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대>로 또다시 청춘의 날개 편 완생의 배우
“14살 된 내 아이가 나이에 맞지 않은 성숙함을 보일 때 짠한 마음이 있는데 임시완에게서 그런 연민을 느낀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한 매체와 인터뷰 중 했던 이 말은 임시완이라는 배우에게 왜 대중들이 마음을 빼앗기고야 마는가를 잘 설명해준다. 그에게서는 어딘가 이면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내력 같은 게 풍겨나온다. 세월을 거꾸로 먹는 듯한 초절정의 동안이지만, 끝없는 노력을 통해 그 안에 쌓인 만만찮은 내공이 만들어내는 아우라가 그것이다. 일찍이 세상의 어려움을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갖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가 이번에는 <소년시대>라는 작품에서 1989년 충청도 출신 고등학생 장병태라는 인물로 분했다. 폭력이 일상이던 시대, 장병태는 매일 안 맞고 지나는 날을 꼽을만큼 두들겨 맞던 온양 찌질이다. 하지만 부여농고로 전학오면서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산 백호라는 전설의 싸움꾼으로 오인받는다. 16대1 전설의 싸움꾼이 왔다는 소식에 부산농고 일진들의 무조건적인 추앙을 받지만, 진짜 아산백호 정경태(이시우)가 같은 반으로 전학오면서 화려했던 봄날은 가고 처절한 응징을 당하는 겨울을 맞이한다. 결국 자신이 좋아했던 부여 소피마르소 강선화(강혜원)를 정경태에게 빼앗기고, 가족까지 해코지를 당하게 되자 각성한 장병태가 죽을 각오로 복수혈전을 치르는 이야기다.
학원 액션물로서 시원시원한 액션은 기본이고, 부여 흑거미로 불리는 여고 짱이지만 장병태를 좋아하는 박지영(이선빈)과의 달달한 멜로도 들어있다. 또 부여 농고의 대표 찌질이인 조호석(이상진)과의 티격태격하는 우정스토리에, 춤바람난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엄마와의 훈훈한 가족서사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코미디다. 충청도 사투리 자체가 주는 정감 가득한 해학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데, 임시완은 찰떡같이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특유의 찌질이 캐릭터를 너무 무겁지도 또 너무 가볍지도 않게 표현해냈다.
여기서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그것이 이 작품을 연출한 이명우 감독이 원했던 <소년시대>의 톤 앤 매너이기 때문이다. <소년시대>는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고 그래서 멍이 들고 피가 튀며 뼈가 부러지는 참혹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키득키득 만화책을 보는 것 같은 웃음이 묻어난다. “하나도 안아프다니께. 어차피 지난주에도 맞고 저번 달에도 맞고 맨날 맞고 사는 인생인디 뭐가 별다를 게 있겄어?” 장병태의 이 대사처럼 맞는데 이력이 나 포기한 듯한 동네북 아이들이 늘 멍을 달고 다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는 웃음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 말을 곱씹어 보면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이력이 다 나버린 이 청춘들의, 속으로 타버린 내면이 느껴져 짠해진다. 그래서 마치 무협지 활극을 우리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학원물로 옮겨놓은 듯한 <소년시대>에서는 희비극이 겹쳐진 페이소스가 묻어난다.
임시완이 풍기는 ‘연민’의 정서는 그래서 이 장병태라는 웃기면서도 짠하고 찌질하면서도 어딘가 신뢰가 생기는 캐릭터를 제대로 빚어낸다. 그러면서 <해를 품은 달(2012)>로 데뷔해 연기자로서 어언 10년의 내공을 다져온 임시완의 또 다른 스펙트럼으로 자리한다. 그 사이 30대 중반의 나이가 됐고, 그만한 삶의 경험치들로 더 단단해진 내면을 갖게 됐지만 여전히 고등학생 얼굴로 등장하니 저 윤태호 작가가 얘기한 연민의 강도 또한 짙어졌다.
이처럼 변함없는 동안은 그를 청춘을 대표하는 배우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미소년의 얼굴에 가녀린 몸은 <변호인(2013)>에서는 용공조작사건으로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는 대학생으로 분해 보는 이들마저 괴로울 정도로 아픈 80년대 청춘의 초상을 그려냈고, <미생>에서는 냉혹한 현실에 내던져진 사회초년생 장그래를 통해 2010년대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는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에서는 극중 대사처럼 ‘혁신적인 또라이’ 역할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2019년 군복무를 마치고 나와서는 이제 선과 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복귀작이었던 <타인은 지옥이다(2019)>에서는 고시원에서 사는 작가지망생 역할을, <런온(2020)>에서는 순수하고 따뜻하며 정의감 넘치는 단거리 육상선수 역할을, 또 영화 <비상선언(2022)>이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2022)> 같은 작품에서는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호칭을 얻은 사이코패스와 스토커 역할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 역사를 새로 쓴 서윤복의 이야기를 그린 <1947 보스톤(2023)>에서는 완벽히 빙의된 마라토너의 면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 이면에 단단해진 내면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임시완이 이같은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갖게 된 건 그 이면에 숨겨진 치열한 노력 때문이다. 그가 보여주는 치열함은 함께 작업을 한 감독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랄 정도로 준비되어 나타난 임시완의 이야기를 꺼내놓곤 한다. 예를 들어 <1947 보스톤>을 연출한 강제규 감독은 처음 임시완을 마주하고는 저런 가녀린 몸으로 마라토너 서윤복을 연기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몇 달도 되지 않아 나타난 임시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완벽한 마라토너(그것도 그 가난했던 시절의)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또 <소년시대>의 이명우 감독 역시 부산 출신인 임시완이 과연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잘 구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 달 정도만에 나타난 임시완이 구사하는 부여 사투리는 말만이 아니라 감성, 뉘앙스까지 살려낼 정도로 실감이 나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연기자라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배우라는 것이다.
실로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네 청춘들은 사회에 나오기도 전부터 치열하게 준비하려고 노력한다. 아픔이 있지만 안으로 꾹꾹 씹어 내공을 만들고, 밖으로는 해맑은 척한다. 아 이토록 조숙한 청춘의 처연함이라니. 임시완의 얼굴에는 끝없이 이들을 ‘미생’으로 만드는 이 시대와 공유하는 청춘의 초상이 느껴진다. 부디 완생하기를.(사진:쿠팡플레이 글: 국방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이주의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석구, 야성과 이성 사이의 치열한 긴장감 (0) | 2024.02.18 |
---|---|
이하늬,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꽃처럼 (0) | 2024.02.12 |
마동석│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0) | 2024.02.05 |
신혜선 │개천을 잊지 않는 용 (0) | 2024.01.29 |
박은빈 │도전적인 세상, 위로와 응원의 아이콘 (0) | 2024.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