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유 감독이 부여한 ‘밤피꽃’의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톤 

밤에 피는 꽃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대본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사건전개가 펼쳐지는 그 밑그림이 분명하게 그려져야 그 위에 연출이든 연기든 힘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작가만큼 중요해진 건 연출자의 몫이다. 그건 최근작들이 멜로면 멜로, 액션이면 액션, 사극이면 사극처럼 분명한 한 장르에 머물기보다는 그 장르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건 다양한 장르들이 튀지 않게 조율하며 전체 드라마의 톤을 맞춰내는 일이다. 

 

무려 18.4%(닐슨 코리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MBC <밤에 피는 꽃>은 그 다양한 장르들의 겹침이 많은 작품이다. 낮과 밤이 다른 수절과부 조여화(이하늬)라는 인물의 설정 자체가 그렇다. 낮에는 과부로서 수절하며 살아가는 열녀의 길이 강요되는 삶을 살아가지만, 밤이 되면 복면을 하고 담을 넘어 저잣거리로 나와 홍길동 같은 의적 활동을 벌이는 인물이다. 낮이 보수적인 조선 사회를 담은 고전 사극의 장르적 색깔을 갖는다면 밤은 그 사극의 틀을 깨는 액션과 활극이 펼쳐지는 히어로물의 색깔이 펼쳐진다. 

 

또 수절과부의 이 이중적인 생활은 이 인물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면서 그 진실을 찾아나가는 추리극의 성격을 띠고, 그 사건은 선대왕의 의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시아버지 석지성(김상중)과 왕 이소(허정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극의 색깔도 갖고 있다. 물론 사건을 수사하면서 금위영 종사관 박수호(이종원)와 조여화가 엮어지는 멜로도 빠지지 않는다. 박윤학(이기우)과 연선(박세현)의 서브 멜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사극의 톤에 현대극적인 히어로물의 색깔을 얹고 그 안에 코미디와 멜로를 풀어가면서 추리극과 정치극까지 엮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울 수 없다. 만일 제대로 엮어지지 않으면 작품은 이도 저도 아닌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구슬들을 하나로 꿰어 일관된 톤을 만들어내는 것이 작품의 관건이 되는 이유다. 

 

최근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장태유 감독은 그 중심을 잡아주는 톤이 중요했다며 “코미디와 액션”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수절과부이고, 그렇게 된 것 역시 석지성이라는 인물의 무서운 계략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밤에 피는 꽃>의 색깔을 무겁고 어두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장태유 감독은 끝내 풀어지는 사건의 결말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드라마는 그래서 여러 코미디적 상황들이 전체 서사의 줄거리들 사이에 꽉 채워져 있었는데, 이를테면 조여화가 시어머니 유금옥(김미경)에 의해 가마에서 내리는 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대목이 그렇다. 과거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던 그 장면은 진지한 시어머니의 면면을 놓치지 않는 김미경의 연기와 이를 코믹하게 풀어내는 이하늬의 연기 톤이 마주하면서 생겨나는 부조화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었다. 

 

또 호판 염흥집(김형묵)이 애지중지하던 산중백호도는 드라마 속 사건들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데, 조여화가 그 그림을 우스꽝스런 그림으로 바꿔치기하는 장면이 코미디로 그려졌다. 그런데 장태유 감독은 그 바꿔치기한 그림의 우스운 톤을 살려내기 위해 직접 그 그림을 며칠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장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얼마나 코미디에 진심이었는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장태유 감독이 깔아 놓은 드라마 전체의 이 톤 위에서 이하늬는 펄펄 날았다. 장 감독 역시 자신이 바랐던 코미디와 액션의 톤을 이하늬가 제대로 소화해냄으로써 작품의 색깔이 완성됐다고 했다. 이하늬가 중심을 잡아주면서 드라마의 다양한 결들이 그 주변 인물들의 색깔에 따라 펼쳐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석지성 앞에서는 추리물과 정치극의 색깔이, 박수호 앞에서는 짝패 액션과 더불어 달달한 멜로의 색깔이 그려졌고, 다양한 주변인물들 이를테면 연선과 봉말댁(남미정), 비찬(정용주)과 황치달(김광규) 같은 인물들의 자잘한 코미디 상황극들이 채워졌다. 

