을 열어가는 이야기, '성장스토리'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현대 모비스 사보에 연재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