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되는 가족, 거기서 보는 희망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웃음폭탄의 주재료로 다루는 건 ‘이 시대의 가족’이다. 그것이 웃음을 주는 이유는 한 집안에서 살고는 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파편화된 관계가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간의 과장된 대결구도는 재미의 한 요소로 끄집어 내진다. 박해미와 민용은 여러 차례 복수와 보복을 거듭하며, 나문희는 며느리인 박해미와 내적인 갈등 상황을 연출한다. 부자지간이지만 아버지인 이순재는 아들인 준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마찬가지. 윤호와 민호는 앙숙지간이다.

이렇게 질서(?)를 잃고 대결로 치닫는 가족관계는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와 달라진 가족구성원들의 역할 내지는 권력구도에서 비롯된다. 권위적인 아버지상의 아이콘이었던 대발이 아빠 이순재는 ‘야동순재’로 불리며 한층 낮아진 눈높이의 아버지상을 그려낸다. 게다가 아버지의 계보를 이어받는 준하는 이 시대가 만든 무능력한 아버지의 전형이다. 그러자 과거 아버지를 중심으로 수직적인 구조를 갖는 전통적인 가족은 해체된다. 대신 가족의 중심으로 서는 인물은 능력 있는 며느리로 표상되는 박해미다. 한 가족 속으로 들어온 며느리라는 이름의 새 구성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혈연으로 묶인 가족체계는 느슨해지면서 좀더 수평적인 구조로 재편된다.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 속에서 점점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의 처지 때문이다. 최근 들어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시대 남성들이 처한 문제를 포착한다. 가장이란 이름으로 칼과 피가 튀는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찾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세계’라는 진창에서 뒹구는 것이다.

이런 조직사회의 어려움은 ‘하얀거탑’이란 드라마 속에서 장준혁(김명민)이란 캐릭터를 통해 극명하게 그려진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만 정작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파멸된 자신이라는 것은 이 시대 가장이란 이름으로 조직생활에 몸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여성들 전문직으로 나아가다
반면 대중문화가 그려내는 여성들은 과거 남성들이 차지했던 그 권력의 자리에 앉혀진다. MBC 드라마 ‘히트’의 강력반 반장이 여성인 차수경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드라마는 작가가 밝혔듯이 형사물 이면에 ‘히트’라는 강력반으로 대변되는 유사가족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장점과 함께 단점을 가진 남정네들을 이끄는 인물은 차수경이란 여성이다. ‘히트’의 차수경처럼 TV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여필종부하는 여성들이 아니다. 심지어는 사극에서조차(예를 들면 황진이나 ‘주몽’의 소서노 같은) 여성들은 남성들을 휘어잡는 존재로 그려진다. 김수현의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남성이란 존재는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 불륜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여성들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된다.

대중문화 속에 전문직 종사자로서 등장하는 여성상은 이제 오로지 결혼에만 목매는 트렌디한 성격으로 그려져서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저 스스로 독립적이며(마녀유희), 즐길 줄 아는 존재(로맨스 헌터)로 공감을 얻는다. 가족을 구성하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 같은 여성들의 변화는 가족 그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요 동인이다.

각자 살아가는, 하지만 버릴 순 없는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이렇게 변화된 가족의 모습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제목이 제시하는 중의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좋지 아니한가’는 ‘좋지 아니한 가(家)’, 즉 안 좋은 가족이란 의미와,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문장 그대로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가족관계는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파편화된 가족의 모습은 저 ‘바람난 가족’에서 고개를 들더니 ‘가족의 탄생’에서 어떤 화해의 모습을 띄다가 ‘좋지 아니한가’에 와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과거의 전통적인 가족이란 의미로서 그 가족은 좋지 않은 가족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비춰주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는 가족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걸어가는 삶 속에서 그저 묵묵히 옆을 돌아다보면 거기 늘 안길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족은, 과거 가족이란 이름으로 희생되고 억압됐던 가족 구성원들을 긍정적으로 유도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다시 그런 가족이라면 ‘좋지 아니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좋지 아니한가’처럼 이 시대에 가족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살기 어려워진 사회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존재로서의 가족이며 또 하나는 수평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해체되는 양상으로 해석되는 가족이다. 이 두 가지는 상충되는 것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 사이에서 가족관계는 변화를 요구한다. 명령하기보다는 대화를 시도하고, 직접 변화를 주려하기보다는 묵묵히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새로운 공존의 방법이 모색된다면, 좋지 않아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또한 좋지 아니한가’ 하고 긍정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형 본격 수사물을 표방했던 MBC 드라마 ‘히트’는 ‘수사반장’이후 보기 힘들었던 형사를 안방극장으로 다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게다가 여성 강력반 반장이라는 설정, 유사가족 형태로 묶여진 팀이 엮어 가는 수사물이란 점, 게다가 우리 식의 수사물(주로 영화 속에서)의 맨발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일상화된 형사의 캐릭터에 동시에 과학수사의 이미지를 덧붙인 점 등등 새로운 시도가 많았던 드라마다.

