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유산', 핏줄의식에 대한 애증을 넘어서

'찬란한 유산'이 40% 시청률을 넘었다. 이런 드라마를 우리는 국민드라마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엇이 '찬란한 유산'을 국민드라마로 만들었을까.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극중 주인공인 고은성(한효주)이라는 캐릭터다. 고은성이라는 캐릭터가 국민들을 때론 울리고 때론 기쁘게 했던 것은 그녀가 가진 두 가지 측면, 즉 그녀의 추락과 상승 때문이다. 그녀가 추락할 때 우리는 그녀를 한없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상승할 때 그 승리의 기쁨을 함께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추락과 상승에 한 가지 모티브가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핏줄의식이다. 고은성을 추락시키는 것은 백성희(김미숙)의 친딸인 승미(문채원)에 대한 엇나간 모성애 때문이다. 자기 핏줄을 챙기기 위해 자식이지만 남의 핏줄을 내치는 비정한 모성애는 물론 극화된 것이지만, 우리네 스토리텔링 전통 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비뚤어진 욕망이다. 우리네 옛이야기 속에 무수히 다른 판본으로 등장하는 잔인한 계모의 이야기는 우리의 남다른 핏줄의식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한편 고은성이 그 핏줄의식으로 인해 떨어진 나락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것은 핏줄을 넘어서는 그녀의 사랑(이것은 거의 인류애에 가깝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바닥에서 봉변을 당한 할머니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데려와 극진히 보살펴주는 일은 혈연과 같은 핏줄의식의 배반이다. 핏줄의식으로 버려졌지만 바로 그 핏줄의식을 넘어서 자식 이상으로 인정받는 고은성의 성장담은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녀는 자신이 핏줄의식으로 인해 버려진 경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그 핏줄의식을 버리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자기 핏줄만 챙기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존재들인가. 강렬한 핏줄의식 속에는 강렬한 죄의식 또한 자리한다. 고은성을 바라보며 핏줄의식의 사회가 내동댕이친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자기 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장숙자 여사(반효정), 그녀를 사랑하면서 변화하게 되는 선우환(이승기), 그녀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용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박준세(배수빈)는 모두 우리의 부채감을 대신해주는 분신들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바로 그 핏줄의식의 욕망을 넘어선 자리에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장숙자 여사는 친 자식이 아닌 고은성을 유산의 상속녀로 지목함으로써, 박준세는 아버지가 아닌 사회의 정의를 선택함으로써 그 핏줄의식의 욕망을 넘어선다. 물론 선우환의 사랑 역시 이것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유산(핏줄로 물려받게 될)을 빼앗아갈 지도 모르는 고은성을 그는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를 넘나드는 핏줄의식의 배반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혈연의 문제가 어느 특정 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숙자 여사는 잘못된 자식들을 일깨웠고, 박준세는 잘못된 아버지를 일깨운다.

'찬란한 유산'은 고은성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우리가 마음 속에라도 가지고 있었던 핏줄의식의 욕망들이 가진 죄의식을 일깨워 눈물로 정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찬란한 유산'이 40%가 넘는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고은성은 우리가 그토록 핏줄의식을 외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잊은 것처럼 저 편에 묻어두었던 타인에 대한 죄의식을 바라보게 만드는 캐릭터다. 우리가 그녀들에게 한 짓은 도대체 무엇일까.

대중의 기대와 작품 사이, 소통의 실패가 가져온 결과

결혼과 연애 사이, 오빠와 연인 사이, 우정과 사랑 사이. 이처럼 중간에 서 있는 것은 그만큼 오인 받을 소지가 많다. 결혼과 연애 사이에 서 있는 것은 문란한 방탕으로 보이기 쉽고, 오빠와 연인 사이에 서 있는 것은 근친상간을 연상케 하며, 우정과 사랑 사이에 서 있는 것은 불륜으로 보이기 쉽다. 특히 우리처럼 이쪽 아니면 저쪽이어야 하는 것이 마치 당위처럼 강요되는 사회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양쪽으로부터 공격받는. 그러니 '트리플'은 한 가지도 오인 받고 비난받기 쉬운 어려운 난이도의 소재들을 무려 세 가지나 동시에 돌아야 하는 드라마다.

