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극장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운 이유

영화티켓 하나 꼭 쥐고 냄새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그저 스크린만 쳐다봐도 좋던 시절은 가버렸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연거푸 몇 번씩 보고 또 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멀티플렉스로 거대해진 극장은 체인화되고 시스템화된 지 오래며 이젠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점점 고급화되어가는 추세다.

이제 레스토랑처럼 보이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최고급 요리를 즐기는 시대다. 250평 규모의 공간에, 일반 스크린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의 고급 스크린이 설치되고, 바닥 스피커까지 갖춘 완벽한 음향시설까지 갖춘 극장은 영화 한 편에 10만 원이라는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연인들을 위한 특별 커플석은 기본이고, 아예 극장 하나를 통째로 빌려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소규모 극장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극장은 이제 더 이상 영화만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다. 복합레저공간이라고 해야할까. 테마파크 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이른바 팝콘무비로 불리는 블록버스터가 만나면 극장은 완벽한 놀이공원(?)이 되는 셈이다.

디지털 시대, 극장의 생존법
디지털이 가져온 변화는 극장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디지털 배급(중앙서버에서 여러 스크린으로 영화파일을 전송하는 시스템)’은 선명한 화질로 무한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장 수에 맞게 프린트를 해서 배급하던 과거의 시스템은 한 벌에 들어가는 2백만 원 상당의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여러 번 프린트하면서 발생하는 화질 저하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 디지털 배급으로 그런 문제는 사라졌다. ‘필름 없는 극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것은 극심한 극장의 위기였다. ‘홈 시어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스템은 극장으로 가려는 관객들의 발길을 가정에 묶어두었다. ‘황후화’를 감독한 장이모우 감독은 그 엄청난 스케일을 만들어낸 데 대해 꼭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볼거리’가 이제 영화에 필요해진 상황을 에둘러 말한 적이 있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거대해지고 블록버스터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장의 변신은 바로 이것과 맞물려 있다. 그저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는 디지털 시대에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극장과 팝콘무비가 만나는 지점이다.

극장과 팝콘무비의 공존, 좋기만 할까
하지만 그것이 좋기만 한 걸까. 국내 영화의 위기론에 불을 붙인 최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극장 점유는 가히 놀라울 정도다. ‘스파이더맨 3’가 전국 816개 상영관을 잡은 데 이어, ‘캐리비안의 해적3’는 이보다 100개가 넘는 912개의 상영관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런 현상은 디지털 배급이 가진 장점인 무한복제가 스크린 독점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극장주들이 돈을 벌겠다는 데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또한 소비자의 선택의 권리를 원천 봉쇄한다는 점에서 그저 상업의 논리로만 내버려두긴 어려운 문제다. 그것도 이른바 팝콘무비, 즉 킬링타임용 영화에 대부분의 극장 스크린을 내준다는 점은 자칫 영화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물론 “재미만 있으면 되지 팝콘무비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는 문화라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재미있는 놀이기구’로 생각하지 문화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팝콘무비와 극장의 변신이 만나 만들어 가는 이 놀이공원화 되는 극장은 영화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은 최근 한 영화 잡지에 “극장에서 영화만 보고 나오기, 콜라와 팝콘 사먹지 않기 운동을 펴자”는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이른바 ‘팝콘무비’라 불리는 천편일률적인 블록버스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자는 뜻이다. 그는 이어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칸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밀양’같은 작품도 극장을 못 잡아 관객들이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잇따른 상영관 독점 현상을 꼬집었다.

물론 극장의 변신은 서비스 차원에서 보면 관객의 선택 폭을 넓혀주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변신이 마치 저 ‘팝콘무비’를 위한 준비처럼 보여지게 만드는 헐리우드 영화들의 잇따른 스크린 독점은 오히려 관객의 선택 폭을 줄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점점 디지털화되고 세련되어지는 극장에서 자꾸만 조금 어수룩해 보여도 정이 가는 옛날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교보생명 사외보 <다솜이 친구>7월호

