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로더’, 밑바닥 청춘들이 진창을 벗어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들

로얄로더

“굳이 따지자면 친구보단 파트너가 맞겠다. 나 평생 마이너리그에서 살다 늙어 죽을 생각 없어. 그래서 널 좀 이용하려고. 메이저리그로 오르는 동아줄로.”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로얄로더>의 한태오(이재욱)는 강인하(이준영)에게 대놓고 속을 드러낸다. 친구 하자고 했지만 사실은 그를 이용하겠다고. 

 

그는 살인자의 아들이다. 그 살인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고. 물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살인죄로 감옥에 간 아버지는 그 안에서도 여전히 한태오와 그의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위협이자 꼬리표다. 다른 깡패들을 시켜 복수하겠다 으름장을 놓는 그런 인물.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는 한태오가 이 진창으로부터 어떤 방법을 써서든 벗어나고픈 욕망에 간절한 이유다. 

 

그런데 강인하 역시 진창에 빠져 있다. 그건 재벌가 혼외자라는 위치 때문이다. 혼외자라는 이유로 그 집안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강오그룹 강중모 회장(최진호)까지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강중모 회장의 첫째 아들이자 한량인 강인주(한상진)가 매일밤 파티를 벌일 때, 강인하는 홀로 방에서 터지는 폭죽을 텅빈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가족이든 재벌가든 그건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니.

 

그걸 알고 있는 한태오가 강인하에게 손을 내민다. 파트너가 되자고 한다. 자신의 동아줄이 되어주면 강인하가 원하는 건 뭐든 해주겠다고 한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한태오의 그런 말을 강인하는 비웃지만, 한태오는 말한다.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걸 자신이 갖고 있다고. 그건 바로 ‘간절함’이다. 

 

<로얄로더>는 흙수저, 아니 그보다 더 못한 밑바닥에 떨어진 청춘이 재벌가 금수저를 동아줄 삼아 신분상승하려는 욕망을 그린 드라마다. 이런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절실한 청춘들의 서사는 <이태원 클라쓰> 같은 작품에서도 등장한 바 있지만, <로얄로더>는 좀더 게임적인 느낌이 더해진 드라마라는 특징이 있다. 자기 인생을 건 이 신분상승 게임에 한태오는 모든 걸 걸고 강인하를 그 재벌가 일원이 되게 만들려 하고 결국 그 왕좌에 앉히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한 치밀한 전략을 짜고 또 행동하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강오에게 전하는 미래 전략’이라는 리포트를 일부러 채동욱 교수(고창석)의 눈에 띠게 만든 것도 다 한태오의 계획이다. 그가 강오그룹 막내이자 실세로 떠오르는 강성주(이지훈)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그 리포트가 강성주의 손에 들어가게 하려한 것. 그 리포트는 향후 강오의 미래가 될 ‘상생협력센터’의 밑그림으로 강성주가 그걸 만들어놓으면 훗날 강오그룹에 입성한 강인하가 그걸 집어삼키게 하겠다는 게 한태오의 큰 그림이다.

 

이처럼 한태오와 강인하가 뛰어든 이 진창을 벗어나 신분을 바꿔보려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인생 전체를 두고 그려나가는 그림이자 계획이라는 점에서 마치 ‘인생리셋’의 욕망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끊어진 성장의 사다리 밑에서 ‘이생망’을 외치는 청춘들이라면 이들의 계획에 판타지로라도 동승하고픈 욕망이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데 친구가 아니라 파트너(인생 비즈니스쯤이 될 게다)로 시작한 관계라도 그것이 중첩되면서 마음이 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트너처럼 계획한대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두 사람이지만 둘 사이에는 어느새 친구 사이의 우정 같은 감정들이 더해진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변수로서 나혜원(홍수주)이 이들 사이에 들어온다. 

 

나혜원은 빚쟁이의 딸로, 도박장 돈을 갖고 도망간 엄마 때문에 조폭들에게 시달린다. 그녀 역시 이 지긋지긋한 진창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건너편 옥탑방에 살고 있는 한태오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강인하가 자신에게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녀는 갈등하게 된다. 한태오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 진창을 벗어나기 위해 강인하라는 동아줄을 잡고 싶은 욕망 또한 간절하다. 