'트리플'이 가진 화법의 문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지 알 수 없는 초반부의 스토리만을 놓고 보면 이 드라마는 실제로 논란거리들이 가득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 낯선 지대에 서 있는 남녀들의 관계가 그렇다. 조해윤(이선균)과 아무렇지도 않게 하룻밤을 지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친구로 돌아가려는 강상희(김희)와, 자꾸만 오빠가 좋아진다는 이하루(민효린), 또 친구의 부인이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된 장현태(윤계상)는 드라마를 불편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들은 그 골치 아픈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캐릭터들이 아니다. 그들은 일단 먼저 행동하는 이른바 쿨한 인물들이다. 장현태는 마음을 빼앗긴 최수인(이하나)에게 조금씩 다가가기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다. 집 마당에 농구대를 떡하니 세워두고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그녀 앞에 불쑥불쑥 자신을 드러낸다. 이 행동은 아무런 고민 없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장현태는 늘 밝은 얼굴을 하고 있고 행동은 거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후에 장현태의 고백으로 밝혀지는 것이지만, 아무 고민 없이 결행된 것들이 아니다. 장현태는 마음을 정리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최수인의 집으로 가기까지 여러 번 그 동네 주변을 뱅뱅 돌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는 것을 밝힌다. 이것은 조해윤과 강상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쿨한 인물들은 좀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부터 보여준다. 하룻밤을 지내고도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던 강상희에게 조해윤이 "넌 그게 쉬운 여자잖아"하고 심한 말을 하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도 고민을 했었던 것을 밝힌다.

이것은 '트리플'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화법이다. 이하루(민효린)는 신활(이정재)과의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오빠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버린다. 강상희와 신활이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질투를 느끼는 것으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갑작스런 행동이 먼저 보여지고,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쿨하게 그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이 드라마의 화법은 여러모로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결혼과 연애 사이, 오빠와 연인 사이, 우정과 사랑 사이에 선 이들이 그저 방탕하고 불륜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지기 때문이다.

'트리플'의 실패, 작품이 아니라 소통이다
이러한 오인되기 쉬운 감추려는 화법 속에서 이윤정 PD 특유의 감각적이고 팬시한 연출은 심지어 이런 기저에 깔린 관계를 포장하기 위한 것으로 오인된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오해다.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엇갈린 관계의 중간에 서 있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가 얘기하는 규범의 틀과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파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일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빠(친오빠가 아닌 관계로서의 오빠)인 줄 알면서도, 친구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또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최수인의 어머니가 죽음에 임박해서 딸의 불륜이 될 수도 있는 장현태가 보내주는 사진들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관계의 틀을 벗어난 순수한 사랑의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런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와 시청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사이의 차이는 이 드라마의 화법이 시청자와의 소통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윤정PD와 이정아 작가라는 콤비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달콤 쌉싸름한 커피향 같은 판타지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트리플'은 그 엇갈린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무게로 판타지를 한없이 무너뜨린다. '커피 프린스 1호점'처럼 청춘들의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려했지만 '트리플'은 그 관계의 무게로 인해 순정만화의 기대치를 배반하고 만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조해윤이 보이는 것은 그가 그나마 이 기대치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주변인물들의 관계들을 보면서 투덜대곤 한다. 강상희에게도 솔직하게 숨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장현태가 최수인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듯 말할 때도 "그만해라. 이젠 지겹다"고 말한다. 조해윤과 강상희가 동거를 한다고 밝혔을 때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신활이 "우리 중에 가장 재밌게 사는 놈은 너"라고 말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이처럼 뒤늦게나마 이 화법들이 엇나가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느끼고 있지만 그 돌파구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트리플'은 이 복잡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관계들을 안고 멋지게 삼단 점프를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소재적으로 오인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시도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전하려는 메시지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삼단 점프를 하면서 정작 그걸 보고 환호해줄 관객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서 발생한다. '트리플'이 끊임없이 비난을 받는 것은 작품이 조악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대중들의 기대와 맞춰가며 나가려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 권하는 사회에 대한 도발, '결못남'

