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가 배출해야할 슈퍼스타는 어떤 가수일까

장재인이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와서 "바닥이 더 편해요"하며 털썩 주저앉아 또박또박 가사를 음미하듯 노래할 때, 아주 오랜만에 가슴 한 켠을 가득 채우는 어떤 설렘을 느낀 것은 거기에서 '음악'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렉트릭 사운드와 현란한 댄스, 그리고 음악 자체는 물론이고 비주얼조차 점점 찍어낸 듯 비슷비슷해진 작금의 가요계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어떤 정서적 감흥을 느끼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아마도 음악이라기보다는 프로듀서에 의해 잘 포장된 하나의 음악상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심사위원으로 경쟁자들을 심사하던 윤종신이 한 후보자에게 "당신은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야 될 것"이라는 지적은 작금의 현실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목소리나 가창력 자체가 가진 거칠지만 독특한 개성은 작금의 가요계에서는 프로듀싱 되는 과정에서 연마되기 마련이다. 좀 더 폭넓은 대중을 상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강렬한 개성 자체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어필이다. 원석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연마되어 상품화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슈퍼스타K'는 이승철이 매번 입에 달고 말하는 것처럼, "프로가 될 사람을 뽑는 자리"다. 따라서 아마추어들의 실력 없는 치기는 모두 '불합격'을 받기 마련이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130만 명이 넘는 경쟁을 뚫고 11명에 안착한 생존자들(?)은 이미 어느 정도 기본적인 실력을 갖춘 이들이다. 포크를 하는 장재인이나 김지수는 바로 그 포크라는 장르가 갖는 어쿠스틱한 매력을 통해 자신들의 음악성을 드러내고, 존박의 재즈적인 느낌마저 주는 R&B 스타일이나 허각의 감성적인 발라드 역시 그들만이 가진 개성적인 보컬에 의해 평이해 보이는 음악조차 돋보이게 만들어낸다.

중요한 것은 이미 실력도 갖추었고, 인지도도 갖춘 이들이 실제로 가요계에 슈퍼스타로 자리하는 문제일 것이다. 작년 '슈퍼스타K'가 배출한 가수들은 슈퍼스타K가 된 서인국, 박세미, 길학미 등이다. 어느 정도 인지도는 갖고 있지만 이들이 말 그대로 슈퍼스타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작년 '슈퍼스타K'는 올해처럼 많은 스타성 있는 후보들을 배출해내지 못한 결과가 크다. 만일 이런 상황이 올해도 반복된다면 이것은 '슈퍼스타K'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에 흠집을 낼 것이다. 아무리 '슈퍼스타K'가 되도 실제로 슈퍼스타가 배출되지 않는다면 그 오디션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슈퍼스타K'에 의해 실력을 검증받고 인기도 얻은 이들이 진정한 슈퍼스타로 서는 과정에는 반드시 상품화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이른바 되는 음악과 되는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프로듀서들이 이 개성 넘치는 신인들을 어떻게 상품화시키느냐는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개성은 무시될 수도 있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을 수도 있다. 개성 있고 실력 있는 가수들이 프로듀싱 과정에서 색깔을 잃어버리는 건 천편일률적인 가요시장의 흐름과 거기에 편승하려는 제작자들의 잘못된 마인드 때문이다.

