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즌 브레이크’, 미식축구 같은 재미

도대체 ‘석호필’이 뭐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고 한번 ‘프리즌 브레이크(SBS TV 토 밤 12시 2회 연속 방영)’라는 미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당신은 섬뜩하면서 뒤통수를 내리치는 스코필드(석호필)의 전신 문신에 빠져들게 된다. 형을 구하러 감옥으로 자청해 들어간 스코필드에게  “네가 지도를 봤구나”하고 형이 말할 때 “그 보다 더 나은 거야. 몸에 새겨 넣었지.”하며 보여지는 문신지도. 그것은 이 탈출 드라마가 왜 그렇게 미드족들의 밤을 지새게 만들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프리즌 브레이크’는 미국인들이라면 더 이해하기 쉬울 미식축구경기의 패턴을 닮아있다. 한 단계씩 공격(탈출시도)을 해나가고 거기에 대해 간수들이나 재소자들이 태클을 건다. 도저히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스코필드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쳐 보인다. 이를테면 그의 온몸에 새겨진 문신지도는 이 경기의 작전지도인 셈이다. 때론 그 숨겨 들어간 지도를 간파해내는 재소자도 등장하고, 심지어 지도가 훼손(?)되기도 하지만 스코필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제한이 있는 경기
스코필드의 문신 위에 그려진 미로 같은 교도소에서 벌어지는 이 미식축구경기 같은 드라마는 세 가지 장치로 그 긴박감을 이어간다. 그 첫 번째는 경기(?)의 시간제한. 그러니까 스코필드는 처음부터 이 한참 뒤진 경기에 투여된 것이 아니고, 끝날 즈음 마지막 승부사로 투입된 쿼터백인 셈이다. 몇 주 후면 사형될 형을 구하기 위해 스코필드는 발가락이 잘리고, 등에 화상을 입어가며 탈옥을 위한 단계들을 밟아나간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은 사형될 형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스코필드,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이것은 스코필드와 함께 탈출을 준비하는 동료자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당장 밀고자를 알아내지 못하면 가족이 위기에 처하게 되거나, 당장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기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되거나, 유일한 혈육인 딸이 곧 불치병으로 죽게되는 상황은 모두 스코필드가 가진 시간제한과 똑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즉 감옥 밖의 상황이 감옥 안의 재소자들의 시간을 틀어쥐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 시간제한은 무고하게 죽게될 상황에 처한 링컨 버로우즈(스코필드의 형)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옛 애인 베로니카가 파고 들어가는 거대한 음모와 변주를 하면서 힘을 얻는다. 이러한 음모이론은 또한 스코필드의 탈옥계획의 심리적 근거를 만들어준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이 같은 시간제한은 미드에서 즐겨 사용하는 장치 중 하나.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24’나 ‘히어로즈’에도 어김없이 시한폭탄처럼 장착되어 있다. 리얼타임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24’는 말 그대로 실시간을 따라가는 드라마로 순간순간 갈등상황에 접하게 되는 잭 바우어(키퍼 서덜랜드)의 상황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히어로즈’에서는 뉴욕시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폭발 장면을 능력자들(히로나 아이작 같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보게되고 그걸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얘기다. 이 같은 시간제한은 공포와 불안으로 다가오는 ‘결정적 순간’으로 인해 매순간 드라마의 극적 긴장을 유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문신지도와 사전준비 혹은 사전제작
두 번째 장치는 경기에 투입되기 전, 스코필드가 라커룸에서 경기를 분석하며 했던 철저한 준비이다. ‘자신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형을 탈출시킨다’는 미션은 감옥이란 활동이 제한된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철저한 준비를 요구한다. 문신지도를 포함한 그 준비장면은 드라마 첫 회, 감옥에 들어가기 전 방 벽을 가득 채운 포스트잇으로 대변된다. 시청자들은 스코필드가 머릿속에 또 문신 속에 하나하나 기록해둔 이 준비된 시나리오를 첫 회부터 신뢰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 스코필드의 작전시나리오는 앞으로 남은 짧은 시간에 해야할 불가능한 미션을 가능하게 해줄 유일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미리 준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가능하려면 드라마 자체도 처음부터 완벽한 시나리오를 갖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프리즌 브레이크’는 사전제작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장점들을 제대로 활용한다. 초반부에 나왔던 한 정신병을 가진 제소자가 후반부에 가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사전제작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의 조합은 오히려 재미로 돌변한다. 22부의 드라마를 하나의 피스로 보고 그 피스를 하나씩 맞춰나가는 퍼즐 맞추기의 묘미를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어찌 보면 제작자가 스스로 스코필드(혹은 극중 인물들)가 되어 경기를 치르는 형식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작자의 사전준비는 스코필드의 사전준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프리즌 브레이크’가 전체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의 편편이 하나의 독립된 에피소드가 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이유이자, 한 편을 보고 나면 그 재미에 전편을 봐야하는 중독성을 지닌 이유가 된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만드는 경기의 의외성
세 번째 장치는 짧은 시간에 탈출을 해야한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위해 철저히 사전준비한 스코필드의 작전(?)을 번번이 어렵게 만드는 ‘경기의 의외성’이다. 이런 의외성을 만드는 요소들은 부지기수다. 기껏 탈출구를 다 파놓은 상태에서 정작 탈출시켜야할 형이 독방에 갇힌다거나, 갑자기 탈출해야할 통로인 환풍구가 교체된다거나 하는 것들은 오히려 쉬운 변수들이다. 더 어려운 것은 이 미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재소자들이 만들어내는 의외성이다. 경기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스코필드는 목적을 위해 이들의 감정을 건드려야 하고, 딜레마를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원하지 않는 악당하고도 손을 잡아야 한다. 이 도저히 조합될 것 같지 않은 팀원들을 끌고 나가는 스코필드의 머릿속에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일에 움직일 거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결속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결속될 수 있는 인물은 오로지 형뿐이다. 이 얇은 고리는 미션을 더 어렵게 만들고 그걸 천재적인 두뇌로 헤쳐나가는 스코필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스코필드의 천재성에 ‘도대체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하는 질문이 나올 즈음, 드라마는 영리하게도 그의 지병인 ‘잠재 억제 부족증상’을 끄집어낸다. 천재성을 하나의 성향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프리즌 브레이크’는 마지막 쿼터에 몰려 출전한 쿼터백, 스코필드가 통솔하기 어려운(불가능해 보이는) 팀원들을 이끌고 마지막 터치다운(탈옥)을 향해 한 걸음씩 달려가는 미식축구 같은 드라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의 온몸에 새겨진 문신지도이다. 이것이 스코필드가 준비했던, 아니 이 드라마의 제작자들이 준비했던 그 미로 같은 문신 속에 한번 빠져들면, 스코필드를 따라서 터치다운 지역까지 달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문신지도로 대변되는 완성도는 ‘프리즌 브레이크’를 통해 우리네 드라마 제작자들이 한번쯤 숙고해야될 것이 아닐 수 없다.

