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의 전쟁’의 풍자가 말해주는 것

장태유 PD는 왜 ‘돈의 전쟁’이 아니고 ‘쩐의 전쟁’이냐는 질문에 “쩐이 더 끈끈한 맛이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지금은 돈을 돈이라 표현해서는 어딘지 밋밋할 정도로 돈에 대한 욕망과 박탈감이 많은 시대다. 그래서일까.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가 만화적인 연출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심각한 이야기를 최대한 부담을 줄여 가볍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짠한 느낌이 남는 것은.

웃으면서도 짠한 것, 풍자의 힘
박인권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쩐의 전쟁’은 만화 원작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 가질 수 있는 ‘과장의 약점’을 오히려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박인권 화백의 만화는 리얼리티를 다루면서도 만화만이 갖는 과장을 또한 극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데, 드라마, ‘쩐의 전쟁’ 속에서도 그 심각한 리얼리티와 만화적인 가벼움이 동시에 나타난다.

즉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게 만들고,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짠하게 만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풍자의 힘 때문이다. 풍자는 과장의 기법을 통해 사람들의 웃음을 끌어내지만, 그 과장이 제거됐을 때 드러나는 심각한 현실 때문에 짠한 느낌을 남긴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버지의 유서를 통해 나타난다. 칼처럼 날카롭게 간 카드로 동맥을 끊어 자살한 아버지가 ‘카드 빚 쓰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는 사실은 그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거기에는 자살도구로 쓰인 것이 카드라는 사실과 유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드 빚’이란 단어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비극일 수 있지만 그것을 드라마라는 장치 속에서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게 무슨 유서가 이래?”하며 오열하는 금나라를 보는 시청자들은 웃게 되는 것이다. 그 웃음은 이 과장된 설정에서 비롯되지만 그 현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간극에서 우리는 작가가 전하려는 사회에 대한 비꼼을 공유할 수 있다. ‘오죽 했으면 카드 빚 쓰지 마라’고 유서를 썼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서주희(박진희)가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고 할 때 그 말의 묘미에서 웃음을 짓게 되지만 또한 ‘정말 돈돈 하는 세상’이라고 씁쓸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유다.

왜 하필 풍자였을까
그런데 왜 하필 풍자라는 장치를 만들어 썼을까 하는 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풍자란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대상을 언어유희나 과장된 표현으로 비꼬는 기술이다. 즉 듣는 사람에게 그것이 자신을 비판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쩐의 전쟁’이 풍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피도 눈물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사채업자’로 그려지는 드라마가 처하게 될 사회적 파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드라마 후반으로 가면서 나올 ‘진정한 돈을 아는 사채업자’의 이야기에서 “혹 사채업자를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에 직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다가는 드라마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는 이상한 오해에 휘말릴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쩐의 전쟁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풍자로 덧대진 악덕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와 그 부하들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거둬 가는 악독한 캐릭터들이지만, 우리가 이들에게 갖는 우선적인 이미지는 코믹함이다. 풍자라는 안전장치를 단 드라마는 더 신랄하게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죽었으니 시체를 가져 가겠다거나, 결혼식장에 들어온 축의금을 강탈해가며, ‘사람은 죽어도 빚은 남는다’는 식의 질깃질깃한 빚 독촉을 해대는 사채업자들의 모습이 풍자라는 옷을 입고 고스란히 그려진다.

우리는 그 속도감 있는 풍자의 틀 속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남는 짠한 느낌은 사실 그 풍자의 대상 속에 자신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돈, 아니 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살아가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웃음이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저네들 사채업자들만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것 또한 자본주의라는 쩐의 세상을 비꼬는 풍자의 장치로 활용되고 있기에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남 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쩐의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내 남자의 여자’의 여자들

김수현의 여자들, 지수(배종옥)와 화영(김희애) 중 당신은 어느 편인가. 이것은 이 시대 남성들에게 그네들의 여성 취향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지수와 화영 중 어느 쪽에 더 빠져드느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내 남자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또한 가정을 지키려는 지수라는 여성상과, 금기된 욕망의 질주를 하면서 가정을 깨려는 화영이란 여성상이 서로 부딪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아무리 얘기해도 불륜드라마라는 딱지를 떼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시청률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드라마의 속내를 한번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거기에는 그 드라마를 보는 대다수 현대 여성들의 욕망이 또한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수와 화영이란 여자들이 그려내는 이 시대 여성들의 환타지는 무엇일까.

