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공화국, ‘거침없이 하이킥’

왠만해선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도 거침없이 날아오는 웃음킥에 실실 웃다보면, 어느새 이 유쾌한 하이킥에 중독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독의 실체는? 바로 캐릭터공화국이라 할 만큼 다채로운 웃음의 개성을 지닌 폭소유발자들. 따로따로 떼어놓고 봐도 영 웃기는 캐릭터인데, 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거침없이 하이킥’, 그 속의 캐릭터에는 도대체 어떤 마력이 숨어 있는 걸까.

세대를 잇는 이 시대의 아버지, 야동+순재
이전까지 젊은 세대들에게 그는 좀 재미있는 기성세대로서의 ‘대발이 아빠’ 혹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높은 영원한 스승으로서의 ‘유의태’였다. 그러나 그가 노트북 앞에서 “야동”이라 외쳤을 때, 젊은 세대들의 가슴속으로 그는 단박에 들어갔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그의 이름과 ‘야동’이란 단어가 합쳐진 ‘야동순재’라는 검색어가 떴다. 그런데 ‘야동순재’는 전날 시트콤에 나온 에피소드를 줄여만든 단순한 단어의 결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꺼이 젊은 세대의 마음 속으로 파고든 일흔이 넘은 어르신의 표상이 되었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이후에도 그의 이름 앞에는 새로운 단어들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악플순재’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독수리타법으로 계속해서 악플을 올리는 모습에서 비롯된 호칭.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순재라는 이름 앞에 붙은 ‘야동’과 ‘악플’이란 단어다. 이 단어들은 모두 인터넷과 연관된 것으로 네티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순재라는 이름 앞에 붙어버리자 이것은 순재와 네티즌 사이에 놓여진 길게는 오십 년, 작게는 사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버린다. 이 시대의 아버지의 초상, 이순재라는 놀라운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후에도 이순재라는 캐릭터는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이며 자애롭기까지 해 도무지 이빨이 들어가지 않을 기성세대의 모습을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그걸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방송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굴욕을 당하는 순재, 나문희에게서 S라인을 느끼는 순재, 멋진 골을 넣고 골 세레모니를 통해 나문희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순재의 모습은 우리가 아버지는 권위적일 거라는 피상적인 편견을 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어르신이 솔선수범해서 마음을 열어주자 그 속으로 들어온 다채로운 캐릭터들은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집살이하는 시어머니 애교+문희
이 시대의 진정한 연기자 나문희. 다양한 스펙트럼의 어머니 연기로 정평이 난 그녀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와서는 ‘시집살이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멋대가리 없는 남편과 제 주장만 펼치는 며느리 사이에서 제 영역이 불분명해진 요즘의 시어머니들을 대변한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세상 놀랄 것 없는 나이의 그녀. 그러나 찬찬히 면면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수줍은 소녀 티가 묻어난다. 캐릭터 상 아들 준하와 함께 ‘괴력’과 ‘식탐’으로 한 세트를 이루는 그녀에게서 언뜻 보이는 이런 면모는 ‘애교문희’란 호칭을 얻은 에피소드에서 극대화된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줍기만 한 그녀가 자신의 나이 값을 하기 위해 취하는 의식적인 행동은 무뚝뚝함.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애교’라는 닭살을 떨어보기로 한 것. 그것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의 대변신이지만 한편으로는 앞치마에 휴대폰을 목에 건 채 늘 부엌떼기로 취급받는 자신에 대한 작은 반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조그마한 일에서 기쁨을 찾아낸다. 자신을 왕 무시하는 며느리 앞에서 늘 입을 삐죽대다가도 며느리의 작은 실수에 쾌재를 부른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그녀의 작은 기쁨에 동참한다.

