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기도, 형님뉴스, 뭔 말인지 알지

운전을 하면서 거래처에 전화를 하고 한 손으로는 네비게이터를 조작하면서 또 한 손으로는 초조하게 담배를 태운다. 그 모습에 거침없이 들이대는 일침. “이건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한 마디에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쫓기듯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허탈해진다. 이거 원 사는 게 사는 건지.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 “사는 게 사는 것 다워야 사는 거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 누군가를 향해 살짝 성을 내본다. 그래봤자. 알아듣기나 하겠어? “뭔 말인지 알지? 몰라? 몰라? 뭐 될래?”답답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본다. 세태를 풍자하는 이른바 세태개그는 개그가 시작된 이래부터 꾸준히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 좀더 생활에 밀착된 느낌이다. 그 이유는 뭘까.

‘같기도’, 복잡한 세상, 넌 도대체 누구냐
개그콘서트의 ‘같기도’라는 코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지금 세태를 제대로 읽어낸 결과다. 20세기 분석의 시대에서 21세기 융복합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깔끔하게 분류되던 기준들은 모두 모호해졌다. 학문은 학문대로 경계를 허물었고 예술 역시 퓨전이란 형태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그러니 우리 생활이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핸드폰이라는 한 가지를 가지고 우리가 하는 것은 전화만이 아니다.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들으며 TV도 보고 인터넷도 한다.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하드웨어 위에 얹어지는 소프트웨어가 달라지자 우리의 생활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생활의 멀티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급변한 세태에 잘 적응된 사람들에 해당되는 말이다. 변화의 과정 속에서 적응 안 되는 사람들은 그걸 흉내내보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기 십상이다. 잘 나가는 한류의 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바이브의 ‘맨날 술이야’를 수리공의 ‘맨날 수리야’로 바꿔 부르던 김준호는 썰렁해진 상황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한류개그도 아니고 삼류개그도 아니여.”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의 개그가 한류에서 삼류로 순식간에 전락하듯, 변화에 적응 못하는 자의 삶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으로 비춰진다. 혹 “넌 도대체 누구냐” 혹은 “너의 적응 안 되는 행동은 도대체 뭐냐”고 묻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같기도’라는 화법은 당혹스런 상황을 유머로 넘길 수 있는 시원스런 해결책이 되어줄 것이다.

‘형님뉴스’, ∼답지 못한 세상에 일갈
웃찾사의 ‘형님뉴스’가 반복하는 말은 “∼가 ∼다워야 ∼지’다. 이것은 거꾸로 당연히 ‘∼다워야 할 것’들이 ‘∼답지 못한’ 세태를 직설법으로 꼬집는 말이다. 그렇다. ‘형님뉴스’는 ‘같기도’처럼 우회하는 방식으로 세태를 풍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된 세태 자체를 비판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러니 뉴스 형식이 따라 붙는 것. 여기에 ‘형님’이 붙자 비판의 방식은 무식해 보이지만 보는 이들을 더 속시원하게 만든다. 비판의 대상 역시 우리가 신문 어느 한 구석에서 보았던 뉴스를 그대로 잡아온다. 그러니 현실의 세태를 고스란히 개그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는 셈이 된다.

칼자루를 쥔 형님들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늘 현장에 나가있는 일용이를 찾지만 그는 엉뚱한 상황을 연출한다. 데스크에 앉아있는 형님들 역시 문제 제기와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을 해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무런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이런 심리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저렇게 무식한 형님들(?)도 “∼가 ∼다워야 ∼지’라고 외치는데 정작 ‘∼답지 못한’ 세태의 당사자들은 뭘 하고 있느냐는 코너 자체가 주는 비판이다. 문득 생활 속에서 ‘∼답지 못한’ 상황에 분노했다면 “∼가 ∼다워야 ∼지’라고 유머를 섞어 외쳐보는 건 어떨까. 듣는 이들이 공감했다면 이심전심의 중의적 웃음이 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다.