‘내 남자의 여자’, 불륜 소재 한계 넘었다

‘내 남자의 여자’가 가진 스토리를 보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친구와 남편이 바람을 피고, 그 바람 핀 것이 발각되고, 결국 살림까지 따로 차리고 이혼했는데, 정작 친구와 남편은 파경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 놀라운 반전도 없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불륜이란 소재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도 이 드라마의 어떤 점이 도대체 시청자들을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과거의 불륜드라마들은 대부분 가부장적인 남성이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불륜도 남자가 저지르고, 그 불륜을 저지른 남자와 여자가 파멸에 이르는 권선징악적 결론에 다다르며, 배신당했던 조강지처는 멋진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식의 끝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주부들의 시각을 대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환타지라는 점에서 고스란히 가부장적 체계 속으로 귀납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대신 ‘내 남자의 여자’는 여자가 주도적인 불륜드라마이다. 준표(김상중)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반면, 지수(배종옥)와 화영(김희애)은 주도적으로 자기 인생을 그려나간다. 불륜을 저지르고(화영), 불륜에 아파하다가 자립의 길을 걸어가는(지수) 이 둘은 마치 대결구도처럼 보이지만 순간순간 여자라는 입장을 통해 서로를 소통한다. 이것은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불륜이라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여자들의 삶에 천착한 결과이기도 하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리하여 이 드라마는 불륜이 갖는 환타지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불륜 속에 깃든 사회현실 같은 것들을 건드린다. 결혼이라는 틀 속에 엮어지게 되는 수많은 관계들이 주는 억압을 들춰내는 것이다. 그 관계의 억압은 화영을 불륜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그 불륜 또한 성공하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다. 불륜에 피해를 본 지수가 불륜을 저지른 화영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똑같이 관계의 억압을 받았던 여자라는 동질감이 주는 어떤 유대감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궁금해했던 결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가 깨려고 하는 것은 불륜,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결혼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통념과 부딪쳐 상처 입은 것은 이 세 남녀지만, 적어도 그들이 다시 결혼이란 틀로 들어오지 않고 각자 홀로 서서 “이게 더 편하다”고 말하는 단계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불륜이란 소재를 선택했지만 표피적인 접근이 아닌 진지함에 도달한 것은 확실한 이 드라마의 성과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그간 ‘불륜’이란 소재를 죄악시하게 만들었던 여타의 불륜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따라서 “불륜도 다루기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 김수현 작가의 말은 실증된 셈이다. 이것은 아무리 진부하고 식상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접근방식에 따라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이런 불륜드라마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토록 재주 많은 작가가 왜 하필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었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갈증이 ‘성공한 불륜드라마’보다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화영이 보여주는 ‘내 남자의 여자’의 진실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지수(배종옥)만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드라마는 자극과 신파로만 치닫는 한심한 불륜드라마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지수의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화영(김희애)과 그들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준표(김상중)가 그 나머지 주인공들이다. 준표야 그렇다 쳐도 화영이란 캐릭터를 그저 멀쩡한 친구 남편 꼬드긴 ‘쳐죽일’ 불륜녀로만 생각하는 건 이 드라마의 나머지 축을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참 사랑하기 어려운 여자, 하지만 이해는 되는 화영이란 캐릭터가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떻게 지수는 화영을 이해하는 걸까
화영에 대해 지수는 “딱하다”고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자기 남편과 바람이 나 가정까지 버리게 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들의 관계를 준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받기만 했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줘본 기억이 별로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다르다. 입장이 서로를 반대쪽에 세우게 했을 뿐이지 그녀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몸을 던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수는 20년 간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화영은 준표를 얻기 위해 1년 동안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모를 겪었다. 이 공유점에서 지수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을 갖게 된다.

