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매운 드라마에 지쳤다면
“아이를 키울 때 보리차를 다시 만났다. 열이 나고 많이 아프면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갓 지은 밥에 보리차를 잔뜩 붓고 두 시간 약한 불에 끓였다. 그 밥물을 먹였다. 하루나 이틀 그러고 나면 다시 식욕이 도는 지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곁에서 기다리고 서 있어야 한다. 넘치면 안 되니까....”
한석규의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먼저 마음을 잡아 끈다. 너무 담담해서 레시피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지만, 그가 정성을 들이며 이렇게 만드는 음식에는 아내에 대한 깊은 마음이 담겨있다. 창욱(한석규)의 아내 다정(김서형)은 대장암 말기다. 수술을 원치 않는 다정은 창욱에게 자신을 챙겨달라고 요청한다. 두 사람은 별거 중이었지만, 사정을 듣게 된 창욱은 기꺼이 집으로 들어와 다정의 식사를 챙긴다. 건강식으로.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가 갖고 있는 서사는 최근 OTT들이 내놓고 있는 자극적이고 매운 맛과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담담하고,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서사라고 하면 말기암 때문에 다정을 챙기는 창욱이 만드는 음식들을 통해 두 사람이 나누는 결코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한 부부애가 중심에 서 있고, 별거해 집을 나갔던 창욱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아들 재호(진호은)와 창욱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이야기가 더해져 있다. 물론 재호와 여자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풋풋한 사랑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석규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 드라마를 대하는 마음부터 다르게 만든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껏 어깨의 힘을 빼고 드라마가 보여주는 담담한 일상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런데 그 담담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 드라마는 깊은 삶의 통찰을 심어 놓는다. 예를 들어 ‘그리운 설날 떡국’이라는 부제를 단 4화의 경우, 떡국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리움’이라는 삶의 본질을 통찰한다.
오래도록 운영해왔던 출판사 일을 더 아프기 전에 후배에게 물려주려 하는 다정의 마음은 헛헛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12월31일 굳이 회사를 찾아가는 길이 새삼스럽다. 그 길에 운전대를 잡아준 남편에게 이 길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굳이 남양주에 있는 동생 같은 저자에게 책을 직접 갖다 주겠다고 한다. 사실은 남편과 그렇게 함께 드라이브 하며 데이트 기분을 좀더 내고 싶어서다.
남양주에게 저자를 만나는 사이 다정은 창욱에게 젊어서 갔었던 장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으라 한다. 그 곳을 찾아가는 창욱의 마음이 또 새삼스럽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다. 주문한 장칼국수를 기다리며 창욱의 심사가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그런데 그 내용은 ‘금식’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금식은 금식할 때보다 먹기 시작할 때가 더 힘들다. 몸이 받아내지 못할 먹을거리를 머리는 끝없이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병이라면 한두 주쯤 금식하고 다시 먹기 시작할 때 잘 조절하면 씻은 듯이 낫기도 한다. 하지만 암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일 년이나 혹은 그 이상을 몸은 그리움과 싸워야 한다.” 먹었던 기억이 만들어내는 그리움. 결국 그리움은 굳이 아플 걸 알면서도 쌓아가는 아름다운 기억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 시각에 여자친구와 서해에 일몰을 보러 온 재호는 “남들은 해맞이 하러 정동진 간다는데 우리는 거꾸로 왔네”라고 한다. 그러자 여자친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가는 해 보내주는 사람도 있어야지”라고 툭 던진 말에 재호는 눈물을 쏟아낸다. 암 투병하는 엄마 생각 때문이다. 오래도록 엄마와 가졌던 그 좋은 기억들은 재호에게 더 깊은 그리움으로 남을 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정은 창욱에게 설날에 먹을 떡국거리를 사자고 한다. 그러면서 창욱의 어머니가 해주셨던 떡국을 먹고 싶다고 한다. 굴을 넣어 국물을 낸 떡국의 그 맛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기억으로 살아있다. “배고픈 만큼이나 그리움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그리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간절히 그리던 것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 그리워할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강창래의 동명 에세이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문학적인 서사가 압권인 드라마다. 지치고 힘든 현실 앞에서 더 큰 자극 속으로 들어가 그 현실을 잊고픈 마음이 크지만, 이 드라마는 더 채워 넣기보다는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담담한 생각들로 채워 넣는 것으로 지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는 앞서 내레이션에 담긴 밥에 보리차를 넣고 끓인 ‘밥물’을 닮았다. 자극에 너덜해진 속을 차분히 가라앉혀 보이지 않던 일상 속에 담긴 삶의 비의를 바라보게 해주는 그런 드라마. 매운 드라마들에 지쳤다면 이 슴슴함에 반드시 빠져들 거라 확신한다. (사진: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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