‘뭔 말인지 알지’, 쇠귀에 경 읽기
개그야의 ‘뭔 말인지 알지’에는 말 귀 못 알아듣는 동수와 조리 있게 얘길 잘 못하는 정태가 나온다. 정태는 시종일관 “뭔 말인지 알지”를 반복하며 ‘뭔 말인지 모르는’ 동수에게 설명을 하려고 애쓴다. 이것이 점점 반복되면서 보는 사람의 답답함도 점점 커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거기서 동수가 “알았다”고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해댈 때, 웃음이 터지는 것. 이 단순한 설정이 어떻게 이런 폭발적인 웃음을 유발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와 똑같은 상황을 익히 경험한 시청자들과 관객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 아닐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 대고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만큼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 있을까. 마치 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인데도 절차만을 강조하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살면서 너무도 불합리한 경험을 했다면 ‘뭔 말인지 알지’의 정태가 겪을 답답함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 ‘쇠귀에 경 읽는’ 상황에서 정태가 쏟아내는 “몰라? 몰라? 뭐 될래?”하는 말이 그렇게 속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세 살 때부터 웃음이나 신용을 잃는(웃찾사의 띠리띠리)’ 사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이유가 고작 ‘회장님의 방침(웃찾사의 회장님의 방침)’인 사회, 늘 존재감이 없는 학생을 만드는 사회(개그콘서트의 까다로운 변선생), 고시생들을 양산하는 사회(개그콘서트의 노량진 블루스) 속에서 살아가며 참 가슴 답답해지는 분들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이 세태개그가 주는 즐거움이 좀더 우리 생활에 밀착된 느낌을 주는 것은 이제 거대담론의 시대가 가고 생활에 밀착된 작은 담론의 시대가 온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답답한 세태가 우리 삶 속에 드리워져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무릎팍 도사’, ‘일밤’ 왜 비판받나

이영자의 ‘가짜 반지 소동’은 리얼리티쇼 시대에 과다한 시청률 추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페이크 쇼(가짜를 진짜인 척 하는 쇼)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혹자들은 이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소동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른바 쇼는 쇼일 뿐인데, 왜 거기서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냐는 것이다. 일견 이러한 의견은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오락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리얼리티쇼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문제의 핵심이 보인다. 우리는 이영자가 ‘경제야 놀자’란 쇼에서 과장되게 얘기한 사실이 엉뚱하게도 쇼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소라에게 악플로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영자가 쇼의 재미요소로 끌어들인 것은 말 그대로 만들어진 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영자의 사생활 즉 리얼리티였다는 것.

즉 리얼리티쇼는 완전한 허구로 구성되는 코미디 프로그램과 달리, 시청자들이 받아들였던 리얼리티가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 프로그램 자체의 진정성을 잃게 된다. 리얼리티쇼의 핵심이 진정성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시청자의 웃음은 기만당한 셈이 된다. “그저 웃었으면 됐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마치 속은 채 웃은 뒤에 남는 ‘바보 된 느낌’은 시청자의 몫이지 거짓말한 자의 몫이 아니라고 하는 궤변과 같다.

몰래카메라,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
쇼 프로그램이 현실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런 사례는 이미 리얼리티쇼를 주창하고 나왔던 프로그램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몰래카메라’가 거의 매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이 쇼 프로그램이 늘 진위를 의심받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의 숨기지 않은 맨 얼굴을 잡아낸다는 몰래카메라에서 억지스런 상황설정으로 ‘속지 않은’ 최진실의 모습을 발견한다든가, 작위적으로 오버하는 성시경의 모습을 본다든가, ‘속은 척 해주는’ 유세윤의 모습이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시청자들의 즉각적인 비판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짜 속은 것인지, 아니면 속은 척 해주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몰래카메라’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 시도되었을 때는 그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연예인들이 이제는 몰래카메라 자체를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몰래카메라’의 재미가 성립되려면 첫째, 베일에 쌓인 신비스러운 연예인이란 전제조건이 필요하고, 둘째 그 연예인의 겉옷을 벗겨내는 몰래카메라라는 비장의 무기가 잘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다. 연예인들은 신비주의를 벗고 생얼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여기서 몰래카메라는 오히려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상황이다. ‘몰래카메라’가 의도했든 아니든,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홍보의 또 다른 방식이 되는 지점에서 진실과 거짓에 대한 논란은 표출될 수밖에 없다.

