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영이 보여주는 ‘내 남자의 여자’의 진실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지수(배종옥)만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드라마는 자극과 신파로만 치닫는 한심한 불륜드라마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지수의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화영(김희애)과 그들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준표(김상중)가 그 나머지 주인공들이다. 준표야 그렇다 쳐도 화영이란 캐릭터를 그저 멀쩡한 친구 남편 꼬드긴 ‘쳐죽일’ 불륜녀로만 생각하는 건 이 드라마의 나머지 축을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참 사랑하기 어려운 여자, 하지만 이해는 되는 화영이란 캐릭터가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떻게 지수는 화영을 이해하는 걸까
화영에 대해 지수는 “딱하다”고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자기 남편과 바람이 나 가정까지 버리게 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들의 관계를 준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받기만 했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줘본 기억이 별로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다르다. 입장이 서로를 반대쪽에 세우게 했을 뿐이지 그녀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몸을 던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수는 20년 간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화영은 준표를 얻기 위해 1년 동안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모를 겪었다. 이 공유점에서 지수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을 갖게 된다.

준표가 화영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지수에게 “당신네 우정은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지수는 ‘경민의 엄마로서 고맙다’고 말한다. 화영을 절망에 빠뜨린 준표의 ‘아이거부’를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엄마로서는 또한 고맙기도 하다는 것. 이런 상반된 감정이 가능한 것은 지수에게도 이른바 관계의 역할이라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자로서 20년 동안 헌신한 대가로 돌아온 고통을 겪은 지수는, 1년 동안 자신을 버려가며 얻으려 했던 사랑이 무의미해진 화영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지수의 마음은, 또한 시청자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화영이란 캐릭터에 문득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수가 이해하고, 시청자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화영의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관계의 거미줄에 걸린 화영
화영은 관계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 그녀가 미국사회에서 생활하다 국내로 들어왔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토록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가족과 사회란 관계에 진저리를 칠만 할 것이다. 그녀 자신의 미국생활조차도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이란 개인적 존재는 없었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한 남자에게 빠져들고 그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일깨우는 것이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는 절실함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것,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다. 준표라는 남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관계의 거미줄들이 쳐져 있었다는 것. 화영은 먼저 친구인 지수와 연결된 거미줄을 잘라야 했고, 지수의 언니, 은수(하유미)와 아들 경민, 그리고 준표가 그다지도 끊기 어렵게 생각했던 부모와의 거미줄조차 잘라야 했다. 그렇게 준표를 거미줄로부터 떼어내어 둘만의 공간으로 오자, 이제는 준표의 속에 남아있는 거미줄의 기억과 습관이 그녀를 괴롭힌다. 준표는 지수의 밥에 끌리고, 경민에게 끌리고, 사회적 관계, 부자지간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문제는 준표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화영은 지수 같은 아버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화영을 옭아매고 있는 거미줄들은 그 둘의 관계를 자꾸만 뒤틀어버린다. 1년 동안 그녀가 해온 일은 바로 그 복잡한 관계의 거미줄들과의 사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자식을 원치 않는 준표는 그간의 관계를 부부관계가 아닌 정부관계로 돌려놓고, 그녀가 발견한 처리되지 않은 준표와 지수의 이혼서류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준표 속에 있는 관계의 거미줄은 여전히 튼튼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 게다가 결혼을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여기는 사회적 풍토와 그 풍토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준표에 화영은 더 이상 자신이 없어진다.

화영의 분노가 이해되는 것은
“내가 겁나는 건 당신부모도 당신도 아냐. 바로 내 자신이야. 조심해. 잠잘 때도. 내가 당신 목을 조를 지도 몰라. 밥에도 독을 탈지도 몰라.” 화영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녀가 겪었던 “모욕, 수치, 경멸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들어버린” 준표 때문이다. 그녀는 “내 사랑, 내 선택, 당신이란 남자, 당신 사랑의 의미를 찾는 중”이라 말한다. 살면서 보상해주겠다는 준표의 말에 그것은 “오히려 지긋지긋한 올가미가 아닐까”하고 쏘아댄다. 준표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친구처럼 연인처럼 사는 것이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그 관계의 거미줄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화영이 말한다. “당신 사랑은 비겁해. 아주 아주 비겁해.”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치 지수의 주부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준표의 사고를 깨버리는 화영의 존재다. “나를 지수로 만들려고 하는 게 화가 나. 나 자신도 지수처럼 되가는 거 싫어. 아내는 아내지 종이 아냐. 밥해주기 싫은 날이 있어. 그런데 해줬어. 그래서 지수가 되가는 거 같애.” 화영은 지수 같은 천사표 아내의 삶을 당연시 생각하는 이 시대 남성들의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냄비를 내주며 해장국을 사다달라고 한다. 준표 같은 남자가 평생 해보지 않았을 그 일을.