 

<밤에 피는 꽃>의 성공은 그래서 좋은 대본과 연기자들의 호연과 더불어 장태유 감독의 전체 작품의 톤을 맞춰낸 균형잡힌 연출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더더욱 복합적인 장르들이 많아지는 현 추세에 이러한 감독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어떤 톤으로 중심을 잡느냐가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 되는 시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진:MBC)

세작, 매혹된 자들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는 그 자체로 빛이 난다. 무언가 삶의 무게가 전혀 느끼지지 않아 가볍고 그래서 해맑게 웃는 모습에는 누구나 가슴이 환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그 해맑은 웃음에 가슴까지 환해지는 빛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걸 바라보고 있는 어른의 무거운 시선 때문이다. 삶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충분히 경험한 어른들은 이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해맑음 앞에 순간 한없이 가벼워져 하늘 위로 떠올랐다가 금세 그만큼의 중력으로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는다. 희극 속에 비극이 느껴지는 페이소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너무나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그 이면에 깔리는 어떤 현실감 같은 것들이 환한 빛만큼 길어진 그림자로 느껴지는 것. 조정석은 바로 그 희비극이 공존하는 페이소스의 배우다. 

 

“막 비벼! ×× 비벼!” 조정석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그게 키스야?”라고 물으며 연애 쑥맥 승민이에게 진짜 키스에 대해 알려주는 납뜩이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승민의 친구로서 아주 적은 분량의 출연이었지만 그가 영화만큼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데는 특유의 잔망미로 관객들을 여지없이 빵빵 터지게 만드는 연기를 선보여서다. 그런데 그 웃음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납뜩이라는 인물이 가진 페이소스 같은 게 숨겨져 있다. 자신은 연애 고수라며 승민에게 스킨십 하는 법이나 밀당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강남보다는 강북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촌티가 묻은 인물 역시 연애를 마치 드라마나 영화로 배운 듯한 어설픔이 느껴진다. “아무 말도 않고 그냥 가. 터프하게. 절대 뒤 돌아보면 안돼. 뒷모습은 컨셉이야.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런..,” 이런 식의 연애학(?)이 그것이다. 자칭 ‘연애고수’라고 하지만 승민과 하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허당기가 그 웃음의 원천이고, 그래서 거기에서는 반어법적인 쓸쓸함이 묻어난다. 

 

2016년 ‘질투의 화신’이 조정석의 인생 캐릭터라고 불리는 이유 역시 그가 연기한 이화신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웃기지만 슬픈 페이소스를 그가 200% 납득되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 고정원(고경표)과 사랑하는 여자 표나리(공효진)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도 억지로 괜찮은 척 하는 인물이 이화신이다. 고정원과 갯벌에서 주먹다짐까지 하고 홀로 쓸쓸히 걸어가던 이화신이 목 뒤에서 꿈틀대는 낙지를 쑥 꺼내놓으며 “떨어지라고!” 화를 내는 장면은 조정석 특유의 페이소스가 묻어나며 이 웃픈 작품의 명장면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화를 내지만 어딘지 쓸쓸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게 안쓰럽게 느껴지며, 지독히 슬픈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는 힘. 조정석의 디테일한 페이소스 연기가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또 9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엑시트’ 역시 조정석의 웃픈 연기가 웃음과 눈물의 롤러코스터 같은 힘을 발휘한 작품이었다. 재난 상황이 주는 위기감과 슬픔의 비극들 속에서 조정석은 이를 살짝 뒤틀어 스릴과 웃음으로 바꿔냄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의 납뜩이가 남긴 강력한 잔상 때문에 조정석을 코미디 배우라 여기는 건 대단한 착각이고 오해이며 실례다. 사실 ‘건축학개론’이 개봉됐던 해에 조정석은 드라마 ‘더킹 투하츠’로 진지한 정극 연기를 함께 선보인 바 있다. 또 ‘녹두꽃’ 같은 사극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혁명에 참여하며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백이강이라는 인물을 무게감있게 그려낸 바 있다. 또 신원호 감독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어떤가.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빠이자 만나면 웃게 만드는 쾌활한 친구이면서 환자들 앞에서는 마음까지 돌보는 의사 이익준을 연기하지 않았던가. 물론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조정석은 특유의 코미디 연기도 선보였지만 거기에서도 특유의 쓸쓸한 페이소스 같은 걸 놓치지 않았다. 

