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인트>가 그리는 경쟁적인 대학생활의 단상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tvN 월화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암 유발자들얘기다. 4학년 선배인 김상철(문지윤), 스토커처럼 홍설(김고은)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찌질이 오영곤(지윤호), 홍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하는 손민수(윤지원), 유정(박해진)을 좋아하지만 마음이 홍설에게 가있다는 걸 알고 취객을 보내는 충격적인 짓을 저지르는 남주연(차주영), 하는 일도 없이 유정의 집안에 빌붙어 살아가는 무대책의 빈대 백인하(이성경) 등등. 이들이 하는 짓은 막장드라마의 한 대목을 연상시킬 정도로 충격적이다.

 


'치즈 인 더 트랩(사진출처:tvN)'

물론 <치즈 인 더 트랩>은 막장과는 거리가 멀다. 대본, 연출, 연기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성도가 높은데다, 이 드라마가 주는 느낌은 청춘 멜로의 밝음과 아픔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막장적인 인물들과 대척점에 있는 홍설, 백인호(서강준), 장보라(박민지), 권은택(남주혁) 같은 인물들의 훈훈한 이야기들이 더 전면에 배치되어 있어 풋풋한 청춘 멜로의 균형을 맞춰준다.

 

<치즈 인 더 트랩>의 막장적인 인물들은 자극을 위해 의도적으로 들어간 인물이라기보다는 이 드라마가 가진 주제의식과 무관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 우리네 대학사회의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고 보면 유정이라는 어찌 보면 사이코 패스 같은 섬뜩한 느낌을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상처받은 짐승 같은 측은지심을 이끌어내는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역시 이 주제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이대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과거 8,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 때라고 경쟁이 없었겠냐마는 그렇다고 이 드라마 속 대학생들처럼 어떤 선을 넘지는 않았다. 홍설은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야 아르바이트의 압력을 덜어낼 수 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강교수(황석정)의 수업에서 팀 과제를 수행하면서 홍설이 겪는 괴로움은 과제의 어려움이 아니라 지나치게 이기적인 팀원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오영곤이라는 찌질이에 스토커인 인물이 같은 과에서 저토록 버젓이 범죄행위에 가까운 짓들을 벌이고 다녀도 선배들이나 동기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홍설과 둘도 없는 절친인 장보라나 말만 하면 뭐든 들어줄 것 같은 착한 후배 권은택을 빼놓고 보면 이 학과의 학생들은 홍설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니 나아가 오영곤의 말만 듣고는 홍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그 이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홍설이 이 학과에서 꽤 공부를 잘해 학점이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존재감으로 살아오다 홍설을 따라하게 된 손민수는 자신의 거짓말들이 발각되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건 네가 다 가졌잖아. 학점도 친구도 남자친구까지 다 가졌으면서 너 뭐가 그렇게 억울해.” 그러자 홍설은 이렇게 자신의 오래도록 숨겨왔던 속내를 드러낸다. “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 학점도 친구들도 그 어느 하나 쉽게 얻은 거 없다고.”

 

즉 대학사회에 깔려 있는 경쟁적인 분위기와, 가진 자는 쉽게 사회로 나가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는 처절하게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 부조리한 구조는 이들의 관계를 친구나 동기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관계로 놓아두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른바 암 유발자들이 대학생이라고는 보기 힘든 놀라운 행위들(심지어 범죄에 가까운)을 하고 있는 건 그들이 본래 그런 악한 존재였다기보다는 이런 경쟁적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부추기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고 보면 유정의 이중적인 캐릭터도 이 사회의 경쟁적인 분위기와 인간적인 관계가 깨져버린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모두가 그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는 목적을 갖고 다가왔다는 점은 유정이 때때로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지는 이유가 아닐까. 그 차가움과 살벌함은 그래서 이 인간적 관계들이 깨져버린 삶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려는 처절한 보호본능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치즈 인 더 트랩>이 그리고 있는 대학생활의 풍경은 물론 극화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풍경이 지금의 우리네 대학현실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도대체 우리네 사회의 어른들은 이 순수하고 풋풋하게 피어나야할 청춘들에게 무슨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원치 않는 무한경쟁 속으로 밀어 넣고, 태생이 모든 걸 결정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시 돋친 경쟁자로 여기게 만드는 짓.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시그널>이 보내는 향후 드라마 판도의 시그널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은 이미 알려진 대로 지상파에서 먼저 편성이 거론됐던 작품이다. 드라마업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와 여러 작품을 해왔던 SBS는 물론이고 지상파 3사가 모두 이 드라마의 편성을 고민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이 드라마를 포기했고 tvN이 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시그널(사진출처:tvN)'

이 그림은 어째 낯설지가 않다. 재작년에 tvN에서 방영됐던 <미생>과 완전히 판박이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생>이 지상파에서 거부됐던 건 멜로의 부재 때문이었다. 지상파는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 멜로를 추가하기를 요구했지만 원작자인 윤태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tvN이 이를 받아들여 제작하게 됐고 결과는 의외로 대성공이었다.