아직 '슈퍼스타K'를 뽑는 오디션이 끝나기도 전에 거기 참가한 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섣부른 걱정이 앞서는 것은, 오디션 과정에서 어떤 설렘까지도 던져주었던 날 것의 개성 넘치는 후보자들의 노래와 스타일이 훗날 프로듀싱 과정에서 똑같은 상품으로 찍혀 나오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제발 장재인이 지금처럼 털털하게 바닥에 앉아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기 때문이며, 김지수가 특유의 소울 가득한 목소리로 포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들이 댄스가수들 속에 들어가 춤을 추고 전자음 가득한 음악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요시장에서 버텨내려면 가장 상품화가 잘 되는 댄스음악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시장이 진정 이렇다면 그것은 시스템이 잘못된 것이다. 어쿠스틱한 노래 하나로도 충분히 화제가 되고 인기를 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슈퍼스타K'는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네 가요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아이돌 그룹이 거의 장악해버린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은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자신들을 어필하기 위해 댄스와 자극적인 음악을 선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슈퍼스타K' 같은 무대는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엮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음악 스타일이 대중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필요하다면 무대를 바꿔야지, 무대에 맞춰 가수들을 바꾸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원석을 세공할 때, 비죽비죽 삐져나온 부분은 잘려져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석에 대한 비유일 뿐, 한 사람의 가능성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정사각형을 둥그런 원으로 만드는 방법은 각을 잘라내는 방법도 있지만, 사각형 바깥으로 두툼한 원을 덧붙이는 방법도 있다. 날 것의 강렬한 개성을 버리기보다는 좀 더 감싸서 두드러지게 어필하는 방식은 어쩌면 지금 막 가요계로 발을 딛고 있는 이들 11명의 후보자들에게 필요한 일일 것이다. '슈퍼스타K'가 오디션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진정한 음악인들의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그대로 느껴지던 그 묵직한 진정성의 감동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상품성과는 별개로 '슈퍼스타K'는 이 시대에 진정한 슈퍼스타를 뽑는 대회로서 자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생활을 소비하는 방송, 인기라면 심지어 발가벗는 세태

그녀는 자신이 '명품녀'라고 불리게 될지 알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대중이 한때 '개똥녀'를 부를 때 가졌던 공분의 뉘앙스를 갖게 될 것을 알았을까. 아마도.

그렇다면 문제가 된 방송 프로그램은 어땠을까. 그녀가 나간 방송이 이토록 큰 파장을 가져올 줄 알았을까. 분명.

명품녀라 불리며 사회적 파장까지 일으킨 당사자와, 그녀를 한껏 스토리텔링해 결국에는 명품녀라 불리게 만든 방송. 이것은 안타깝게도 작금의 우리네 방송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한쪽에서는 인기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 사생활을 팔겠다 나서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렇게 내놓은 사생활을 '상품화'시킨다. 물론 그 '상품화'의 성패는 얼마나 논란이 되느냐다.

한때 '루저 논란'을 일으켰던 '미녀들의 수다'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방송사고'였다면, 명품녀의 탄생은 의도적인 방송이었다는 점에서 실로 '독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나가 실수(?)였다면, 다른 하나는 의도지만, 이 두 방송은 내용적으로 보면 그다지 차이가 없다.

명품녀는 자신이 한 얘기가 10배쯤 부풀려졌다고 주장하고, 제작진들은 오히려 명품녀가 한 얘기를 오히려 순화해서 편집했다고 한다. 지금 이 공방은 '거짓말을 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 '누구'인가가 과연 중요할까. 한쪽은 너무 부풀려졌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축소된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크고 작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왜 명품녀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이런 소재가 버젓이 방송을 탔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른바 아이템이 되기 위해 스토리화되어서.