그런데 그녀의 ‘작은 기쁨’에는 묘한 페이소스가 숨어있다. 유난히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는 슬프다. 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통닭 몇 마리에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왠지 모를 가슴저림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마치 엄청난 힘을 가진 거인이 그 힘을 모두 타인을 위해 쏟아 부은 후,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습. 그것은 바로 생각하면 유쾌하게 웃다가도 뭉클해지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아귀가 되어버린 고개 숙인 가장, 식신+준하
그가 바보라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건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 그는 오히려 기꺼이 웃음 없는 사회에 웃음을 주기 위해 바보가 된 천재다. 바보가 주목을 받는 건 그만큼 사회가 각박하고 힘들다는 반증이다. 너도나도 잘난 사회에서 그가 늘 도맡는 역할은 어눌하고 바보 같은 캐릭터. 준하는 그 같은 캐릭터로 오히려 사람들에게 때론 진한 공감을 때론 희망을 선사한다.

늘 손에 무언가 먹을 걸 들고 있는 그를 보며 순재는 “동물이냐 사람이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왜 버젓한 가장이 빈둥빈둥 집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늘 먹을 것만 찾는 동물이 되었는가”하는 사회적인 맥락으로 읽힌다. 그는 마치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 저 사회에 대해 반항하는 것 같다.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닌데도 밥벌이를 못한다는 주변의 질책에 대해 오히려 먹을 것만 찾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의 식탐은 못 먹어 죽은 귀신이 아귀로 태어나는 것처럼 어쩌면 밥벌이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아귀가 되어버린 고개 숙인 가장의 가족을 향한 마음은 애틋하기만 하다. 아내인 해미와 벌이는 닭살 애정행각은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란 맥락과도 맞닿아있지만 또 한편으론 부부사이에도 쿨하기만한 세태에 가슴 뭉클한 따뜻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늘 인상을 쓰고 앉아 무언가를 먹으며 투덜대고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는 괴력의 사나이. 그는 어머니인 나문희와 그대로 짝을 이룬다. 그래서 이 시트콤의 가장 억압받는 두 존재는 문희와 준하가 된다. 그래서일까. 그 둘이 함께 식탐에 빠지는 장면에서 늘 배꼽잡고 웃다가도 애잔한 감정이 남는 것은.

먼저 OK할 수 있는 그녀, OK+해미
‘하늘이시여’에서 자신의 딸에게조차 시어머니 역할을 했던 해미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와서는 자신의 시어머니에게조차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다만 확연히 달라진 것은 ‘하늘이시여’의 방식이 부정(NO)의 방식이었다면, ‘거침없이 하이킥’의 방식은 긍정(OK)의 방식이라는 것. 당당한 이 시대의 며느리들이라면 해미의 OK 방식에 마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거침없는 OK가 매력적인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워킹우먼이라면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처럼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는 자신이었으면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 해미 캐릭터의 핵심은 바로 ‘능력’이다. 그녀는 사회생활에서도 가정사에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여성의 표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건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닐 것.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이 시대의 여성상을 대변하는 동시에 여성들이 희구하는 하나의 환타지가 된다.

“남이 당신에게 OK라 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OK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그녀의 대사 속에는 누구에게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적극적이고 심지어는 공격적으로 느껴져 사육해미가 되기도 하는 그녀의 캐릭터는 그녀 주변에 있는 소심한 캐릭터들(가장 중심에 있는 나문희와 준하 같은)과 명쾌한 대비를 이루며 웃음을 유발한다. 나문희와 준하 같은 소심한 우리네 소시민들에게 늘 시원시원한 해답을 내주는 그녀가 소중하게만 느껴지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까칠남, 까칠+민용
요즘은 까칠한 남자가 뜬다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에도 ‘까칠’하면 빠지지 않는 이민용이란 캐릭터가 있다. 까칠남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과거의 이상적인 남성상으로서의 로맨티스트가 이제는 느끼남이 되어버렸기 때문. 즉 까칠한 건 참아도 느끼한 건 못 참는다. 물론 드라마 캐릭터로서(아마 실제는 다를 지도 모른다) 말이다. 까칠남의 매력은 늘 까칠하다가도 어느 순간 잠깐 보이는 부드러움에 있다. 본래는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무언가 상처 같은 것이 그를 까칠하게 무장시킨 탓이다. 이민용은 이 복합적인 까칠남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까칠해진 이유? 그건 아마도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이혼남에다 아이까지 갖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 정도 되면 이제 현실의 각박함은 이미 벌써부터 겪어왔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젊은 나이가 갖는 풋풋함 역시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젊은 나이에 젊음을 누리지 못하게 된 상황을 자초한 그는 지금 자신을 벌주는 중이거나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잔뜩 웅크리는 중이다. 어찌 보면 배배 꼬여버린 성격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밖에 없다. 바로 꽈당민정이다.