하지만 종영에 즈음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은 이제 이야기를 좀 해볼만한 상황에 끝나버린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히트’는 초ㆍ중반부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 사실이다. 미드(미국드라마) 식의 전문성을 가진 드라마가 이제 막 태동하는 시기인데다, 그것이 우리 식으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니, ‘히트’는 그 첫 시험대에 오른 셈이 되었다. 드라마는 스토리 전개보다 캐릭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캐릭터는 완전 소중, 스토리는 지지부진
작가들은 “사건 자체보다는 인간관계에 중점을 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히트’가 수사물이라는 장르의 틀을 빌어 왔다는 점에서 상충될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은 장르에 대한 어떤 기대감을 갖게 되는데 사건은 지지부진하면서 캐릭터에 집중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인간관계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장르를 배반할만한 특별한 대체물이 있었어야 했다. 그래서 캐릭터 설명에 할애된 ‘히트’의 초반부 스토리는 사족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팀원들 한 명씩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이야기 전개를 하기에 20부작은 너무 짧다. 그들의 캐릭터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그것은 후반부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차수경과 연쇄살인범의 대립구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어야 했다. 하나씩 설명하는 스토리들이 초반에서부터 중반까지 이어지자 기현상이 벌어졌다. 캐릭터는 완전 소중해졌는데 스토리는 지지부진해진 것이다.

16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이다
‘히트’의 진짜 얘기는 연쇄살인범의 얼굴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20부작 짜리 드라마는 후반부 16부에 와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즈음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수사물이 갖는 미스테리의 요소를 일찌감치 지워버린다. 연쇄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하고 쫓고 쫓기는 이야기 속으로 바로 뛰어들었다. 그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드라마의 긴장감이 생기면서 중심 이야기 부재로 지리멸렬해진 ‘히트’가 가야할 강력한 목표가 생겨버린 것. 드라마는 그제야 살아나기 시작한다.

연쇄살인범과 차수경의 본격적인 심리전은 ‘히트’가 처음부터 했어야 했던 요소다. 14년 동안 감옥에서 정신병원에서 차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준비했던 범인 캐릭터라면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예 히트 팀원 들 전체를 이 범인이 벌이는 사건과 연관시켰다면 시간도 벌면서 이야기는 더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진화된 ‘히트’를 기대하는 이유
드라마가 끝난 마당에 이런 아쉬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 아쉬움은 ‘히트’가 일정부분 성과를 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는 늘 어렵기 마련이고 그 첫 시행착오를 거쳐 해결의 실마리를 막 잡았다는 점에서 ‘히트’는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전문성 있는 드라마들을 위한 작은 징검다리를 하나 놓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히트’의 시즌2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것일까. ‘히트’가 구축해놓은 캐릭터가 너무 아쉽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감을 잡은 ‘히트’가 이렇게 단발성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조직된 ‘히트’는 이제 겨우 사건 하나를 해결한 셈이다. 그걸로 이렇게 끝내기가 못내 아쉽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을까. 종반부에 보여줬던 긴장감을 초반부터 유지해간다면 이처럼 잘 구축된 캐릭터에 좀더 진화된 ‘히트’가 나오지 않을까. 실망과 함께 말미에서 보인 가능성이 너무 아쉬워하는 말이다.

누가 알기나 했을까. 감동이 자극보다 더 강하다는 걸. 그 반가운 사실을 알려준 첫 번째 주인공은 이미 종영한 ‘고맙습니다’란 드라마다. 에이즈에 감염된 딸과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미혼모가 세상의 편견을 진심으로서 넘어서고, 그 진심이 에이즈보다 더 강력하게 주변으로 전염된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서 감동을 전해준 두 번째 주인공, 바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5회에 걸쳐 연속으로 꾸며진 ‘휴먼다큐 사랑’이다. 그 중에서도 2회로 방영된 ‘안녕 아빠’편은 전 국민을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값싼 눈물이 아닌, 값진 감동이었다. 가족과 사별하는 이야기 앞에 어찌 눈물이 없겠냐마는 이준호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무언가 다른 이유도 있을 법하다.

‘고맙습니다’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은 미혼모 가족의 바람이 거창한 것이 아닌, 그저 함께 그 곳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고맙다고 표현하는 일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호의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이상하다, 뭐가 고맙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의 작은 호의들. 그런데 ‘휴먼다큐 사랑’을 본 시청자라면 그것이 왜 고마운 지를 알게됐을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의 다섯 편 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바라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이며(엄지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 편), 물질이 아닌 자신들의 진짜 사랑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는 것이고(벌랏마을 선우네 편) 가족들과 좀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며(안녕 아빠), 아이의 돌잔치를 보고 싶다(엄마의 약속 편)는 것이다. 놀랍지만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전부이다.