무릎팍 도사는 과연 그들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가
‘무릎팍 도사’가 ‘물의 연예인 면죄부 프로그램’이냐는 논란은 이 리얼리티쇼가 가진 프로그램 진정성 역시 의심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연예인을 무릎 꿇리고 거침없는 질문공세로 맨 얼굴을 드러내게 만드는 ‘리얼 인터뷰 쇼’라는 애초의 의도는 희석되고,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에게 오히려 변명의 기회를 주는 면죄부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릎팍 도사가 인기를 끌면서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물의 연예인들이 매주 등장해 자신의 소회를 얘기하는 것은 좋지만, 결론적으로 무릎팍 도사가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시청자들을 무시한 오만한 행위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이다.

리얼리티쇼들은 그것이 진실을 끄집어낼 때 보여지는 날 것의 신선함으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늘 그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쇼의 리얼함으로 인기를 끈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조금씩 연출에 대한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편집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당연한 연출자의 권리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아무리 대본이 아닌 연예인들의 애드립으로 현장성을 높인 쇼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편집이 가해지기 마련이며, 출연자들은 최종편집이 될 때까지 자신의 발언이 어떤 뉘앙스로 시청자에게 전달될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리얼리티쇼의 진정성 문제는 출연자들의 의도라기보다는 편집권을 가진 연출자들의 문제이다. 당장은 이야기가 가진 자극적인 뉘앙스에 유혹을 받는 것이 당연할 지라도, 그것은 멀리 볼 때 프로그램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편집은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위해 쓰여져야지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리얼리티쇼에서 결국 제 살을 파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극 없고 악역 없는 고마운 드라마, ‘고맙습니다’

MBC 수목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흔히 종영과 함께 ‘중독’이니 ‘금단현상’이니 하는 증상으로 아쉬움이 표현되는 강한 인상을 남긴 드라마들 속에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 시청률 전쟁에 자꾸만 자극적으로 변해 가는 드라마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본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었으나 잊고 있었던 ‘감동’을 끄집어내 준 고마운 드라마, ‘고맙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시간의 흔적이 남긴 여운의 의미를 되짚어보자.

자극이 아니어도 좋다
자극과 파행을 거듭하는 이른바 논란드라마들의 탄생목적은 명백히 시청률이다. 그것은 이미 공식이 되어버렸다.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들 속에서 일단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러기 위해 이들 드라마들은 자극적인 장면과 파행적인 인물들을 전면에 배치한다. 논란은 예상된 코스이며 시청자들은 그 논란을 만든 극중 캐릭터들이 야기한 마음의 상처를 분노하면서 보게된다.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지만 시청률은 오른다. 목적의 달성이다.

하지만 ‘고맙습니다’는 이들 논란드라마가 가는 공식을 정반대로 걷는다.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자극과 파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착한 캐릭터들, 착한 스토리로 일관해 나간다. 사실 치매든 에이즈든 미혼모든 그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도 논란드라마의 공식을 채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설정들을 가지고 이 드라마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정답들만 하나씩 끄집어낸다.

자극적일수록 시선을 끄는 세태에, 그 시시해 보이는 정답에서 그 누가 드라마 성공의 공식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논란드라마들이 내는 자극적인 상처에 피학적 쾌감을 느끼며 드라마를 봐오던 시청자들에게, 이 정답들은 치유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드라마를 보며 억지로 짜낸 눈물이 아닌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난 상처들은 하나씩 아물게 되었다. 시청자들은 감동하고 시청률은 오른다. 꼭 자극이 아니어도 드라마는 된다는 반가운 소식. ‘고맙습니다’는 그 소식을 들고 온 고마운 드라마다.

좋은 드라마는 악역이 없다
또한 ‘고맙습니다’는 좋은 드라마는 악역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낸 드라마다. 작년 좋은 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던 ‘연애시대’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악역 없이도 충분히 극적인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연애시대’는 드라마의 극적 상황이 선악구도와 같은 대립이 아닌, 성격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로도 충분하다는 걸 실증해 보여 주었다.

악역이 없는 극적인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캐릭터에 대한 진정성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선악구도에서 보여지는 선한 캐릭터와 악한 캐릭터는 그것을 인물로 두고 볼 때 반쪽 짜리의 진실만을 담은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악한 캐릭터 속에서 선한 면모를 찾아내고, 선한 캐릭터 속에서 또한 악한 면모를 찾아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지 못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그 때부터 드라마에서 악역은 사라지게 된다.

