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 의식의 힘, 그 힘을 넘어서

내세울만한 톱스타도 없고, 눈을 잡아끄는 스펙터클도 없다. 중견연기자들이 보여주는 탄탄한 연기가 드라마의 허리를 지탱해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빵왕 김탁구'가 보여준 괴력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연출이 실험적이거나 빼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스토리에 답이 있다는 것인데, 완성도로만 놓고 보면 '제빵왕 김탁구'는 과장이 많고 개연성도 많이 떨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제빵왕 김탁구'의 그 무엇이 대중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한 것일까.

스토리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이 드라마는 이른바 시청률이 된다는 검증된(?) 소재들이 넘쳐난다. 출생의 비밀, 불륜, 부모와 자식 간의 상봉, 복수, 경합, 가족애, 미션이 주어지는 성장드라마, 형제애, 자식을 두고 벌이는 부모 간의 대결, 비밀, 엇갈린 사랑.... 아마도 우리네 드라마들이 가졌던 성공 코드들을 이 드라마 속에서 거의 다 발견할 수 있을 정도.

이 드라마의 세대적인 폭이 넓은 것은 시대극의 틀 속에 성장 드라마적 요소를 집어넣은 공적이지만, 또한 이를 받쳐주는 다양한 성공 코드들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코드들을 김탁구(윤시윤)라는 실전적인 인물의 성장 스토리 속에 녹여낸 것이 드라마가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코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가족드라마들이 늘상 강조하는 '핏줄의식'이다. 수많은 세월을 수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걸어왔지만, 이 드라마가 결국 보여주는 것은 '핏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다.

구일중(전광렬)의 김탁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 오로지 자식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는 김탁구의 모친 김미순(전미선)의 절절한 자식 사랑,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엄마를 찾아 헤매는 김탁구의 효심이 이 드라마의 긍정적인 힘을 만들어낸다면, 자기 핏줄에 대한 지나친 편애로 비뚤어져 버린 서인숙(전인화), 불륜으로 갖게 된 자식을 거성식품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친아버지임을 숨기면서까지 모든 악행을 떠안는 한승재(정성모),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비뚤어져 버리는 구마준(주원)은 핏줄의식으로 보여지는 이 드라마의 부정적인 힘이다.

모든 것을 경쟁으로 바라보며,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질 수밖에 없다 여기는 한승재는 그래서 잘못된 가족 이기주의의 표상처럼 보인다. 반면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다 여기는 김탁구는 만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을 가족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는 가족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시대에 따라 가족에 대한 의식도 달라져 왔다는 점에서 이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의식은 이 시대극 속에서 서로 대결을 벌인다. 시대극으로 보면 한승재는 '경쟁'을 가치로 삼던 구시대의 인물이고, 김탁구는 '행복'을 가치로 삼는 현 시대의 인물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힘은 바로 이 우리네 정서를 끌어당기는 핏줄의식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시대에 여전한 것이 바로 이 핏줄의식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 핏줄의식이 가진 힘으로 추동력을 얻은 후에 차츰 그 핏줄 이상의 판타지로 나아간다. 구마준이 친형제임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김탁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자칫 가족주의에 매몰될 수 있는 드라마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김탁구라는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탁구와 구마준이 서로 자신들의 지분을 합쳐서 큰 누나인 구자경(최자혜)에게 거성식품의 대표이사 자리를 내주는 장면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여성이 CEO가 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고, 팔봉선생의 마지막 경합주제였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가족이라는 틀 그 이상을 넘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삶이라는 것을 '제빵왕 김탁구'는 말하고 있다.

'성균관 스캔들', 청춘물 그 이상을 그릴까

'성균관 스캔들'에는 우리가 익히 봐왔던 많은 사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세책점은 '음란서생'을, 남장여자 콘셉트는 '바람의 화원'을, 두건을 하고 밤을 휘젓고 다니는 홍벽서는 '일지매'를 그리고 금등지사와 정조 그리고 정약용의 이야기는 '영원한 제국'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성균관 스캔들'이 단지 이런 몇몇 사극들의 코드들을 버무려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이들 작품들과 차별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청춘'이다.

