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분 토론’은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하게 될 정도로 계속되는 ‘연예인 자살’문제에 대해 다뤄졌다. 파급효과가 클 수 있는 연예인의 자살은 단지 연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하에 이뤄진 이 토론에서 쟁점으로 다뤄진 것들은, 왜 이런 자살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와 스타시스템, 무한경쟁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구조적인 문제인가였다.

논의에 의하면 연예인들을 자살로 내모는 이유 중 하나로 그 직업상 포장된 이미지와 실제의 자신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점을 들었다.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가져오는 미디어 환경 변화 또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보았을 때, 연예인이라는 특성의 한 면인 ‘상품화된 사람’의 문제로 보인다.

고인이 된 유니, 정다빈씨의 공통점으로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봐야 하는 압박감에 인기 하락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 또한 성형 논란 이후 안티팬의 악성 댓글이 급증했다는 점 등을 들었는데,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고충이기도 하다. 소위 ‘잘 나갈 때’는 자신의 상품화가 아무런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지만, 갑작스레 자신의 상품가치가 떨어질 때, 상실감은 바로 그 상품화된 자신에 대한 자조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논란에 휩싸여 악플의 공격을 받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상품은 외모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여배우에게 더 가중된다. 패널로 참여한 김일중 방송작가에 의하면 “여배우들은 연기도 해야하고, 요조숙녀 같은 사생활을 가져야 하며, 게다가 섹시함을 갖춰야 하고 또한 소녀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해야하며,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여기에 자연미인으로서의 이미지까지 가져야 하는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부역”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연예인들이 그렇게 된 데는 상품가치를 만들려는 기획사들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요구하는 상품구매자 즉 팬들 때문인가.

이것은 사실 어느 쪽의 문제가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특정직업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기획사와 상품구매자들 간에 공조에서 비롯된다. 한 패널이 말한 것처럼 “기획사의 역할은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역할”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기획사의 존재이유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연예인이라는 상품 개발과 그 개발된 상품을 활용한 이윤 창출에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지 관리 같은 연예인의 관리 부분이 들어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품으로서의 이미지 관리다.

어찌 보면 연예인의 길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본인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상품화할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상품화되는 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불암씨는 “상품화되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명감이나 본분 같은 걸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예인을 연예 상품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이미지로서의 관리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는 한 사람으로서의 관리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관리 주체가 기획사가 되든 스타 스스로가 되든, 사람으로서의 관리가 이루이지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상품의 종말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평론가이자 심리학자인 심영섭씨는 ‘우울증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연예인들이 마음놓고 상담을 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을 우리네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질환자를 괴물 보듯 하는, 그래서 정신병원을 출입하는 것을 절대로 숨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아마도 연예인들이 우울증 상담을 선뜻 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연예인 자살에 대해 다뤄진 ‘100분 토론’에서 드러나지 않게 논의된 것은 바로 상품으로서의 연예인과 인간으로서의 연예인 사이에 벌어진 대립이다. 자에 더 많은 방점이 찍혀지길 기대하며, 상대적으로 더 빈발하는 우울증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연예인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어쩌면 연예인들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우울증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줄 수도 있지 않을까.

냉정과 열정 사이에 선 의사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의사와 환자들이 엮어 가는 본격병원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 이제 본격적인 봉달희(이요원 분)의 위기국면이 시작된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일이다. 이 모든 환자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아이처럼 여기는 ‘인간적인 의사’라는 존재는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니다.

