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용'의 재심사건들, 범인이 나타나도 돌려보내는 사법이라니
"잘 나신 변호사님과 기자님은요, 할 말 다 하고 사는지 모르겠는데요, 저 같은 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 못해요. 기자님. 말이란 것은요, 입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하는 거예요. 세상 천지에 우리 같은 사람들 말을 누가 들어주기나 합니까?"
SBS 금토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에서 오성시 트럭 기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두식(지태양)은 재심을 해서 억울한 누명을 벗어야 되지 않겠냐는 박태용(권상우) 변호사와 박삼수(배성우) 기자의 말에 그렇게 일갈했다. 과거 그는 형사에게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그토록 항변했었다. 하지만 이미 그를 범인으로 특정해버린 형사들은 강압적인 수사로 그를 결국 범인으로 만들었다.
애초 살인사건의 목격자였던 김두식은 강압에 의해 몽타주를 그리게 하자 어쩔 수 없이 당시 그가 일하던 곳의 사장 얼굴을 그렸다. 잠시 경찰에서 풀려난 김두식이 경찰이 두려워 도주를 하면서 문제는 꼬여버렸다. 경찰은 아예 김두식을 범인으로 특정했고 그렇게 아니라는 항변에도 모두 귀를 닫아버렸던 것.
놀라운 건 그렇게 김두식이 옥살이를 하던 중 진범이 나타났지만 이를 경찰도 검찰도 묻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한상만(이원종)은 진범의 진술을 서장도 직접 듣게 했지만 서장은 자리 지키기에 더 전전했다. "야 한 반장 나도 괴롭다. 야 3년 전에 우리가 수사해서 잡아넣은 김두식이 아직 감옥에 있잖아. 우리 다 죽어. 검찰은 어쩔 거여? 법원은? 판사들은 무려 열 명이나 오판을 했어. 너 저 꼬맹이들 땜시 온 나라에서 곡소리 나는 거 듣고 싶어?"
그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으면 곡소리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한상만의 일갈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서장은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사에게 이 일을 알렸고 검사는 청장에게 보고했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묻으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임관하자마자 미안한데 이거 묻어. 검사는 한 몸. 이제 와서 뒤집으면 그거 3년 전에 수사하고 공판하고 했던 선배 검사들 어떻게 되겠어?" 그 청장은 대석 로펌 고문이 되어 있었다.
<날아라 개천용>이 다루는 재심사건들은 놀랍게도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오점을 가리기 위해 이를 묻어버리려는 사법권의 모습들을 담아낸다. 물론 이것이 사법권 전체의 보편적인 이야기는 아닐 게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네 사법부가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때론 기계적인 법률 해석만 해야 한다고 '공정함'을 빌미로 무정해지고, 때론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거나, 특정 사안을 정치적으로 해석해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게 지금의 대중들에게 비춰지는 사법부의 모습이 아닌가. 억울해하고 힘겨워 하는 약자들의 목소리가 그 귀에 닿을 리가 만무다.
<날아라 개천용>은 허구로 만들어진 드라마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 주인공들이 바로 실제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다, 이들이 다루는 재심사건도 실제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실제 모델 중 한 명인 박상규 기자가 대본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런 드라마의 소재가 될 수 있었던 재심사건들의 승소가 가능했던 건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연 변호사, 형사, 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한상만이니까.. 그냥 감방에 갇혀 있는 열일곱 살 김두식이가 내 아들처럼 느껴졌나봐. 그 어린 것이 누명을 쓰고 그 속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까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요. 그게 다예요." 왜 김두식 사건에 그토록 집착했냐는 박태용 변호사의 질문에 한상만은 그렇게 답한다. 형사나 검사, 판사라는 직업이 아닌 개인의 양심으로 그나마 정의를 지켜나가려는 몸부림이 있는 사회는 과연 정상적일까. 이런 정의의 문제가 몇몇 영웅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에 의해 그나마 작은 희망을 전해준다는 건 우리네 사법부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은 아닐까.(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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