‘고맙습니다’는 다만 악역이 없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물들 속에 공존하는 불완전함을 감동의 요소로 끄집어낸다. 그것은 악한 면모를 보이던 석현모(강부자)가 흘리는 회한의 눈물 속에서, 편견으로 똘똘 뭉쳐있던 푸른도 주민들의 눈물 속에서, 좀체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했던 민기서(장 혁)의 변화과정 등을 통해 보여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에서 악역이 없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영신(공효진)의 가족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고맙습니다”라는 마법의 주문 때문이라는 것. 그 주문이 악역이 될 뻔했던 인물들 입에서 흘러나올 때, 악역은 사라지고, 좋은 드라마는 탄생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맙습니다’라는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고 간 가장 큰 선물은, 어찌 보면 그저 심심풀이나 재미로 치부될 수 있는 드라마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혹여나 영신이나 봄이(서신애), 미스터리(신구)가 죽지 않을까 마음 졸이게 된 것은 그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시청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인물로 각인되었다는 반증이다. 우리는 영신이 미혼모로서 당하는 고통과 봄이가 에이즈에 걸려 받는 편견,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미스터리의 상황을 어느 순간부터 내 일처럼 느끼게 되었다.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을 의도하는 건 어떤 드라마나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이 드라마는 거기에 독특한 화법을 개입시킨다. 그것은 전혀 고맙지 않은 상황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캐릭터에 몰입한 시청자는, 분명 캐릭터가 분노해야할 상황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몰입이 깨지는 체험을 갖게 된다. 캐릭터와 시청자간의 감정에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간극이 주는 짧은 이질감은 곧 캐릭터에 대한 감동으로(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하는 경외감) 이어짐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생각은 드라마를 그저 재미거리로만 취급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물론 드라마는 분명 재미거리임이 맞지만, 그것으로만 취급될 때 괴물처럼 얼굴을 내미는 것이 시청률 지상주의와 논란드라마라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드라마가 드라마일 뿐이 아니라고 여길 때 거기서 적어도 우리는 괜찮은 드라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특별한 체험의 시간을 준 ‘고맙습니다’는 종영에 있어서도 ‘중독’이니 ‘금단현상’이니 하는 것을 뛰어넘어 ‘긴 여운’으로 오래도록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너무 잘 짜여진 ‘마왕’ vs. 너무 흐트러진 ‘히트’

‘하얀거탑’을 통해 미드와 같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 시청자들이 그 연장선 상에서 기대했던 드라마는 ‘마왕’과 ‘히트’였다. 하지만 이 두 유망주의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마왕’은 그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연일 최저시청률을 경신하고 있고, ‘히트’는 수사물로서의 맥을 잡지 못하면서 시청률 추락을 맞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잘 짜여진 드라마, ‘마왕’
‘마왕’을 보고 있으면 이 드라마가 김지우라는 작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구성력에 있어서 이 정도면 거의 퍼즐 맞추기에 가까운데, 그 속에 인물들을 살려놓고 양파 껍질 벗기듯 조금씩 속살을 감질나게 보여주는 전개방식은 이것이 과연 드라마에서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미드를 한 편이라도 본 경험이 있다면 ‘마왕’의 전개방식이 그다지 낯설다고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작품에 수십 명의 작가들이 달라붙어 만들어내는 미드와 ‘마왕’은 그 대본의 제작환경이 백 프로 다르다.