하지만 그 간단한 것들을 막는 것들이 존재한다. 무한정 지속될 것만 같던 삶에 장애와 병 같은 것이 들어오자 삶은 더 진지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 우리가 행복을 위해 원했던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고 일상적이고 작은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작게 보였고, 그래서 무시하거나 실천하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안녕 아빠’ 편에서 아빠가 무한히 반복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미안하다, 사랑해, 고마워” 같은 대단할 것 없지만 평상시 잘 쓰지 않았던 말들이다. 그것이 이제 한 달도 채 생이 남지 않은 아빠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그 진정한 의미들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아빠의 옆을 수호천사처럼 지키고 결국 가슴으로 아빠를 떠나보낸 은희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처럼 아빠를 희생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더라면 10년 동안 살아 온 결혼생활이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왜 내가 진작 이런 맘으로 남편을 대하지 못했을까. 지금은 저의 모든 것을 다해서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 감동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질문으로 다가온다.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통해서, ‘휴먼다큐 사랑’을 통해서 받은 감동의 실체는 이렇게 우리 삶의 주변까지 둘러보게 만든다. 자신을 그 상황 속에 감정이입시키며 눈물을 흘린 사람이라면 먼저 일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사랑 표현과 점점 서먹해져 가는 관계 같은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TV 속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해진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자신 역시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린 시절, 누군가 던진 돌팔매질에 상처 난 이마는 누가 고쳐주었나. 정성스레 솜에 과산화수소를 발라 상처를 소독한 후, 빨간 약을 발라주신 어머님인가. 아니면 과산화수소와 빨간 약인가. 이창동 감독이 들고 온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 ‘재수 없음’으로 치부되는 운명의 돌팔매질에 입은 상처가 과연 인간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화는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을 아들 준과 함께 찾아가는 신애(전도연)의 자동차에서부터 시작된다. 햇살이 저 멀리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그것은 차창에 가려져 굴절된다. 신애가 밀양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하늘의 태양이 그저 거기 떠 있는 존재로만 알았다. 그러나 밀양에서 겪게되는 참기 힘든 시련(아들이 유괴되고 살해되는)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가슴을 두드리고 그래도 죽지 않는 제 육신에 억지로 밥알을 쑤셔 넣으면서 미칠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애 옆을 종찬(송강호)은 서성댄다. 밀양이라는 지명을 ‘비밀의 햇볕’이라 부르며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그녀는, “뜻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예”하는 속물 같은 이 사내를 무시한다. 하지만 종찬은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믿음 없이도 교회를 나가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애가 처음 종교의 힘을 빌어 하늘을 쳐다본 것은 그것이 자신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 그것은 마치 상처가 분명 있는데도 없는 것이라 믿고 아무런 대응조차 않는 것처럼 헛된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신도를 유혹하면서 신을 비웃듯 두 번째 하늘을 올려다보는 신애의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있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직시하지 않았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버렸던 것. 상처는 어느덧 그녀의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영화는 신애라는 상처 입은 인간이 벌이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투를 끝까지 배신한다. 남편을 잃고, 아이를 잃고,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하려 했지만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해도 거기서 또다시 상처와 마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독스런 신애라는 인물을 연기해낸 전도연이란 배우는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자신 속에도 깊은 상처가 드리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연기는 실제처럼 리얼하고, 그 리얼함은 진짜 전도연이라는 몸피 속에 숨겨진 신애, 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상처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상처의 연속이다. 누군가와 함께 숨을 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매일 조금씩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래서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아무는 것일까. 그 답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적혀 있었고, 그녀 주변을 뱅뱅 도는 종찬이란 인물에 의해 구체화된다. 상처는 ‘누군가’에 의해 나는 것이지만 그 ‘누군가’는 그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상처는 결국 소독약과 빨간 약도 아니고, 어머니의 정성도 아닌 상처 입은 자의 몸 스스로 아무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인간의 조건을 어찌 참혹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상처 입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빨간 약을 발라주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달릴 수 있게 일으켜주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신애의 주변을 서성대며 심각한 영화의 질문들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관객들을 툭툭 던지는 말로 웃겨버리는 종찬은 그래서 이 고통스런 영화의 ‘비밀의 햇볕’같은 존재다. 종찬으로 대변되는 우리 주변의 바라보는 자들은 또한 우리 삶의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되게 만드는 햇볕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햇살은 저 멀리서 비춰주는 것만으로 생명을 살아가게 하니까. 마지막 장면, 후미진 더러운 마당을 담담히 비춰주는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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