울면서 웃기는 그녀, 꽈당+민정
그녀는 왜 아무 이유 없이 ‘꽈당’ 넘어지는 걸까. 그 행위 자체는 바보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미지가 민정과 연결되자 거기에는 순수함과 더불어 묘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구석이 생긴다. 작고 약하기만 할 것 같은 그녀. 하지만 그녀의 솔직함은 그대로 까칠한 민용의 마음에 꽂혀버린다. 그녀는 늘 진지하다. 좋다면 “정말 좋아요”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아이들을 꽉 잡기 위해 단호한 목소리로 사랑의 매를 들고 호통을 친다. 하지만 진지한 그녀가 하는 행동은 늘 어색하다. 이 마음을 몸이 따라가지 않는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시킨다.

그렇지만 그 어색함은 기분 좋은 어색함이다. 마치 어린이가 어른 흉내를 내다 들킨 것 같은 유쾌함. 그래서 그녀가 웃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웃게 된다. 또 그녀가 진지해질 때도 우리는 웃게 된다. 심지어 때로는 그녀가 울 때조차 우리는 웃음을 짓게 되는데 그것 역시 그 울음 속에서 과장된 응석의 귀여움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사정없이 귀여운 그녀. 넘어질 때도, 화를 낼 때도, 심지어는 울 때조차도.

모성애로 돌아온 철없는 이혼녀, 신지
신지란 극중 캐릭터는 억울하다. 그것은 최초 설정에서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가족의 모습을 구성하다 보니, 신지란 캐릭터가 ‘자신의 꿈을 찾아’ 철없이 이혼하고 러시아로 떠나는 설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러시아에서 얻은 것은 결국 사기. 그리고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서 먼저 여타의 캐릭터와 달리 신지는 진지함이 사라졌다.

여기에 돌아온 이혼녀가 이제 막 러브라인을 만들어가는 민용과 민정 사이에 끼어 삼각관계를 이루자 캐릭터에 대한 호감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지란 신인연기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애초 캐릭터 설정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지는 러브라인에서 빠져나와 적극적으로 민용과 민정을 밀어주는 조력자가 되면서 캐릭터에 대한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 또한 아무 대사는 없지만 늘 온 가족을 울리고 웃기는 아기, 준이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준이를 통해 신지는 철없는 이혼녀에서 모성애로 귀환하고 있다.

톰과 제리, 이윤호와 이민호
우리는 이윤호와 이민호, 이 두 캐릭터를 보면서 좀 헷갈리게 된다. 겉으로 볼 때 전교 꼴등에 오토바이를 몰지 않나,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리고, 툭하면 자습시간에 도망치는 윤호는 전형적인 꼴통이다. 반면 늘 일등에, 탁월한 언어능력과 논리력, 심지어는 여자친구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민호는 모범생으로 보인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닌 속까지 이 두 캐릭터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본 시청자들이라면 이 전형적인 사고의 틀에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모범생으로만 보이는 이민호는 사실 그 얄미울 정도의 똑똑함으로 철저히 이득만을 챙기는 인물이다. 청소년으로서의 풋풋함보다는 일찍 어른의 세계에 도달한 캐릭터. 그래서 그는 오히려 꼴통으로 보인다. 반면 완소윤호라는 호칭을 얻고 있는 윤호는 거칠고 때론 모자란 듯하지만 정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인물. 그런데 재미있는 건 힘으로는 형인 민호를 동생 윤호가 제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전형적인 톰과 제리의 재미가 이어진다. 힘은 세지만 어리숙해 매일 당하면서 “억울해”를 연발하는 윤호는 톰의 역할을, 힘은 약해도 비상한 머리를 굴려 윤호를 골탕먹이는 민호는 제리의 역할이다.