 

이 일련의 필모그래피를 염두에 두고 보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세작, 매혹된 자들(이하 세작)’에서의 조정석이 보여주는 연기가 그간의 경험치들이 쌓인 결과물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세작’은 감정 연기가 복잡한 사극이다. 세작이라는 존재는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하는 인물인데,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세작의 감정은 복합적으로 뒤엉킬 수밖에 없다. 애초 대의적 목표는 상대를 제거하려는 것에 맞춰져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나누게 되는 감정의 교류는 그 목표를 실행하는 것을 꺼려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극에서 조정석이 연기하는 이인(이름부터가 2인 같은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이라는 인물은 왕이 되기 전 자신이 몽우라 이름 붙여준 바둑 친구 강희수(신세경)와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왕좌에 오르는 순간 자신이 더 이상 ‘필부’가 아니라며 살려달라 간청하는 그를 버린다. 3년 후 다시 살아돌아온 강희수가 이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남장여자였다는 걸 알게 된 강희수와 이인이 연정을 나누게 되면서 두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게 얽힌다. 그런데 팽팽한 대결구도와 달달한 멜로구도를 오가는 전개는 조정석이 보여주는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연기를 통해 납득이 된다. 한없이 비정한 모습을 보여줄 때는 살벌한 긴장감을 유발할 정도로 냉혹해 보이지만, 눈빛이 풀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연인의 다정함을 보여줄 때는 모든 경계심을 무장해제시켜버리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다보면 그의 눈빛과 목소리 변화에 따라 순간 순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드라마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조정석의 웃픈 얼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그건 우리네 삶의 비의다. 결국은 삶의 빛은 죽음이라는 어둠을 향해 가는 여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끝은 결국 쓸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웃는다. 그건 삶의 비의를 모르는 무지함의 웃음이 아니고, 오히려 그 의미를 알고 있어 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조정석의 웃음이 담는 희비극은 그래서 우리의 삶을 납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아닌 웃음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페이소스 가득한 삶을.(사진:tvN)

‘밤에 피는 꽃’의 성공이 MBC 사극에 갖는 의미와 가치

밤에 피는 꽃

결국 조여화(이하늬)는 자신의 오라비가 시아버지인 좌상 석지성(김상중)에 의해 죽었다는 걸 알게 됐고, 왕 이소(허정도) 또한 선왕의 죽음이 석지성이 사주한 독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밤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진실이 꽃이 고개를 드는 중이고, 이제 그 꽃은 마지막 서사를 향해 꽃피울 참이다. 

 

MBC 금토드라마 <밤에 피는 꽃>이 단 한 회만을 남기고 있다. 최종 빌런 석지성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또 조여화가 이 수절과부의 굴레를 벗어나 금위영 종사관 박수호(이종원)와 행복한 미래를 그려나갈지 자못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미 어느 정도 결말이 예상되는 가운데, <밤에 피는 꽃>이 거둔 성취가 MBC 사극에 갖는 의미와 가치가 새삼스럽다. 

 

사실 MBC 사극은 저 이병훈 감독이 이끈 일련의 사극들로 확고한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허준>, <상도>, <대장금> 같은 작품이 퓨전사극을 이끌었고 그 열풍은 <주몽>, <선덕여왕>, <해를 품은 달>까지 이어지며 ‘MBC 사극’이라는 표현이 그저 지칭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독특한 특색으로 규정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MBC 드라마의 위상이 떨어질 정도로 큰 위기를 겪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인한 경영악화를 극복하기 위해 드라마 제작편수도 줄이면서 MBC 드라마의 존재감 자체가 흐려졌던 게 사실이다. 그걸 깨고 다시금 MBC 드라마가 부활의 신호탄을 날린 작품이 바로 2021년 방영된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사극이었다. 이산 정조와 성덕임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실제 역사와 인물들을 가져오되 여성서사가 전면에 등장하는 현재적 관점이 담긴 해석으로 과거 MBC에서 제작됐던 <이산>과는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MBC 사극의 이 흐름은 작년 <연인>으로 이어졌다. <연인> 역시 실제 역사적 사건이었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여기에 인조나 소현세자 같은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현재적 가치관을 담은 이장현(남궁민), 유길채(안은진) 같은 허구적 인물들의 새로운 서사로 채워졌다. 지상파 드라마 편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 정도로 지상파 전체가 어려운 현실을 맞이했지만 MBC 사극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흐름을 이어받은 <밤에 피는 꽃>의 성공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완전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사극이었다. 조선사회를 시공간으로 가져왔지만, 그 상상력은 현대적이었고 수절과부가 밤이면 담을 넘어 ‘전설의 미담’으로 활약한다는 과감한 이야기를 펼쳤다. 어찌 보면 적절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퓨전사극들보다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역사를 벗어나 마음껏 상상력을 피워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래서 한껏 가벼워질 수 있는 부분들을 어떻게 눌러주고 무게감을 갖게 하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밤에 피는 꽃>은 다소 무거운 선왕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조여화와 박수호의 가족도 연관된)을 밑그림으로 깔아놓는 반면, 매회의 그 흐름은 ‘활극’의 경쾌함과 유쾌함으로 톤을 잡았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코믹한 연기들을 채워넣어 상상으로 구축된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조여화 역할의 이하늬는 바로 이 코믹하면서도 시원시원한 활극이 펼쳐지고 또 박수호와의 달달한 멜로를 그려가면서도 진실에 다가가는 무게감도 균형있게 가져가는 연기를 펼쳤다. 그가 가진 색깔이 <밤에 피는 꽃>이라는 사극의 색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작품의 메시지나 색깔은 인물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이세영, <연인>의 안은진의 연기가 주목받았던 건 그것이 그 작품이 하려는 메시지와 색깔을 분명히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바톤을 이어받은 이하늬의 공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밤에 피는 꽃>까지 성공함으로써 MBC 사극이라는 브랜드가 다시금 활짝 꽃 피게 되는 상황을 이끌었으니 말이다. 