화영이 지수와 전화통화를 하는 내용은 한국이란 사회에서 결혼해 살아가는 여자들이 새로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당해야하는 관계의 부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이해 받지 못하면서 왜 이해해야하는 지 모르겠어. 네가 경탄스러워.” “나는 모자라잖아. 모자라서 그렇겠지.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 별거 아니잖아. 자꾸 파면 좋을 거 없잖아.” 그녀들이 공유하는 이 부당한 대접은 과거 가부장적 가족의 틀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관계와 서열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가족의 틀. 김수현 작가는 이 불륜극을 통해 바로 그 틀의 견고함과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불륜이란 두 가지 힘의 충돌을 말한다. 그 하나는 사회가 가진 규범, 틀의 힘이고, 또 하나는 그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이다. 김수현 작가는 이 두 힘의 충돌을 그리면서 그 화학작용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관계의 거미줄들을 잡아낸다. 비굴하고 치사하게 만드는 그 관계들 속에서 결국 그녀들이 얻은 것은, 관계 속에 매몰된 삶이 아닌 자신의 당당한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서 마주보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극에서 시작해 심리극으로 치닫다가 말미에 사회극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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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찰나의 소중함을 묻다

청춘시절의 한 때를 생각해보면 꽤 강렬했을 감정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장면들은 단순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라든지, 그 하늘을 유유히 움직이던 구름이라든지, 방과후 텅 빈 운동장에서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던 그 단순한 시간들 같은 그림들이 갈무리된 감정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그 시절에는 너무 강렬했거나, 따분했거나, 때론 급박하게 움직여 볼 수 없었던 시간의 풍경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과 시간들, 그리고 그것들 위로 등장해 우정의 이름으로 스치듯 지나가 버린 사랑의 감정 따위는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라는 능력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사랑스런 애니메이션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그 아름다움조차 기억나지 않는 청춘이란 시간대를 마코토라는 소녀를 통해 여러 번 되돌려보기로 한다.

다행히도 마코토라는 캐릭터는 지구를 구한다거나 하는 거대한 욕망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 능력은 오로지 우리가 흘려보낸 일상 속에서만 발휘된다. 타임리프라는 능력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루종일 부른다거나,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을 먹는데 사용된다.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의 시간대를 되돌려보자 일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들이 피어나면서 툭툭 던지곤 했던 말들과 행동들에 감춰졌던 청춘이란 열병의 실체가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풍경을 담아내기에 정지된, 혹은 정지된 듯한 장면들이 유난히 많이 보여진다. 호소다 마모루라는 섬세한 눈의 소유자는 그 정지된 장면 속에 고즈넉이 서 있는 집, 운동장, 하늘, 구름, 언덕, 강물 같은 풍경을 집어넣는다.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장면 속에 주인공들이 가진 감정의 떨림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멈춰선 시간의 풍경 속을 유영하는 주인공들을 넣어 마치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싶은 안타까운 감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누구나 흐뭇한 감회에 젖는 것은 소년 소녀에서 남자와 여자로 성장하는 그 과도기의 작은 떨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반추해내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가 자칫 추억이라는 웅덩이에서 허우적댈 수 있는 위험성을 이 애니메이션은 ‘일상을 되돌아보는 타임리프’라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뛰어넘는다. 잔잔함에 젖어 잊고 있던 청춘의 추억 속에서 물 흐르듯 빠져들다가, 수면 위로 불쑥 솟은 열병을 발견하곤 급박한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역시 귀여운 반전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애니메이션이 얻은 성취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아포리즘에나 나올 법한 이 메시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과연 이 메시지가 평범한 걸까. 그것은 오히려 중요한 메시지조차 평범하게 되어버린 우리의 둔감한 이성과 감성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마코토가 그랬듯이, 바로 그 평범과 일상이 되어버린 시간을 다시 소중한 것으로 환원시켜주는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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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더미 앞의 금나라 혹은 연예인들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마동포(이원종)가 사무실 지하비밀금고에 숨겨둔 돈더미로 첨예한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두 욕망이 부딪치면서 시청자들은 돈에 대한 은밀한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마동포가 숨겨놓은 돈이 몇 장의 수표도 아니고, 은행계좌의 수치도 아닌, 만 원짜리 돈더미란 점은 금나라(박신양)가 그 돈을 찾는 이야기를 자본주의라는 섬에서 보물을 찾는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돈 다발이란 구체적인 돈의 형태는 수치로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그것은 보물이 아니고 돈이라는 점이다. 보물이야 낭만이라도 있겠지만, 돈 다발은 무언가 어둡고 음침한 구석이 있다. 그것도 사채업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서 모아진 돈 다발은 더욱 그렇다. 비공개적인 돈의 흐름이 가능한 돈 다발에는 사실 그 돈을 벌기 위해 떨어진 땀 냄새보다는 누군가 흘린 피 냄새가 더 진동한다. 그 돈더미 앞에서 금나라는 갈등한다. 아니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갈등하게 될 것이다.