봉달희가 “의사도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 안중근(이범수 분)이 “누가 의사가 사람이래?”라고 되묻는 건, 감정이 들어간 판단은 오히려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말처럼 “너무나 살리고 싶은 환자가 있어 더 빨리 낫게 하려고 수치 이상의 항생제를 쓰면” 결국 환자는 죽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게되는 환아가 동건이다. 1차 항암치료에서 별다른 암세포의 변화를 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2차 항암치료를 강행했던 동건이는 일시적인 회복을 보이고는 결국 암세포의 급작스런 전이로 사망하게 된다. “왜 내게 희망을 주었냐”는 동건에게 “그래도 이겨낼 수 있다”고 2차 항암치료를 강권한 봉달희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개입된 판단’으로 결국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던 것.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동건의 담당의로서의 조문경(오윤아 분)의 최종 결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문경은 사망자컨퍼런스에서 자신은 이제 둔감해져 사라진, 열정을 갖고 있는 봉달희가 부러워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의사가 환자에 대한 열정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환자를 괴롭힐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설상가상으로 위급환자를 돌보다 혈관이 터져 죽게 하자 봉달희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녀는 그 두 환자의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보게 된다. 병원에 나오 그녀를 두 남자가 찾아온다. 이건욱(김민준 분)은 집 앞까지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고, 안중근은 자신만의 버럭 스타일로 봉달희를 사망자컨퍼런스에 나오게 만든다. 여기서 안중근은 봉달희에게 그 두 죽음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동건의 경우에는 봉달희의 열정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 후에 사망한 위급환자는 제대로 된 판단과 처치를 다 했지만 사망했으므로 의사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판단을 내려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열정적 인간’과 ‘냉정한 의사’를 봉달희와 안중근, 전공의와 전문의, 신참의사와 고참의사로 나누어 보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안중근의 판단을 통해 그 둘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고민하는 의사 속에 내재된 두 가지라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봉달희에게도, 안중근에게도 이 두 가지는 공존한다는 것. 이것이 공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자신의 판단이 환자를 즉각적인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남자, 이건욱의 걱정이나 버럭 남자 안중근의 채찍질 그 어느 것도 낙오자가 되는 위기에 처한 봉달희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봉달희를 낙오자의 길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환자들이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제대로 처치를 받고 있는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길을 가다 우연히 본 기흉 환자를 응급처치하는 봉달희는 다시 의사의 길로의 복귀를 예고한다.

결국 의사를 의사답게 만드는 것은 환자가 아닐까. 안타까운 환자 앞에서 인간적인 열정에 휩싸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냉정한 판단을 해야하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 봉달희는 물론 안중근의 면면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늘 환자와 전공의들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환자 옆에서 잠든 봉달희의 어깨에 아무도 모르게 옷을 덮어주는 열정을 갖고 있는 안중근에서 의사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봉달희와 안중근이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류의 의사로 보이는 이유다.

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때까지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내 일이 아닌 남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관객의 상황과 동일하다.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은 한경배 앵커가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도 지나간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괴된 상우의 부모들과,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타인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당사자들만 내 일로 여기는 사회
과학수사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잠복수사에 이골이 난 김욱중(김영철 분) 강력계 형사는 오히려 ‘그놈’에게 붙잡히고, 노반장(송영창 분)은 감으로 엉뚱한 인물들을 혐의자로 잡아 심문한다. 그들은 목소리 분석이나 필체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를 무시해버린다. 그들이 입만 열면 냉소적인 목소리로 ‘과학수사’를 떠들어대는 것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것이 실종 상태였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그러니 상우의 부모는 이 형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직접 돈 가방을 들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우의 부모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무나 많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로 시간에 맞춰 ‘접선장소’로 갈 수 없는 장면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한 건 당사자뿐이다. 타인들은 이 유명한 앵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아무도 모르게 ‘그놈’과의 약속장소로 나가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로 뛰어드는 한경배에게 사람들은 자초지종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저 “이러시면 안된다”, “여기는 교회다”라며 밖으로 내쫓는 게 일이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처음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만큼 좀더 극적인 연출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탓이라기보다는 관객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속에서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 내지는 ‘남 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은 도대체 저 평범한 부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토록 고통받아야 하고, 우리는 왜 그 고통을 남 일처럼 방관하고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요령부득의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 애타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차츰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의 아버지이자 앵커인 한경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앵커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 TV 뉴스를 잠깐 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애초에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이나 혹은 한경배가 타인의 유괴사건을 보도하던 그 때의 마음처럼 “저건 뭐야?” 하는 정도로 그 눈물을 흘리는 앵커를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 순간, ‘남 일’에서 ‘내 일’이 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한경배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하며 오열하는 동안, 영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자막을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여기서 영화는 그 안전한 스크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로 파고든다. 언제든 돈 내고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화라는 ‘남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남 일’을 ‘내 일’로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그 놈 목소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남 일’의 환타지가 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네 영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 일’로 보여지는 ‘쓸 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분들이 있었다면 최소한 이 영화는 제 가치를 해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놈 목소리’는 여전히 ‘남 일’인가. 아니면 ‘내 일’인가.

