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혁이란 환타지를 위해 버려진 캐릭터들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 끝에 외과과장이 된 장준혁(김명민)의 무한질주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졌던 최도영(이선균). 그러나 최도영이란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장준혁의 까칠한 눈빛 속에 가려져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소송을 포기하려는 고 권순일씨의 처를 막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갈 때만해도, 또 거기서 장준혁에게 “왜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나도 내 소신대로 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법정에 선 최도영의 모습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란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최도영이란 캐릭터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기대감 → 실망감’은 이번만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 초기부터 내내 있어온 것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명민의 카리스마 연기가 더 돋보여서가 아니다. 한 회 분량에서 거의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김명민과 잠깐 잠깐씩 등장하는 이선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연기력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것은 캐릭터의 성격이라든지 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연기자 같은 캐릭터 내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캐릭터의 비중을 설계할 때부터 의도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최도영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 설정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라는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드라마가 캐릭터를 그려내는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모든 카메라의 시선은 장준혁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장준혁이 그냥 주인공이 아닌 ‘악역을 해야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캐릭터의 경우, 그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되었나가 드라마 전편에 깔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악마적인 캐릭터 중간에 간간이 인간적인 고뇌 같은 모습을 끼워 넣어 자신이 이런 이전투구를 하는 것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대부분 범법자가 주인공인 드라마, 영화에서 캐릭터를 세우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니 이주완(이정길) 과장과의 초기 대결구도는 장준혁의 이런 캐릭터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설정이다. 장준혁은 여러 번 “내가 왜 이렇게 외과과장이 되려고 하는 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드라마는 가끔 시골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하면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 속시원한 이유를 말해주진 않는다. 막연히 배경도 돈도 없는 집에서 어렵게 자라 성공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인상만을 줄뿐이다. 그러나 3대째 의사집안인 이주완이 장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설정이 엮이자 이 막연한 설정은 힘을 발휘한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장준혁의 성공을 위한 무한질주에 동참하게 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비호감으로 만드는 것들
그런데 반면 최도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었을까. 장준혁이 수술대 앞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하고 공격적인 수술을 하고 있을 때, 최도영은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초반 드라마에서 최도영이 맡은 최대의 역할은 소아암 환자 ‘진주’를 돌보는 일이었다. ‘하얀거탑’에서 환자가 보이지 않은 것은 보다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캐릭터였던 최도영을 초반부에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진주에게만 집착하는 최도영이란 의사 캐릭터는 비현실적이고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이런 캐릭터가 진지한 얼굴로 생명이니 뭐니 하는 ‘공자님 말씀’을 하는 모습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서 ‘선한 의사’의 캐릭터를 구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난 척하는’ 비호감 캐릭터의 면면을 형성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불리하게 만든 건 환자뿐만이 아니다. 이윤진(송선미)이란 또 다른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엮이면서 그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진짜 운동가도 아니면서 운동하는 척 하는’ 이윤진은 직업도 없고 오지랖 넓은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드라마의 한 편에서 벌어지는 숨가쁜 정치싸움이 시청자들의 두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왜 이윤진이 진주라는 환자 때문에 병원에 나오고 그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는 지는 드라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 이윤진과 최도영의 멜로가 사라졌나
게다가 드라마는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묘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하는데 이것 역시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환자 때문에’ 시간이 없어 며칠에 한 번 겨우 집에 돌아와 아내와 얘기할 시간도 없는 최도영이 전혀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윤진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법정드라마로 변신한 지금에 와서도 계속 이어진다. 왜 이윤진이 갑자기 권순일 환자의 일에 뛰어들게 되었고 지금처럼 그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하는 지는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이런 구도로 흘러갈 것이었다면 애초의 설정대로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멜로 라인을 끼워 넣었어야 옳다. 그렇다면 최도영을 쫒아다니는 이윤진이란 캐릭터에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윤진이란 캐릭터의 최초 설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인술을 펼치는 학구파 의사 최도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를 사모하게 된다. 그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있는 유부남. 이성적으론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최도영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간다.” 우리는 이윤진의 최도영에 대한 깊어만 가는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혐의는 찾을 수 있다. ‘하얀거탑’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 나온 폭발적인 반응, ‘멜로 없이도 된다’는 포지셔닝이 그 둘 간의 멜로를 막아버린 건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자 이윤진이란 캐릭터도 버려지게 되었다.

