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 연장보다 시즌을 요구하는 이유

 

권석장 PD의 엔딩은 독특하다. 정지화면과 동영상이 교차되면서 그간 있었던 사건들과 일어날 사건들이 열거되고 그 위로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음악이 흐른다. 이것은 <파스타>에서도 그랬고 이번 <골든타임>에서도 그랬다. 이 짧은 엔딩의 특징은 이들 드라마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연속극의 전통을 갖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이 다음 회에는 무슨 이야기가 벌어질 것인가를 놓고 엔딩에 이른바 ‘낚시질’을 한다면, <골든타임> 같은 드라마는 오히려 그날 있었던 사건들이 보여준 흥미로운 순간들을 정리해준다.

 

'골든타임'(사진출처:MBC)

물론 다음 회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는 걸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지는 않는 인상이다. 이것은 <골든타임>이라는 드라마가 어떤 이야기의 연속적인 흐름을 타고 위기 절정을 향해 치닫기 마련인 여타의 우리네 드라마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골든타임>은 그 한 회가 집약해서 보여주는 에피소드와 그 의미에 더 천착한다. 우리가 흔히 미드에서 보게 되는 형태다. 각 회마다 각각의 제목을 부여해도 충분할 법한 그런 구조.

 

이렇게 각각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드라마는 아무래도 시청률에서 불리할 수 있다. 즉 연속적인 시청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골든타임>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 개의 이야기가 서로 병치된다고 해도 그 안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그 흩어진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준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현재 <골든타임>의 에피소드만 봐도 그렇다. 갑자기 강대제(장용) 이사장이 쓰러지면서 강재인(황정음)이 그의 손녀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것을 알게 된 병원 과장들의 역전된 반응이 씁쓸한 웃음을 전해주었으며, 이 사실을 이용해 응급실의 해결사가 된 강재인의 유쾌한 모습도 방영되었다. 그 와중에 최인혁(이성민)과 이민우(이선균) 사이의 사제 간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최인혁과 신은아(송선미)의 연애보다 흥미로운 밀당도 보여준다. 배달부로 일하면서도 이웃사랑을 전한 박원국 환자의 따뜻한 이야기, 산탄총을 맞고 들어온 미스테리한 사건의 환자들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많은 이야기들이 어떻게 한 드라마 속에 용해되어 있는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응급실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처럼 산발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고, 이것이 오히려 진짜 리얼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응급실의 일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흩어지지 않는 건 그 이야기들을 묶어주는 강력한 캐릭터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인술의 대명사로 서 있는 최인혁 교수와 병원 과장 4인방의 팽팽한 대결구도가 틀을 만들고, 이민우와 강재인의 성장담이 그것을 받쳐준다. 여기에 신은아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는 최인혁 교수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인물구도라면 그 안에 어떤 에피소드가 들어와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의사들을 도전하게 만드는 응급한 환자들이 있고, 그 환자들이 갖고 들어오는 무수한 사연들이 있다. 환자를 겪으며 성장해나가는 의사들의 성장드라마가 있고, 이상과 현실의 부딪침에서 생겨나는 의사들 간의 정치적인 드라마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걸 아우르면서도 유머를 만들어내는 여유 또한 잊지 않는다.

 

이런 수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골든타임>이라는 드라마에 대해 유독 대중들의 시즌제 요구가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보인다. 건물로 치면 이제 겨우 기초공사 끝내고 골조만 세웠을 뿐인데, 어느덧 종영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대중들은 최인혁 교수가 제대로 트라우마 센터를 운영하게 되는 그 과정을 보고 싶어 하고, 이제 겨우 시작한 이민우와 강재인의 성장드라마를 보고 싶어 한다. 또 아직 전면에 보여주지 못한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라든가, 사제 간에 벌어질 멘토링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주연들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여주는 많은 동료나 후배 의사들의 변화과정도 궁금하다.