 

결국 진창을 벗어나 신분상승을 하고픈 한태오나 나혜원은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이건 강인하에게도 대가를 요구한다. 그 역시 한태오와 나혜원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라도 한태오나 나예원을 모두 우정과 사랑으로 갖고 싶지만, 그건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로얄로더>가 흥미로운 건 그래서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진창에 빠진 청춘들의 신분상승을 향한 질주를 마치 ‘인생리셋’ 같은 느낌으로 하나하나 그려가는 걸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욕망들이 이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만큼 이들에게 요구하는 대가가 만만찮다는 걸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했지만 이 청춘들의 무한질주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흔히 꿈꾸는 ‘인생리셋’의 판타지의 짜릿함과 더불어 또한 그만큼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아이러니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사진:디즈니+)

 ‘더 커뮤니티’, 이 독보적인 정치 실험 서바이벌이 불러 일으킨 기대감

더 커뮤니티

흔히들 서바이벌 프로그램 하면 떠올리는 느낌은 ‘피곤하다’는 것이 아닐까.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누군가는 생존하고 누군가는 탈락한다. 그러면서 그 생존의 법칙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양이라고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은연 중에 강요한다. 그 많은 오디션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떠올려 보라.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만이 독식하는 그 욕망의 질주를 바라보며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사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씁쓸해지는 그 양가감정들이 피어오르지 않던가. 

 

하지만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는 마치 이런 사회가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단정이 섣부르다고 말하는 듯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물론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여타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게 서로 다른 가치관과 살아온 배경, 성향 등을 가진 출연자들을 한 자리에 모여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로그램이 그 사람의 사상을 나누는 기준은 네 가지다.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이 그 키워드다. 이로써 진보와 보수, 페미니즘과 이퀄리즘, 서민과 부유, 개방과 전통으로 출연자들의 사상은 마치 MBTI처럼 구분된다. 

 

그래서 이런 구분은 출연자들 간의 다른 가치관과 생각들로 인한 갈등과 대결을 상상하게 한다. 여타의 서바이벌이었다면 이들은 ‘사상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사상을 맞춰 탈락시킬 수 있다는 룰이 공개되자마자, 공격과 반격이 벌어지며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민의 힘 소속 도봉갑 당협위원장 출신인 슈퍼맨(김재섭)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자 문재인 정부 대통령 비서실 청년 비서관 출신인 백곰(박성민)처럼 정치 최전선에서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던 이들은 팽팽한 대립이 불을 보듯 뻔한 일처럼 여겨진다. 

 

나아가 페미니스트인 하마(하미나)와 페미니즘과는 어딘가 거리가 있어 보이는 707 특수단 상사 출신 다크나이트(이창준)이나, 홍콩대 출신의 금수저를 자처하는 지니(이지나)나 흙수저를 자처하는 다크나이트나 청와대 여성 경호원 출신 낭자(이수련)처럼 분명한 차이가 느껴지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더 커뮤니티>는 이러한 차이가 결국 분란을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저격하며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흐름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상을 보기좋게 빗나간다. 성향과 출신이 다른 이들은 결코 함께 생존해가는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생각 자체가 그저 고정관념이고 편견의 소산이라는 걸 보여준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테드(이승국)가 통찰력으로 빠르게 현재 그들이 놓여 있는 상황들을 브리핑하듯 정리하면서 다 같이 생존할 수 있는 ‘천국’의 이상을 설파하면,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는 충돌하지만 같은 정치권에서 활동했던 이력을 갖고 있어 오히려 더 잘 소통되는 슈퍼맨과 백곰이 머리를 맞대고 그 방법들을 고민한다. 데이터 전문가이자 방송인인 그레이(전민기)나 맥심 모델이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슈가(김나정)가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커뮤니티의 소통을 풀어간다. 

 

이러한 통상적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예상을 깨는 의외의 전개 때문일까. <더 커뮤니티> 이렇다할 대대적인 홍보 없이도 방송이 진행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웨이브측의 발표에 의하면 <더 커뮤니티>는 3~4회가 공개된 오픈 2주차 전체 시청시간이 앞선 1주차 대비 120% 증가했고, 설 연휴였던 오픈 3주 차에는 4회차 동시 공개(5~8회)라는 파격 편성으로, 오픈 4주차에는 첫 주 대비 무려 420% 상승한 시청시간을 기록했다. 또 매 신규회차 오픈 당일인 금요일 웨이브 예능 장르 신규유료가입자 견인 1위를 기록했고, 특히 30대 여성 시청시간 비율이 30%를 차지하는 성과를 냈다. 