지수, 착한 여자 콤플렉스
“내가 저를 위해 전부를 바쳤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준표(김상중)를 화영에게 보내고 남은 지수는 아버지(송재호) 앞에서 이렇게 오열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그러라고 했어? 네가 좋아하고서는 이제 생색내려고 하지마.”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은수(하유미)가 한 마디 한다. “그래도 지수가 지극 정성한 건 인정해줘야 되요.” 거기에 대해 아버지가 하는 말, “그게 바로 지수 너야.” 그 말에 지수는 멍해진다. 자신의 괴로움은 준표가 준 상처 때문 만이라 여겼는데, 거기에는 자기 스스로 자초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드라마 초반 내내 김수현 작가가 지수를 그려낸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주변에서 모두 잘한다고 얘기 듣는 그런 여자를 꿈꾼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활에서 찾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서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준표를 숨막히게 하는 거라는 걸 그녀는 알아채지 못한다. 착한 여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이상을 하려고 하는 데서 내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자기 삶이 없는 헌신은 때론 자신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는 강요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끝까지 가정을 지켜야 하나
상처 입은 착한 여자가 아픔을 토로하는 식의 드라마는 이제 식상해져버렸고, 김수현 작가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당사자가 갑자기 돌변해 악다구니하는 모습은 자칫 가정을 지키는 여자와 불륜녀가 같은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김수현 작가는 은수라는 지수의 대리인을 등장시킨다. 은수가 등장하자 눈물 흘리고 있을 가정 지키는 여자 편에 든든한 힘이 실린다. 욕망을 향해 뻔뻔하게 질주하는 화영 앞에 주먹을 날리고 업어치기를 하는 은수는, 어려워도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지수편에 선 시청자들의 분노를 대리충족 시켜준다.

많은 시청자들이 은수의 거침없는 말과 액션(?)에 “속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왜 끝까지 가정을 지켜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지수에 대한 감정이입이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학습된 결과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부모와 남편, 아이에게 헌신하는 삶을 가치로서 받아들여왔던 시청자들로서는 “왜 그래야 하는가”하는 질문보다는 “가정을 지키려는 건 당연한 것”이라는 이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대리인으로서 등장해 참으며 가정을 지키라는 은수와 달리 지수가 선택하는 것이 별거라는 것은 이 드라마가 섣부른 결론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드라마가 여타의 불륜드라마와 다른 점이다.

화영, 금기된 욕망의 화신
반면 화영은 윤리적 잣대로 보면 뻔뻔한 불륜녀지만, 또 한 편으로 보면 금기된 욕망에 솔직한 여자이기도 하다. 불륜 사실을 알고 지수가 “왜 그랬니? 넌 내 친구였잖아”하고 항변할 때 화영은 당돌할 정도로 솔직하게 말한다. “불가항력이었어. 죽어도 좋았어. 너 따윈 아무 상관없었어.” 그러자 발끈한 지수가 독설을 퍼붓는다. “너희 짐승이니?” 그러나 화영은 선선히 그 사실도 인정해버린다. “행복한 짐승.”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가는 화영이지만, 그녀의 금기된 욕망을 향한 무한질주는 이 시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억압받아왔던 여성들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구석이 있다. 특히 가정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왔던 중장년층의 주부라면, 가정보다는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지금의 세태 속에서 상대적인 박탈감 같은 것을 느꼈던 여성이라면, 그녀의 도발은 ‘비난하면서도, 속 시원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이것이 그녀를 (윤리적인 잣대에서) 욕하면서도, (금기된 욕망의 표출을 통해) 묘한 매력을 갖게 하는 요인이다.

친구의 가정을 깨고 얻은 것, 결국 가정?
하지만 그런 화영의 거침없는 욕망의 질주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늘 가족들의 생계를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야 했고, 남편조차 자살해버린 그녀에게 가정이 주는 의미는 억압과 고통 그 자체이다. 늘 단란해 보이는 지수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데는 바로 그 점도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수를 찾아가 “셋이서 같이 살자”는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이것은 가부장제와 기존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한 것과 같다.

그런데 지수에게서 준표를 빼앗아와 자신의 집에 들이자 그것이 가정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묘한 상황이 발생한다. 살을 맞대고 살면서 사랑(이것은 화영의 표현이다)은 퇴색되고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그녀는 그토록 깨고 싶었던 (지수의) 가정을 깨고, 결국 스스로 가정을 만든 셈이다. 그런 그녀가 지수를 찾아가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부분이 이 드라마가 공감을 주는 대목이다. 화영은 악역이 아니고 가정이라는 억압을 주는 단단한 사회적 질서 속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점이다.