하지만 때론 제리의 영리함이 바보스러움을 만들기도 한다. 설익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일약 ‘카리스마민호’란 호칭을 얻는 민호를 윤호를 위시한 가족들은 보기 좋게 한방 먹인다. 그래서일까. 공부만 잘했지 다른 방면에는 영 무지한 민호의 모습을 보면서 대학입시 교육의 희생자로서 윤호뿐만 아니라 민호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가족보다 가족다운 그, 김 범
가족 바깥에 존재하지만 더 가족 같은 인물이 있다. 그는 신비롭기까지 한 김 범이란 캐릭터. 민호와 단짝을 이뤄 거의 매일 이 가족들 주위를 배회한다. 식신준하보다 민호네 냉장고 사정에 더 정통하고, 애교문희보다 더 가족사에 민감하다. 그러니 하숙범이란 호칭으로 불릴만하다. 그가 하숙범이라 불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김 범이란 캐릭터가 그저 자주 놀러오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캐릭터가 배신범으로 불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이 캐릭터에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만큼 가족의 결속이 약해져만 가는 시대에 가족들보다 더 가족 같은 김 범의 존재 때문이다. 민호의 가족들이 김 범을 배신범으로 놀리는 장면들에서 ‘이건 너무 한다’싶은 마음이 들다가 그가 눈물을 흘리며 “그래요 전 가족은 아니에요. 하지만 단 한번도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모를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하숙생’이란 음악이 흘러나오며 리어카에 민호네 집에서 나온 자신의 물건을 싣고 떠나가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지면서도 동시에 각박해진 현실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진지한 캐릭터들, 그 조합이 유발하는 웃음
이상에서 본 것처럼 ‘거침없이 하이킥’의 캐릭터들은 그저 희화화된 캐릭터로만 보기 어렵다. 그들은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틀 안에서 진지하다. 그들은 억지로 웃기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특정 성격으로 극대화된 캐릭터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면서이다. 캐릭터들의 수로 미루어보면 그 조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웃음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시트콤의 성공이 결국 그만큼 생산된 캐릭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보기만 해도 공감이 가고 웃음이 터지는 캐릭터들은 중요한 성공의 기반이다. 이것은 캐릭터 조합의 수를 1:1, 1:2, 2:2, 2:3…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시트콤은 지금까지 그 재미의 반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울한 시대, 불륜 코드까지 시청률이란 명목으로 방영되는 저녁 시간대, 가족이 둘러앉아 유쾌한 웃음을 웃게 해준 ‘거침없이 하이킥’의 롱런을 기대하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 캐릭터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웃음들
▶ 야동순재 + 윤호민호 : 노트북을 사기 위한 윤호민호의 거짓말에 속은 순재가 노트북 앞에서 ‘야동’을 외치는 이야기.
▶ 순재 + 애교문희 : 모임에서 자신과 달리 애교를 떠는 여자(김애경)를 본 문희가 순재 앞에서 애교를 떨기 시작하는 이야기.
▶ 식신준하 + 문희 : 문희의 먹는 양이 줄자 울면서 “왜 밥이 줄어!”하고 준하가 오열하는 이야기.
▶ 순재 + 식신준하 : 늘 식충이로 순재의 주식만 날리던 준하가 갑자기 몇 일동안 계속 상한가를 치다가 결국 작전주로 밝혀지는 이야기.
▶ OK해미 + 까칠민용 :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해미를 호시탐탐 노리던 민용이 해미의 실수(변기물이 막힘)를 찍기 위해 달리는 이야기.
▶ 까칠민용 + 꽈당민정 : 학생들에게 매일 당하기만 하는 민정에게 민용이 학생들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지만 영 안 되는 민정의 이야기.
▶ 순재가족 + 배신범 : 민호의 여자친구 유미를 꼬드겼다는 사실로 순재가족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범이가 민호네 집에서 이삿짐만큼의 자기 짐을 챙겨 떠나는 이야기.
▶ 순재 + 준하 + 민용 + 윤호 + 민호 + 범 : 순재에게 쫓겨 민용의 옥탑방으로 들어간 그들이 오히려 거기 갇히는 이야기
▶ 이외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

역사와 재미 사이에 선 퓨전사극

‘드디어 ‘주몽’이 막을 내렸다. 35주 연속 주간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시청률 50% 넘겨 또 한 편의 국민드라마가 된 ‘주몽’. 그러나 ‘주몽’은 그런 성공 이면에 다양한 숙제들을 남겼다. 그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다.