한류의 위기, 일류의 도전, 그 이유

우리가 물건을 팔면, 돈은 일본이 벌어간다는 말이 있다. 과거 제품 생산에 있어서 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거의 수입해 조립하면서 벌어졌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금 우리네 문화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 부지불식간에 들어온 일본 문화들은 이제 우리 문화 저변 속으로 폭넓게 퍼져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복제되어 유통되며 저변을 넓혀온 일본 만화에서부터, 대학생들의 가벼운 읽기 수요를 채워주고 있는 일본소설, 일드로 대변되는 일본 드라마는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우리 사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것들이 수면 위에 올라온 우리 문화 속의 일본 문화라면, 일본영화들은 수면 아래서 한류로 대변되는 우리 문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요인이다. 2001년 1천만 달러 정도에 머물던 우리 영화의 수출 성적표는 2005년 7천6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류의 영향이었다. 그런데 이 2005년 빛나는 성적표를 만들어준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 2005년 일본에서 벌어들인 것만 6천만 달러에 이르러 전체 수입의 약 80%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한류 위기의 주범이 되었다. 2006년 일본으로부터 거둬들인 수입이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한류 열기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한 것.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중론은 하나다. 한류열기로 상품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높아지는 반면, 양산된 작품들은 그들의 기대를 맞춰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일본인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남북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빼면 대부분, ‘스캔들’, ‘달콤한 인생’, ‘내 머릿속의 지우개’, ‘외출’ 같은 한류스타들이 포진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의 거품은 차츰 빠지게 됐고 ‘야수’, ‘태풍’. ‘연리지’. ‘형사’ 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한류의 원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의 경우에는 ‘겨울연가’와 ‘대장금’이후 ‘풀하우스’ 정도를 빼고는 그다지 한류로서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국내에도 일드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늘고 있어, 일드와 한드(한국 드라마)의 상황이 역전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런 예견들이 나오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한류의 언저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일류가 가진 득의의 미소이다. 한류가 일본에서 인기를 끈 것은 일본 드라마에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순애보 같은 향수 섞인 전통적인 이야기 소재가 직설어법으로 일본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덕이다. 즉 한류의 인기는 거꾸로 말해 당시 일본 드라마나 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봉착하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어찌 보면 한류는 일본의 침체되어 있는 시장을 일깨운 공이 크다. 현재 한류가 몇몇 스타들에만 의지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와중에, 일본영화가 그 공백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한편 한류라는 전 세계 마켓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포장을 뜯어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본 부품들(일본 만화, 소설 같은 원작들)’은 한류의 이면에서 일류가 얻어간 이득의 실체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류에 들뜬 상황에서 일류는 두 가지를 얻은 셈이다. 대내적으로는‘겨울연가’ 열풍 같은 자국의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류라는 흐름에 자연스럽게 자국의 문화 부품들을 띄워 세계 시장을 두드린 격이 됐다. 여기에 국내에서 불고 있는 일드 같은 일본 문화에 대해 갖게 된 호감은 덤이다. 아직 국내에 개봉된 일본영화들의 성적표는 좋지 않지만, 전보다 몇 배나 많이 일본영화들이 상영관이 걸리는 것은 앞으로도 그 성과가 미미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한류든 일류든 그것을 과거와 같은 한일전의 양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일본의 것이든 중국의 것이든 이젠 작품의 질이 국가의 차원을 넘어 개인에게 직접 소구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론이 대두되는 상황을 외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이 샴페인 일찍 터트리고 실익은 주변에서 다 채가는 상황을 막는 길이며, 그것만이 좀더 좋은 우리네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쩐의 전쟁’, ‘내 남자의 여자’가 뜨는 이유

역시 돈(쩐)과 여자는 되는 소재인가. 불륜이란 자극적인 상황에서 여자들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내 남자의 여자’에 이어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사채업자들의 지독한 이야기 ‘쩐의 전쟁’도 30%대의 시청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주몽’의 장기집권(?)과 ‘하얀거탑’같은 새로운 시도에 힘입어 드라마왕국이라 불리던 MBC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히트’와 ‘에어시티’의 부진으로 주춤하는 사이, SBS는 오랜만에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다. 도대체 어떤 점들이 시청자들의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든 걸까.

