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반란, 더 이상 <직장의 신> 같은 판타지 아닌 이유

 

“혼자서는 못가. 시계가 어떻게 혼자서 가. 다 같이 가야 나 같은 고물도 돌아가는 거야. 그런데 김양은 맨날 혼자서 큰 바늘, 작은 바늘 다 돌리면 너무 외롭잖아. 내 시계는 멈출 날이 많아도 김양 시계는 가야 될 날이 더 많은데...” <직장의 신>의 만년 과장 고정도(김기천)의 이 대사는 늘 로봇 얼굴의 무표정했던 미스 김(김혜수)은 물론이고, 무수한 직장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거기에 권고사직, 정리해고로 점철된 우리네 파리 목숨 직장인들의 자화상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사진출처:KBS)

오죽하면 직장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로지 업무로만 무장하려는 미스 김 같은 캐릭터가 각광을 받겠는가.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한 그녀의 말대로 작금의 직장인들은 심지어 “회사의 노예”로 취급되는 을 중의 을이 아니던가. 그러니 <직장의 신> 같은 드라마에 대한 열광과 미스 김 신드롬에는 우리네 아픈 현실이 묻어난다.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백만 시대에 이제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된” 아픈 현실.

 

하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을의 반란’을 보면 이제 이런 현실을 그저 한탄하거나 감내하면서 잠시나마 드라마 같은 판타지로 아픈 속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른바 라면 상무와 빵 회장에 이어 이른바 조폭 우유(?) 사태까지. 그간 이른바 갑에게 짓눌려 왔던 을의 정서는 최근 인터넷과 SNS를 통해 폭발하는 인상이다. 이러한 정서의 폭발이 드라마 같은 대리충족 콘텐츠 안에서 소극적으로 벌어졌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실제 현실을 바꾸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 때 인터넷을 달궜던 ‘대나무 숲’ 열풍은 그래서 어쩌면 지금 같은 ‘을의 반란’의 전초전 같은 징후였을 지도 모른다. 이 누군지 이름을 숨긴 채 ‘대나무 숲’에 들어와 회사의 비리나 고충을 한껏 소리 지르고, 그 소리가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전파되는 그 소극적인 쾌감을 만끽했던 이 땅의 수많은 을들은 이제 현실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과 SNS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집결된 여론들은 이제 말에 머물지 않고 어떤 실행력을 갖추기 시작한 셈이다. 이제 공감하거나 공분할 수 있는 대중정서가 밑바탕 된다면 인터넷 여론은 그간 갑으로 군림하던 이들까지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항공기 승무원에게 폭언에 폭행을 한 상무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쓰게 되었고 호텔 종업원에게 장지갑으로 뺨을 때린 한 중소기업 회장은 결국 자신이 납품하던 코레일에 빵 납품을 못하게 되었다. 이 회장은 심지어 회사를 폐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터진 이른바 조폭 우유 사건은 회사 대표의 공식사과문이 발표됐고 현재 제품 강매가 있었는지에 대해 검찰이 조사 중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에서의 갑을관계는 이미 일상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 갑을관계를 다루는 풍자는 코미디의 단골소재가 되어오기도 했다. 일찍이 80년대 정치풍자 코미디의 대가였던 고 김형곤 개그맨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를 통해 회장님 말이 곧 법인 회사의 갑을관계를 풍자한 바 있다. “딸랑 딸랑”으로 대변되는 김학래의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라는 유행어는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한 모양이다. 최근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였던 ‘갑을컴퍼니’의 직장 내 풍경 역시 그다지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겉보기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으로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이른바 ‘대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갑을 관계를 깨는 진짜 힘은 ‘을’로 대변되는 대중들이 소비자의 위치를 넘어서 같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목소리를 점점 내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상품만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상품이 갖고 있는 기업이미지는 구매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며 군림해왔던 이들은 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갑이 누군가를 다시 바라봐야 할 시점이다. <직장의 신>에서 미스 김이나 고 과장 혹은 <무한도전> 무한상사의 정 과장 같은 존재를 만들어낸 시스템이 상정하고 있는 갑을관계는 이제 조금씩 역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중의 시대에 슈퍼 갑은 대중일 수밖에 없다.