‘주몽’만큼 퓨전사극이 가진 장점들을 잘 활용한 드라마가 있을까. 과거 ‘다모’, ‘상도’, ‘허준’, ‘해신’ 등에서 그 새로운 사극의 묘미를 맛보게 해주었던 퓨전사극은 ‘주몽’에 와서 그 정점을 이룬다. 이것은 퓨전사극의 중흥을 이룬 최완규(허준, 상도), 정형수(상도, 다모), 정진옥(해신)이란 작가들이 ‘주몽’이란 한 작품에 모두 모여있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주몽’은 이들 작품들의 요소들, 예를 들면 ‘상도’의 상단 이야기, ‘해신’의 해적이야기 같은 유사한 소재들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소재들은 마치 우리가 환타지 소설하면 알아야될 코드들(엘프나 골렘 같은 종족이나 그들의 특성 같은)처럼 이제 퓨전사극의 코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사극하면 당연히 퓨전사극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몽’ 마지막 회, 한나라군과 벌이는 요동벌 전투에서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라 황자경에게 칼을 내리치는 장면은 과거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장면이었다. 갑자기 환타지나 무협지가 된 듯한 그 장면을 그러나 이제 시청자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주몽’이란 작품 속에 무수히 나타난다. 비금선 신녀의 출현이나 주몽을 저주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부여의 마우령 신녀가 번개에 맞아 죽는다는 설정 같은 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사극의 틀을 너무 벗어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사극을 표방하는 작품 속에서 재미를 위해 진지함을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주몽’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최근의 ‘연개소문’을 보면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기를 끌어 모아 태연히 불을 뚫고 나오는 연개소문의 모습이 등장한다. ‘주몽’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과장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대조영’은 그나마 진지한 사극의 틀을 온전히 유지하려 애쓰는 작품으로 보인다.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의 ‘퓨전’은 어쩌면 당연한 대세인지도 모른다. 무협, 환타지, 게임 등으로 달라진 시청자들의 마인드는 오히려 퓨전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확실한 ‘퓨전’을 보여준 ‘주몽’은 재미있다. 우리가 신화와 역사를 통해 보았던 무표정한 인물들은 드라마로 퓨전되면서 톡톡 튀는 개성적인 인물로 재탄생되었다.

주몽, 소서노, 금와, 대소, 유화부인, 오이, 마리, 협보 등등, 이제는 역사서를 보면서 바로 이 수많은 캐릭터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엮어내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은 당대 주몽과 유민들처럼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주몽이 한나라를 몰아내고 하나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끝없이 채널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잦은 완성도에 대한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청률과 논란의 상관관계는 퓨전사극이 가진 재미와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몽’이 처음 직면한 문제는 역시 퓨전사극의 가장 큰 문제인 역사고증 논란이다. 우리의 눈을 화려하게 사로잡은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중국풍이며 건축물도 조선시대 양식이라는 점. 철기라는 게임의 레벨적 장치로 사극 전체의 재미를 끌어낸 드라마 도입부의 설정, 즉 한나라의 철기문명에 멸망한 고조선의 설정 역시 거짓이라는 점. 퓨전사극으로서 인물간의 멜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설정된 주몽과 소서노, 예씨 부인의 삼각관계 역시 지나친 설정이라는 점 등이 그것.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왜곡이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를 지나치게 대결구도로 만들었다는 것은 고구려 건국이라는 이 드라마의 목표를 위해 부여라는 역사를 희생시켰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부여는 고구려를 잉태한 모(母)국가 역할을 했고, 또한 온조가 세운 백제도 성왕 시절 수도를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을 정도였다. 부여의 부정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지나친 것이라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주몽’이 최초의 고구려사극이라는 점에서 그 부정적인 영향은 대내외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스케일 문제와 환타지 역시 퓨전사극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일 정통사극을 주창했다면 고작 십수 명의 별동대로 수만의 한나라군과 맞서는 장면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비금선 신녀가 등장하면서 불거진 ‘신물3종세트’논란은 ‘주몽’이 가려던 환타지사극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후 논란이 점점 거세지자 후에는 결국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신물에 대한 이야기는 ‘주몽’의 목적이 점점 시청률쪽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에게 사상 유례 없는 주인공 없는 사극을 2회에 걸쳐보게 만들었다.