 

또한 <별에서 온 그대>로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지만,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홍천기> 그리고 <밤에 피는 꽃>까지 사극 연출에도 갈수록 일가를 만들어가는 장태유 감독의 성취 또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하이에나> 같은 현대극에도 많은 성공작을 내놓은 감독이지만 일련의 사극들에서도 분명한 성적을 내고 있으니. (사진:MBC)

‘세작’, 조정석 표정 변화 하나로 드라마의 분위기가 바뀐다는 건

세작, 매혹된 자들

“과인은 이제 필부가 아니다. 이 나라의 임금이다. 임금에겐 신화와 정적만 있을 뿐 친구는 없다.” tvN 토일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이하 세작)>에서 조선의 왕 이인(조정석)은 그 한 마디로 ‘몽우’라 부르며 우정을 쌓았던 강희수(신세경)의 애절한 간청을 단칼에 거절한다. 왕이 되기 전 진한대군으로서 강희수에게 보였던 다정함은 온데간데 없고 사방이 적이 되어버린 이인은 깊은 속내와는 달리 사사로운 정 따위는 단호히 끊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순간 이인과 강희수(물론 남장을 했지만)의 달달하고 훈훈했던 모습들로 채워졌던 드라마의 분위기는 권력을 두고 죽느냐 사느냐가 오가는 살벌한 정치판의 분위기로 바뀐다. 그로부터 3년 간 이인이 보이는 모습은 인간적인 온기를 지워낸 비정한 권력자의 그것으로 채워진다. 자신을 위협하는 김종배(조성하)를 몰아내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인 왕대비 박씨(장영남)와도 살가운 모습은커녕 입장 차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그러다 죽은 줄 알았던 강희수가 기대령 선발에 나서면서 그 비정했던 이인의 얼굴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강희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냐는 추상 같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와 바둑을 두며 “네가 좋다”는 속내를 끝내 드러내고, 강희수가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을 거짓으로 속였다는 배신감에 분노하다가도 그 연정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돌아온 강희수와 처음 마주할 때만 해도 둘 사이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질 것처럼 긴장감을 자아내게 했지만, 서서히 누그러지며 다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이인의 변화를 통해 드라마는 다시 달달한 멜로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강희수 역시 변화한다.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하겠다고 돌아온 그지만 이인에게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빠져든다. 그러면서도 이인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 속에서는 자신의 그런 감정과 상관없이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 

 

<세작>은 이처럼 두 개의 마음이 공존하는 두 사람이 연정과 대결을 오가는 과정의 묘미를 담은 드라마다.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정치극이 이인과 강희수 사이의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들지만, 이와는 대비되게 두 사람은 또한 사사로이 서로에 대한 연정을 품은 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흑과 백으로 나뉘어 대결하지만, 호적수를 만나 상대에게 감탄하며 매혹되기도 하는 바둑을 닮았다. <세작>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멜로 혹은 정치극의 특별함이다. 

 

상반된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인 역할의 조정석이나 강희수 역할의 신세경의 연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표정 하나의 변화만으로 다정과 비정을 오가는 조정석의 연기는 실로 <세작>이라는 드라마를 쥐락펴락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주목되는 면이 있다. <건축학개론>의 납득이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리 앞에 나타난 이 배우는 <녹두꽃>의 처절한 백이강으로 또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다정한 익준이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납득이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 코미디 연기가 두드러진 배우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세작>은 이런 이미지를 탈피하게 해주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조정석의 다정과 비정을 오가는 연기에 힘입어 <세작>은 갈수록 복잡한 감정들의 소용돌이를 경함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되어가고 있다.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마음까지 내주는 세작들처럼 목적을 향해 칼을 내밀지만 그 칼끝이 자신에게도 향하게 되는 이 비극적인 관계는 어떤 파국을 향해 나아갈까. 조정석은 끝내 비정한 얼굴을 보여줄까 아니면 다정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낼까. 조정석의 어떤 얼굴이 그 마지막을 장식할지 궁금해진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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