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중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 된 사연

 

<늑대소년>이 누적 관객수 52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를 순수한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멜로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한 셈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중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늑대소년 철수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걸 연기해낸 송중기라는 아우라다.

 

자료: 영화 '늑대소년'

멜로라는 장르가 영화에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해왔던 것처럼 드라마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런데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다. 여기서도 역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그걸 연기한 송중기다. 겉면으로는 스릴러와 판타지가 섞여있고 또 복수극의 요소들이 깃들여있지만 모두 그 알맹이를 보면 멜로의 결이 느껴지는 이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 그 안에 있는 늑대소년 철수와 강마루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걸 연기한 송중기. 과연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송중기라는 배우가 가진 면모와, 지금 현재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조합이 절묘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중성적 이미지의 외모와 남성성을 드러내는 내면을 가진 ‘세상 어디에도 없는(없을 것 같은)’ 판타지적인 존재다. 그렇다면 송중기라는 연기자와 늑대소년, 착한남자라는 캐릭터, 그리고 버겁디 버거운 현실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걸까.

 

<늑대소년>은 작금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완벽한 판타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늑대와 소년의 만남은 늑대로 표징되는 남성성과 미소년이 가진 중성적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남성성과 중성적 이미지)는 작금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양가적 이미지다.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급격히 초식화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거꾸로 ‘남성적인 면’을 판타지로 꿈꾸지만 그것이 중성적으로 포장되길 원한다.

 

이것은 이른바 ‘나쁜 남자 신드롬’과 맞닿아 있다. ‘나쁜 남자 신드롬’은 자신에게만 부드럽고(중성적) 타인들에게는 까칠한(남성적인) 그런 남자에 대한 판타지다. 흔히 드라마에서 ‘버럭’ 캐릭터로 등장하곤 하는 인물들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그렇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그러하며, <파스타>의 셰프 최현욱(이선균)이 그렇다. 이들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기 분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자기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존재들이다.

 

<늑대소년>은 이 캐릭터의 극화버전인 셈이다. 철수라는 캐릭터는 아예 이러한 판타지가 가상의 존재로 축조된 인물이다. 철수는 순이(박보영)에 의해 순화되지만 인간이 아니다. 인간보다는 늑대에 더 가까운 존재. 그래서 남성성은 그 차원을 넘어 야수성으로까지 보여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에 대한 부드러운 태도는 순정을 넘어 절대 복종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이 양가적 성격은 내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 캐릭터의 외형으로도 드러난다.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이들 앞에서 그는 늑대로 변신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맑디맑은 미소년의 얼굴로 돌아온다. 미소년의 외모에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보호해줄 것 같은 남성성의 결합체. 이런 완전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존재. <늑대소년>은 그래서 <착한남자>라는 드라마가 구축해낸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만나게 된다. 강마루는 자신의 여자를 위해서 대신 감옥에 가기도 하고, 때론 죽음도 불사하는 그런 존재다. 제목은 <착한남자>지만 그 착함(사랑하는 여자를 위한)은 때론 파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강마루 역시 <늑대소년>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물론 이 극대화된 판타지는 이런 남자가 현실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세상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특히 남자에게는. 특히 청춘에게는. 청춘의 남성들은 그런 현실 속에서 초식화되거나 타인과 담을 쌓고 자신에게 침잠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띌 수밖에 없다. 청춘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멜로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거나(<건축학개론>처럼), 극단적인 판타지로 숨는 것(<늑대소년>같은)은 그런 현실 때문일 게다.