 

물론 <더 커뮤니티>는 서바이벌이 갖는 분란도 엄연히 존재했다. 모두가 생존하자는 이들의 노력들을 현실주의자인 다크나이트나 낭자 그리고 다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경험자이기도 한 마이클(윤비)은 앞에서는 커뮤니티의 결정에 따르면서도 뒤에서는 비웃는다. 그것은 마치 현실주의자들의 조롱처럼 처음에는 느껴지지만 뒤에 가면 이들이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즉 누군가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베이징덕 요리를 먹지 못하게 되어 너무 슬퍼 울었다는 이야기를 짜장면 한 그릇도 사치로 여겼던 이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처럼 생각과 성향과 출신이 다른 이들이 꾸려가는 커뮤니티는 놀랍게도 꽤 오래도록 유지된다. 전체 11회 분량에서 8회까지 모두가 생존하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평화는 룰 자체가 더 독해지고 불순분자인 벤자민(임현서)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8회에 깨진다. 어쨌든 탈락자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룰의 압박 속에서 평화와 공동 생존을 주장해왔던 이들 중 이를 깨고 배신과 저격을 시도함으로써 첫 번째 탈락자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 균열은 또 다른 탈락자로 이어진다. 불순분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불순분자를 모두가 협력해 커뮤니티에서 탈락시키지만 또 다른 이가 그 역할을 부여받는 지독한 상황이 펼쳐진다. 

 

결국 <더 커뮤니티>는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이 그러하듯이 그 생존의 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탈락하고 끝내 살아남는 이들이 상금을 분배해 가져가는 것이 이 형식의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애초 사상이 전혀 다른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의 커뮤니티를 꿈꿨던 그 이상이 깨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크나이트가 주장하듯이 이들이 그간 해왔던 토론과 노력들이 마치 ‘배운 이들의 탁상공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커뮤니티>의 서바이벌이 달랐던 건 정해진 생존 현실의 결말을 향해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끝없이 이들이 공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10회에 미션으로 주어진 ‘인생스피치’에서 테드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위선자’라는 키워드를 갖고 개인적인 경험까지 꺼내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가진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위선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욕망들을 마구 꺼내놓기보다는 그걸 콘트롤하며 살아가는 ‘위선’을 선택할 거라는 거였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더 커뮤니티>에서 8회까지 공존의 이상을 꿈꾸며 해왔던 노력들이 ‘위선’이라고 간단히 폄하될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설사 현실은 끝내 이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커뮤니티라는 틀을 통해 함부로 자신만의 욕망을 마구 꺼내놓는 걸 스스로 통제하려 애써 노력하는(물론 실패할 수 있겠지만) 것 자체가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다는 걸 이 독특한 서바이벌은 보여주고 있다.

 

이제 리얼리티쇼 트렌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국 예능에서 이제 ‘서바이벌’도 조금은 다른 시도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더 커뮤니티>는 보여줬다. 그건 정치라는 소재적 차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사회 실험’이라고 할 수 있어 그저 프로그램에 머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보다 본격적인 리얼리티쇼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최근 몇 년 간 진행된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중에서 단연 <더 커뮤니티>는 도드라져 보인다. 이 프로그램이 연 이 문을 통해 리얼리티쇼의 새로운 영역들이 열릴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기는 이유다.(사진:웨이브)

‘킬러들의 쇼핑몰’, 냉혹함 속에서 더더욱 부각된 이동욱의 따듯함

킬러들의 쇼핑몰

‘이동욱은 어딘지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에 안으로는 뜨거운 열정 같은 걸 갖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면 한없이 냉정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그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때는 마치 그 얼음이 녹아들어 흘러내리는 물 같은 처연함을 느끼게 해준다.’ 과거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이동욱의 진가에 대해 내가 썼던 이같은 표현들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의 정진만이라는 캐릭터에서도 이동욱의 그 처연한 눈빛을 볼 수 있으니. 