‘젠틀맨’이 포르노? 국위선양?

 

왜 그저 음악을 음악으로 듣고 즐길 순 없는 걸까. 심지어 ‘젠틀맨’이 ‘국위선양 포르노그래피’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나왔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가 쓴 이 글의 골자는 ‘젠틀맨’이 사실은 포르노 수준의 선정적인 뮤직비디오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좋아하고 유튜브 클릭수가 폭발하는 등의 이른바 ‘국위선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찬양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문화를 담고 있기 보다는 미국문화를 열심히 홍보해주는 ‘젠틀맨’은 한류가 아니라 미국문화의 첨병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사진출처: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

아마도 보수적인 시선으로 본 ‘젠틀맨’의 뮤직비디오가 못내 역겨웠었던 모양이다. 지나치게 편향적인 글인데다가 그 근거 역시 해외의 반응(그것도 과격하게 안 좋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면 이 글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 반응에 민감한 느낌마저 든다. ‘젠틀맨’이 보여주는 B급 유머는 물론 우리가 이제는 ‘SNL 코리아’ 같은 데서 토요일마다 보며 열광하는 미국식의 유머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한국적인 정서가 없는 건 아니다(이엉돈 피디를 어떻게 미국 SNL에서 볼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게 없다면 어찌 우리네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정희준 교수의 ‘젠틀맨’이 미국문화의 첨병이라는 얘기는 싸이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네 대중들의 미국 편향을 지적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가.

 

사실 싸이는 글로벌하게 네트워킹된 세상이 만들어낸 문화현상이다. 그것은 이미 국가나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다. 싸이가 곡을 발표한 지 단 이틀만에 전 세계의 음원차트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과거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흔히들 모국어라고 말할 때 드러나는 국가적인 배타성이 싸이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부를 때 저편에서는 그것을 자기네 언어로 비틀어 “Open condom style!”로 듣거나 “말이야!”라는 말을 “마리아!”로 듣는 식이다. 여기서 국가나 언어의 장벽은 오히려 창조적인 재해석의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러니 정희준 교수의 이야기처럼 싸이의 곡을 미국문화니 한류니 하는 식으로 국적성을 드러내는 논리는 이제 구시대적 발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미국문화나 남미의 문화, 일본문화, 중국문화 나아가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를 바로 집 안에 앉아서 자유롭게 즐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화적 사대주의나 국가주의의 논리를 가져오면 이 국가를 초월한 다양성 추구 시대에는 어딘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아마도 정희준 교수는 ‘젠틀맨’이 가진 선정성에 대해 언론들이 관대한 것을 국가적인 망신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론이 지나치게 ‘젠틀맨’을 국위선양 운운하며 국가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희준 교수의 논리 역시 그 국가주의적 시선 안에 포획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갑자기 촉발적으로 생겨난 싸이 현상에 국가나 정부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는 식의 모습을 보게 될 때다. 그래서 정부의 관계부처들이 싸이를 ‘한류의 첨병’이니 또 그 방식을 해석해 ‘창조경제’니 하는 식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현상은 이해되지만 의도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대중문화가 국가를 초월한 SNS 같은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촌화된 전 세계로 뻗어나갈 때 거기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너무 속보이는 일이 아닌가.

 

싸이는 자신의 음악이 그저 대중음악의 하나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인식되는 상황의 불편함을 이미 드러낸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국민가수’가 아니라 ‘국제가수’라고 이름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미국식(이 표현도 우습긴 하다)의 유머를 즐기면 안 되는가. 그걸 즐긴다고 우리의 본질이 달라지기라는 하는 걸까. 과거처럼 국가 대 국가로 폐쇄된 세계에서라면 그것은 침공이니 침략이니 하는 배타적인 표현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지구촌의 시대에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배타성이 과연 유효한 걸까. 싸이의 ‘젠틀맨’을 둘러싼 국가주의적인 잡음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이다.