이 스토리화되는 과정에서 명품녀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삭제되고 오로지 명품, 사치 같은 특정 부분들만 취사선택되어 보여진다. 그것이 과장됐든 아니든 이미 스토리화 과정에서 논란은 의도된 것이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지만, 명품을 좋아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이다. 물론 정치인 같은 공인이 이런 행동을 버젓이 내놓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성이 아무리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공인처럼 치명타를 입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사생활의 노출이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인이 방송을 타는 조건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사생활이 거래되는 방송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이 등장하는 케이블 채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우리는 늘 이 사생활이 사고 팔리는 장면들을 당연한 듯 바라보고 있다. 토크쇼는 대표적이다. 연예인들은 이제 심지어 푯말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자랑이라도 되는 듯 써놓고 그 내밀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한다. 연예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있지만, 사생활을 거래하는 방식은 '명품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방송이 점점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경향에서도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발견된다. 즉 개인의 훼손불가능한 몸은 사적 영역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 몸을 전시하는 TV의 선정성은 프라이버시의 대표적인 침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지극히 사적인 내밀한 몸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사생활 침해'에 더더욱 둔감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품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는 문제의 핵심을 흐린다. 문제는 그런 사생활을 거래하는 방송이 상호거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자극적으로 흐르면서 거기에 제작자나 대중들 모두 둔감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연예인들이 공공연히 사생활을 소비하면서 인기를 유지하고, 방송은 그들을 끌어들여 시청률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명품녀 논란을 통해 알게된 것처럼, 이러한 사생활 소비는 이제 연예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논란이든 인기든 또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화제가 된다면 무엇이든 끄집어내지고 발가벗겨지는 방송 프로그램과, 주목받고 싶다면 서슴없이 그런 방송에 알몸으로 자신을 세우는 세태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제2, 제3의 명품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사실은 명명백백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이 가진 힘이 너무나 약해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블로의 이야기다. 한 네티즌에 의해 제기된 학력의혹은 타블로 당사자에게 처음엔 우스워보였을 지도 모른다. 왜 그렇지 않을까. 분명 자신은 대학을 나왔다는데 누군가 나오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좀 심한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언제든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여겨온 타블로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들이 네티즌이 제기한 학력의혹을 기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언론들은 점점 경쟁적으로 이를 기사화하면서 여기에 대응을 하지 않는 타블로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수상함'은 곧이어 '사실'로 둔갑한다. 뒤늦게 타블로는 결국 사실을 제시하면 모든 일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몇 가지 증거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웬걸? 사실들은 오히려 의혹을 더 증폭시킨다. 이 놀라운 마술 상자는 증거를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커다란 의혹으로 돌아오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왜 한 쪽은 사실이라고 증거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타블로를 믿지 못하는 걸까. 결국 사건은 검찰에게까지 가게 되었다. 상황은 아직 종료된 것이 아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이 타블로 사건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타블로 본인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연예인들(실제로 현재 몇몇 연예인들은 이 소통의 문제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팩트(fact)의 시대에서 스토리(story)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팩트의 시대에 사실 그 자체는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즉 증거 제시는 그 자체로 사건의 일단락을 맺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시대에 상황은 달라졌다. 팩트는 그저 스토리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런 정보들이 소문에 의해 증폭되고 변질되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막기 위해 던지는 팩트란 오히려 스토리만을 더 크게 만들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진원지는 정보의 과잉이다. 팩트의 시대에 정보들은 지금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처럼 그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는 자체적으로 정보가 생산되는 매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이 매체 속에서는 과거 수용자로 존재하던 대중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정보는 과잉일 수밖에 없다. 이 정보의 과잉은 이제껏 우리가 알 필요도 없었던 어떤 이들의 사적인 생활까지를 정보로 끌어들임으로써 정보를 더욱 과잉되게 만들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반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정보로 생산되는 시대. 그리고 이미 트위터나 미니홈피 등으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혼재가 일반화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이 무수히 많아진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한 가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쏟아지는 정보들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쓰레기(공해)가 되어버린다. 마치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해도 그 별과 별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서 별자리가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의 과정이 바로 팩트가 스토리가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무수한 정보의 별들이 쏟아지는 공간에서 중요해진 것은 그 별이라는 팩트 자체가 아니고, 그 별과 별들이 이어지는 스토리의 별자리다. 카더라 통신이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그 통신이 제공하는 스토리가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블로 사건처럼 그 스토리가 사적인 영역을 침투해들어갈 때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즉 팩트의 시대에 진실처럼 보였던 공적인 영역은 이미 스토리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화 경향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적 영역이 보호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대중들이 공적영역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적으로 발표된 자료에 대해 사적인 의심이 제기될 때, 그 스토리는 더욱 진짜처럼 믿어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적인 내밀함을 정보가 드러낼 때(혹은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정보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우리가 종이신문의 콘텐츠를 대하는 것보다 블로그나 트위터의 콘텐츠를 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하다못해 제품의 기능에 대해 어떤 전문가가 연구결과를 토대로 쓴 신문의 정보들보다, 한 주부가 직접 쓴 사용기가 더 신뢰가 높아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시대가 진실을 매도하는 시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스토리가 가진 힘은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 스토리는 혹독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통해 구체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잇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류가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제기되고 있는 스토리화의 문제는 아주 작고 사소한 부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쁜 스토리가 나쁜 미래를 가져오듯이 좋은 스토리는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의 시대에 대한 이해다. 어떤 정보의 왜곡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이제는 스토리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곡이 벌어진 그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왜곡이 말해주는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즉 타블로 사건에서 팩트(사실)는 학력의혹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스토리는 병역문제나 국적문제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안다면 어떻게 자신이 가진 진실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론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늘 하는 태도로서 몇몇 네티즌들을 악플러로 몰아가는 자세 역시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해 사건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은 합당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싸잡아 모두를 악플러로 모는 것은 소통을 불통으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실이 중요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실 뒤에 놓여진 스토리를 바라봐야 하는 시대다.