 

아마도 이 이미지 때문일 게다. 이미지에 민감한 광고가 송중기를 가만둘 리 만무다. 그는 2개월간 총 10편의 광고를 제의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송중기가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다. 그는 곱상한 미소년의 얼굴에 강한 남성성의 내면을 숨기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로 축조됐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듯이 그는 미소년(<성균관스캔들> 같은)에서 시작해 갈등하고 고뇌하며 때론 분노하는 햄릿으로 왔다가(<뿌리 깊은 나무> 같은) 이 두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로 세워졌다. 작금의 현실을 두고 볼 때, 이러한 캐릭터를 가진 송중기의 시대는 이미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고싶다>의 박유천, 갈수록 물건이 되어간다

 

이건 아역이 아니야. 여진구가 드라마에 나올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다. <해를 품은 달>에서 그가 사라진 연우를 향해 오열할 때 그 감정의 질감은 시청자들의 마음에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보고싶다>의 한정우로 돌아온 여진구. 그 연기는 더 깊었다. 살인자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로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가는 수연에게 “살인자 딸 이수연. 나랑 친구하자.”고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아마도 시청자들은 그 미소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보고싶다'(사진출처:MBC)

또 다시는 그녀를 부정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납치범들에게 겁에 질려 그녀를 혼자 놔두고 도망쳤을 때,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영영 사라져 버렸을 때 그녀가 남긴 일기장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한정우(여진구)의 모습을 보며 똑같이 가슴이 먹먹해졌을 것이다. ‘보고싶다’라고 담벼락에 쓰고는 사라져버린 수연을 가슴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는 한정우의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아픔과 그리움의 정조를 깔아주었다. 그 한정우를 연기해낸 여진구는 그런 존재감을 남겼다.

 

그러니 그 역할을 이어받는 박유천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아역의 지나친 존재감은 성인역으로의 변신에 때로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니까. 게다가 <보고싶다>는 어린 한정우가 가진 그 그리움과 순수에게 기인하는 아픔이 궁극적인 주제가 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의 대결을 그린다. 김성호(전광렬)가 정우에게 자신의 꿈이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 말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한정우의 시간은 14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진구의 아우라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유천으로 넘어오는 그 과정이 특별한 이물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다. 박유천은 이제 형사라는 어른의 겉옷을 입은 채 여전히 여진구가 보여줬던 그 어린 한정우의 순수한 아이 같은 그리움과 슬픔을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장르적으로는 형사물이 갖기 마련인 추적과 잠적의 이야기와, 숨겨져 있던 과거 사건의 실체를 풀어내는 추리와 스릴러의 이야기가 겹쳐져 있지만, 그 위에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힘은 한정우와 이수연의 세월을 뛰어넘는 가슴 절절한 멜로다. 따라서 한정우의 끈질긴 수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한 남자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따라서 이것은 순수를 잃어버린 세상(사건으로 점철된)을 향한 한 형사의 대결이면서 사랑이 된다.

 

<보고싶다>가 점점 더 보고 싶어지는 이유는 이 두 지점이 절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정우의 사랑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거기서 아마도 멜로의 차원을 뛰어넘는, 차디찬 세상에 대한 대결의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옛 사랑이면서 어린 순수이면서 따뜻한 정이 넘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방해하는 어른들의 세계와 부딪치며 달려 나가는 인물 한정우. 어린 시절의 강력한 트라우마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순수의 세계를 다시 복원해내는 그 역할을 박유천은 특유의 몰입으로 잘 소화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여진구가 만들어낸 그 강력한 아우라 속에서도 그 바톤을 이어받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은 박유천이라는 배우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점이다. 박유천, 이 친구 갈수록 물건이 되어간다.

<전우치>, 어설픈 CG보다 급선무는

 

<전우치>가 첫 선을 보였다. 전우치라는 새로운 사극의 소재가 갖는 신선함과 차태현이라는 배우가 주는 기대감 때문인지 첫 방 시청률은 좋은 편이다. 단번에 1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청률과 다르게 반응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먼저 <전우치>라는 도술을 쓰는 존재를 그려내는데 있어 필수적인 CG가 기대 이하라는 평이다. ‘사극 버전 벡터맨’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전우치'(사진출처:KBS)

물론 CG의 완성도가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액션이 갖는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CG가 아니라 촬영과 연출의 문제일 수 있고, 또 대본이 가진 장르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놓고 판타지를 보여주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CG에 확실히 자신감이 있거나 그만한 투자가 이뤄졌다면 모르겠지만 영화도 아닌 드라마에서 그런 CG는 맞지도 않고 효과도 별로 없다.

