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의 변신이 놀랍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보다는 CF에서 더 얼굴을 많이 보여온 탓에 김남주는 연기자보다는 CF퀸이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 언제까지 CF에 머물 수만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연기자로의 복귀를 꿈꾸는 김남주의 행보는 사실 지금 '내조의 여왕'에서부터 시작된 일은 아니다. 이미 재작년 '그놈 목소리'에서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 역으로 나왔을 때부터 그녀의 이미지 변신은 예고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CF가 만들어놓은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놈 목소리'에서 끝없이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 모습에서조차 그녀가 했던 집 전화 CF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물론 '그놈 목소리'에서 그녀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깔끔하고 맑고 투명해보이던 CF속의 이미지는 그 영화 속에서는 신경쇄약 직전의 한 엄마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다만 CF 속 이미지의 여운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을 뿐이다(심지어 그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에 집 전화CF가 TV에서 반복되었다.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햇수로 2년이 지난 지금, 김남주가 돌아온 것은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다. 이 드라마는 다행스럽게도 영화 '그놈 목소리'와 집 전화CF가 가져왔던 이미지들의 불협화음을 자체적으로 지워버리고 있다. 천지애라는 캐릭터는 한때 퀸카로 자신에게 넘어오지않는 남자가 없을 정도로 잘 나가던 여자였다. 하지만 온달수(오지호)와 결혼한 후, 그녀의 신데렐라 꿈은 좌절되었다. 서울대를 나왔지만 사회부적응자인 온달수(온달+백수)로 인해, 그녀는 알바 전선을 뛰어야 하고, 심지어 남편 취직을 위해 옛날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던 폭탄 양봉순(이혜영) 앞에 무릎까지 꿇어야 한다.
이 천지애의 캐릭터가 가진 상황은 자연스럽게 김남주의 변신을 용인하게 만든다. CF퀸으로 잘나가던 김남주는 천지애를 입고, "카드 마그네슘이 손상됐나 보네요”, “잘난 사람들은 튀게 되어 있어. 군대일학이라고 하잖아” 하는 말을 툭툭 뱉으며 그 맹한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병원을 전전하고, 남편을 취직시키기 위해 퀸즈그룹 사모님들 사이로 들어가 치열한 내조(?)전쟁을 벌이는 천지애의 모습은, 김남주의 과장된 코믹 연기에 힘입어 좀체 무거워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부유층 사모님들 사이에서 여우처럼 아양을 떨다가, 그 치사함에 뾰로통해지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스러워 남편을 잡아먹을 듯 달달 볶다가, 또 남편을 위해서 굴욕을 참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자장면을 먹어도 흔적하나 없을 것 같던 그녀의 이미지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장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CF의 프레임 속에 갇혀있던 고정된 이미지의 탈을 벗어버리게 된다.
천지애라는 캐릭터가 김남주에게 약이 되는 것은 이 드라마가 스토리 구조상 그저 천지애를 우스꽝스런 아줌마로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점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실업가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내조라는 이름으로 만연한 인맥 사회의 권력구조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천지애의 처절함은 그저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한 안간힘에 머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실적 상황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천지애라는 캐릭터는 주부들은 물론이고, 취업전선에서 갖은 수모를 겪고 있을 현실의 가장들에게까지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것은 김남주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 드라마의 끝에서 CF퀸 하나를 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대신 좋은 연기자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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