27년만에 다시 행진하는 들국화

 

들에서 모진 바람을 버텨온 탓일까. 국화 향은 더 진해졌고 더 강렬해졌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들국화. ‘인제는 돌아와 대중 앞에 선’ 들국화는 서정주의 절창만큼이나 원숙해졌다. 젊은 시절 거칠었던 야성은 그 긴 시간을 거치며 그 강렬한 힘 속에 부드러움을 갖추게 되었고, 그들이 노래하는 가사는 도발적이면서도 인생의 깊이가 더욱 느껴졌다. 합정동 인터파크 아트홀에서 열린 ‘다시 행진’이라는 콘서트(4일-14일)는 그 제목처럼 들국화를 27년 만에 돌아와 다시 출발점에 서게 했다.

 

'들국화'(사진출처:컴퍼니F)

가사의 진정성이란 가수의 삶이 거기에 그대로 겹쳐질 때 담겨지는 법.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콘서트의 첫 곡 ‘행진’은 그들이 살아낸 삶을 미리 예시한 곡처럼 그 가사가 새록새록 피어났다. 아마도 1985년 발표됐던 젊은 시절 들국화의 이 노래에 발을 동동 굴리며 그 행진의 설렘을 느꼈던 팬들이라면 그 가사가 들국화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30여 년의 세월을 단숨에 꿰뚫는 힘. 그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 아니던가. ‘헤어진 후에’, ‘제발’, ‘사랑일 뿐이야’,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명곡들은 그 세월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20대 청춘들에게나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중장년들에게나 들국화의 노래는 여전히 청춘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꿈이 있으면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전인권은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꿈을 꾸고 다시 모여 다시 무대로 돌아오고 다시 행진하는 데는 긴긴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강렬한 힘을 가진 와인은 바로 따면 거칠고 쓰기만 하지만 오랜 시간 묵혀두고 꺼내면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깊어지는 것처럼, 들국화는 어쩌면 그 대기만성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보였다.

 

전인권의 목소리는 여전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읊조리는 듯한 저음에서 쇳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고음까지 단번에 치솟아 오르는 쾌감을 선사했고, 최성원의 부드러움은 여전히 속삭이듯 관객의 귀를 간지럽혔으며, 주찬권의 드럼은 여전히 마치 장작을 쪼개듯 강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전히’ 속에는 원숙미가 더해졌다. 공연 중간 중간 툭툭 던지는 농담 속에마저 인생의 깊이가 묻어나듯.

 

“예전에 다투고 헤어졌던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 한 관객의 질문에 주찬권이 던진 “헤어진 후에, 이별이란 없는 거야.”라는 답이나, 한 젊은 관객이 “젊었을 때 꼭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게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전인권이 “고생하세요”라고 던진 답변이 관객들을 공감시킨 것은 거기에 자신들의 삶을 통과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말 뿐이랴. 들국화의 곡들은 마치 부흥회의 연설처럼 강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담겨있었다. 27년만의 신곡 ‘노래여 잠에서 깨라’는 그래서 우리네 가요계에 던지는 도발이면서도 그 안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꿈과 희망이 들어있었다.

 

다시 돌아와 행진하는 들국화의 이 노래를 요즘 시쳇말로 떠도는 ‘힐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너도 나도 ‘힐링’이라 떠드는 탓에 그 단어가 가진 힘이 희석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들국화의 노래 속에는 넘어진 이들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로이고 힘이고 격려이며 도전이고 꿈이다. 들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기다려온 국화꽃이 피었다. 그 향기는 더 진해졌다.

김재철의 MBC, 그 잃어버린 3년의 의미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공고하게 세워둔 MBC라는 방송사의 위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은. 그 중심에는 이명박 정권과 함께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김재철 사장이 있다. 이전에는 MBC 사장이 도대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면서 방송을 즐겼던 대중들도 이제 김재철 사장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그는 MBC 프로그램의 추락을 초래했다. 그 전까지는 잘 몰랐던 사장 한 명의 위력을 실감하던 시간이었다.