 

드라마는 결국 볼거리보다는 스토리와 캐릭터에 천착하는 장르다. 영화 <전우치>가 화려한 CG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신나는 한 판 놀이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런 방식이 드라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눈보다는 마음이 움직이게 해야 된다. 게다가 <전우치>는 한 시대의 영웅을 그리는 서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대중들이 희구하는 영웅의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사극의 전우치(차태현)는 우리를 가슴 떨리게 하고 마음 한 구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그런 영웅일까.

 

첫 회에서 보여준 이 영웅에게서는 그런 소명의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탐관오리들이 학정을 펼친다거나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민초들이 있다거나, 혹은 전쟁이 벌어져 외세가 쳐들어와 온 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썩은 정치적 관료들 때문에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산다거나 하는 그런 현실을 끄집어낼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우치의 개인사가 어설픈 CG와 함께 액션으로 보여졌을 뿐이다.

 

율도국에서 사랑했던 무연(유이)이 강림(이희준)에 의해 최면에 빠져버리고 전우치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건이 첫 회의 가장 큰 스토리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 전우치를 살려낸 스승이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강림을 막으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앞으로 이 사극이 하려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전우치는 결국 조선을 넘보는 강림을 제압하고 무연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은 전우치라는 영웅의 존재의미이기도 하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포졸들에게 쫓기다가 숨기 위해 닭으로 변신함으로써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그런 틀에 박힌 도술 시퀀스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 <매트릭스>와 <와호장룡>에서 나왔던 몇몇 액션 장면들을 따라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전우치>라는 고전소설의 주인공에게 지금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이 현실의 갈증을 빗대어 풀어줄 영웅의 서사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디딘 것에 불과하지만 CG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 전우치라는 캐릭터가 어서 빨리 민초들을 구원하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놀라운 볼거리로 승부할 것이 아니라면(이것은 전술했듯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좀 더 명쾌한 대립구도 속에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 대중들이 갖고 있는 갈증을 사극의 형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전우치>는 자칫 B급 CG장르에 머물 위험성이 있다.

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나

 

불과 2,3년 전과 비교해도 작금의 시청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이런 변화는 특히 드라마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같으면 기본이 20%에서 시작해 잘된 작품은 4,50%를 넘기기 일쑤였던 사극의 시청률이 대표적이다. <마의> 같은 이병훈 사단의 웰메이드 사극도 겨우 17%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종영한 <신의>도 10%대 시청률에 머물렀고 <대풍수> 역시 한 자릿수 시청률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완성도에 그만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낮은 시청률의 원인이 온전히 작품의 문제만이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흔히들 사극이 죽었다는 얘기들을 하지만 사실상 죽은 건 드라마 전체의 시청률이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를 빼놓고 20%를 넘기는 드라마가 귀하게 되었다. <착한남자>처럼 극성 강하고 완성도도 높은 드라마도 18% 시청률로 종영하는 상황이다. 사극이 죽었다고까지 표현된 데는 과거 높은 시청률을 올렸던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낙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란 얘기다.

 

이런 사정은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만 해도 20%를 넘어 30%에 육박하는 예능 프로그램들(<1박2일>이 그랬고 <무한도전>도 그랬다)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말 예능에서조차 20%를 넘기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개그콘서트>가 그나마 20%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주중 예능 시청률은 더 상황이 안 좋다. 토크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월요일 밤 예능들은 언젠가부터 10% 시청률 기록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시청률 대폭락이 일어난 걸까.