이런 시청률 지상주의는 결국 퓨전사극이 가진 함정이기도 하다. 사극에서 역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재미가 중심이 되자 결국은 작품성보다는 시청률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주몽’은 우리에게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극임에는 틀림없다. 거기에는 퓨전사극이 갖는 재미의 요소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재미라는 것 때문에 모처럼 나온 고구려사가 왜곡되고 재단된 것 또한 사실이다. 드디어 ‘주몽’은 끝났으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역사 자체도 재미거리로 변형시키는 강력한 퓨전사극의 맛을 보여준 ‘주몽’은 이후의 사극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냐 재미냐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퓨전사극의 숙제다.

다수는 현실적이고 소수는 비현실적인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은 최소한 ‘하얀거탑’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쏟아지는 의견을 보면 캐릭터에 대한 현실성 논란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하기 때문. 그 논란의 중심에 선 두 캐릭터가 있다. 이른바 내부고발자로 나선 최도영(이선균)과 염동일(기태영)이 그들. 선악의 차원을 넘어서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장준혁(김명민)을 필두로 한 여타의 캐릭터들에 비해, 이들의 선택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정 비현실적인 캐릭터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들은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어찌 보면 더 현실을 제대로 말해주는 캐릭터라고 보여진다. 모두 권력과 돈을 향해 움직이는 조직 속에서 그렇지 않은 캐릭터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조직 속에서 어떤 선택의 순간들을 매번 경험하지만 조직 모두의 선택이 같을 수는 없다. 장준혁이 조직의 논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선택을 했다고 해서 더 현실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최도영과 염동일이 소수자들이 하는 선택을 했다고 해서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명인대 외과와 군대의 공통점
‘하얀거탑’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명인대 외과와 군대의 공통점. 첫째, 생과 사가 오가는 피 말리는 상황에 있다. 둘째, 상명하달. 이견은 용납되지 않는다. 셋째, 전쟁이 벌어지면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이겨야 한다. 넷째, 조직의 꼭지점에 있는 몇몇을 위해 조직원들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 그것이 결국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다섯째, 부하직원의 희생(도덕적인 희생을 포함)에는 반드시 미래라는 보장이 따른다. 여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포기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소수자, 속되게 말해 ‘골통’들이 존재한다.

그 소수자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 대가로 오는 것은 처절한 보복이다. 염동일이 그처럼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다. 조직으로부터의 따돌림과 징계, 부적응자라는 낙인은 사회생활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두려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양심선언’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양심을 저버림으로 해서 스스로 겪을 심적 고통이, 조직이 가할 고통보다 더 앞서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준혁이 최도영의 집에 숨어있는 염동일을 찾아와 하는 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랬냐”는 장준혁의 질문에 염동일은 “힘들었어요! 마음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라고 말한다. 그러자 장준혁은 역시 조직의 두려움을 보여주어 염동일을 회유하려 한다. “마지막 기회야. 의사 그만 할래?”라고 되묻는 것이다. 장준혁은 돌아서 나오며 마지막까지 “염동일 가자!”는 명령 투의 말로 저 조직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지금 제 모습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라 말하는 염동일은 조직의 두려움을 넘어서 양심선언을 하는 이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양심선언을 한 소수자라는 문제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양심선언을 하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2007년 1월 한국일보에서 발표한 공익제보자 20인의 전화 인터뷰 결과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제보자 중 90%가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중 60%는 심지어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라 답했다. 그 이유는 제보를 통해 당한 집단 따돌림, 징계와 해고, 오명 씌우기, 공갈 협박 등, 조직의 가혹행위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양심선언을 한 이들에게 박수를 쳐주기보다는 오히려 비난을 가했다는 것.

