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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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매, 왜 반쪽짜리 영웅이 됐을까

D.H.Jung 2009. 4. 1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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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일지매'가 종영했습니다. 꽤 잘 만든 사극이었고, 실험적으로도 완성도로도 훌륭한 드라마가 분명했습니다. 정일우의 사극 연기는 그런대로 괜찮았고, 강남길이나 박철민이 보여준 감초연기도 볼만 했으며, 무엇보다 김민종과 정혜영의 절절한 중년 러브라인은 백미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아쉬움은 왜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돌아온 일지매'가 그린 영웅이 그렇게 속시원하게 대중들의 억압된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극이 끝나고, 한 편의 영웅 활극을 보았다기 보다는 한 개인의 사모곡 혹은 운명적 사랑이야기를 본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왜일까요. 일지매가 종영에 즈음해 '일지매 없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고, 하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필요한 일지매 같은 영웅을 삽화로 넣은 것이 그다지 큰 울림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그것은 '돌아온 일지매'가 보여준 이율배반적인 영웅 행위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 드라마가 보여준 세계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지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청계천에 버려지고, 거지와 스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죠.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으로 청국과 왜국을 방황하다가 겨우겨우 달이(윤진서)의 품 안에 정착하지만 나라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죠. 달이는 관원의 칼날에 사라집니다. 무엇이 그를 이런 구렁텅이로 빠뜨린 걸까요. 이 사극이 영웅담을 그리고 있다면 바로 그 원인을 향해 그 원인이 무엇이든 칼날을 들이댔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일지매가 칼날을 들이댄 건, 이 시스템을 만든 나라가 아니라 김자점(박근형)이라는 한 탐관오리일 뿐이었습니다. 사극의 대부분에서 일지매가 겨룬 것은 김자점과의 대결이었죠. 그나마 그것 역시 김자점을 하나의 잘못된 나라의 시스템으로 상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죠. 그런데 이 김자점이 청국을 끌어들여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지점에서부터 일지매의 이야기는 방향을 틉니다. 나라의 시스템과 대결을 벌이던 도적에서 갑자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적인 영웅으로 변모하게 되죠.

내부의 문제가 터져나올 때, 외부의 문제로 내부를 결속시키는 이야기는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많이 있었던 일들이죠. 임진왜란 같은 전쟁은 바로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일지매는 (나라는 그를 버렸지만)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로 바뀝니다. 이유는 애매하지만 그나마 설득력있게 들리는 '그것이 결국 백성을 위한 것'이란 것이죠. 물론 이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죠. 나라가 있고 나서야 바꾸고 대항할 시스템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하나의 허구입니다. '돌아온 일지매'는 영웅담이 가질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왜 하필 이렇게 체제 순응적인 영웅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요. '돌아온 일지매'는 따라서 이 이야기의 끝에서 하나도 바꾼 것이 없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문제(서자 같은 시스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못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갈 이들의 문제 또한 바꾸지(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한다 하더라도 시도라도 하는) 못했습니다. 이 사극은 꽤 사랑스러운 인간적인 인물들을 그려냈지만, 대중들이 희구하는 영웅은 그리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난 현재, 도시의 빌딩 숲 사이에 여전히 일지매는 서 있습니다. 그가 거기 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치안유지를 하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번에는 진짜 저 잘못된 시스템을 향해 칼날을 드리우려는 것일까요. 관원으로서의 삶과 개인적인 삶 사이에서 분열적인 인생을 살아온 구자명(김민종)의 길을 혹 일지매는 다시 살아가려 하는 건 아니겠지요. 나머지 부분을 채워넣는 건 어쩌면 이제 우리들의 몫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