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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인물

이하늬,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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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피는 꽃’을 유쾌, 통쾌, 상쾌하게 만드는 이하늬의 존재감

밤에 피는 꽃

한때 사극 여주인공의 핫트렌드는 ‘남장여자’였다. ‘성균관 스캔들’의 김윤희(박민영),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 ‘구르미 그린 달빛’의 홍라온(김유정), ‘연모’의 이휘(박은빈)가 그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사극에는 ‘수절과부’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혼례대첩’의 정순덕(조이현),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의 박연우(이세영) 그리고 ‘밤에 피는 꽃’의 조여화(이하늬)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사극이 남장여자를 여주인공으로 자주 세웠던 건, 조선이라는 사극의 시대적 배경이 여성들에게 부여한 삶의 차별과 제약들을 뛰어넘는 모습을 이 장치를 통해 그려내려 했기 때문이다. 문장에 재주를 가졌지만 글 공부의 꿈을 펼칠 수 없거나(성균관 스캔들),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화원으로 이름을 떨칠 수 없거나(바람의 화원), 혹은 기막힌 연서 쓰는 재능을 가졌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돈벌이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거나(구르미 그린 달빛), 쌍둥이 왕손으로 태어났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버려졌던(연모) 사극 속 여성들은 그래서 남장을 한 채 꿈을 펼쳤다. 

 

수절과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다 과부가 되어 먼저 간 남편을 따라가지 않은 것 자체가 ‘죽을 죄’처럼 여겨지는 그들은 바깥출입 자체도 금기시되니, 하고픈 일을 하거나 꿈을 펼친다는 건 언감생심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는 갈등(장애) 요소가 클수록 드라마틱해지는 법. 그래서 이 수절과부들이 담을 넘어 시부모 몰래 저잣거리에서 ‘중매의 신’이 되는 ‘혼례대첩’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해질 수밖에 없다. ‘밤에 피는 꽃’은 여기서 더 나아가 밤이면 복면을 쓴 채 홍길동 같은 의적이 되어 힘겨운 백성들을 돕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에 의해 기루에 팔려간 아이나, 소장한 그림에 물을 튀겼다는 이유로 주인집 양반에게 두들겨맞은 나이든 노비 같은 가난하고 곤궁한 백성들의 처지는 비극 그 자체다. 그래서 그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수백 냥을 쾌척하거나 노인에게 의원을 보내고 포악한 양반을 혼내주기 위해 그 그림을 훔치는 조여화는 ‘전설의 미담’으로 불린다. 비극은 아마도 조선사회에 실제로 비일비재했을 현실이지만, 이를 비틀어 그린 미담들은 ‘홍길동전’ 같은 서민들의 염원이 담긴 판타지다. 또한 수절과부의 현실을 담은 조여화라는 인물도 그 공고한 시대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뜻을 펼쳐나가는 판타지적 인물로서 서민영웅으로 그려진다. <밤에 피는 꽃>이라는 현실의 무거움과 판타지의 가벼움이 교차하는 퓨전사극은, 그 비극적 현실과 희극적 판타지를 엮어 무거운 밤에도 경쾌하게 피어나는 꽃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밤에 피는 꽃>은 그래서 이하늬라는 배우가 가진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애초 국악과 전통무용을 전공한 전력이 있어서인지 한복이 유독 잘 어울리는 이 배우는 이미 ‘홍길동전’을 새로이 해석한 드라마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숙용 장씨로 등장해 그 고운 자태를 드러낸 바 있지만, 동시에 밤이면 복면 쓰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으며 악당들 때려잡는 액션에도 능한 배우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하늬만이 가진 매력은 특유의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코미디 연기에서 나온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홍일점으로 껄렁껄렁한데다 화끈하고 걸걸한 모습으로 대중들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어버린 이하늬는 그 후 ‘열혈사제’, ‘원 더 우먼’으로 그녀만의 확실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당혹스런 순간에 껄껄 웃으며 눙치기도 하는 그 털털한 매력은, 노력해도 좀체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허덕이는 서민들에게 잠시나마 웃음꽃을 터트리게 하는 시원 통쾌한 경험들을 가능하게 했다. 서민들이 갖는 곤궁함에 대한 공감(극한직업)과 억울함에 대한 카타르시스(열혈사제)를 풀어주는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 게다가 일에 있어서도 또 사랑에 있어서도 좀 더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현대 여성들의 판타지 또한 담아냈다. 

 

그래서일까. ‘밤에 피는 꽃’은 바로 이 이하늬의 이미지를 사극 버전으로 가져와 극대화한 작품처럼 보인다. 조선사회의 백성들이 마주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곤궁함과 억울함이 아닌가. 마땅히 국법이 해결해야 하는 사안들이고 그래서 금위영 종사관 박수호(이종원) 같은 공권력을 올바르게 쓰려는 자가 등장하지만, 그 역시 이 사안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아니 그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법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다. 그리고 그건 조여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함께 공조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하던 그들은 그 과정에서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의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타인을 돕는 일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로 연결된다는 건, 정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일은 그렇게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한 일이 된다.

 

이하늬라는 밝은 페르소나에 대중들이 빠져드는 건, 그만큼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그 속에 침잠하기보다는 웃으며 그걸 이겨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쾌활한 웃음소리 속에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비극과 희극이 교차한다. 찰리 채플린도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진정한 페이소스가 있는 코미디는 웃음 끝에 남는 비극적 여운의 맛이 있기 마련이다. 이하늬가 주는 털털한 웃음 끝에도 그런 맛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비극을 애써 희극으로 승화해내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 그 코미디 연기 속에 담겨 있어서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긴긴 밤을 마주하면서 반드시 오고야말 새벽을 기다리고, 춥디 추운 겨울을 통과하며 그 동토의 얼음을 뚫고 피어날 꽃을 기다리듯이 우리 모두는 매일 매일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지 않은가. 그러니 웃을 일이다. 때때로 무거운 어둠이 어깨를 짓누른다 해도 그 뒤에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다가올 빛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굳게 믿으며.(글:국방일보, 사진: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