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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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사람들은 왜 퀴즈쇼에 열광할까

D.H.Jung 2009. 3. 2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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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퀴즈쇼라는 허구, 영화라는 판타지

예전에 두 번 기회가 있어서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행 관련 퀴즈쇼였고, 또 하나는 '우리말 겨루기'였습니다. 둘다 예선전에서 떨어졌지만 그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의 경험은 왜 이다지도 사람들이 퀴즈쇼에 열광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주었죠.

퀴즈쇼는 일단 단순합니다. 한쪽에서는 문제를 내고 다른 쪽에서는 문제를 맞히죠. 많이 맞히면 상금을 많이 줍니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는 마치 축구경기 같습니다. 운동장에 공 하나를 던져주면 몇 시간을 재밌게 놀 수 있는 힘. 퀴즈쇼의 단순함은 그 엄청난 포상과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저 정도 단순한 게임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순한 게임을 단 몇 시간 하는 것만으로 인생역전을 할 수도 있으니...!'

이것은 퀴즈쇼가 시청자들에게 건네는 말이며, 시청자들을 포획하는 말이기도 하고, 시청자들을 열광케해 결국은 퀴즈쇼 자체가 그 게임의 진정한 승자가 되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슬럼독 밀리오네어'는 바로 이 슬럼독(가난하고 비천한 삶을 사는 자)이라도 몇 시간의 단순한 게임으로 밀리오네어(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퀴즈쇼의 자본주의적 사탕발림을 전제로 시작합니다.

영화는 바로 이 자본주의의 사탕발림을 하나하나 깨부수고 있죠. 연거푸 문제를 맞춘 자말(데브 파텔)이 속임수를 썼다는 혐의로 심문(고문)을 받는 장면과, 처음 퀴즈쇼에 등장해 진행자의 질문을 받는 장면이 교묘하게 교차편집된 것은 대니 보일 감독 특유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영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인터뷰가 가진 유사성은 모두 한 사람의 삶을 발가벗긴다는 면에서 둘다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자말은 이제 슬슬 퀴즈쇼의 문제를 풀 수 있었던 이유를 얘기하면서 자신의 굴곡진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말의 복잡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퀴즈쇼의 형식이 단순한 사지선다의 선택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한 것이죠. 하지만 자말은 그 사지선다의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그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사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합니다.

퀴즈쇼의 말끔한 모습은 이제 시궁창같은 삶을 살아온 자말의 인생역정과 대비되어 보여집니다. 진짜 삶이 가지는 무게감은 어머니를 어린 시절 잃고 슬럼가에 버려진 자말 앞에 놓여진 삶만큼 무거운 것이죠. 그 하나하나의 쓰라린 경험이 문제를 맞힐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고 진술하는 자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 퀴즈쇼가 사실은 그저 몇 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운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줍니다. 사실 그렇게 모든 자신의 인생경험이 퀴즈 문제로 하나하나 나올 수 있는 확률이 몇이나 될까요. 자말은 말 그대로 운좋은 청년이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거꾸로 퀴즈쇼가 가진 허구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 퀴즈쇼가 표상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의 허구 혹은 환상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죠. 자말이 평생의 연인으로 여기며 사랑해온 라티카(프리나 핀토)와 얽히고 설키는 그 과정들은 실로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우연적입니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가 현실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영화 중간에 카메라에 대고 한 경찰관이 "여기서는 촬영하면 안됩니다"하고 말하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이 영화는 철저히 리얼리티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서는 리얼리티에 대한 추구가 대니 보일 감독에 의해 희망적인 메시지로 바뀌어집니다. 하긴 이건 영화이지 다큐멘터리는 아니니까요. 퀴즈쇼가 가진 허구를 한창 드러내고, 자말과 라티카의 실제상황이라면 도무지 연결될 수 없는 그 관계를 설파한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이를 모두 뒤집어 버리죠.

아마도 헐리우드의 속성,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 흥행과의 상관관계를 생각했을 때, 대니 보일의 선택은 불가피했을 지도 모릅니다. 리얼리티로 시작한 영화는 판타지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가 가진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얻으려 하는 것은 그 작은 위안이 아닐까요. 퀴즈쇼가 이루기 어려운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가능성에 여전히 열광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