미드의 경우, 에피소드 하나를 만드는 데 투여되는 인원은 최소 10명에서 1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메인 작가는 한 명이지만 공동 집필을 하는 경우 공동작가(co-writer)가 있고, 여기에 그들을 돕는 여러 보조작가(staff writer)들이 붙는다. 작가들의 분야도 각자 달라서 아이디어만을 내는 작가(creator)가 있고 스토리를 구성하는 스토리 구성작가(story editor)들, 그리고 대본만을 집필하는 작가(teleplay)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어찌 보면 이 정도 작가군이 투입되는 드라마가 치밀한 완성도로 미드 폐인들의 혼을 쏙 빼는 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왕’의 작가는 김지우 혼자다. 그는 12년 전의 한 사건(혹은 사고)에서부터 비롯된 처절한 복수극을 혼자 생각해냈고, 수많은 인물들의 캐릭터와 캐릭터들이 가진 스토리를 혼자 만들어냈으며,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사건들에 혼자 질서를 부여했고, 그 복수극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주제의식도 스스로 세웠다. 실로 놀랍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역량을 통해 김지우 작가는 초라한 우리네 드라마 작가 시스템에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은 ‘마왕’을 좀더 많은 대중들이 즐기기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마왕’의 도전의식은 가치 있고 이 변화의 기로에 선 우리 드라마에서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사명이지만, ‘마왕’은 그 지점을 넘어서 너무 멀리 앞서가고 있다. ‘마왕’은 지금 미드에서도 좀체 시도하지 않는 20부 연작 추리극을 시도하고 있다. 미드가 그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도 맥을 놓치지 않는 것은 그 한 회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는 에피소드 형식을 안전망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왕’ 역시 그 형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마왕’의 이야기는 어느 한 편, 아니 어느 한 신, 심지어는 그저 휙 지나가 버린 소품 하나까지 기억해두지 않으면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짜여져’있다. 시청률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매니아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지만 중간에서라도 보고 싶은 시청자는 처음부터 챙겨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것이다. ‘마왕’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 짜여져 있어’ 시청자들을 허락하지 않는 드라마가 되었다.

너무 흐트러져 있는 드라마, ‘히트’
반면 ‘히트’는 너무 허술한 구성과 스토리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배반한 드라마가 되었다. ‘히트’의 문제는 그것이 ‘멜로가 있어서’ 라든가, ‘리얼하지 않은 연기’라는 식의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성과 스토리, 캐릭터 등이 맞물려 생긴 총체적인 문제이다. ‘마왕’이 너무 에피소드별로 드라마를 자르지 않아 시청자들의 진입장벽을 높였던 것에 반해, ‘히트’는 너무 에피소드별로 잘라내면서 맨숭맨숭한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미드가 가진 에피소드들이 시즌 드라마로서 힘을 받는 이유는 그 잘려진 에피소드들이 다음 에피소드와 맞물려 차츰 드라마의 긴장도를 높여간다는데 있다. 그러나 ‘히트’의 에피소드들 간에는 차츰 발전되어 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 접착력조차 약하게 느껴진다.

‘히트’가 이렇게 된 데는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캐릭터에 너무 천착한 결과이다. ‘히트’는 스토리와 구성 등에 많은 허점을 드러내지만 보기 드문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갖고 있는 ‘이상한’ 드라마이다. 보통의 경우 스토리란 캐릭터(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그것이 차츰 미궁에 빠지기도 하고 해결을 향해 나가기도 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마련인데, ‘히트’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극적인 긴장감을 일으킬만한 스토리가 부족하다.

강력 사건의 발생이 히트 팀 캐릭터들과 함께 벌어진다(장형사와 홍콩마약밀매 사건, 조과장과 최반장이 얽힌 증거물 도난 사건 등등)는 구조 역시 별로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사건에 캐릭터들을 포진시켜 좀더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려 했던 시도는 캐릭터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했을 지는 몰라도,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좀더 디테일한 사건 전개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홍콩 사건을 예로 들면, 어느 순간 사건은 사라지고 장형사(최일화)와 그 딸의 애틋한 정으로 흘러가면서 급작스럽게 맥이 풀려버리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형사물로서 사건이 우선이 되고 그 사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캐릭터들이 부각되어야 하는 기본이 지켜지지 않은 탓이다. 좀더 치밀한 스토리와 에피소드 간의 강력한 접착력 그리고 그것이 중첩되면서 좀더 극적 긴장감을 높였다면 ‘히트’가 가진 캐릭터들은 좀더 사건 속에서 부각되었을 것이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현재 드라마의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있는 14년 전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는 이전 에피소드와는 다르게 치밀한 면모가 있다. 초반에 있었던 사족 같은 에피소드들 대신 바로 이 메인 에피소드에 천착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마왕’은 너무 잘 짜여져 있어서, ‘히트’는 너무 흐트러져 있어서 결과적으로 시청률의 추락을 만들었다. 하지만 과거의 드라마와 앞으로 변화될 미래의 드라마 사이, 과도기에 걸쳐 있는 이들 드라마들의 시도는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의미가 있다. 시행착오들이 좀더 탄탄한 성공의 길을 알려준다는 면에서 어쩌면 그것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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