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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인물

조정석, 그의 웃픈 얼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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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작, 매혹된 자들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는 그 자체로 빛이 난다. 무언가 삶의 무게가 전혀 느끼지지 않아 가볍고 그래서 해맑게 웃는 모습에는 누구나 가슴이 환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그 해맑은 웃음에 가슴까지 환해지는 빛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걸 바라보고 있는 어른의 무거운 시선 때문이다. 삶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충분히 경험한 어른들은 이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해맑음 앞에 순간 한없이 가벼워져 하늘 위로 떠올랐다가 금세 그만큼의 중력으로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는다. 희극 속에 비극이 느껴지는 페이소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너무나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그 이면에 깔리는 어떤 현실감 같은 것들이 환한 빛만큼 길어진 그림자로 느껴지는 것. 조정석은 바로 그 희비극이 공존하는 페이소스의 배우다. 

 

“막 비벼! ×× 비벼!” 조정석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그게 키스야?”라고 물으며 연애 쑥맥 승민이에게 진짜 키스에 대해 알려주는 납뜩이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승민의 친구로서 아주 적은 분량의 출연이었지만 그가 영화만큼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데는 특유의 잔망미로 관객들을 여지없이 빵빵 터지게 만드는 연기를 선보여서다. 그런데 그 웃음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납뜩이라는 인물이 가진 페이소스 같은 게 숨겨져 있다. 자신은 연애 고수라며 승민에게 스킨십 하는 법이나 밀당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강남보다는 강북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촌티가 묻은 인물 역시 연애를 마치 드라마나 영화로 배운 듯한 어설픔이 느껴진다. “아무 말도 않고 그냥 가. 터프하게. 절대 뒤 돌아보면 안돼. 뒷모습은 컨셉이야.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런..,” 이런 식의 연애학(?)이 그것이다. 자칭 ‘연애고수’라고 하지만 승민과 하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허당기가 그 웃음의 원천이고, 그래서 거기에서는 반어법적인 쓸쓸함이 묻어난다. 

 

2016년 ‘질투의 화신’이 조정석의 인생 캐릭터라고 불리는 이유 역시 그가 연기한 이화신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웃기지만 슬픈 페이소스를 그가 200% 납득되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 고정원(고경표)과 사랑하는 여자 표나리(공효진)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도 억지로 괜찮은 척 하는 인물이 이화신이다. 고정원과 갯벌에서 주먹다짐까지 하고 홀로 쓸쓸히 걸어가던 이화신이 목 뒤에서 꿈틀대는 낙지를 쑥 꺼내놓으며 “떨어지라고!” 화를 내는 장면은 조정석 특유의 페이소스가 묻어나며 이 웃픈 작품의 명장면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화를 내지만 어딘지 쓸쓸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게 안쓰럽게 느껴지며, 지독히 슬픈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는 힘. 조정석의 디테일한 페이소스 연기가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또 9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엑시트’ 역시 조정석의 웃픈 연기가 웃음과 눈물의 롤러코스터 같은 힘을 발휘한 작품이었다. 재난 상황이 주는 위기감과 슬픔의 비극들 속에서 조정석은 이를 살짝 뒤틀어 스릴과 웃음으로 바꿔냄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의 납뜩이가 남긴 강력한 잔상 때문에 조정석을 코미디 배우라 여기는 건 대단한 착각이고 오해이며 실례다. 사실 ‘건축학개론’이 개봉됐던 해에 조정석은 드라마 ‘더킹 투하츠’로 진지한 정극 연기를 함께 선보인 바 있다. 또 ‘녹두꽃’ 같은 사극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혁명에 참여하며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백이강이라는 인물을 무게감있게 그려낸 바 있다. 또 신원호 감독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어떤가.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빠이자 만나면 웃게 만드는 쾌활한 친구이면서 환자들 앞에서는 마음까지 돌보는 의사 이익준을 연기하지 않았던가. 물론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조정석은 특유의 코미디 연기도 선보였지만 거기에서도 특유의 쓸쓸한 페이소스 같은 걸 놓치지 않았다. 

 

이 일련의 필모그래피를 염두에 두고 보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세작, 매혹된 자들(이하 세작)’에서의 조정석이 보여주는 연기가 그간의 경험치들이 쌓인 결과물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세작’은 감정 연기가 복잡한 사극이다. 세작이라는 존재는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하는 인물인데,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세작의 감정은 복합적으로 뒤엉킬 수밖에 없다. 애초 대의적 목표는 상대를 제거하려는 것에 맞춰져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나누게 되는 감정의 교류는 그 목표를 실행하는 것을 꺼려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극에서 조정석이 연기하는 이인(이름부터가 2인 같은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이라는 인물은 왕이 되기 전 자신이 몽우라 이름 붙여준 바둑 친구 강희수(신세경)와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왕좌에 오르는 순간 자신이 더 이상 ‘필부’가 아니라며 살려달라 간청하는 그를 버린다. 3년 후 다시 살아돌아온 강희수가 이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남장여자였다는 걸 알게 된 강희수와 이인이 연정을 나누게 되면서 두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게 얽힌다. 그런데 팽팽한 대결구도와 달달한 멜로구도를 오가는 전개는 조정석이 보여주는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연기를 통해 납득이 된다. 한없이 비정한 모습을 보여줄 때는 살벌한 긴장감을 유발할 정도로 냉혹해 보이지만, 눈빛이 풀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연인의 다정함을 보여줄 때는 모든 경계심을 무장해제시켜버리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다보면 그의 눈빛과 목소리 변화에 따라 순간 순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드라마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조정석의 웃픈 얼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그건 우리네 삶의 비의다. 결국은 삶의 빛은 죽음이라는 어둠을 향해 가는 여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끝은 결국 쓸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웃는다. 그건 삶의 비의를 모르는 무지함의 웃음이 아니고, 오히려 그 의미를 알고 있어 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조정석의 웃음이 담는 희비극은 그래서 우리의 삶을 납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아닌 웃음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페이소스 가득한 삶을.(사진: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