 

“잘들어 정지안.” ‘킬러들의 쇼핑몰’은 이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건 이 액션스릴러가 갖고 있는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일단의 킬러들이 정지안(김혜준)의 집을 무차별 난사하고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그녀가 극복해나가는가가 전체 서사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생존상황이 시시각각 펼쳐지지만, 그 때마다 정지안은 삼촌 정진만이 평소에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과거로 돌아가 정진만이 어떻게 과거 용병 시절을 보냈고, 어쩌다 은퇴하게 됐으며, 킬러들의 무기를 거래하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이야기와, 킬러들의 타깃이 되어 부모를 모두 잃게 된 정지안을 거둬 함께 지내게 됐던 이야기 등을 조금씩 소개한다. 그래서 드라마가 펼쳐내는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정지안이지만, 시청자들은 시청 내내 어딘가 정진만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정진만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아우라가 이 작품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앞서 언급한 이동욱의 냉정한 듯 따뜻한 ‘겉차속따’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처연한 분위기는 이 작품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한때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민간인들이 다치는 걸 막으려 했던 정진만이라는 인물은 겉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지만 따뜻한 내면에 의해 안으로는 녹아흐르는 눈물이 가득 채워진 듯한 인물이다. 이런 이동욱의 이미지에 의해 잘 구축된 정진만이라는 캐릭터가 더더욱 부각되는 건,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대결구도를 만드는 베일(조한선) 같은 돌처럼 냉혹한 킬러들과의 대비 때문이다. 저들과 달리 그는 피와 눈물을 흘리며 아파한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끈끈함은 이 인물이 결국은 갖게 되는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로 인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파신(김민)이나 민혜(금해나) 같은 죽음도 불사하고 그를 돕는 진짜 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겉으론 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돈으로 묶여 그 목적이 사라지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베일 일당들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1999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베스트극장이나 드라마시티 같은 단역부터 시트콤을 거쳐 멜로, 가족드라마, 사극, 장르물 등 무수한 작품들을 해왔지만, 이동욱의 존재감이 도드라진 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저승사자 역할처럼 어딘가 신비로우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런 인물들에서였다. ‘아이언맨’의 몸에 칼이 돋는 역할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를 드디어 꺼내놓은 이동욱은, ‘도깨비’의 저승사자로 제 몸에 딱맞는 옷을 입은 후, ‘구미호뎐’ 시리즈로 펄펄 날았다. 

 

이렇게 된 건 독특한 분위기를 갖는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익숙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하기를 거부하며 새로운 영역을 계속 넘보는 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라이프’ 같은 작품에서는 소신이 확실한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역할을 했지만, ‘진심이 닿다’ 같은 로맨틱 코미디의 달달한 역할을 소화하더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살벌한 사이코 패스 역할을 연기하는 식이다. 심지어 ‘배드 앤 크레이지’라는 작품에서는 유능하지만 나쁜 놈과 정의롭지만 미친 놈의 양자를 오가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다.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품은 듯한 이미지나 익숙한 역할 대신 새로운 영역을 넘보는 연기에 대한 열정은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독특함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 그가 보여준 저승사자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으로 늘 봐왔던 검은 도포에 갓을 쓴 그런 인물이 아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댄디한 양복을 걸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저승사자는 그래서 설화 등에서 고정화된 캐릭터 이미지를 트렌디하게 해석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구미호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구미호라는 캐릭터는 역시 ‘전설의 고향’에서 주로 소개됐는데, 여성으로 그려지곤 했다. <구미호뎐>은 남성 구미호를 그려내면서 초능력을 쓰는 새로운 히어로의 모습으로 재해석됐다. 이동욱이어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게 됐던 뉴웨이브 남성 구미호라고나 할까.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런 작품들 속에서 ‘이동욱이 개연성’이라는 이야기들을 종종 하곤 한다. 독특한 스타일, 세계관, 톤 앤 매너를 가진 작품일수록 그의 연기가 설득력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유재석이 이끄는 유튜브 채널 ‘핑계고’에 자주 출연하면서 이동욱이 가진 어딘가 심드렁하지만 그러면서도 장난기와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면모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유재석과 함께 하는 모습에서 그는 차가운 듯 툴툴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만, 그것이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억지로 만들어내는 텐션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 묻어있어 그 점이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는 것. ‘킬러들의 쇼핑몰’의 정진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이처럼 ‘겉차속따’의 인물을 지금의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거기에서는 위험요소들이 적처럼 도처에 깔린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냉정할만큼 단단하게 맞설 수 있으면서도, 같은 편끼리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히어로에 갈증을 느끼는 대중들의 판타지가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팀으로 꾸려지곤 하는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이 원하는 리더십이기도 할 게다. 권력과 이익으로 얄팍하게 묶여진 베일이 이끄는 팀과는 전혀 다른, 피와 땀과 눈물로 묶여진 정진만이 이끄는 팀의 끈끈한 리더십이 그것이다. (사진:디즈니+)

