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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블로거의 시선

‘미워도 다시 한번’, 그 복잡한 가계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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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드라마, 그 임신 권하는 세상이 말해주는 것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의 가계도는 실로 복잡하다. 명진그룹 회장인 한명인(최명길)은 같은 회사 부회장인 이정훈(박상원)과 부부이고 그 사이에 아들 이민수(정겨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민수는 이정훈의 친아들이 아니다. 한명인의 첫사랑의 소산이다. 한편 이정훈과 내연관계에 있는 은혜정(전인화)은 그와의 사이에 딸 수진(한예인)을 두고 있는데, 사실은 숨겨진 딸 최윤희(박예진)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한명인의 며느리로 들어오면서 관계가 복잡해진다. 이정훈을 사이에 두고 한명인과 은혜정은 서로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데, 최윤희의 존재는 이 둘 관계를 나락에 빠뜨린다. 최윤희의 시어머니인 한명인이 죽기살기로 대결을 벌이는 이가 자신의 친어머니(은혜정)가 되고, 시아버지가 된 이정훈은 갑자기 친아버지가 된다....

이 가계도는 사실 정리하면서도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이 관계의 거미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지나치게 엮여져 있는 관계들의 기저에는 자식문제가 지뢰처럼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극단적인 드라마 구조 속에서는 제 자리에 서 있는 자식이 거의 없다. 이민수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죽었다 생각하며 살아오고, 최윤희는 자신이 은혜정의 딸인 줄도 모르고 살아온다. 흔히들 식상한 표현으로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는 이 드라마의 중심 모티브가 된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이 든 중년들이고 이제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들이라 가려져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미혼모의 문제다. 한명인은 젊은 시절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사랑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그 사이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고, 은혜정은 미혼이면서도 내연관계인 이정훈과 두 명의 딸이나 둔 셈이다.

희한한 일이지만 이들의 미혼모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미혼모의 문제는 주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비춰지곤 한다.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는 회피되어 있다. 이것은 이 미혼모의 문제가 여전히 여성들의 문제라는 가부장적 사고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물론 남성들은 입만 열만 “미안하오. 잘못했소.”를 연발하지만 그 뿐이다. 이 저질러진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고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고 있는 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미혼모 문제에 대한 이런 시각은 1968년 정소영 감독이 동명의 원작 영화에서 보여준 시각에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까지 갖게 된 혜영(문희)이 후에 그 사실을 알고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아이가 성장하자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낸다는 이 모성을 자극하는 신파적인 이야기는 미혼모의 문제를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무책임한 신호보다는 불쌍한 혜영에 더 집중해 신파적 감성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네 드라마에서 임신이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부모들은 임신을 지상과제처럼 강권하고, 만일 피임이라도 하다가 들키는 날에는 마치 아이라도 지운 것 마냥 지탄을 받는다. 그래도 결혼한 사이라면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종종 드라마들은 피임이라는 문제를 회피하기 일쑤다. 과감한 성담론을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2006년 작 ‘여우야 뭐하니’에서 콘돔이 등장하고 솔직한 피임의 이야기들이 나왔을 때, 선정성 논란이 불거졌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도대체 피임이 왜 선정적인가.

피임의 문제가 이처럼 은근히 회피되면서 드라마 속에 문제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낙태의 문제다. 낙태는 종종 공포의 하나로 취급되는데, 그것은 은폐하려 했던(그래서 여성들만이 그것을 대면하는) 끔찍한 결과를 그대로 드러내놓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1994년도에 제작되었던 ‘M’이다. 낙태된 아기의 영혼이 낙태에 직면한 여성의 몸 속으로 들어와 복수를 한다는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변주되던 소재들이다. 이 드라마는 최근 ‘아내의 유혹’의 제작사인 신영이앤씨에서 올 여름 리메이크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낙태의 문제 역시 과거와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드라마가 여성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은 ‘아내의 유혹’처럼 첫 회부터 교빈(변우민)이 은재(장서희)를 강제로 아이를 갖게 해 결혼을 하고 내연녀를 낙태시키고 비서를 성희롱 하는 것처럼 직설적인 면도 있지만, 도무지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미워도 다시 한번’처럼 그 이면에 왜곡된 시각을 숨겨 두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주로 임신 권하는 사회(혹은 피임을 죄로 취급하는)의 모습으로 드러나거나, 낙태를 여성의 고통스런 문제로만 내면화하는 형태를 띄기도 한다.

만일 드라마 속에서 한 주부가 6개월 치씩 피임약을 사서 먹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그것도 이유가 몸매 때문에 아이를 원치 않아서(물론 섹스는 좋아하지만) 결혼 후 몇 년 동안 계속 피임을 해온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것은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미드의 한 에피소드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피임약을 버리고 대신 비타민약을 넣어두어 결국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알게된 부인에게 남편이 한바탕 혼이 나는 장면이 나온다. 또 ‘프렌즈’에는 한 집 살이 하는 두 여자친구가 각각 남자친구를 데려왔는데 콘돔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아 콘돔내기(?)에 진 여자가 “오늘은 안되겠다”고 말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물론 우리네 정서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적어도 임신에 대한 남녀의 동등한 시선만큼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임신 권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남성적 시각이 만들어낸 ‘미워도 다시 한번’의 그물 같은 가족관계를 언제까지나 미워도 다시 한번 봐야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