여기서 '청춘'이라고 하면 단지 남장여자 콘셉트의 여주인공과, '꽃보다 남자'의 사극 버전 정도로 읽을 수 있는 꽃미남들이 어우러지는 그저 그런 멜로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성균관 스캔들'이 가진 가장 큰 강점 중은 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청춘들의 대학(?) 멜로에 있는 게 사실이다. 믹키유천에 유아인 그리고 송중기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대학 멜로에 빠질 수 없는 기숙사(?)에서 남장여자 윤희(박민영)는 그들과 심지어 같은 방을 쓴다. 그것도 조선시대에.

거기에만 머문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청춘물의 사극버전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금등지사의 이야기와 윤희의 아버지 김승헌의 죽음이 연관이 있고, 또 문재신(유아인) 역시 그 형의 죽음이 금등지사와 관련이 있다고 볼 때, 이 사극은 그저 알콩달콩 청춘물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성균관에 정약용을 보낸 이유 역시 바로 그 금등지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니까.

겉보기엔 지조 있는 선비처럼 엄숙한 낯빛을 한 채 단단한 권력의 틀을 쥐고 있지만, 그 뒤편을 보면 그 권력이 끝없는 당쟁과 권력 투쟁의 음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청춘들은 과연 어떻게 이와 싸워나갈 것인가. 홍벽서(洪壁書)라는 이름이 말 그대로 대자보를 뜻하듯, 이미 이 싸움은 이 작품 밑바닥에 세워져 있다. 권력의 중심에서 누릴 모든 것을 누리며 자라온 선준(박유천)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권력의 실체를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만을 지키려 하는 아버지 앞에 문재신은 어떻게 저항해나갈 것인가. 재미로만 살아오다 사는 이유를 알게 된 용하(송중기)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가난에 꿈꾸는 것조차 사치라 여기며 살아온 윤희는 다시 꿈꿀 수 있을 것인가.

'성균관 스캔들'이 앞으로 그려나갈 청춘의 파릇파릇함이 보는 이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들이 상기시키는 젊은 날의 그 연애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느덧 삶에 지쳐 잊고 있었던 청춘의 꿈같은 것들이 꿈틀거린다. 거침없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끝까지 믿고 밀고 나가던 그 시절의 호기. 뭐든 꿈꾸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강건했던 마음. 물론 작금의 청춘들에게는 윤희가 조금씩 꾸게 되는 꿈을 통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역시 그 사치로만 생각했던 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호화로운 집, 고급 세단, 화려한 파티, 명품백과 우아한 드레스, 게다가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망가의 변호사로 잘 나가는 남편. 돈 걱정 없는 삶... 누구든 이런 삶을 꿈꾸지 않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전설이다'의 전설희(김정은)는 이런 삶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숨기며 살 순 없다"며 이혼을 결심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진짜 삶은 무엇일까. 젊은 시절, 가난했어도 피를 끓게 했던 무대 위, 그 곳에 그녀가 꿈꾸는 진짜 삶이 있다. 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면 답답한 가슴의 체증을 전부 날려버릴 수 있었던 그 시간의 기억들. '밴드'에 숨겨진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 여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버리려고까지 하는 것일까.

'밴드'라는 키워드를 두고 보면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가 상기시키는 영화가 있다. 바로 2007년에 개봉되었던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이다. 이 영화에서 지질한 인생을 살아가던 남자들은 '밴드'로 묶이면서 그 갑갑하고 출구 없는 일상을 음악으로 훌훌 털어버린다. 자꾸만 설 자리가 없어지는 남성들이 이 영화를 보며 열광했던 것은 매일 매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오면서 잊고 있었던 즐거운 청춘에 대한 기억과 꿈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일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그래서 놀이로 여겨지는) '밴드'를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즐거움'을 찾아낸다.

