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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봐야해

이제훈의 탈북에서 우리네 청춘들의 탈주가 읽히는 까닭(‘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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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 이제훈과 구교환 그리고 홍사빈이 담아낸 처절한 청춘들의 상황극

탈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종필 감독의 영화 ‘탈주’는 우리네 청춘들의 상황극에 가깝다. 군사분계선 너머의 북한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곳을 탈출해 남한으로 넘어오려 하는 규남(이제훈)의 처절한 사투를 그리고 있지만, 이를 통해 정작 하려는 이야기는 우리네 청춘들이 처한 감옥 같은 속박과 그 곳에서 탈주해 뭐든 스스로 선택하는 삶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라는 배경은 일종의 상황이고, 그 곳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규남이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상황극처럼 보인다. 치밀하게 지뢰지대에 매설된 지뢰 위치를 밤마다 일일이 표시해놓고 탈주의 거사를 치를 계획을 짜는 규남이 왜 그토록 탈북을 하려 하게 됐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사건은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탈주 과정에서 그를 추적하게 되는 어렸을 때 ‘형’이라고도 불렀던 현상(구교환)이 등장해 “허튼 생각 말고 받아들여. 이것이 니 운명이야”라고 이야기할 때 그 이유가 감지된다. 

 

규남은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그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원한다. 하지만 10년 동안 군 생활을 하고 이제 말년 제대를 앞두고 있지만 나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현상이 러시아에서 피아노 유학을 했고, 돌아와서도 보위부 소좌로서 악명을 떨치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게 부모 잘 둔 집안 덕분이지만, 아무 것도 없어 그 현상의 집 운전기사를 했던 아버지를 둔 규남은 제대 후에도 자신이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삶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아버지가 죽었고, 군에 있을 때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자신 뿐. 그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남측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며 남한으로 가겠다는 욕망을 갖는다. 

 

이로써 영화는 ‘탈북’이 아닌 ‘탈주’가 된다. 즉 탈북 상황을 통해 담아낸 ‘탈주’에 대한 은유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탈주하려는 자 규남과 이를 막으려 추격하는 자 현상의 대결구도는, 물론 스펙터클하고 스피디한 액션의 서사를 따라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추격전으로 그려지지만, 그건 일종의 자유와 속박에 대한 관념의 형상화처럼 보인다. 북한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저토록 탈주하려 애쓰는 규남이 꿈꾸는 남한은 과연 다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그것은 결국 우리네 청춘들이 똑같이 꿈꾸는 탈주가 무엇일까를 떠올리게 한다. 

 

태생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고, 그래서 더 이상 꿈을 꿀 수도 또 꿔도 무의미하다 느끼는 청춘들. 흔히 말하는 ‘N포’의 정서 속에서 도전하기보다는 주어진 운명대로 살며 그 안에 작은 행복들에 만족해야 하는 삶. 규남은 남으로의 탈주가 적어도 “마음껏 선택하고 실패하는 삶”의 기회가 주어진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지만, 그건 속박이 더 심한 북한과의 비교에 의해 그나마 낫다는 뜻일 뿐이다. 규남이 막연히 남으로의 탈주를 꿈꾸게 만드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라는 노래 자체가 그렇다. 

 

전화하면 늘 ‘양화대교’라고 했던 아버지가 택시운전수였던 그 삶을 이제 성장한 화자가 똑같이 살게 되면서 느끼는 소회를 담은 이 명곡은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라는 가사가 폐부를 찌르는 노래다. 규남을 다소 낭만적으로 매료시켰던 그 곡은 사실상 노력해도 크게 변하지 않는 우리네 청춘들의 ‘인생유전’을 담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규남의 선택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실패하더라도(아니 실패가 정해져 있더라도) 마음껏 선택하는 삶을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탈주하려는 규남과 그를 추격하는 현상 그리고 규남과 함께 도망쳐 먼저 탈북한 엄마를 만나려 하는 동혁(홍사빈)이 한 인물이 분화한 캐릭터들 같다는 점이다.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현상 또한 자신의 피아노에 대한 꿈이 꺾어진 청춘이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던 손은 이제 이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총을 쏴 피로 물들어간다. 그래서 이 인물이 규남에게 하는 일련의 말들, “이것이 니 운명”이라거나 이 곳에서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말들은 사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 없다.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규남을 따라 나서는 동혁의 모습 또한, 엄마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규남의 마음이 겹쳐진다. 그래서 이 세 인물은 운명처럼 속박된 삶 위에서 저마다의 선택으로 분화된 모습을 드러내는 청춘의 초상이 느껴진다. 

 

도전하는 삶을 살았던 아문센을 끝까지 꿈꾼 규남이나, 그 책을 선물하며 첫장에 ‘규남아. 실패보다 의미없는 삶을 두려워 해라’ 라고 쓰기도 했던 ‘피아노형’ 현상은 모두 발밑에 지뢰를 밟고 있는 청춘들이다. 그래서 발을 떼면 죽을 것 같아, 그 선택조차 하기 어려운 청춘들. 그럼에도 ‘탈주’는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그나마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규남의 처절한 탈북 과정이 탈주로 읽히고 그 탈주에서 아련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이유다. (사진:영화'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