준표가 화영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지수에게 “당신네 우정은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지수는 ‘경민의 엄마로서 고맙다’고 말한다. 화영을 절망에 빠뜨린 준표의 ‘아이거부’를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엄마로서는 또한 고맙기도 하다는 것. 이런 상반된 감정이 가능한 것은 지수에게도 이른바 관계의 역할이라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자로서 20년 동안 헌신한 대가로 돌아온 고통을 겪은 지수는, 1년 동안 자신을 버려가며 얻으려 했던 사랑이 무의미해진 화영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지수의 마음은, 또한 시청자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화영이란 캐릭터에 문득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수가 이해하고, 시청자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화영의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관계의 거미줄에 걸린 화영
화영은 관계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 그녀가 미국사회에서 생활하다 국내로 들어왔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토록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가족과 사회란 관계에 진저리를 칠만 할 것이다. 그녀 자신의 미국생활조차도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이란 개인적 존재는 없었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한 남자에게 빠져들고 그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일깨우는 것이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는 절실함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것,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다. 준표라는 남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관계의 거미줄들이 쳐져 있었다는 것. 화영은 먼저 친구인 지수와 연결된 거미줄을 잘라야 했고, 지수의 언니, 은수(하유미)와 아들 경민, 그리고 준표가 그다지도 끊기 어렵게 생각했던 부모와의 거미줄조차 잘라야 했다. 그렇게 준표를 거미줄로부터 떼어내어 둘만의 공간으로 오자, 이제는 준표의 속에 남아있는 거미줄의 기억과 습관이 그녀를 괴롭힌다. 준표는 지수의 밥에 끌리고, 경민에게 끌리고, 사회적 관계, 부자지간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문제는 준표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화영은 지수 같은 아버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화영을 옭아매고 있는 거미줄들은 그 둘의 관계를 자꾸만 뒤틀어버린다. 1년 동안 그녀가 해온 일은 바로 그 복잡한 관계의 거미줄들과의 사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자식을 원치 않는 준표는 그간의 관계를 부부관계가 아닌 정부관계로 돌려놓고, 그녀가 발견한 처리되지 않은 준표와 지수의 이혼서류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준표 속에 있는 관계의 거미줄은 여전히 튼튼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 게다가 결혼을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여기는 사회적 풍토와 그 풍토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준표에 화영은 더 이상 자신이 없어진다.