불륜드라마와 여성심리극의 갈림길
가정이란 틀을 두고 벌이는 지수와 화영의 대립구도는 이 드라마가 그저 자극적인 설정만을 추구하는 불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 금기된 욕망과 억압에 대한 여성심리극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김수현 작가는 지금껏 드라마 속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들이댄 혐의가 짙다. 가부장제의 문제를 꼬집고 비틀면서 한껏 시청자들의 금기된 욕망을 해소시키다가 결국에는 다시 가부장제로 돌아가는 결론으로 끝맺었던 것.

만일 김수현 작가가 여타의 드라마들을 통해 보였던 이중적인 잣대를 이 도발적인 문제제기의 끝에 꺼내든다면 그것은 이 드라마를 그저 자극적인 설정을 통해 시청률만을 노린 불륜드라마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의 틀을 깨는 도발적 제안으로 끝낸다는 것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 이것이 지수와 화영이란 대타자들을 통해 가정이란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김수현 작가가 앞으로 고민해야될 문제다.

또한 이 드라마를 열성적으로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한번쯤 어떤 캐릭터가 자신을 그렇게 공감하게 하는가를 생각해보면서, 김수현 작가의 행보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 보는 재미도 더할 것이지만, 그것이 그럴 듯한 이야기로 포장된 불륜드라마에 기만당하지 않고, 질 높은 여성심리극을 불륜드라마로 싸잡아 비판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수와 화영, 당신은 어느 편인가.
/정덕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드라마 종반에 와서야 왜 궁의 황태자가 마왕으로 캐스팅 되었는지를 알 것 같다. ‘궁’에서 보여주었던 겉으론 차갑지만 정이 많은 황태자의 모습은 ‘마왕’에 와서 좀더 완성되는 느낌이다. 이 드라마에서도 주지훈은 초반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그 차가운 얼굴 속에서 따뜻함이나 아픔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야누스적인 면모는 ‘마왕’이란 드라마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면서 또한 주지훈만의 독특한 아우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왕’과 주지훈은 서로의 주인을 제대로 찾은 격이다. ‘마왕, 오승하’가 아닌 ‘마왕, 주지훈’이라 일컫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마왕, 오승하
오승하(주지훈)란 캐릭터를 연기하는 주지훈의 얼굴은 좀체 변화가 없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포커페이스다. 이것은 ‘마왕’이란 드라마가 처음 시청자들에게 내민 얼굴과 같다. 그 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지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 얼굴, 그것은 ‘마왕’이란 퍼즐조각 맞추기 게임에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된다.

변호사란 직업을 가진 오승하란 캐릭터는 그 설정 자체가 이 드라마의 질문이 된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란 철학적 질문은 변호사라는 직업이 갖는 이중성과 맞물린다. 그것은 변호사가 ‘약자를 위한 변호’를 하기도 하지만 또한 ‘강자를 위한 변호’를 하기도 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오승하가 변호사가 된 것은 자신의 형이 ‘강자(강오수네 집안)를 위한 변호’에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려는 것은 형사인 강오수(엄태웅)가 잡으려는 범인을 변호해 과거의 자신이 약자로서 겪었던 상황을 강오수가 똑같이 겪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변호사의 캐릭터를 가진 오승하의 얼굴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다. 직업적인 얼굴과 표정과 말이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승하가 갖는 묘한 카리스마와 탈속한 듯한 느낌,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악마적인 이미지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눈과 입이다. 그의 감정은 반쯤 감겨진 눈빛을 통해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더욱 강하게 전달된다. 그것은 포기한 눈이며, 슬퍼하는 눈이고, 분노하고 있는 눈이며, 그런 자신을 증오하기도 하는 그런 눈이다. 그런데 좀체 표정을 보이지 않던 입이 실룩거리기 시작하면 위악적인 얼굴이 연출된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언뜻 보이는 살짝 말아 올려진 입 꼬리가 주는 섬뜩함은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악동을 만들어낸다. 오승하는 바로 이 악동의 얼굴을 차마 숨기려는 듯 애써 무표정한 주지훈의 절제된 연기에 의해 탄생했다.

마왕, 정태성
무표정과 절제된 얼굴이 주는 힘은 지대하다. 그것은 시종일관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얼굴이 특정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을 지었을 때 보다 특별한 강렬함으로 다가온다. 이 미로 같은 드라마에 오승하는 작은 실타래를 던져주는 캐릭터이기에 그 얼굴의 변화에 시청자들은 극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얼굴은 좀체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감정이 수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얼굴에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 때 나타난 얼굴은 바로 오승하란 얼굴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 정태성의 얼굴이다.