직장인 밴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은 바로 이 '일과 놀이'를 구분하며 일을 우위에 두던 삶에서 이제 그 동등함, 혹은 나아가 그것이 역전된 삶으로의 이행을 우리가 경험하는 시대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놀지 않고 일해 성공하던 시대에서 이제 제대로 놀아야 성공하는 시대로의 이행. '일밤'에 생겼다 사라져버린 '오빠 밴드'라는 코너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들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다시 악기를 쥐고 전국의 무대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물론 그 구성원들이 탁재훈이나 유영석처럼 프로들로 짜여져 아마추어밴드라는 성격이 무색해지는 단점을 드러내면서 사라져버렸지만 그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욕망은 해마다 무슨 무슨 가요제라는 이름으로, 혹은 기념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무한도전'이 밴드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최근 밴드를 조직해 아마추어 밴드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담은 '남자의 자격'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로써 '밴드'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물론 이들 밴드 이야기에 있어서, '나는 전설이다'의 전설희라는 여성이 밴드로 복귀하는 이야기와 '즐거운 인생'에서 지질한 남성들이 밴드로 복귀하는 이야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남성들은 인생의 끝단에 몰려서 밴드라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는 반면, 전설희라는 여성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밴드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좀 더 능동적이다. 남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절망을 밴드를 통해 풀어낸다면, 여성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결혼생활이 갉아먹는 자존감을 밴드를 통해 확인하려 한다. 성별에 따른 삶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밴드를 선택하는 동기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밴드를 중심으로 보면 삶의 억압과 그 탈출구로서의 음악이라는 점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밴드에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단초는 "왜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밴드'인가"라는 질문으로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밴드'만이 가지는 자유, 저항정신, 마이너리티 정서 같은 감성에 대한 향수가 숨겨져 있다. 밴드하면 연관되어 떠오르는 록의 정신, 사회적인 억압이나 관습적인 틀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그 저항정신의 뜨거움,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젊음(생각의 젊음이다) 하나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메이저들의 세상을 뒤집는 위치에 있기에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뭐 하나 거칠 것이 없는 생각의 자유. 이것들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밴드'라는 존재가 던지는 매혹이다.

이들 '밴드 콘텐츠(?)'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모든 걸 던지고 밴드로 회귀하는 인물들의 연령대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 경험을 통해 그 깊은 억압을 겪어본 중년들이다. 따라서 작금의 중년들이 그 청춘의 시절에 만끽했던 '밴드'의 경험(여기에는 밴드에 열광했던 기억까지 포함된다)은 이들 콘텐츠 속에서 향수가 되어 이들을 자극한다. 이 중년들은 '밴드'를 통해 이제는 희미해진 이 청춘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도대체 나이가 장애가 될 건 뭔가. 왜 지금 하면 안 되는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마흔의 청춘을 얘기하는 시대로 바뀌면서 이 중년들이 찾는 것은 잃어버린 자신들의 문화다. 일만큼 중요해진 것이 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놀이가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때론 그 자체가 경쟁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중년들은 자신의 삶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놀이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젊은 세대들을 위한 것들이기 일쑤고, 그러니 그들의 문화를 기웃거리며 그 청춘의 향기를 멀리서 맡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다반사가 아닌가.

좀 더 기획적인 자본이 투여되면서 대중문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밴드 음악은 사라져버렸다. 록에 심취하고 무대에 익숙했던 중년들은 그네들의 문화 한 자락을 잃어버린 셈이다. 프로의 시대에 직장인 밴드들이 아마추어리즘을 오히려 내세우며 클럽에 등장하는 것은 이 잃어버린 문화의 복원을 꿈꾸는 것이면서, 또한 지나치게 상업화되면서 사라져버린 그 아마추어리즘의 도전과 실험정신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 속에서 밴드 음악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동시에, 아이돌로 대변되는 상업화된 현재의 음악계가 등장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니 그들이 돌아간 무대는 단지 향수어린 추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밴드'라는 존재가 그려내듯이 거기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과거 그 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어떤 삶을 누려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들어있다.