독성이 강한 드라마들
시작부터 논란이 야기됐을 정도로 ‘내 남자의 여자’와 ‘쩐의 전쟁’은 독한 드라마다. 불륜이 그렇고 사채업이란 소재가 그렇다. 잘못 건드리면 불륜이나 사채업자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소재만이 아니다. 이 두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아름답거나 매력적이거나 귀여운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다. ‘쩐의 전쟁’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돈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며, ‘내 남자의 여자’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언어로 벌이는 전쟁이다.

이 두 드라마는 자극적인 상황으로 시청자들의 욕망에 직격탄을 날린다. 첫 회부터 내놓고 불륜사실을 드러내는 ‘내 남자의 여자’는 이 금기된 욕망이 가지는 양가감정을 건드린다.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찢어 죽일’ 불륜에 이를 갈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되고 길들여졌던 마음의 대리충족을 경험한다. 물론 전자에 더 무게중심이 실린다. 한편 ‘쩐의 전쟁’ 도 더럽다고 하면서도 숭배하는 돈으로 시청자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이 역시 양가감정이다.

두 드라마의 욕망에 대한 법칙은 라깡이 말했듯이 얻어질 수 없는 환상이다. 욕망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 깊은 허기에 시달리는 격이다. 이 두 독성 강한 드라마가 승승장구하는 이면에는 위에서 밝힌 독한 소재, 독한 이야기 전개가, 시청자들 속에 숨겨져 ‘지저분한 일’ 혹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던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일까. 이 독한 두 드라마가 논란드라마 혹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지함’이다.

욕망에 대한 진지한 접근
단지 욕망과 자극만을 추구한 드라마였다면 지금 같은 드라마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적당한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률을 꾀해보려다 실패한 여타의 불륜드라마들이 단적인 예이다.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드라마 상황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이 두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진지한 칼날을 갖다댄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드라마라는 오명에도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그 진지한 접근이 우리네 현실에도 와 닿았기 때문이다. ‘쩐의 전쟁’이 사채업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돈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성찰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자극적인 소재까지도 공감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이 진정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다. 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동시간 대 여타의 드라마들과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김수현이란 작가가 끌어가는 언어의 전쟁은 때론 살 떨릴 정도의 실감으로 다가온다. ‘쩐의 전쟁’ 역시 만화원작이 갖는 스토리성을 장태유 PD 특유의 속도감 있는 연출감각으로 풍자가 깃든 독특한 현실성을 끌어낸다. 여기에 힘을 듬뿍 실은 ‘쩐의 전쟁’의 박신양,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배종옥 같은 선수(?)들의 연기는 완성도에 굵직한 방점을 찍는다.

‘쩐의 전쟁’과 ‘내 남자의 여자’의 시청률 독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진지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스토리의 탄탄함일 것이지만 이 역시 드라마에 취하고 있는 진지한 태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시청률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완성도와 비례가 되는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드라마가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지독함과 진지함 사이에서 벌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푸른도라는 살아있는 드라마 세트장에 가다

‘고맙습니다’는 끝났지만 아직도 드라마가 지속중인 곳이 있다. 강한 여운을 남기며 푸른도란 이름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 ‘고맙습니다’의 또 다른 주연, 증도다. 그 곳에선 아직도 영신이네(공효진) 집 이야기가 꽃 피어나고, 바닷가에선 까칠한 기서(장혁)와 천진난만한 봄이(서신애)가 어른거린다. 남해여인숙에선 두섭이네 엄마(전원주)가 불쑥 나와 특유의 목소리로 두섭이에게 “으이구 이놈아”하고 말할 것만 같다. 증도를 빠져나가는 선착장에는 석현(신성록)이 도망치듯 차를 타고 배 위로 오를 것 같고, 짱뚱어 다리 앞 정자에선 아직도 영신이와 기서가 함께 술을 마시는 것만 같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고맙습니다’란 드라마 속을 걷는다.