해인(신민아)의 집에 초대되어 잡채를 먹다가 어린 시절 형과의 추억이 떠올라 차마 삼키지 못하는 장면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뒤쫓아 나온 해인이 본 것은 늘상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이라고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오승하의 얼굴이 아니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주고는 자신은 괜찮다며 빗속으로 달려간 정태성의 얼굴이다. 사고로 죽은 오승하 행세를 한 자신을 알아차린 오승하의 누나 앞에서 미안하다며 오열하는 이는 바로 정태성이다.

정태성이란 얼굴이 늘 울고 있는 것은 그 복잡한 상황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 오승하가 지금 하고 있는 복수는 자신이 당한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또 다른 정태성이란 피해자를 만드는 일이다. 권현태(이도련) 변호사를 죽인 조동섭(유연수)을 변호해 결국 무죄로 만든 오승하에게 권 변호사의 아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무죄라는 게 말이 되냐”고 말한다. 그 말에 오승하 속의 정태성이란 얼굴이 꿈틀댄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12년 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 속에서 복수의 희생양이 되는 대리살인자들에 대한 죄책감 역시 그를 짓누른다. 복수를 하면 할수록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온다는 것. 그것이 채워질 수 없는 갈증으로 정태성의 얼굴이 울고 있는 이유다.

마왕, 주지훈
그를 캐스팅한 박찬홍 PD는 주지훈이란 연기자에 대해 ‘따뜻함과 악마 같은 차가움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라 평한 바 있다. 이처럼 주지훈이 정태성과 오승하의 양면성을 모두 지닌 마왕이 된 것은 그의 얼굴 이미지가 갖는 양면성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거기에는 주지훈 자신의 얼굴에서 마왕의 면모를 뽑아내려는 당사자의 노력이 전제되었을 때 얘기다. 무표정으로 날카로움과 차가움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짧은 웃음과 울음을 극대화시킨 주지훈의 전략은 주효했다.

여기에 주지훈을 마왕으로 탄생시킨 공로에 있어서 반드시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탁월한 화면연출과 조명이다. 드라마 중간마다 마치 간주곡처럼 삽입되는 주지훈의 모습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 너머의 감정을 영상을 통해 전달하는 효과를 주었다. 빛이 쏟아지는 창을 바라보며 등을 보이고 똑바로 앉아 있는 주지훈의 모습은 오승하의 악마적인 면모와 정태성의 쓸쓸한 면모를 동시에 전달한다. 가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에 처연한 얼굴로 선 주지훈에게서는 마왕의 전지전능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긴 터널을 걸어가다 문득 돌아보는 얼굴에서는 쓸쓸함과 동시에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영상들 속에 여지없이 끼어 드는 것은 바로 조명이 만들어내는 색감이다. 때론 파란색으로 때론 오렌지색으로, 때론 어둠 속에 실루엣으로 주지훈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내는 조명은 그 얼굴에서 여러 가지 모습의 감정들을 전달해준다. 파란색 속에서 악마적인 이미지를 끄집어냈다면, 오렌지색에서는 쓸쓸한 감정을 잡아낸다. 조서실의 어둠 속에 나타난 실루엣은 이 인물이 가진 야누스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마왕, 주지훈의 탄생은 김지우라는 작가가 탄생시킨 놀라운 이중적 캐릭터에 박찬홍 PD의 계산된 연출과 정길용 조명감독의 색감이 주지훈이란 연기자의 얼굴에 집중된 결과이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 앞에서 고뇌하는 ‘마왕’이란 캐릭터의 창출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의 목적인 바, ‘마왕’은 주지훈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전제작만이 해답이다