'밴드'를 다룬 콘텐츠들 어떤 것들이 있나
윤도현이 출연했던 '정글스토리'는 당대 록월드라는 실제 라이브 록카페를 공간으로 사라져가는 밴드 음악의 끝단을 잡아냈다. 새벽 영업이 금지되던 시절, 홍대 앞 록월드는 툭하면 영업정지를 먹곤 했는데, 영화 속에 그 주인이 등장해 "영업정지를 먹었습니다"하고 말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영화로 끌어들이길 즐겨하는 이준익 감독은 '라디오 스타'에서 한물 간 가수의 삶을 그려내고는, '즐거운 인생'으로 직장인밴드를 통해 당대 고개 숙인 남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의 음악 취향(?)은 '님은 먼 곳에'라는 영화에까지 이어져 월남으로 가는 순이(수애)에게 마이크를 쥐게 했다. TV는 주로 예능 프로그램이 밴드를 다뤄왔는데, '오빠밴드'처럼 아예 밴드를 특화해 하나의 코너로 만든 것도 있고, '무한도전'이나 '남자의 자격'처럼 하나의 아이템으로 밴드를 활용한 것도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가 밴드를 소재로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전설이다'가 대표적이고 주말극으로서 '글로리아'도 역시 밤무대 가수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이들 드라마들이 무대 위에 여성들을 올린 것은 다분히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탈피와 동시에 개인적 성장의 공간으로서 무대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되었던 원고입니다)

감각이 드라마에 미치는 영향

'제빵왕 김탁구'에서 주인공 김탁구(윤시윤)는 천재적인 후각을 갖고 있다. 너무나 미세해 구분이 어려운 냄새도 구별해내고, 뭐든 한 번 맡은 빵 냄새는 잊지 않아 그 빵을 다시 재현내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어린 시절 탁구가 맛보았던 팔봉 선생의 봉빵을 재현해내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 김탁구의 남다른 후각에 기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른 감각도 아닌 후각일까. 그것은 음식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이 후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각이라는 감각이 드라마에 미치는 특별함 때문이기도 하다.

김탁구가 오븐에서 빵을 꺼내면 제일 먼저 우리의 눈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이다. 그리고 탁구가 거의 습관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은 그 빵의 냄새를 맡는 것. 그 냄새 맡는 얼굴이 흐뭇해지면 그 빵이 잘 되었다는 뜻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빵은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장면은 언뜻 단순해보이지만 사실은 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장면은 단지 시각적인 자극에 머무는 드라마의 감각을 후각의 차원으로 넓혀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실제로 우리 자신이 경험했던 저마다의 달콤한 빵의 냄새를 기억해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탁구의 어린 시절, 빵집 창문 너머로 입맛을 다시며 빵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아버지 구일중이 별채에서 만든 빵을 맛보며 즐거워하는 장면, 그리고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이들로부터 도망치던 탁구가 팔봉선생의 빵을 허겁지겁 먹는 장면은 그래서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 장면들이 우리의 뇌리 속에 남긴 후각의 기억은 훗날 성장한 탁구가 팔봉빵집에서 일련의 과제를 통과해나가면서 만들어낸 빵들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이 후각의 연결고리는 그 어떤 개연성보다 더 강력하게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탁구가 가진 천재적인 후각은 그것이 '김탁구 식'의 문제 해결 방법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캐릭터에도 중요한 역할을 미친다. 김탁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뿐, 별다른 학업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은 특유의 선한 마음과 성실함이지만, 그것만으로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후각은 이 상황을 모두 바꾸어 놓는다. 해외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온 마준(주원)과 탁구가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탁월한 후각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회사 경영에 뛰어든 탁구가 역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경영이 갖는 수치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 수치의 실체인 빵을 직접 대하는 방식이다. 김탁구는 이사회에서 서류가 아닌 빵을 준비함으로써 그 실체가 지닌 진심으로 이사들의 신임을 얻는다.

드라마가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여기에 후각을 부가시키는 이른바 음식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들이 힘을 발휘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장금'은 물론이고, '식객' 같은 드라마의 성공 이면에는 음식이라는 보편적인 소재가 가진 힘과 더불어 그 음식이 환기시키는 감각의 확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신데렐라 언니'가 얽히고설킨 관계의 파토스를 그려내면서도 그토록 진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배경이자 아우라를 만들어낸 막걸리 도가가 풍겨내는 독특한 후각의 힘이 아니었을까. 이제 빵 냄새를 맡으면 이 드라마가 떠올려지듯이, 드라마에서 감각이 갖는 힘은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류로서의 우리네 음식이 어떻게 드라마와 맞닿을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김탁구가 천재적인 후각을 가진 건 그것이 환기하는 감각이 드라마에 특별한 힘을 부가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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