최도영과 염동일이란 캐릭터에 대한 비현실 논란은 바로 이점에서 기화한 것이 아닐까. 문제는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게 아니고, 그들이 ‘양심선언을 한 소수자’라서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골통’이라 부르는 그들 말이다. 이 점을 뒤집어서 보면 왜 그다지도 장준혁이란 캐릭터가 ‘대단히 현실적’이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장준혁, 그는 바로 조직 속에서 양심보다는 현실을 선택하면서 더러워도 버텨야 하는 대다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준혁이 잘못됐고 최도영과 염동일이 옳은 일을 한 것이라는 것에 이견을 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직을 경험했고 그 쓴맛과 단맛을 알고 있다. 소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장준혁이 했던 것과 유사한 선택들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끔씩 최도영과 염동일 같은 사람들이 조직에 나타난다. 그들은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모두 암묵적인 동의로 행해져왔던 다수의 비양심적 선택들에 대해서 그들은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러니 다수의 시선이 고울 리가.

비현실적으로 보고 싶은 그들
최도영과 염동일이란 캐릭터에 쏟아지는 비현실 논란은 바로 이 다수가 내부고발자를 목격했을 때 벌어지는 양상과 유사하다. 우리가 그들 캐릭터를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속내에는 ‘비현실적으로 보고싶은’ 마음이 자리한다. 이것은 어쩌면 시청자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른다. 좀더 리얼하게 현실적으로 공감할만한 캐릭터를 그려내기 위해서 장준혁을 전면에 배치하고 최도영의 비중을 낮춘 것은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의 이런 심리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닐까.

드라마는 때론 ‘현실’보다는 ‘현실이었으면 하는’ 것을 극화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이 실제 현실이건 아니건, 장준혁은 바로 드라마 속에서 현실이었으면 하는 캐릭터였던 것이고, 최도영과 염동일은 그 반대였을 뿐이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캐릭터라고 해서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하얀거탑’의 캐릭터 현실성 논란은 우리사회의 다수와 소수, 조직의 동조자와 내부고발자를 보는 시선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드라마에 부는 전문성과 오다쿠적 감수성의 요구

최근 들어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요즘의 열기는 수면 위로 올라와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이유다. 한때는 ‘한류’라는 태극마크에 우쭐하던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갑자기 미드, 일드가 부상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것은 한류의 ‘한 때 부흥’에 들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은 우리네 드라마의 진화 속도가, 오히려 한류로 드라마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시청자들의 드라마를 보는 높은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 데 있다.