 

이런 것들을 단 몇 회만에(심지어 몇 회 연장한다고 해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골든타임>이 갖고 있는 특유의 전개 속도 때문이기도 하다. <골든타임>은 이야기의 속도를 높이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벌어진 여러 많은 이야기들을 중첩시켜 보여줌으로써 속도감을 준다. 따라서 디테일들이 풍부한 반면, 인물들의 성장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다. 이런 속도라면 몇 차례의 시즌을 해도 충분할 정도다.

 

끔찍할 정도로 리얼한 수술 장면이 주는 긴박감과 사제 간의 공조와 팀플레이가 주는 따뜻함, 조직의 냉혹한 현실과 그 속에서도 잊지 않는 유머감각, 환자들을 통해 보여주는 서민들의 감동적이고 때론 아픈 삶의 이야기들까지... <골든타임>은 실로 다채로운 감정을 끄집어내주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어디서 이렇게 리얼한 배우들을 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단역들조차(이를테면 박원국 환자나 신경외과 레지던트인 조동미(신동미)같은) 주목되게 만드는 연기자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시즌제를 통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물론 우리네 드라마 환경에서 연장은 쉽고 시즌제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든타임>은 그 내적인 장점들 때문에 가장 현실적으로 시즌제가 가능한 드라마인 것도 사실이다. 대중들의 시선이 자꾸만 장르드라마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현재, <골든타임>이 장르드라마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즌제의 포문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연 <골든타임>은 이러한 대중들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을까.

대중의 귀, 고음 아닌 마음에서 열린다

 

<나는 가수다2(이하 나가수2)>가 준비한 ‘새가수 초대전’은 시작 전 있었던 잡음과는 달리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기존 가수들과 새롭게 도전하는 가수들 사이에 이른바 레벨(?)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고는 이런 정도의 가수들이 바로 <나가수> 무대에 오르지 않고 초대전을 거친다는 것이 오히려 과하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새가수 초대전’은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은 셈이다.

 

'나는 가수다2'(사진출처:MBC)

사실 그간 <나가수2>의 무대는 정체된 느낌이 강했다. 새로움보다는 비슷한 패턴의 반복처럼 여겨졌고, 여전한 고음지르기 대결은 물론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나가수2>의 무대가 가진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김건모, 김연우, 이영현, 정엽 등등 물론 여전히 가창력은 최고지만 시즌1부터 지금까지 계속 무대에 오르고 있는 가수들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물론 잘 하는 가수들이 계속 무대에 오르는 것은 <나가수>의 룰이지만,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나가수> 무대가 어딘지 고정되고 폐쇄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새가수 초대전’은 훨씬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껏 계속 봐왔던 가수들이 아니고, 또 방송에도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던 말 그대로 재야고수들이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굴되지 않은 고수들을 발굴해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나가수>의 진면목이 아니던가.

 

유리, 그룹 플라워의 고유진, 밴드 어반자카파, 게이트플라워즈, 지영선, 더원, 타루, 빨간우체통, 박희수, 조장혁, 소찬휘, 리사. 물론 대중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얼굴들이 많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더 지지한 면이 많았을 것이다. 소속사와의 문제 때문에 좋은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음악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조장혁이나 박희수 같은 가수도 있었고,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의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한 말 그대로의 진짜 숨은 고수 더원도 있었다. 도시적인 깔끔한 사운드에 화음이 돋보인 어반자카파의 무대도 신선했고, 악마처럼 울부짖는 게이트 플라워즈의 야성도 주목할 만했다.

 

‘새가수 초대전’이 결국 보여준 건 <나가수>의 초심이다. 본래 <나가수>에 대중들이 기꺼이 ‘준비된 귀’가 되어주었던 것은 이 프로그램에 대한 심정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김범수나 박정현, 임재범 같은 절정의 가창력을 가졌지만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가수들에 대해 대중들이 기꺼이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나가수> 무대는 특별해질 수 있었다.