대결구도보다는 환타지에 집중하는 ‘하얀거탑’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현재 법정드라마 속에서 장준혁에 맞서는 순일 처(김도연)라는 캐릭터이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이 의료사고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그저 눈물로 호소하는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는 시청자들에게 눈물은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좀더 이성적인 대응이었다면 그녀의 캐릭터는 공감과 호감을 끌어냈을 것이다. 반면 그녀 앞에 ‘피도 눈물도 없이’ 선 장준혁이란 캐릭터는 점점 공고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런 싸움에서 누가 이긴들 그것이 드라마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만일 장준혁이 진다면 사필귀정의 의미보다는 그 캐릭터에 대한 동정심만 더 커질 것이다. 장준혁은 이겨도 이기고 져도 이긴다는 말이다.

‘하얀거탑’이 최도영이란 캐릭터에 비중을 주지 않은 이유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윤리적인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장준혁이라는 환타지를 통한 카타르시스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이다. 집안도 배경도 없는 장준혁이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 하는 모습. 거기서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한번 끝까지 가보는 것. 우리 같이 매달의 생활을 걱정하는 소시민들이 선이든 악이든 한번 미친 듯이 해보고 싶은 그 상승욕구를 드라마 속에서 풀어보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치열한 대결구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장준혁의 독주를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을 싸워 이기든지 혹은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장준혁은 계속 높은 거탑을 향해 올라간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최도영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면서 대결구도로 드라마를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속에서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권력에 대한 욕망 속에서도 ‘정말 이래도 되나’하는 자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샬롯과 글쟁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
밤이 되면 샬롯이란 이름의 거미는 여러 개의 다리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면서 거미줄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밤이면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텅 빈 거미줄 같은 화면을 글자들로 채워 넣는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글쟁이의 모습 그대로다. 샬롯이 그렇게 글자를 새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웰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를 위해서이다. 가만 두면 햄이 될 운명을 가진 웰버는 심지어 비천하기까지 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비천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거미줄이라는 빈 원고지를 가진 거미 샬롯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미줄의 두 가지 용도, 밥벌이와 창조
웰버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샬롯이듯, 또한 샬롯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웰버다. 웰버가 나타나기 전까지 샬롯이 하는 일이라곤 거미줄을 치고 포획된 먹이에서 피를 빨아먹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일지는 몰라도 ‘가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농장의 동물들은 그런 샬롯을 두려워하고 역겨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의 눈길을 던져준 것은 웰버. 웰버의 출연은 샬롯의 삶을 바꿔놓는다.

햄이 될 비천한 운명의 소유자 웰버를 위해 샬롯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 한다. 그 동안 먹고살기 위해만 쓰던 거미줄을 한 생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샬롯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부합한다. 웰버가 식용이 되지 않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즉 이 샬롯의 선택은 자신이 살아온 ‘그저 먹고사는 삶’의 부정인 동시에, 생산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세태와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네 글쟁이들의 선택과 거기서 오는 딜레마와 맞닥뜨린다.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려 선택한 길에서 결국 밥벌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글쟁이들도 자기의 거미줄을 그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먹고살기 위해 쓰는 글과 가치창조를 위해 쓰는 글. 샬롯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줄의 거미줄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초상이다.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 기적을 바라지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글은 사실 무력해 보인다. 더욱이 글보다는 돈의 가치를 더 맹신하는 사회 속에서는 글 자체도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있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애초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만만한 글쟁이들의 초심은 차라리 기적을 바라는 편이 나을 정도로 무력해진다. 샬롯이 하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밤, 농장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글자를 만든다. 그것으로 저 생산성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겠다는 것.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거미줄에 새긴 글자는 ‘Some pig(멋진 돼지)’였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구간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자들은 웰버를 앞에 놓고 연실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관심으로 웰버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잠시 뿐, 사람들은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농장의 동물들이 모여 밤새 회의를 한다. 그래서 나온 글자가 ‘Terrific(굉장하다)’. 그리고 기적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회에 나간 웰버를 위해 마지막으로 ‘Humble(겸손하다)’이란 글자를 새겨 넣는다.