 

'뉴스데스크'(사진출처:MBC)

가장 큰 문제는 공정방송 회복을 위해 무려 170일 동안의 파업을 벌였지만, 이로 인해 2백여 명의 MBC직원이 해직되거나 징계되었다는 것이다. <PD수첩>의 최승호 PD, 박성제, 박성호 기자, 정영하 노조위원장, 이상호 기자 등 8명이 해고되었고, 파업 관련자들을 본래 직종과 무관한 부서로 전보 처리하는 등 보복성 인사와 징계가 이어졌다.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MBC의 얼굴들이 일거에 사라져버린 것. 서울남부지법은 이러한 전보 처리 등이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이들은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MBC의 얼굴들이 해고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가장 눈에 띄게 망가진 것은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다. MBC 하면 먼저 떠오르던 <뉴스데스크>나 <PD수첩>의 날선 비판의식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뉴스의 정부 편향성은 대중을 위한 뉴스가 아니라 정부를 위한 홍보에 머물렀고 당연히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렸다. <PD수첩>은 PD의 해고에 이어 작가 8명 전원이 해고당하고 대신 시용PD들이 배치되면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00분 토론> 또한 손석희가 빠지면서 급격히 신뢰도가 떨어졌고 결국 대중들의 기억에서조차 멀어진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전문 인력들이 빠져나가자 뉴스 프로그램의 방송 사고도 줄을 이었고 몇몇 아나운서들의 적절치 못한 발언과 실수로 연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그저 시청률에 목매달면서 <뉴스데스크>를 8시 대로 옮긴 것은 MBC 전체 프로그램의 틀을 뒤흔들었다. 시간대를 옮겼지만 여전히 시청률은 지상파 방송3사 꼴찌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고, 9시 대에 <구암 허준>이라는 일일사극 파격 편성 또한 그다지 시청률을 가져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변경은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의 공백을 가져온 셈이다.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MBC 주말드라마의 막장으로 이어졌다. <메이퀸>은 아동학대에 가까운 자극적인 전개로 시작해 개연성 없는 인물들의 변화와 극악스러운 캐릭터들을 세움으로써 시청률을 가져갔지만 대중들의 냉랭한 비판을 받았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백년의 유산> 또한 비상식적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등장해 막장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오로지 시청률 지상주의가 가져온 MBC 드라마의 비극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의 그림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그대로 드리워졌다. 시청률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8년 장수한 예능 프로그램인 <놀러와>가 떠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종영되었고, 그 자리를 채웠던 <배우들>이라는 토크쇼 역시 시청률 난항으로 갑작스런 폐지를 맞았다. 아예 이제 MBC는 월요일 저녁 예능 프로그램을 빼고 <MBC스페셜>을 편성함으로써 사실상 예능 포기선언을 한 셈이다.

 

이 월요일 저녁 시간대를 때우고 있는 <MBC스페셜>도 그 위상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다. 과거 참신한 기획으로 다큐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금요일 밤의 최강자로까지 자리했던 <MBC스페셜>은 끝없는 편성 변경으로 인해 한없이 망가져버렸다. 눈물 시리즈와 <휴먼다큐 사랑> 같은 좋은 아이템들이 즐비했던 <MBC스페셜>의 추락은 MBC의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뼈아픈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사장 한 사람의 전횡으로 인해 방송사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그것이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을 떨어뜨리는 그 일련의 과정이 지난 3년 동안 MBC에서 벌어진 일이다. 방송의 성패가 프로그램의 질만큼 대중들이 그 방송사를 바라보는 정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 3년이 준 뼈아픈 교훈이다. 해고 노동자 복직, 변방으로 밀려난 직원들의 원대복귀 등등 해야 할 일들은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김재철 사장이 물러난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는 문제다. 이 하나의 선택은 앞으로 MBC가 잃어버린 3년을 되돌려 다시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대중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인가를 가름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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