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패밀리'로 보는 조직에서의 자기계발
'로열패밀리'(사진출처:MBC)
모든 로열 패밀리들이 다 그런 것인지 어떤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 '로열 패밀리' 속에 등장하는 정가원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기업에 가깝다. 시어머니인 공순호(김영애) 회장을 위시해, 첫째 며느리 임윤서(전미선), 둘째 며느리 김인숙(염정아), 그리고 셋째 며느리인 양기정(서유정)과 공순호 회장의 딸 조현진(차예련)이 한 자리에 모여 앉으면 그것은 영락없는 중역 회의를 연상시킨다. 대화도 가족 간의 살가운 이야기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JK그룹이 지주회사를 설립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러기 위해 차기 대통령 감으로 지목되는 국회의원의 안주인을 공략할 계획을 세운다.
정가원의 분위기를 가족보다는 회사로 더 여겨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공순호 회장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 며느리들과 딸을 경쟁 선 상에 올려놓고 상벌을 준다. 결국 후계 구도를 위한 치열한 싸움은 가족의 선조차 넘어버린다. 며느리가 며느리를 감시하기 위해 도청장치를 하고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력자를 끌어들인다. 첫째 며느리 임윤서는 자신의 친정인 구성 그룹을 끌어들이고, 정치인의 딸인 셋째 며느리 양기정은 집안 인맥을 동원해 로비를 벌인다. 공순호 회장의 딸, 조현진은 알게 모르게 공순호 회장의 비호를 받는다. 즉 이 기업형 가족(?)은 모두 저마다의 인맥을 갖고 있다. 단 한 사람, 둘째 며느리 김인숙만 빼고. 인맥이 없는 김인숙은 그래서 로열 패밀리의 일원이 아니다. 이름이 아닌 K로 불리며 살아온 그녀는 남편마저 잃고 나자 금치산자로 내몰려 아들마저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이 김인숙이라는 여인이 낯설지가 않다. 그녀는 어떻게 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조금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조직에서 살아남았을까.
그녀가 괴물로 불리는 이유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로열 패밀리를 다루고 있지만 이 드라마가 낯설지 않은 건 왜일까. 잘 보면 알겠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늘 회사에서 겪는 그 시스템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로열 패밀리는 우리가 겪는 조직의 다른 이름이고, 그 안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공순호 회장은 그 조직의 수장이며, 그 밑에서 끝없는 경쟁을 통해 생존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조직원들이다.
모두가 갖고 있는 인맥이 없어(남편이 죽으면서 그녀의 인맥은 끊긴 것이다), 내쫓길 위기에 몰린 김인숙에게서 '구조조정'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건 실력이 아닌 관계로 돌아가는 우리네 조직의 한 병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늘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김인숙이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며 싸늘하게 웃기 시작한다. 그녀는 사실 수십 년 간을 조용히 준비해왔던 것. 심지어 괴물처럼 보이는 그녀의 이 와신상담은 그 괴물이란 호칭마저 찬사로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안에 없는 인맥을 바깥에서 만들어낸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고위층 사람들과 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해놓은 것이다. 자신이 계속 후원해온 한지훈(지성) 변호사는 거의 무조건적인 로열티를 그녀에게 보내고,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돕는 정가원의 집사인 엄기도(전노민)는 이 집안의 모든 정보들을 그녀가 손아귀에 쥘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이 정가원이 굴러가는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찾는 점쟁이까지 매수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낸다. 내부적인 정보와 외부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충성어린 팀원, 그리고 완벽히 시스템을 이해하는 그녀는 사실상 모든 것이 준비된 조직원이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보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 태생으로 신분을 계층화하는 그들 속에서 그녀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 바로 그 무섭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해온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괴물로 불릴 정도로 속내를 보이지 않은 철저한 준비.
조직에서의 생존, 그래도 괴물은 되지 말자
'로열 패밀리'라는 드라마의 스토리는 조직을 살아가는 일들이라면 대단히 매력적으로 읽힐 것이다. 매일 같이 던져지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 인맥 하나 없는 이라면 더더욱 김인숙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다소 허황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것이다. 모든 게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시스템 속에서 일천한 네트워크를 가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실력은 기본이고, 인맥은 필수다. 아니 인맥도 실력인 세상이다. 그러니 뭐 하나 없는 조직원들은 저마다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조직의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서점가를 둘러보면 작금의 샐러리맨들의 불안감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 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각종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나 심리학 서적, 이른바 자기계발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책만 읽으면 없던 실력이나 인맥이 마구 생겨날 것 같은 기분. 그 책을 쥐는 손끝의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준비하고 준비하고 또 준비하라! 세상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계발 서적의 봇물.
그런데 자기계발이라는 말에는 착각이 들어있다. '자기'라는 단어가 붙어서 마치 스스로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부의 보이지 않는 강요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그 자발성은 의심된다. 물론 진짜 스스로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의 자기계발은 긍정적인 것들도 많다. 하지만 집착적으로 어떤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벌이는 자기 계발은 과도해지면 자칫 자신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 조직은 목적을 갖고 있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구성원을 독려하고 경쟁시킨다. 하지만 조직원들이 모두 정가원 사람들처럼 괴물이 된 조직은 미래가 없다.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목적이 분명하고, 그 만나는 지점을 찾아내게 해주며 그걸 이루기 위해 준비하게 하는 것. 이것은 개인을 위해서나 조직을 위해서나 모두 필요한 생존의 가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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