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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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를 보며 다윈을 떠올린 이유

D.H.Jung 2009. 5. 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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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리뷰를 쓰고 나니 미진함이 남네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지만 '박쥐'는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개봉 첫날 '박쥐'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 조조에는 본래 거의 관객이 없던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박쥐'는 꽤 많은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보는 이들에 따라 다 보러온 관점이 다를 것입니다.

혹자는 박찬욱이라는 이름 석자에 끌려 왔을 수도 있고, 해외에서 주목하는 '박쥐'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으며, '박쥐'가 홍보된 성적인 이미지에 끌려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송강호의 성기노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박찬욱이 가진 힘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더군요. 박찬욱은 늘 틀에 박혀있는 여러 영화적 요소들을 그의 실험실로 가져와 하나로 이종교배해 새로운 종자를 끄집어내는 듯 합니다. 바로 그런 점이 이런 다양한 관점과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일 겁니다.

'박쥐'는 그런 면에서(제목부터가 그렇지만) 엉뚱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제게 찰스 다윈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하나하나의 복잡한 개체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개체들의 무수한 결합과 자연선택에 의한 도태의 결과가 어떤 진화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관점은, '박쥐'가 서 있는 수많은 이종적 이미지들의 교배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백신 개발을 위해 몸을 던지고(순교적으로), 죽음에 이르지만 흡혈귀의 피를 수혈받고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 그는 대중들에게 부활과 구원의 상징이 되죠. 즉 흡혈귀와 신부가 상현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로 엮어집니다. 그는 친구의 아내인 태주(김옥빈)를 만나고 그녀에게 욕망을 가지게 되죠. 여기서 상현의 욕망은 또다시 두 가지로 부딪칩니다. 하나는 불행해보이는 태주를 자신이 구원하겠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육욕이죠.

그리고 결국에 이르게 되는 파국들 속에서 상현은 살인하지 말라는 신부로서의 계명과 살인해야 살 수 있는 몸의 요구 사이에 서게 됩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는 태주에게 살인하지 말라면서 이미 죽은 시체의 발목을 자르면 피가 더 잘 나올 거라는 조언을 해주는 이중적인 자아를 보여주죠. 새와 쥐의 이종교배인 박쥐처럼, 인간과 괴물의 이종교배인 뱀파이어처럼, 상현은 신부와 뱀파이어의 이종교배가 만든 어떤 피조물로서 구원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이런 이종교배된 자아를 인간의 실존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있는 '박쥐'는 실로 매혹과 잔혹이 교배되어 있고, 구원과 타락이 교배되어 있으며, 성과 속이 교배되어 있고, 인간적인 어떤 것과 종교적인 어떤 것, 그리고 빛과 그림자가 교배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그 교배된 지점이 실로 절묘한 것은 심지어 머리에 후드를 쓴 상현이 신부복을 입고 있는 장면에서 그 자체로 박쥐의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죠.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기대와 평가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돌연변이 같은 면모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돌연변이는 영화라는 늘 새로운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생태계의 발전적인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물론 살아남아야 그 진화는 이루어지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체는 꽤 의미있는 것이죠. 진화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수많은 피조물들이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죠.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박쥐'는 사라질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살아남아 진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영화를 보고 와서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쓴 리뷰를 또 쓰고 하면서 뭔가를 자꾸 정리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 닳고 닳은 관습적인 영상들 속에 이제 막 도태되려 하던 시선 속으로, '박쥐'라는 어떤 이물감이 뛰어들어 새로운 교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