현실과 이상을 대변하는 캐릭터들

기존 삼각 사각으로 이어지는 멜로의 구조 없이도 병원드라마는 될 것인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한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 병원드라마에서 정치드라마로 그리고 이제는 법정드라마로 진화해가는 ‘하얀거탑’은 마치 전문직 드라마의 모든 실험을 해 보이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하얀거탑’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그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드라마의 캐릭터와 스토리 구조를 엮어 가는 전문직 드라마다운 솜씨이다.

장준혁에 더 방점이 찍힌 ‘하얀거탑’
우리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주목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초기에 등장한 장준혁(김명민 분)을 위시한 인물들과, 여기에 안티테제로 등장한 외과과장 이주완(이정길 분)과 그 일파들의 대결구도에서 우리는 선악의 구분이 없는 냉정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선한 인물 없이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되는 이 상황 속에서도 시청자들은 장준혁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었다. 이주완과 비교했을 때 장준혁이 그다지 선한 인물도 아니고 싸움 방식에 있어서도 정정당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그가 가진 명분 때문이다.

그는 최고의 실력자이나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현실에 시청자들은 공감했고, 그러므로 그의 승리를 기원하게 되었던 것. 그렇게 보면 초반부에서 이 드라마의 선한 인물, 정의의 인물을 대변하는 최도영(이선균 분)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은 치밀한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원작에서는 이 두 인물이 시작부분부터 어느 정도 비슷한 중량감으로 등장했던 반면, 우리의 ‘하얀거탑’에서는 장준혁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장준혁을 앞세운 극적 구성
이러한 선택은 좀더 드라마를 극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었다. 만일 초기부터 장준혁과 최도영을 치열하게 맞서게 했다면 드라마는 선악구도로 흘러가면서 장준혁에 대한 감정이입이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최도영을 살짝 후반부를 위해 밀어놓자, 장준혁이라는 선도 악도 아닌 인물의 거침없는 돌진에 더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환자들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매진하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최도영이라는 의사보다, 차라리 권력을 추구하면서 진흙탕도 마다 않는 의사 장준혁이 더 리얼한 캐릭터라는 점도 한 몫을 한다. 쉽게 말하자면 현실에서 매일 조직의 쓴맛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고매하고 이상적인 최도영의 모습은 ‘잘난 척하는 인물’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현실 vs 이상, 장준혁 vs 최도영
그러나 드라마가 ‘장준혁의 외과과장되기’라는 정치드라마를 지나 ‘장준혁이라는 오만불손한 권력과의 한판 승부’라는 법정드라마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적인 캐릭터인 최도영은 사실 리얼한 현실의 캐릭터인 장준혁의 가장 싸우기 힘든 인물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극단적인 이상과 극단적인 현실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두 인물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의료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장준혁과 그걸 캐내려는 최도영이 마주하는 순간, 시청자들이 갖는 감정이다. 분명 고전적인 드라마였다면 이 대결구도에서 권선징악의 형태로 최도영쪽에 마음이 가야 마땅할 것인데, 실제로는 자꾸 장준혁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이유는 단지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동안 계속 시청자들은 그에게 감정이입이 된 상태이며, 거기에는 권력추구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최도영이라는 선한 인물은,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된 장준혁의 권력추구를 가로막는 인물이 된다.

현실적 욕망의 패배자 vs 이상적 욕망의 승리자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은 드라마를 좀더 팽팽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욕망추구형의 장준혁에 집중시키면서 시청자의 현실적인 욕망의 환타지를 끄집어냈다. 그러니 그 전반부에서 현실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최도영이라는 인물에게 그다지 큰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이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최도영이 전면으로 나선 이상 그 역시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정의는 이긴다’는 이상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장준혁의 끝없는 욕망의 질주는 어떤 식으로든 파국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장준혁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현실적 욕망의 추구는 삶의 동인이지만 그 끝없는 욕망의 추구는 파국(죽음)이 될 때에만 끝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상에서 장준혁은 패배자가 되고 결과적으로 최도영은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드라마가 던지는 자기 성찰의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누구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현실적 욕망을 추구하는 패배자인가, 아니면 이상적 욕망을 추구하는 승리자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도대체 어느 쪽에 가까운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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