 

당시 이 <미생>의 성공은 지상파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미생>의 성공이 말해주는 의미들, 이를 테면 완성도 높은 작품에서 굳이 멜로를 끼워 넣지 않아도 성공이 가능하다는 식의 자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그널>의 사례는 이러한 자성도 지상파라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왜 지상파는 <시그널>을 거부했을까. 그것은 이미 여러 보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본격 장르물에 대한 부담때문이다. 적절한 장르와 지상파에 친숙한 코드들(이를테면 멜로나 가족 같은)이 버무려진 복합 장르물은 그나마 지상파가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괜찮은 장르물의 외형에 익숙한 드라마적 코드들을 넣음으로써 지상파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층과 장르물을 선호하는 시청층을 모두 끌어안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시그널>은 김은희 작가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본격 장르물에 해당한다. 거기에는 전형적인 멜로구도가 들어가 있지도 않고, 드라마의 전개도 본격 추리물과 스릴러처럼 촘촘하게 꾸며진데다 그 속도도 만만찮게 빠르다. 완성도 높은 장르물이지만 지상파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는 진입장벽이 꽤 높을 수밖에 없다. 잠깐 놓치면 이야기 전개가 이해되지 않는 드라마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지만 그건 또한 더 깊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시그널>tvN에서 방영되어 이처럼 성공하고 있는 걸 보는 지상파 드라마 관계자들이 대단히 아쉬워할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에서 방영됐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가 나오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즉 지상파를 보는 시청자들의 시청 패턴과 케이블을 보는 그것이 사뭇 다르다는 것. 보편적으로 틀어 놓는 지상파와는 달리 선택적 시청을 통해 지금의 위상이 만들어진 tvN은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청 패턴의 차이는 <미생>에 이어 <시그널>처럼 멜로 없는 본격 장르물로도 tvN 드라마들이 성공적일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tvN은 훨씬 더 영화처럼 드라마를 찍어낸다. <미생>도 그랬지만 <시그널> 역시 김원석 감독은 드라마라기보다는 거의 영화에 가까운 디테일과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지상파 드라마의 경향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지상파에서 거부한 작품이 케이블에서 성공하고 있다고 해서 그걸로 지상파가 배 아파할 것이라는 시각은 너무 이 문제를 단순화시킨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불안감이 지상파에 드리워져 있다. 그건 지상파 드라마의 제작패턴보다 점점 더 케이블 드라마의 제작패턴에 미래의 드라마가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현재의 콘텐츠 시대에 케이블 플랫폼이 지상파 플랫폼보다 훨씬 유리한 지점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시그널>의 성공이 보내는 향후 드라마 판도의 시그널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마담 앙트완>, 엄마 연기도 자연스러워진 한예슬

 

아마도 한예슬의 대표작을 고르라면 여전히 <환상의 커플>을 지목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 드라마에서 한예슬은 안나조라는 캐릭터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을 터트리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어딘지 가볍고 엉뚱할 것 같은 안나조라는 캐릭터는 한예슬에게 맞춤이었고, 바로 그 점은 한예슬에게 연기생활의 득이면서 독이 되기도 했다.

 


'마담 앙트완(사진출처:JTBC)'

그 이상의 캐릭터를 연기해내지 못한다는 건 연기자로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한예슬이 딱 그랬다. 무얼 해도 안나조의 잔상을 털어내지 못했고, 그 캐릭터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타짜>,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는 물론이고 <스파이 명월>, <미녀의 탄생>까지 그녀는 연기변신을 하지 못했다. 연기에서 주목받지 못하자 그녀가 보이는 건 광고 이미지뿐이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만난 <마담 앙트완>. 한예슬도 나이를 먹었다. 물론 여전히 예쁜 미모를 갖고 있지만 10년 세월이 드리운 얼굴의 흔적은 아무래도 숨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은 한예슬에게서 비로소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늘 나오는 드라마마다 소비되곤 하던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의 연기가 아니다.