언제부턴가 시청자들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공식을 꿰뚫고 있으면서 그 공식에 딱딱 맞게 무한 생산되는 드라마들을 외면하고 있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이런 현상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 ‘멜로 드라마’의 몰락을 불러왔다. 모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트렌디 드라마’는 구태의연한 드라마의 대명사로, ‘멜로 드라마’는 통속적인 신파로 싸잡아 인식되었던 것. 우리네 드라마가 이런 시청자들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미드와 일드는 그 시청자 욕구의 빈자를 찾아 매일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속도로 인터넷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드와 일드 어떤 점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헐리우드와 시즌제 드라마의 만남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가 헐리우드 시스템에 갇혀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헐리우드는 영화라는 장르에서 시즌제 드라마라는 장르로 새로운 부흥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회에 영화 제작비에 버금가는 투자가 이뤄지고 유명 감독들과 스타들이 포진하는 이 시즌제 드라마는 그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니다. 이 괴물은 우리가 과거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에서부터 ‘V’, ‘맥가이버’를 거쳐 ‘X파일’을 통해 익숙한 헐리우드라는 강물 아래서 꾸준히 커왔고 수면 위로 올라와서는 거침없이 세계의 시장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미드가 가진 특징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갖는 특성 중 하나인 전문성이다. 특정 직업에 대한 심도있는 접근은 미드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형사(CSI)와 의사(그레이 아나토미)는 물론이고 탈옥전문가(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전문성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박아두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한 편 한 편에 들이는 영화 수준의 완성도는 전체적인 연결성을 두고 이어지면서 파괴력을 높인다. 어느 중간에 한 편을 봐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다 자꾸 찾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즌제를 통해 무한복제되는 양상은 두렵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방송형태에 있어서도 PMP를 통한 방식을 취해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니 드라마 폐인의 탄생은 이 정도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오다쿠적 드라마의 중독성
반면 일드의 특징은 편집증적이라 할 만큼 집요한 디테일과 섬세한 감정 묘사이다. 우리네 드라마에 비해 좀 템포가 느리다거나 다이내믹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영상문법에 있어서 우리보다는 좀더 고도의 우회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리 드라마는 한 장면을 묘사할 때 A=A로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드라마는 A=B이고 B=C라는 전제를 충분히 깔아놓은 상태에서 A=C라고 말한다. 그러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더 수고를 해야 그 감정 선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언뜻 보면 답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중독성은 더 커진다. 일방적인 전달보다 강한 것은 상호 교감이라는 것. 이것이 오다쿠적인 일본 드라마의 중독성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튼튼한 문화의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로 승부하는 수많은 소설들이 또한 각종 권위 있는 상을 휩쓸고 있는 건 우리네 소설계 풍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또한 만화를 하위장르가 아닌 하나의 가치 있는 상위장르로 보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소재와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은 드라마처럼 늘 소재발굴에 목마른 장르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미드와 일드 앞에 우리 드라마는?
이러한 미드와 일드의 약진 속에서 작년 우리 드라마가 내민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작년 한 해 우리의 드라마는 사극과 논란드라마, 그리고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몇몇 실험적인 드라마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은 드라마적인 재미에 있어서 가능성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또한 민족주의적인 접근이 갖는 한계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미드와 일드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약하다. 논란드라마는 드라마의 퇴진과 시청률 지상주의가 가져온 병폐로 진화보다는 퇴화가 가까울 것이다. 그나마 몇몇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실험적 드라마들(예를 들면 ‘90일 사랑할 시간’이나 ‘환상의 커플’같은)이 겨우 우리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래서 올 들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소위 ‘전문직 드라마’다. 이것은 분명 미드와 일드의 영향이 가져온 결과다.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같은 병원드라마는 그저 화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드라마의 지반을 변동시키는 큰 동인이 되고 있다. 과거의 향수로서 드라마를 대하는 시청자들은 이들 전문직 드라마보다는 드라마의 원형에 가까운 가족드라마와 사극에 아직도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만 이들은 미래의 시청자가 아니다. 미래의 시청자들은 굳이 TV가 아니라도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드라마를 보는 세대다. 이들 세대들을 겨냥하는 더 많은 전문직 드라마의 등장이 예고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변화된 환경, 시청률에도 질적 개념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어떠한 장르든 인터넷과 연결되면 ‘매니아화’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터넷의 속성이다. 인터넷은 누구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주장을 펼치고 거기에 좀더 많이 빠져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하얀거탑’의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인터넷에서의 폭발력도 낮은 것은 아니다. 이 ‘충성도 높은 시청자’는 ‘그저 심심풀이로 보는 시청자’와는 다르게 분류해봐야 할 것이다. 시청률도 양적인 개념이 아닌 질적인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변화된 매체환경 속에서 미드와 일드가 각자 자신들이 가진 개성과 힘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무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를 촉발하게 된 우리네 드라마는 현재 퓨전 사극과 전문직 드라마들에 올인하는 느낌이 있다. 이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네 드라마에 활기를 줄 훌륭한 시도임에 틀림없으며 또한 인터넷 환경에서 자꾸만 요구되는 전문성과 오다쿠적 감수성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과거 한류드라마의 틀을 이루었던 ‘멜로드라마’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은 한류에 기대 몇몇 유명 한류스타를 내세워 성공하려했던 제작사들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들 졸속 멜로드라마들에 대한 백안시 때문에 ‘완성도 높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실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졌던 힘을 버리는 행위는 아닐까. 멜로는 드라마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전문성에 매니아적 감수성 그리고 여기에 덧대진 질 높은 멜로의 틀이 완성될 때 우리 식의 독특한 개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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