여기서 이 세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멋지다’, ‘굉장하다’와 같은 자기 자랑형 문구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것은 ‘겸손하다’와 같은 자신을 낮추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겸손’같은 가치마저도 하나의 홍보성 문구로 활용되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웰버를 위해 샬롯이 쓴 ‘겸손하다’는 결코 홍보성 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성이 담긴 글자였는데 그 증거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샬롯이 쓴 문구를 보며 웰버가 말한다. “그런데 내가 저 멋진 표현에 어울리는 지 모르겠어.” 그러자 샬롯이 말한다. “바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너한테 딱 어울리는 표현이야.”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원
그런데 이런 샬롯의 노력으로 웰버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웰버의 소원은 겨울까지 살아남아 첫눈을 보는 것. 그러니 그가 얻은 것은 생존이다. 그런데 그 생존을 막는 요인은 욕망이다. 돼지 한 마리에게는 생존인 것이 그 돼지로 만든 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화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돼지를 그저 진짜 돼지로 읽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돼지와 거미와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과 동일선상의 가치로서 생명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웰버라는 돼지로 상징되는 비천한 존재와 그를 비천하게도 만들고 특별하게도 만드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생존과 욕망 사이에 서서 한 돼지의 가치를 비천함에서 특별함으로 끌어올리려는 한 거미의 노력은 이 세계의 총체적인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좀더 섬뜩한 현실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아이들 영화라고 치부할 수 없는 구석이 생긴다. 오히려 ‘샬롯의 거미줄’은 우화라는 아이들 영화의 형식을 차용해 어른들의 세계를 꼬집는 영화라 할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 손잡고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영화관에서 아이가 볼까 숨기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리가 있을까. 그저 글쟁이가 동병상련식으로 느끼는 감정과잉이라 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이 영화 속에는 있다.(www.ohmynews.com)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이범수. 그는 극중 배역인 안중근의 캐릭터 때문에 ‘버럭범수’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입만 열었다 하면 ‘버럭’ 화난 듯한 말투 때문이지만 바로 그 점이 그의 매력포인트. 한치의 긴장감도 늦출 수 없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 그의 ‘버럭’은 결국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될만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일까. 늘 굳어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얼굴에서 잠깐 동안의 미소를 보는 것은 시청자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의사로서 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어 처음 보자마자 “넌 의사할 생각도 하지마”라고 말해버렸던 봉달희(이요원 분)에게. 그러니 요즘 드라마에서 아무리 멜로가 죄라지만,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재미에 버럭범수의 사랑법을 뺄 수 있을까.

버럭범수 사랑법의 핵심은 ‘어색하다’는 것.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괜시리 늘 하던 대로 버럭대다가, 가고 나면 후회하는 그 미숙함이 오히려 순수하온다. 그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듯 하다. 그가 봉달희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남들처럼 연애감정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봉달희의 환자들에 대한 열정을 그가 목격하면서부터이다. 어쩌면 버럭범수는 그 모습에서 자신처럼 상처 입은, 그래서 의사가 되어야만 했던 또 다른 자신을 보았는 지도 모른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야 겨우 사랑을 찾을 정도니 그의 사랑법이 어색할밖에.

그래서 사랑에 어색한 그는 수동적이다. 그가 봉달희에게 하는 것은 고작, 멀리서 쳐다보거나, 환자의 처치법을 가르쳐주거나, 화를 안내거나, 그녀를 건드는 사람에게 버럭하는 정도다. 응급실로 실려온 살인용의자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봉달희에게 기껏 하는 말이, “괜찮아? 됐어 그럼.”이다. 이건 겉으로 봐서 누가 봐도 사랑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수동. 하지만 극은 극으로 통한다고 그의 마음을 미리 읽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100% 반대의 묘미를 선사한다. 표현 못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나오다가도 그의 숨겨진 아픔이나 심연 같은 것을 문득 엿보기도 하는 것이다.

버럭범수의 사랑법이 눈에 띄는 또 다른 이유는 삼각관계의 한 축이 되고 있는 이건욱(김민준 분)의 사랑법이 그와 너무나 대조를 이루기 때문. 이건욱의 사랑법은 안중근과는 정반대로 ‘매우 세련’되어 있다.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적극적이고,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게다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인내의 미학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이 능동적인 이건욱과 수동적인 안중근의 사랑법만 보아도 우리는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약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겉보기에 부드러워 보이는 이건욱은 사실은 굉장히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다. 그는 타인이라면 견뎌내기 힘들 마음의 고통(7년 간 살아온 자신의 아들이 사실은 타인의 자식이었다는 것 같은)을 웃는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버럭대기 일쑤라 강해 보이는 안중근은 사실 상처투성이로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다. 우리의 마음이 완벽해 보이는 이건욱보다 안중근에게 자꾸만 가는 이유는 버럭 이면에서 언뜻 보이는 약한 모습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버럭범수의 봉달희 사랑법이 드라마적으로 공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의사라는 직업과 잘 매칭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의사들의 사무적인 모습은 사실 안중근과 많이 닮아있다. 그 현실의 딱딱함은 그러나 드라마 속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의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의사로 살아온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딱딱한 모습으로 굳어진 의사의 얼굴 이면을 비추는 드라마 속에서 따뜻한 의사의 작은 표현에도 반하는 것이 아닐까. 버럭범수는 그 시청자들의 욕구가 제대로 투영된 캐릭터라고 보여진다.

