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트리플'이 막장? 과연 그럴까? 본문

옛글들/블로거의 시선

'트리플'이 막장? 과연 그럴까?

D.H.Jung 2009. 6. 25. 15:49
728x90
'트리플'은 인물의 관계로만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트렌디한 설정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그 첫번째는 신활(이정재)-이하루(민효린) 사이에 싹트는 멜로 라인이다. (물론 피는 한 방울도 안섞였지만) 오빠-동생 하던 사이인 이들은 조금씩 애정의 감정을 갖기 시작한다. 두 번째는 신활-최수인-장현태(윤계상) 사이에 벌어지는 삼각 멜로 라인이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된 것이지만) 현태는 친구 신활의 아내인 최수인을 사랑하게 된다. 세 번째는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이지만 조해윤(이선균)-강상희(김희) 사이의 멜로 라인이다. 이들은 우연히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강상희의 거리두기로 인해 조해윤은 그 사정거리 바깥에서 늘 마음을 졸이게 된다.

단순하게 표피적으로 그리고 부박하게 이들 관계를 말한다면 1. 오누이 멜로 컨셉트 2. 불륜 컨셉트 3. 자유를 빙자한 방종한 자유연애 컨셉트 정도라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트리플'이라는 드라마를 이렇게 쉽고도 단순하게 트렌디라는 색깔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항간에는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고까지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막장이라는 용어가 참 애매모하하다. 나 역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늘 꺼림칙한 느낌을 갖곤 했는데, 이미 대중들에게는 막장이라는 용어가 그만큼 친숙하게 침투해 있었던 터라, 결국에는 다른 표현을 굳이 찾지 않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꽤 많은 오류들과(심지어는 심각할 수도 있는) 왜곡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막장이라는 용어부터 생각해볼 일이다. 막장은 말 그대로 바닥까지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 첫 번째는 윤리적인 것이다. 근친상간이나 성희롱의 뉘앙스가 들어 있다거나, 불륜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완성도에 관한 것이다. 인과관계가 잘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 얼개나 전혀 개연성이 없는 캐릭터의 행동 같은 대본의 요소들, 또 엉성한 연출과 이른바 우리가 발연기라고 하는 연기력까지 모두 이 완성도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서로 일정한 상관관계를 갖는데 예를 들어 김수현 작가가 쓴 '내 남자의 여자' 같은 작품은 불륜이라는 소재가 비윤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막장 드라마(당시에 막장드라마라는 용어는 없었으나 대신 논란드라마라는 용어는 있었다)라 불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륜이라는 그 소재를 끝까지 탐구하는 드라마로서 '명품 드라마'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가을동화'의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만들어가는 오누이 멜로 컨셉트를 가지고 역시 막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유는? 완성도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흔히 막장이라고 부르는 용어에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윤리적인 잣대와 완성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도라는 것이다. 사실 소재만 가지고 윤리적인 잣대로만 판단한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고대 비극을 막장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윤리적인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윤리와 비윤리를 넘어다니는 그 아슬아슬한 지점에 놓이게 되는 인간 실존의 문제 같은 것이 오히려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재가 완성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 소재를 자극을 위해서만 끌어왔을 뿐, 아무런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거나 나름의 완성도를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소재를 보고 "저거 또 막장이네"하고 쉽게 판단하고 또 그 판단이 대개는 맞는 이유는 작금의 드라마 시장이 작품보다는 상품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시청률에만 목을 맨 나머지 윤리적으로 뒤틀린 자극적인 소재만을 끌어왔을 뿐, 그저 그런 늘 보던 대로의 식상한 전개를 보여주는 드라마들이 양산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소재가 등장만 해도 그런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리플'로 다시 돌아가서 이 잣대를 대보면 어떨까. 트리플이 지금 현재 갖고 있는 소재들은 윤리적인 잣대로 봤을 때는 분명 오인의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완성도를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트리플'이 보여주는 이윤정 PD 특유의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연출은 실로 놀라운 영상경험을 하게 해준다. 4회에서 연출된 비오는 날의 정경은 영상 연출이 그 축축한 느낌이나 그 안에 서 있는 인물들의 감정선까지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윤정 PD의 카메라 앵글은 우리가 보통의 드라마에서 봐왔던 그 관습적인 앵글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멈춰선 카메라 속에서는 인물들의 소소한 감정들이 그들의 동작에서는 물론이고 배경에서조차 묻어난다.

특히 배경은 이윤정 PD에게는 드라마의 또다른 얼굴이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가 드러내는 감정을 잘 포착해주는 공간이 된다. 이것은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도 그렇고 '트리플'에서 세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소녀가 사는 공간에서도 그렇다. 이들은 종종 공간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색깔을 입히고 또 심지어는 지붕 위의 공간(수인의 집) 위로 올라감으로써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혹자는 이윤정 PD의 이러한 연출이 '막장을 위장하기 위한 위장전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연출이 가지는 작품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결과가 된다. 연출은 스토리에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스토리가 되기도 한다. 이윤정 PD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다면 '트리플'이 가져온 소재들과 이 연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주제와의 맥락을 가질 때 우리는 이 드라마를 쉽게 막장이라 부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리플'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드라마일까. 막장이라 판단한다면 그 얘기는 뻔해진다. 그저 그런 자극적인 이야기들의 나열일 테니까. 하지만 이 공들여 만들어진 듯한 '트리플'을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억울한 점들이 많다. 아직 5회밖에 진행되지 않았던 고로(또 그 5회의 주제가 '웜업'이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는 아직 워밍업 단계였을 뿐일지도 모르므로 더더욱) '트리플'이 하려는 이야기를 속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격적인 얘기조차 들어가지 않은 이 작품이 벌써부터 막장이라는 칭호로 보여지기조차 못할 지도 모른다는 기우는 무리해서라도 '트리플'이 하려는 이야기를 예단하게 만든다.

따라서 여기부터는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는 '트리플'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트리플'은 피겨스케이팅을 소재로 삼고 있다. 김연아 마케팅을 위한 포석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 피겨스케이팅이 갖는 특징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이 드라마의 매회 구조가 그 특징들을 소제목을 삼고 어떤 삶과의 연관점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빙판에 서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미끄러운 공간이 가진 위험성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를 통해 예술로 승화된다. 아슬아슬함과 위험함을 뛰어넘었을 때 발견하게되는 것은 극한의 아름다움이다.

'트리플'을 피겨스케이팅이 갖는 이미지와 연결시켜보면 바로 이 아슬아슬한 관계들 위에서 빚어내는 어떤 아름다움 같은 것이 아닐까. 드라마의 주축이 되고 있는 세 남자의 멜로 관계는 저마다 빙판 위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서로 빗나가고 엇갈리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그 일련의 모습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극적인 설정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미려한 연출이 말해주는 것은 "그래도 청춘은 아름답다"하는 전언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동성애 코드를 소재로 가져왔지만 우리에게 잘잘못으로 판단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청춘을 되새겨 보여주었다. '트리플'이 그 연장선에 있다면 이윤정 PD는 일관된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일련의 작품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작도 전에 논란에 휩싸이고, 막장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여전히 이 드라마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는 이 예감이 빗나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