 

결국 <나가수> 무대의 핵심은 그 들어주는 대중의 귀다. 그런데 그 귀는 제 아무리 절정의 고음과 가창력을 가진 가수가 나온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그 귀를 열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거기 서는 가수를 지지하고픈 대중들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보면 왜 같은 가수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나가수2>가 <나가수1>에 비해 감흥이 적은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나가수1>을 통해 충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가수들이 <나가수2>에 또 출연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성가수로서의 헤게모니처럼 여겨지게 하는 면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카스텐이나 소향이 나왔을 때 대중들이 보낸 지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들은 물론 최고의 가창력과 음악성을 가진 가수들이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으로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간 방송에 나오지 못했던 인디밴드에 대한 지지가 있었고 CCM이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활동해온 소향에 대한 신선함이 있었다.

 

똑같이 고음을 질러대도 어떤 것은 절절한 절규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은 ‘나 노래 잘한다’는 자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두 반응의 차이를 만드는 건 결국 듣는 이의 마음이다. 음악이 청중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건 바로 이런 얘기일 것이다. ‘새가수 초대전’은 그래서 <나가수2>가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 <나가수>의 초심을 보여준 무대를 단 1회의 단발성으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정법> 마다가스카르, 주말 예능의 면모

 

<정글의 법칙>, 도대체 어디까지 진화할까. 마다가스카르로 떠난 <정글의 법칙>은 주말예능에서 대중들이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정확히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신기한 식물들과 무수히 많은 독보적인 동물들이 가득한 마다가스카르라는 공간이 주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이 있었고, 어느 한 명 빠지는 것 없이 꽉 찬 느낌의 일곱 명의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있었으며, 사막과 정글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자연과의 공존이 주는 즐거움이 재미와 의미를 모두 만족시켜주었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그간 <정글의 법칙>은 참신한 시도는 좋았지만 주말 예능으로서 조금은 거친 느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툰드라편은 특히 그랬다. 아무 것도 없는 불모의 땅에 던져진 병만족들은 물론 고생을 감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방송분량 자체가 나오지 않는 환경 때문에 난관에 봉착한 적이 있다. 주말예능으로서 즐거움을 선사해야 하지만 툰드라의 살풍경 속에서 힘겨워하는 연기자들만큼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도 불편함이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거친 영상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툰드라와 비교해 마다가스카르는 마치 천국 같은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희귀한 동식물들이 살아 숨 쉰다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활력을 주는 그런 생생함. 무엇보다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보며 웃고, 또한 나아가 생태 교육적인 효과까지 주는 그 긍정적인 인상은 주말 예능으로서 <정글의 법칙>이 제대로 된 진화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모두에 자막으로 걸린 것처럼, ‘도전’이 아닌 ‘보전’으로 가는 <정글의 법칙>에서는 한층 여유가 느껴진다.

 

일곱 명 최다 멤버가 투입된 것도 주목할 만하지만, 그들이 모두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마다가스카르에 간 <정글의 법칙>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김병만을 위시해 류담과 노우진이 모두 합류함으로써 완성된 달인팀이 주는 기대감이 그렇고, 김병만을 보좌하는(?) 정글2인자로서의 리키김은 물론이고 새로 투입된 전혜빈, 박정철, 진운이 만들어내는 신선함도 좋다. 특히 진지함을 유지하며 여전사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전혜빈, 어딘지 허당의 느낌으로 웃음을 줄 것 같은 박정철, 또 기타 하나 둘러매고 서글서글한 웃음을 날리는 진운은 모두 단 한 회만에 그들만의 캐릭터를 드러냈다.

 

여기에 기대감을 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글의 법칙> 제작진을 대표하는 이지원 PD가 좀 더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첫 날 분량에서 병만족들은 자신들만 덜컹거리는 트럭 뒷칸에 탈 수 없다며 이지원 PD를 강제로 태우는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다. 미션을 제시하고 룰을 세우는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속으로 함께 들어온다는 사실은 그들과 병만족 사이의 밀당이 좀 더 전면에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 밀당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제작진과 연기자들 사이의 동료애가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은 주말예능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현재 주말예능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는 경향이 짙다. <남자의 자격2>는 다시 합창단 미션을 시작했고, <승부의 신>은 <무한도전>의 하하와 홍철의 대결을 스핀오프했다. <나는 가수다2>는 시즌제로 돌아와 반복되는 같은 가수들의 무대들 때문에 주목되지 않은 지 오래다. ‘새가수 결정전’이 오히려 본 대결보다 더 흥미롭게 여겨지는 건 ‘새로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1박2일2> 역시 새로운 멤버들이 이제 적응하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 형식이 너무 오래 반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주말예능들과 비교해 볼 때, <정글의 법칙>은 확실히 저 스스로 진화를 멈추지 않는 새로운 도전으로 여겨진다. 그 누구도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걸어가는 그 독보적인 행보. 그러면서도 주말예능이라는 본분에 충실한 <정글의 법칙>의 자세는 그래서 다른 주말 예능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주말예능이라면 <정글의 법칙>처럼.