마동포가 서민들의 희망을 짓밟아가며 지하 비밀금고에 쌓아놓은 돈 다발의 적나라함은,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덧씌운 대부업체 광고의 포장을 벗겨버린 이 드라마의 적나라함을 고스란히 닮았다. 손만 뻗으면 자기 손에 잡히는 그 돈 다발 앞에서 갈등하는 금나라의 모습은, 대부업체들의 광고 앞에 선 연예인들을 연상케 한다. “무이자 무이자-”를 외치며 유혹하는 돈은 자칫 이미지 실추라는 살인적인 이자로 되돌아올 판이다.

적어도 ‘쩐의 전쟁’을 두고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란 얘긴 하지 못할 것 같다. 연예인들은 줄줄이 대부업체와의 광고 계약을 거절하거나, 취소했고, 대부업체들은 벗겨진 실체로 인해 추락된 이미지를 금리인하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넘어서려 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살인적인 이자율에 대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쩐의 전쟁’의 인기는 이런 현실까지 움직이는 리얼한 스토리, 연출, 연기 때문이거나, 드라마가 그리는 현실 자체의 지독함 때문이다.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그저 ‘쩐’을 다루는 게 아니고, ‘쩐의 전쟁’을 다룬다. 즉 쩐에도 ‘좋은 쩐’과 ‘나쁜 쩐’이 있어서 서로 전쟁을 벌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선악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란 욕망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가 그걸 구분하는 기준이다. 금나라는 바로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속 대사대로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주먹보다는 돈이 앞서는” 세상에서 돈의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가 그리는 쩐의 전쟁의 승리자는 아마도 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 아닐까. 돈더미 앞에 앉아 갈등하는 금나라도, 많은 연예인들이 광고라는 유혹의 쩐의 전쟁 속에서 포기함으로써 승리한 그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될까.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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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절을 한다. 방귀 깨나 뀐다는 부잣집 양반님네들 앞에서도,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진 사또 앞에서도, 글 깨나 읽었다며 위선 떠는 선비 앞에서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녀가 절을 한다. 그녀가 절을 하는 곳은 하녀들이 매일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마룻바닥이 아니다. 신음과 고열에 젖은 피비린내와 땀 냄새 심지어는 똥 냄새, 오줌 냄새 그것이 뭉뚱그려진 죽음의 냄새가 배어나는 옥사의 맨바닥이다. 그녀가 절을 하는 대상은 가장 천하디 천한 ‘놈이(유지태)’란 남정네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놈이는 저잣거리 왈자패, 색주가의 기둥서방, 그리고 화적 두목으로 살아가는 그 시대, 이 놈도 되고 저 놈도 되는 대부분의 천민들이 그러했던 양반네 눈에는 그저 잡놈인 비천한 사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가슴속에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못 가겠냐”는 호기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그 놈은 양반집 아기씨로 자라온 황진이(송혜교)의 태생을 밀고해 하루아침에 그녀를 천한 기생으로 만들어버린 놈이다. 빗나간 사랑으로 비롯된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반면 그 놈은 낮아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가장 낮은 사람들을 돕는데 남은 인생을 건다. 높은 데서는 몰랐던 낮은 자들의 처지를 알게된 황진이의 마음 속으로 점점 놈이가 들어온다.

낮은 사람들을 돕는 화적패 두목 놈이와 천한 기생으로 살아가는 황진이는 지체 높은 양반네들에겐 가슴속에 칼 하나씩을 품고, 낮은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삶에 매진한다. 그래서 양반들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런 그들이 무릎을 꿇는다. 누굴 위해서? 이름마저 비천한 괴똥이(오태경)를 위해서다. 황진이는 그를 볼모로 잡고 있는 사또에게 몸을 허락하고, 놈이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허락한다. 그런 그들이 옥사에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다. 황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잔을 건네고, 가장 비천한 놈이란 놈에게 절을 한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는 이처럼 신분의 정점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황진이를 그려낸다. 그리고 결국엔 저 서화담(김응수)이 화두처럼 던졌듯이 신분도 귀천도 없는 자연의 일부로 끝을 맺는다. 황진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먼저 했던, 드라마 ‘황진이’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드라마에서는 낮은 신분의 황진이가 점차 예인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라는 인물에 있어서도 드라마 속의 양반들을 농락하는 카리스마보다는 삶을 탐구하는 듯한 진중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메인 카피,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이란 문구는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황진이라면 모를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황진이는 20세기적 가치였으나 지금은 찾아볼 길 없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21세기 여인은 희생보다는 행복을 꿈꾸는 좀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묘한 부조화는 그래서 21세기 여인들이 보기에는 좀 낯선 것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의 한없이 낮아지는 혁명가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은 아직도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까. 놈이 같은 비천한 놈을 향해 절을 올리는 황진이의 모습이 좀체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황진이가 내뱉는 수많은 대사들이 이제는 오래된 향수처럼 느껴지는 문학으로 읽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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