한류는 가고 미드(미국드라마)가 오나?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던 미드는 케이블TV를 통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덧 공중파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CSI 마이애미’가 현재 방영되고 있는 상황이며 곧 미드라는 불꽃에 휘발유를 끼얹은 ‘프리즌 브레이크’도 공중파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이것은 최근 ‘히어로즈’, ‘프리즌 브레이크’, ‘섹스 앤 더 시티’,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미드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서 소외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드의 수요를 방송사들이 읽은 것이다. 미드에 푹 빠진 이들은 우리 드라마가 시시해서 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 드라마가 좇아가지 못하는 대중의 트렌드를 미드의 어떤 면들이 사로잡은 것일까. 거기서 혹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만이 가진 능력을 깨닫게 되고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소임을 갖게 되면서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히어로즈’에는 히로(마시 오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텔레포트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히로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그의 능력은 이 드라마가 가진 스토리를 무한히 해방시킨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와중에 갑자기 미래에서 온 히로가 다른 능력자에게 “지금 당신은 당장 치어리더를 구하러가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리 벌어질 일에 대한 예고이자 그 예고를 지금 바꾸는 것이 능력자들의 소임이라는 걸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려면 이미 전체 이야기를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사전제작이 보편화된 미드의 최대강점이다. ‘프리즌 브레이크’에 열광하는 것은 그 시리즈물의 연속성에서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마치 정교한 피스를 조립하는 듯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석호필(스코필드)의 철저한 탈옥을 위한 준비는 사실 드라마 제작자들이 드라마를 만들어 가는 철저한 사전준비와 거의 일치한다.

사전제작은커녕 쪽 대본을 들고 찍는 우리 드라마가 가장 부족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전에 이야기의 얼개를 거의 완벽하게 짜놓아야 가능하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히트’ 같은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처음부터 전체 얼개인 연쇄살인범과 차수경(고현정)의 대립구도를 잡은 상태에서 차근차근 에피소드를 진행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사전 제작된 초반부의 내용과 주단위로 드라마를 찍어낸 중반 이후의 내용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차수경이 아무리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초반부의 차수경과 지금의 차수경은 너무나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굳이 전문직 드라마뿐만 아니라 멜로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종영한 ‘마녀유희’의 실패는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외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탄탄한 스토리는 이제 명망 있는 연기자들보다 더 중요한 드라마의 성패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같은 멜로 드라마라고 해도 미드와 우리의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왜 미드는 멜로라도 뽀송뽀송한 걸까
우리의 멜로드라마는 퇴조하고 있는 형국이 뚜렷하다. 멜로라 하면 트렌디한 설정의 드라마들이나, 혹은 최루성 신파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드의 멜로로 대표적인 ‘그레이 아나토미’나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드라마들을 보고 있으면 분명 우리 드라마에는 없는 그 무엇이 감성을 자극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렇게 뽀송뽀송한 걸까’하는 느낌이다.

‘그레이 아나토미’가 시작할 때 타이틀 롤을 보면 이 드라마의 성격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외과의의 나이프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면, 이어서 여성들의 눈썹집게가 화면에 이어진다. 수혈되는 피를 따라가면 붉은 빛의 와인 잔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즉 이 드라마는 의사라는 전문직과 여성들의 사랑이라는 멜로를 엮은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였다면 즉각 비판이 나왔을 멜로와 전문직의 결합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가 매 에피소드마다 내세우는 주제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멜로 드라마들은 주제가 너무 피상적이고 무겁다. 예를 들어 불치와 불륜이 많이 나오는 것은 멜로의 주제가 삶이나 죽음까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드가 가진 멜로드라마의 주제는 ‘실용적’이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부제들을 봐도 ‘전투에선 이기고 전쟁에선 지다’, ‘남자 없는 세상’처럼 무거움이나 과도한 심각함이 없다. 똑같은 ‘고통’이란 주제를 다룰 때, 우리 드라마가 삶의 어려움 같은 무거움을 넣어 캐릭터를 울리는 반면, 미드는 마치 실험실의 화학반응을 보여주듯 담담하게 여러 고통의 모습들을 유머를 섞어가며 그려낸다. 시청자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눈물 젖은 질척함과 뽀송뽀송한 유쾌함으로 나눠지는 순간이다.

사전제작만이 답이다
우리드라마는 지금 위기이자 기회의 시간들을 갖고 있다. 변화의 길은 분명 저 앞에 보이고 있지만 지금 당장의 변화는 현실이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드라마의 최대 수입국이었던 일본이 자체적으로 한류에서 힌트를 얻은 멜로 드라마를 양산하고 있고, 동시에 미드라는 강력한 드라마들이 FTA로 활짝 열린 TV로의 진출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도 얻은 것은 있다. 그것은 안일한 기획이나 몇몇 스타들만 내세운 드라마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남은 건 단 하나다. ‘철저한 제작’이다. 100% 사전제작이 당장 어렵다면 적어도 전체 틀을 관통하는 철저한 대본이라도 사전 제작되어야 한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초기의 힘을 잃고 쉬운 방식의 전통적인 멜로로 흐르는 것 역시 사전 제작이란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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