푸른도에 증도가 캐스팅 된 이유
증도는 오지 중의 오지다. 서울에서 간다면 서해안 고속도로를 거의 끝까지 달려서 다시 신안군의 바닷가로 가야 한다. 거기서 먼저 연육교로 연결된 지도로 들어간 후, 다시 사옥도란 섬으로 넘어가야 한다. 사옥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비로소 증도에 당도하게 된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가서 굳이 촬영을 해야 할 이유로 작가가 가졌던 시골 삶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꼽는 것은 어딘지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멀리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진심’과의 거리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고마운 일 별로 없는 세상에 던지는 반어법 같은 드라마, ‘고맙습니다’에 대해 이경희 작가는 이 이야기가 수도권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는 점을 들면서 시골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라 했다. 즉 도시 사람들이 잊고 있던 순수한 세상의 이야기가 공감을 주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도시에선 특별하지만 시골에선 평범한 이야기의 배경을 찾아 증도라는 외딴 섬까지 오게된 것이다. 그것은 이곳에서 촬영된 장소들이 드라마 제작을 위해 지어진 세트가 아니라 실제 거주민의 집이며, 일상생활 속의 도로 위 혹은 바닷가, 시골길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증도는 푸른도의 배경이 아니라 숨겨진 주연이 분명하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증도에서도 영신네 집은 물때를 맞춰 연육교를 지나야 하는 부속섬 화도에 있다. 마치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듯 섬에 섬을 넘어가 당도한 화도에는 그러나 그닥 볼거리가 많지 않다. 그저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몇몇 양파밭들이 널려 있을 뿐이다. 포장도 잘 되지 않은 그 길을 따라가면 거기 팻말이 붙어있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평범한 영신네 집이 있다.

아직까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심어놓았던 조화가 남아있는 그 집 앞에서 쭈뼛댈 수밖에 없는 건, 객이 아무 집이나 기웃거리는 기분을 갖게 만드는 영신네 집 구석구석의 사람 손때 때문이다. 그곳은 만들어진 세트장이 아니고 실제 주민이 거주하는 집이다.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객에게 오히려 손을 내밀어주는 건 주인.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주인이 던진 이 말에 용기를 낸 객들은 저 드라마 속 기서가 그랬듯이 집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마당에는 드라마 내내 나오던 덩달이는 보이지 않고 다른 흰 개가 앉아있다. 알고 보니 이 덩달이는 증도, 보물섬 민박집 개인데 현장에서 캐스팅 되었다는 것. 이유는 잘 짖지 않기 때문이란다. 드라마가 끝나고 덩달이는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드라마를 위해 지어진 기서가 머물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은 명소가 되었다. 그 앞에 앉아 사진 찍고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객으로 와서 푸른도의 값진 선물을 얻어간 기서처럼 사람들도 얻어 가고픈 것들이 있나보다.

24년 간 이 집에서 살았다는 주인아저씨는 드라마 찍는 내내, 그리고 그 후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우루루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귀찮을 만도 한데 전혀 내색 없이 반가운 기색만 보인다. 외딴 곳을 멀리서부터 찾아주는 객들이 반갑기만 하다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란 말은 그저 관광객에 익숙해진 멘트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었던 것이다.

푸른도로 기억될 작은 세트장 같은 섬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는 고스란히 ‘고맙습니다’의 세트장이 된다. 도시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한 집들과 가게들이 굳이 세트를 만들지 않아도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다. 영신이 선을 보았던 양지다방과 기서가 묵었던 남해여인숙은 물론이고 섬에 거의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문방구, 미용실, 가게들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대로 세트처럼 보인다.

섬에 지천으로 널린 양파밭과 증도의 한 가운데 숙명처럼 자리한 태평염전, 갯벌을 뛰어 노는 짱뚱어들을 위한 조형물 짱뚱어 다리, 증도 선착장, 해송들이 아름답게 펼쳐진 우전해수욕장까지 눈 가는 곳 어디에서든 ‘고맙습니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평범해 보이는 바닷물과 햇볕이 빛나는 소금을 만들어내듯 ‘고맙습니다’는 그렇게 증도의 생활 그 자체와 주민들의 선한 얼굴이 만들어낸 보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고맙습니다’의 또 다른 주연, 푸른도는 증도라는 생명력 있는 훈훈한 섬의 온기를 입고 탄생했다. 과거 보물이 발굴되어 보물섬으로 불리기도 했던 증도. 이제는 ‘고맙습니다’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푸른도라는 보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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