'7일간의 기적', 우리에게도 기적인 이유

김제동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주일 간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네 식구를 위한 집을 찾아헤매던 그에게 선뜻 자신의 집을 내주겠다는 집주인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제동을 바라보는 PD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비록 마당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풀들이 무성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낡았지만, 그 집이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네 식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 유재석이 기부한 선글라스 하나로 시작해서, 그 선글라스가 수많은 물건으로 교환되고 변신해 결국은 집으로 변하는 이 기적 같은 일은 '7일간의 기적'이 매주 우리 앞에 보여주는 마술이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물건들. 너무 흔해서 때론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 물건들이 우리를 이토록 감동시킬 수 있을까. '7일간의 기적'은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기적 같은 기부와 나눔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왜 하필 '물물교환'일까. 화폐 경제 사회 속에서 가격이라는 수치로만 가치매겨지는 물건은 '물물교환'이라는 조금은 구닥다리의 방식을 통해 가치가 새로 매겨진다. 누군가 사용하던 만년필이 장인의 다기와 교환되고, 누군가의 캠코더가 일년 내내 어떤 이가 자식처럼 키운 마늘과 교환될 때, 물건들의 가치는 수치를 넘어선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그렇듯, 구매할 때는 수치로 가치매겨지던 것도 사용하면서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그 물건에 새로운 가치로 덧입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물건과 물건이 교환되는 순간, '7일간의 기적'은 단지 그 수치적인 가치가 교환되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그 물건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에 천착한다. 40여만 원에 달하는 야구 글러브가 가치 있는 것은 그 가격 때문이 아니라, 그 글러브를 처음 끼고 마운드에 섰던 주인의 마음과 경험치 때문이다.

이 기부 프로그램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래서 어떤 작은 물건이 수혜자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거대한 물건으로 변신하는 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물건들이 다른 물건으로 변화할 때 거기에 담겨지고 중첩되는 따뜻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때,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때 그 기적은 일어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기적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느낌표'나 '일밤'에서 사회 공익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7일간의 기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가진 담담한 시선 때문이다. 흔히들 수혜자의 힘겨운 삶 앞에 눈물을 흘리고 그 동정적 시선을 기반으로 카메라의 위력을 과시하던 기부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7일간의 기적'은 기부자와 수혜자 사이에 수직적인 시선이 없다. 수평적인 눈높이로 위가 아니라 옆자리에 서서 수혜자를 동등한 눈높이로 바라보는 김제동이라는 MC의 시선은 '7일간의 기적'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은 기부가 가진 일방성을 교환이라는 쌍방향성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이 수평적 시선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이 '물물교환'을 통해 목도하게 되는 물건이 가진 가치의 재배열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생각을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이 '기적'은 단지 TV 속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건이 더 이상 부의 증명이거나 소유의 욕망으로 존재하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본래 있었던 사용가치를 복원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진 물건이지만 다른 사람이 가진다면 더 큰 가치를 가질 물건은 무엇일까. '7일간의 기적'이 제안하는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어쩌면 이 프로그램이 사회에 전하는 가장 큰 기적일 것이다. 그래서 매주 '7일간의 기적'이 방영되는 1시간 동안 우리들은 우리가 변화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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