 

한 아이의 엄마다. 그것도 이혼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전 남편에게 가겠다는 아이의 엄마. 갓난아기 때부터 집 나간 남편 대신 키워온 애지중지 딸이 그 전 남편과 함께 살겠다는 편지를 읽으며 한예슬은 조용히 숨죽여 흐느끼는 엄마의 절절한 속내를 연기한다. 울다가 온 딸과의 전화에서 한예슬은 마치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눈물을 숨기는 연기를 한다. 이제 자신의 딸을 키워줄 전 남편의 여자에게 다가가 자기 딸이 어떤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고 성격은 어떻고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으며 눈물을 흘린다.

 

<환상의 커플>의 잔상이 강하게 남아 한예슬이 그간 보여준 연기라고는 코미디적인 웃음이 대부분이었다고 믿었던 시청자들로서는 <마담 앙트완>에서 엄마 역할로 보여주는 눈물 연기가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그 눈물 연기에 대한 깊은 공감까지 갖게 되었으니 한예슬이 달리 보일 수밖에.

 

<마담 앙트완>에서 한예슬의 연기는 확실히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것은 세 남자들과 밀당을 벌이며 보여주는 멜로 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가 한예슬의 엉뚱 발랄한 한 가지 이미지였다면, <마담 앙트완>에서는 그 엉뚱 발랄함에 때때로 보여주는 진중함까지를 덧붙였다.

 

물론 이건 연기자 한예슬의 새로운 시작점일 것이다. 이제 겨우 삶의 폭이 넓어져 연기가 자연스러워진 것일 테니 말이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는 이미 한예슬이 10년 전에 확보한 것들이다. 이제 그녀는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심리 분석을 통해 그 속내까지를 살짝 들여다보는 <마담 앙뜨완>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고혜림이라는 인물은 한예슬이라는 여배우의 새로운 면면들을 충분히 이끌어내 줄 것으로 보인다

<시그널>은 왜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였을까

 

갑자기 지지직대며 울려대는 무전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무전기 소리에 이제 박해영(이제훈)도 이재한(조진웅)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민감해져 있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들며 잊혀졌던 과거의 사건을 들춰내거나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예고한다.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은 그렇게 무전기라는 판타지 장치를 이용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였다.

 


'시그널(사진출처:tvN)'

아무 생각 없이 그 무전기로 경기남부연쇄살인사건의 현풍역 기찻길에서 벌어질 살인을 예고하게 된 박해영 경위는 그 얘기를 듣고 현장에 간 이재한 순경의 개입에 의해 일어날 살인이 미수로 바뀌게 되는 걸 목도한다. 과거를 바꾸자 현재의 기록들이 모두 바뀌는 걸 확인하게 된 것. 박해영은 이 놀라운 변화를 보고는 1989년에 살아가고 있는 이재한에게 보내는 무전을 통해 그 끔찍했던 연쇄살인사건을 막아보려 한다.

 

다시 수사를 하면서 박해영은 연쇄살인사건이 한 버스노선을 따라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낸다. 그리고 그 날 현풍역 기찻길에서 도주한 범인인 이전 범행과는 달리 주거지 근처에서 살인을 벌이는 등 폭주하고 있는 걸 확인한다. 범인의 목격자인 버스에 탔던 승객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있었던 것. 하지만 당시의 목격자를 추적하다가 박해영은 당시 연쇄살인사건과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를 발견하고 자책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판타지를 담고 있지만 <시그널>의 이야기가 전하는 현실적인 함의는 놀랍다. 즉 살인사건을 막아내자 살인이 미수로 바뀌는 장면이 고스란히 전하는, ‘과거가 변하면 현재도 변한다는 명제가 그렇고, 26년 만에 다시 나타난 동일 수법의 살인이 전하는 기억에 사라졌어도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경고가 그렇다. 무전기의 지직 대는 소리가 그저 귓가에 울리는 소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망각의 저편으로 던져놓았던 것들을 긁어서 다시 깨워내는 소리로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시그널>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저 판타지가 섞여있는 형사물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가 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물론이고,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까지 무수한 사건 사고들로 점철되어 있는 게 우리 사회의 맨얼굴이다. 당시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목 놓아 외치며 한 목소리를 내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누구도 관심을 보내지 않고 결국은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져간다. 제대로 된 해결도 없고 사후대책도 나오지 않았지만 망각은 그것을 애초에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린다.

 

<시그널>의 무전은 그 망각을 파고들어오는 휘발된 과거의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 사건은 기억 속에서 묻혀 졌을 뿐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이 드라마는 전하고 있고, 과거의 벌어진 사건들이 결국은 현재를 만든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평범한 판타지 형사물로 보기에는 그 깊은 함의와 신랄함이 묻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시그널>이 던지는 무전은 그래서 저들 드라마 속 형사들만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 속에서 휘발시켜온 우리들에게도 날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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