‘닥터 슬럼프’, 흔들리는 우리를 붙잡아주는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닥터 슬럼프

“아유 니가 애면 좋겠다. 목마나 한번 태워주고 저 문방구 가 가지고 문제집이나 몇 권 사 주고 이라믄 입이 귀에 걸렸는데. 그 때야 니 기분 풀어 주는 거 쉬웠지. 아휴 지금은 우째야 니 기분 풀리는지도 모르겠고.. 이 삼촌이 해줄 게 없어 가지고 여가 애리.”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슬럼프>에서 태선(현봉식)은 울적해하는 조카 하늘(박신혜)의 울적해진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 하지만 뭘 해줘야 할지 또 자신이 뭘 해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털어 놓는다. 

 

“니 병원 그만 두고 삼촌이 몇 번이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왜 그만뒀니, 응? 뭣이 그래 힘들었는가, 아니 뭐 우리가 도와줄 건 없는가 해가. 이 삼촌이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니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니가 기댈 어깨를 내 주는 거뿌이 더 있겠나. 근데 또 니가 뭣이 모자라 가지고 이 보잘 것 없는 삼촌 어깨에 기대겠노.” 

 

해줄 게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지만 태선의 그 말에 하늘의 울적했던 마음은 한껏 누그러진다. 태선은 일부러 옥상에 심어진 양배추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늘의 엄마 월선(장혜진)이 바로 갖다 심은 거라며, “느그 엄마가 이래 양배추 갖다 심는 거 말고는 니한테 해 줄 게 뭐 있겠냐”고 그 마음을 에둘러 전한다. 마침 선 자리라는 걸 속인 엄마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갔다 봉변을 당하고 돌아와 엄마에게 “내가 창피하냐”고 쏘아댔던 하늘에게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과연 우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세상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뭘까. 그건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그런 능력만이 아니고, 그저 힘들 때 옆에서 바라봐주고 어깨를 내주고 토닥여주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 <닥터 슬럼프>가 태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너무나 평범해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말하지만, 바로 그 해주고 싶은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버텨내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걸 태선은 보여준다. 

 

태선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건 그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민경민(오동민) 같은 인물과의 대비 때문이다. 처음 마취과에 와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하늘을 선배로 다가와 도와주며 든든한 기댈 어깨처럼 보였던 그는 사실 거짓으로 속이고 하늘을 이용하기만 하다 버린 인물이었다. 해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은 힘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오히려 거짓으로 이용만 하려 하고 그래서 더 큰 배신감을 안기기도 하는 냉혹한 현실을 이 인물은 표상한다. 

 

태선과 경민의 대비가 보여주듯이 힘겨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해주고픈 마음이다. 마음 없는 능력은 이용하는 것으로 상대를 더 무너뜨릴 수 있는 반면, 능력이 없어도 진실된 마음은 그 따뜻함만으로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그리고 이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1등을 받은 성적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늘 한결같은 월선 같은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공부하느라 아버지가 죽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던 하늘에게 월선은 말한다. “하늘아 괘않다. 죄책감 내리 놔라.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니 아빠여서 행복했다더라. 우리는 진짜 니 부모라서 억수로 행복했다.” 

 

<닥터 슬럼프>는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고 그래서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진 않는다고 정우와 하늘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갖게 된 우울증이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마음의 병은 그 성공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넘어졌을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 역시 그런 대단한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없어도 서로를 걱정해 기댈 어깨를 내주는 그런 마음을 통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태선이나 월선 같은 늘 가까이 있어 당연한 듯 여겼던 사람들이 진짜 기댈 어깨였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정우가 성형외과 의사이고 하늘이 마취과 의사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부분에서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늘이 하려고 했던 마취과 의사는 어찌 보면 수술을 하는 의사의 든든한 기댈 어깨 같은 존재였을 테니 말이다. 외상후 스테레스 장애로 수술방에서 공황을 겪는 정우 옆에 마취과 의사로 나타난 하늘의 존재가 더욱 든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하늘의 능력만이 아닌 마음이 느껴지니 말이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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