버럭범수의 봉달희 사랑법은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또 다른 재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욕구가 반영된 의사의 사랑법이란 점에서 병원드라마와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멜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완전히 사랑에만 빠진 의사를 보는 것도 싫고, 사랑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기계 같은 의사를 보는 것도 싫다. 관건은 의사로서의 긴장감이 차츰 무장해제되어가는 과정과 수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전문직 드라마 속에서도 제대로 엮어진 멜로는 재미있다.

한류 vs 반한류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한류열풍 4년 만에 이뤄낸 1억불에 달하는 무역흑자!’, ‘올해를 신한류를 이뤄내는 해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낸 문화관광부.’ 같은 핑크빛 전망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미 한류는 끝났다’, ‘한류는 애초에 없었고 욘사마만 있었다’, ‘반한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제 한류라는 국가상표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류라는 상표에 민족주의가 붙으면서 발생하는 주변국의 ‘반한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붙은 한류라는 태극마크
박진영씨는 이후에도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통해 굳이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이름으로 태극마크를 달아야 하겠냐’며 강한 어조로 한류라는 이름 하에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을 경계했다. 그는 연예인으로 ‘우리나라 문화 알리기’보다는 ‘이웃나라와 친해지기’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이제 과거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던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자체를 알리는 데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고도의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정서를 통해 흥행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한일전’이라고 하면 제 아무리 비인기종목이라 하더라도 피끓는 감정으로 보던 스포츠경기의 흥행요소와 같다. 김진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남북이 공조해 일본에 핵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하다 할 정도이다. 물론 과거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개봉했다 실패한 ‘한반도’의 경우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에만 기대서는 자국에서도 해외에서도(이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상품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작년 한 해 TV 드라마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 사극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제작한 이들 드라마를 가지고 한류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이 드라마들은 반한류의 기류를 형성해 여타의 드라마 수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작년 한 해 우리가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달아 해외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적을 수밖에 없고 그 적은 수마저도 이런 기류 속에서 판매부진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류에 포함된 상품논리
우리나라에서 만든 문화상품에 우리의 민족적 정서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민족적 정서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낼 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컨텐츠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박진영씨가 스스로를 “애국자가 아닌 배신자”라 자칭하며 미국에서 음악을 만들 때 한국인임을 철저히 숨기며 만든 “흑인음악 속에 한국은 없었다”고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한류’라는 단어가 단지 ‘우리 문화’가 아닌 ‘우리의 문화상품’을 지칭하는 것이란 점이다. 즉 ‘한류’에는 그 안에 상품논리가 들어가 있다. 박진영씨의 글은 바로 이 상품에 대한 이야기며, 그 상품이 세워야할 전략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고’식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중문화는 절대 해외마켓에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문화컨텐츠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국내의 시장만으로는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세계 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이런 마당에 굳이 반감을 가지게 하는 상품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만일 박진영씨의 글이 이런 해외를 겨냥한 문화상품전략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칫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다. 말 그대로의 ‘국적 없는 문화’는 의도하든 하지 않든 현재 거대자본과 세계적인 유통망과 힘을 가진 소위 선진대중문화의 세계화를 공고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싫더라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해외 시장을 노리는 상품의 하나로 한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류 속에 내포된 반한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처음 한류가 태동했던 곳으로 되돌아 가볼 필요가 있다. ‘한류’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가 마구 들어오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그러므로 ‘한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들어있으며 그 자체로 ‘반한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한류가 세계적으로 흐르고 넘칠 때일수록 우리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품 마케팅으로서는 더 유리하다.

게다가 한류는 특정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저 문화종사자들이 열심히 컨텐츠를 생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여기에 어떤 목적이 가미된다면 그 때부터 컨텐츠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장경제 논리와 마찬가지다. 잘 움직이는 시장에 국가가 손을 대면 경제는 어지러워진다. IMF에 각종 사건 사고들이 빈발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한류라는 냉수는 그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한류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 자체가 문제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래도 이것을 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들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과잉된 한류’이다. 우리 스스로 한류 한류 외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조장된 결과이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우리 입으로 한류를 들먹이지 말고 좀더 차분하게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류라는 막연한 태극마크에 기대 안이하게 제작했다 실패하는 사례도 줄어들 것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성에 승부한다면 민족적인 색채를 띤다해도 특별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명성은 우리가 떠들고 다닌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타인의 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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