 

시청률이 이렇게 뚝 떨어진 것은 콘텐츠가 질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청률 산정 방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 시청 패턴이 TV 중심에서 인터넷, IPTV, 모바일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이런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예로 들면 현재 시청률 산정은 매일 전국 13개 지역, 3천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청률을 산출해낸다고 한다. 각 가구에 설치된 피플미터기(시청률 산출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치가 집계되는데 이 해당 시간 콘텐츠 자료를 통합하는 방식으로 시청률이 산출되는 것. 물론 과거에는 이런 산정방식이 어느 정도 유효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TV 방송을 본다는 것이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인터넷을 통한 다운로드로 방송을 보는 시청층들도 상당히 많아졌고, 시간에 맞춰보기보다는 IPTV를 통해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또 최근에는 모바일이 확산되면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이렇게 방송을 보는 방법이 다양화되었는데 여전히 오로지 TV에만 맞춰져 있는 시청률 산정은 달라진 시청자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편향적인 시청률은 광고의 잣대가 되기가 어렵다. 실제로 시청률과 광고가 비례적으로 올라가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즉 시청률이 제아무리 40%를 넘긴다고 해서 광고가 더 많이 붙지 않는다는 것. 또 반대로 시청률이 10%에 머물고 있어도 광고를 완판하는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추적자> 같은 경우는 시청률이 10%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종영까지 광고가 완판된 사례다. 이 드라마는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까지 받았는데 그것은 시청률은 조금 낮았지만 화제성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이라는 수식어의 기준도 시청률에서 화제성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문제는 이러한 시청률 산정 기준이 가져오는 폐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청률 산정 기준으로는 TV 방송 프로그램을 급격히 노화시킬 수밖에 없다. TV를 통해 보는 시청층이 중장년층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1일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10년 사이에 10-30대의 시청률은 절반 이상이 줄었다고 한다. 2002년 13%였던 이들 세대의 평균 시청률이 올해는 5%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 이제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은 고작 중장년층들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여기에는 젊은 층들의 비아냥이 섞여 있다) 전형적인 과거의 자극적인 코드들을 답습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러한 시청률 산정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 소위 막장드라마들의 주 시청세대는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기억상실, 신파 같은 코드들은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들이다. 결국 젊은 세대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현재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방송 콘텐츠가 질적으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는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류 콘텐츠의 퇴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중장년층에 편향된 시청률에 좌지우지되는 방송 환경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눈에 걸맞는 새로운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시청률 산정에는 포착되지 않는 화제성 높은 젊은 드라마들을 마니아 드라마로 치부하는 것은 방송 콘텐츠에서 젊은 세대를 소외시키는 행위다. 세상에 마니아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단지 작금의 시청률 산정이 그 기호를 반영하지 못할 뿐이다.

 

중요한 건 이제 중장년층들조차 이렇게 다양화된 시청패턴에 적응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방송을 TV로 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만, 이미 90년대 인터넷을 경험한 3,40대의 경우 인터넷 시청이나 모바일 시청이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 이른바 본방사수라는 실시간 시청보다 자신이 편안한 시간에 보는 ‘다시보기’ 시청 패턴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결국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중장년층의 기호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이 나이든 세대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따라서 그런 방송 프로그램들만 높은 시청률이란 왕관을 쓰고 더 많아지는 것은 자칫 TV콘텐츠의 보수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볼 것 없는 젊은 세대들은 TV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한 콘텐츠를 찾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TV의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지금의 미디어 발달 속도로 볼 때 이런 이탈의 속도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커다란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 세대의 기호를 반영하지 못하고, 광고 산정 기준도 되지 못하며 그저 고정적인 TV 시청층의 취향만을 보여주는 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는 걸까. 설마 여기에도 매체를 하나의 정치적인 도구로 바라보는 구태적인 시선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유명무실한 시청률 산정 기준은 빠른 시일 내에 달라져야 한다. IT 강국, 한류를 전면에 내세우는 우리에게 이 두 분야가 합쳐질 수 있는 인프라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인프라 위에 제대로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평가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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