<슈퍼피쉬>, 오랜만에 느끼는 다큐의 맛

 

새롭게 <메이퀸>과 <다섯손가락>이 동시에 시작했던 지난 8월18일,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통상적으로 주말극의 동시출격으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만, 이 날 이 두 드라마는 <슈퍼피쉬>라는 다큐멘터리에 무릎을 꿇었다. 시청률 13.8%. 같은 시간대의 <메이퀸>과 <다섯손가락>은 11%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그 후에는 자극으로 무장한 주말극이 이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을 앞질렀지만, 그래도 12%대의 고른 시청률을 유지한 <슈퍼피쉬>의 저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슈퍼피쉬'(사진출처:KBS)

<슈퍼피쉬>의 그 놀라운 저력은 그림 같은 압도적인 영상과 그 속에 담겨진 흥미로운 내용이 잘 어우러진 결과다. 거친 목탄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시작해 서서히 영상으로 바뀌는 오프닝은 <슈퍼피쉬>의 영상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크기의 참치가 펄떡 펄떡 뛰고, 고대 로마시절부터 전해져온 참치 잡이 방식인 마탄차(학살이란 뜻이다)는 바다를 피와 희뿌연 정액으로 물들인다. 말리의 안토고 호수에서는 1년에 딱 한 번 허락된 고기잡이를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호수로 뛰어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라오스 곤파펭에서는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한 급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 물고기 잡이가 벌어지고, 중국에서는 삼키지 못하게 목줄을 감은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들은 고속 카메라에 담겨 펄떡임 하나, 튀는 물방울 하나까지 세세하게 담겨진다. 육안으로라면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다큐 안에 그득 채워지는 것은 고속 카메라, 헬리 캠 같은 인간의 시각을 넘어서는 카메라 영상 기술 덕분이다.

 

하지만 <슈퍼피쉬>에 빠져들게 한 것은 이런 시각적인 스펙터클 때문만이 아니다. 물고기의 생태가 아닌 물고기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시간적으로는 태곳적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전 지구 곳곳까지 파고 들어가 살펴보는 이 다큐의 지적인 호기심은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 다큐는 사냥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물고기를 잡아 단백질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문명의 발달과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주고, 쉬 상하기 마련인 물고기를 오래도록 저장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며, 물고기가 종교와 만나 어떻게 세계사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실로 지구와 인간의 역사는 물고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 다큐의 증언이다.

 

<슈퍼피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시선이다. 지중해에서 북유럽, 아프리카, 중국, 라오스, 호주 등등 거의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 다큐는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고기와 인간의 공존을 마치 옆 동네 일처럼 담담히 펼쳐 보여준다. 바로 이런 시선은 굳이 지구촌 운운하지 않아도 우리 인류가 국가와 민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의 삶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동질성을 드러내준다. 물고기를 주제로 하지만 거기서 보편적인 인류사의 중요한 자산인 쌀, 소금, 종교 같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얼마 만에 맛보는 다큐의 맛인가. KBS의 <차마고도>, <누들로드>나 MBC의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다큐의 전율이다. 주말 저녁 비슷비슷한 자극적인 설정으로 치닫는 주말극에 지친 이들에게 그래서 <슈퍼피쉬>는 편안하고도 놀라운 지적인 여행을 떠나게 해주었다. 일상화된 영상의 시대, 일상적인 다큐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된 다큐에 대한 갈증도 커지고 있다. <슈퍼피쉬>는 오랜 만에 그 다큐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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