화영의 분노가 이해되는 것은
“내가 겁나는 건 당신부모도 당신도 아냐. 바로 내 자신이야. 조심해. 잠잘 때도. 내가 당신 목을 조를 지도 몰라. 밥에도 독을 탈지도 몰라.” 화영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녀가 겪었던 “모욕, 수치, 경멸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들어버린” 준표 때문이다. 그녀는 “내 사랑, 내 선택, 당신이란 남자, 당신 사랑의 의미를 찾는 중”이라 말한다. 살면서 보상해주겠다는 준표의 말에 그것은 “오히려 지긋지긋한 올가미가 아닐까”하고 쏘아댄다. 준표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친구처럼 연인처럼 사는 것이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그 관계의 거미줄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화영이 말한다. “당신 사랑은 비겁해. 아주 아주 비겁해.”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치 지수의 주부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준표의 사고를 깨버리는 화영의 존재다. “나를 지수로 만들려고 하는 게 화가 나. 나 자신도 지수처럼 되가는 거 싫어. 아내는 아내지 종이 아냐. 밥해주기 싫은 날이 있어. 그런데 해줬어. 그래서 지수가 되가는 거 같애.” 화영은 지수 같은 천사표 아내의 삶을 당연시 생각하는 이 시대 남성들의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냄비를 내주며 해장국을 사다달라고 한다. 준표 같은 남자가 평생 해보지 않았을 그 일을.

화영이 지수와 전화통화를 하는 내용은 한국이란 사회에서 결혼해 살아가는 여자들이 새로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당해야하는 관계의 부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이해 받지 못하면서 왜 이해해야하는 지 모르겠어. 네가 경탄스러워.” “나는 모자라잖아. 모자라서 그렇겠지.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 별거 아니잖아. 자꾸 파면 좋을 거 없잖아.” 그녀들이 공유하는 이 부당한 대접은 과거 가부장적 가족의 틀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관계와 서열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가족의 틀. 김수현 작가는 이 불륜극을 통해 바로 그 틀의 견고함과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불륜이란 두 가지 힘의 충돌을 말한다. 그 하나는 사회가 가진 규범, 틀의 힘이고, 또 하나는 그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이다. 김수현 작가는 이 두 힘의 충돌을 그리면서 그 화학작용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관계의 거미줄들을 잡아낸다. 비굴하고 치사하게 만드는 그 관계들 속에서 결국 그녀들이 얻은 것은, 관계 속에 매몰된 삶이 아닌 자신의 당당한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서 마주보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극에서 시작해 심리극으로 치닫다가 말미에 사회극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찰나의 소중함을 묻다

청춘시절의 한 때를 생각해보면 꽤 강렬했을 감정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장면들은 단순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라든지, 그 하늘을 유유히 움직이던 구름이라든지, 방과후 텅 빈 운동장에서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던 그 단순한 시간들 같은 그림들이 갈무리된 감정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그 시절에는 너무 강렬했거나, 따분했거나, 때론 급박하게 움직여 볼 수 없었던 시간의 풍경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과 시간들, 그리고 그것들 위로 등장해 우정의 이름으로 스치듯 지나가 버린 사랑의 감정 따위는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라는 능력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사랑스런 애니메이션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그 아름다움조차 기억나지 않는 청춘이란 시간대를 마코토라는 소녀를 통해 여러 번 되돌려보기로 한다.

다행히도 마코토라는 캐릭터는 지구를 구한다거나 하는 거대한 욕망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 능력은 오로지 우리가 흘려보낸 일상 속에서만 발휘된다. 타임리프라는 능력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루종일 부른다거나,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을 먹는데 사용된다.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의 시간대를 되돌려보자 일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들이 피어나면서 툭툭 던지곤 했던 말들과 행동들에 감춰졌던 청춘이란 열병의 실체가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풍경을 담아내기에 정지된, 혹은 정지된 듯한 장면들이 유난히 많이 보여진다. 호소다 마모루라는 섬세한 눈의 소유자는 그 정지된 장면 속에 고즈넉이 서 있는 집, 운동장, 하늘, 구름, 언덕, 강물 같은 풍경을 집어넣는다.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장면 속에 주인공들이 가진 감정의 떨림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멈춰선 시간의 풍경 속을 유영하는 주인공들을 넣어 마치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싶은 안타까운 감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누구나 흐뭇한 감회에 젖는 것은 소년 소녀에서 남자와 여자로 성장하는 그 과도기의 작은 떨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반추해내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가 자칫 추억이라는 웅덩이에서 허우적댈 수 있는 위험성을 이 애니메이션은 ‘일상을 되돌아보는 타임리프’라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뛰어넘는다. 잔잔함에 젖어 잊고 있던 청춘의 추억 속에서 물 흐르듯 빠져들다가, 수면 위로 불쑥 솟은 열병을 발견하곤 급박한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역시 귀여운 반전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애니메이션이 얻은 성취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아포리즘에나 나올 법한 이 메시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과연 이 메시지가 평범한 걸까. 그것은 오히려 중요한 메시지조차 평범하게 되어버린 우리의 둔감한 이성과 감성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마코토가 그랬듯이, 바로 그 평범과 일상이 되어버린 시간을 다시 소중한 것으로 환원시켜주는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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