'결혼 못하는 남자'는 언뜻 보기에는 이 결혼적령기를 지나 혼자 살아가는 남자, 조재희(지진희)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다들 하는 것을 '못하고' 있는 이상한 성격의 남자, 조재희의 행동에 주변사람들은 "재수 없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 먹는 저녁에 정성껏 스테이크를 굽고 와인까지 챙겨먹는 모습은 자신의 고독감을 속이려는 행동으로 보인다. 심지어 고깃집에 혼자 앉아 고기 맛을 음미하며 먹는 모습은 측은하게까지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결혼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측은한 생각과는 달리, 보면 볼수록 마음 한 편으로 이 남자가 꽤 매력이 있고, 또 심지어 이 남자의 생활이 부럽기까지 한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 첫 번째는 이 남자가 관계의 피곤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혼자인 대신, 그 혼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한다. 축제가 벌어질 때, 군중들 속에 자신도 끼고 싶다는 막연한 욕구는 종종 그 군중들이 가져오는 피곤함에 의해 배반당할 때가 많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은유다. 조재희가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저 혼자만이 아는 뷰포인트에서 와인이 세팅된 테이블에 앉아 오페라망원경을 손에 들고 그걸 감상하는 것이 궁상맞아 보이다가도 부럽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관계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삶은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그려낸다. 드라마는 과장되게 마니아적인 삶으로 그것을 그려내지만 어떤 음악을 들을 때는 볼륨을 어느 정도에 맞춰 들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즐거움에 철두철미하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혹은 포기해버린 그 즐거움을 그는 지독할 정도로 챙긴다. 파도에 자갈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때의 그 즐거움은 사실 이런 삶의 태도에서 비로소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결혼 못하는 남자'는 지상과제로서의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혼자 사는 삶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일면들을 목도하게 해준다. '결혼적령기'라는 말이 가진 사회적 압박감, 즉 '결혼은 몇 세 이전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그 압력은 혼자로서의 삶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결혼이 사회구성원의 생산과 관련된 것이기에, 이것은 사회의 생존을 건 압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결혼은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의 모든 것들을 규정해버린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싫어도 사회적 관계들을 유지해야 하고, 그 속에서 개인적인 삶은 잠자리에 들기 전 소파에 앉아 잠깐 TV를 쳐다보는 것 정도로 뒷전에 세워두어야 한다.

'결혼 못하는 남자'는 이러한 결혼을 중심으로 상식이 되어버린 삶에 대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혼자 사는 조재희가 처음에는 이상하고 심지어 안쓰럽게까지 보이다가 차츰 그 삶이 부럽고 또 그가 매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이 사회에 대한 도발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또한 결혼이 궁극의 목표가 되는 여타의 멜로드라마들에 대한 도발이기도 하다. 멜로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지극히 상투적인 '결혼 못해 안달난 남녀들'보다 이 드라마의 "결혼? 그걸 왜 해?"하고 묻는 이 남자가 더 매력적인 건 그 때문이다.

대작, 캐스팅, 막장을 넘어선 '찬란한 유산'

시청률 40%를 돌파한 '찬란한 유산'의 성공은 신드롬에 가깝다. 드라마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이승기, 한효주, 배수빈 같은 출연 배우들에 대한 관심도 가히 신드롬급이다. 그런데 '찬란한 유산'의 성공 요인들을 들여다보면 지금껏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공식들에서 빗겨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찬란한 유산'은 흔히 말하는 대작드라마가 아니다.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가족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로케이션이라고 해봐야 멀리 간 곳이 동해안 정도일 정도로 소박한 드라마다. 이것은 툭하면 해외 로케이션이 범람하는 작금의 드라마 공식 속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찬란한 유산'은 그 소박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40% 시청률을 넘기는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대작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오히려 '찬란한 유산'이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블록버스터 드라마라고 부르는 대작드라마들은 그만큼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한다. '거대한 그림'에 집착하다가 디테일한 이야기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찬란한 유산'은 그 외형보다는 내실이 탄탄한 드라마다. 유산과 핏줄이라는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보편적인 주제로 공감을 이끌어내면서도, 드라마가 보여주어야 하는 극적인 갈등구조를 균형 있게 병치시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드라마는 극적인 힘을 가지면서도 세대를 넘어서는 공감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러한 스토리와 연출에 대한 자신감은 흔히 대작드라마들이 가져오는 스타마케팅의 함정도 벗어나게 했다. 이 드라마의 이승기와 한효주는 한류스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견배우도 아니다. 이승기는 가수출신으로 '소문난 칠공주'에서 첫 연기 신고식을 치른 후, 이 드라마가 두 번째 작품이 되는 셈으로 연기자로서는 이제 막 시작한 새내기라고 할 수 있다. 한효주는 상대적으로 이승기보다는 많은 작품에 등장했지만, 그간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했던 배우다.

그러니 캐스팅만을 두고 보면 이 드라마의 기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낮은 기대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 드라마는 성공적인 캐릭터를 구축해냄으로써 이 두 배우들을 스타덤에 올렸다. 이승기는 이로써 가수, 예능인, 배우로서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한효주는 드디어 자신의 몸에 맞는 캐릭터를 만나 비상했다. 이밖에도 배수빈, 문채원, 김미숙, 반효정 등 많은 배우들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드라마가 그만큼 좋은 캐릭터들을 많이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찬란한 유산'이 깬 대박공식 중 가장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것은 '착한 드라마는 안된다'는 편견이었다. 이 드라마는 막장드라마들이 할거하는 드라마 세상에서 진심과 진정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주었다. '찬란한 유산'은 이처럼 흔히 말하는 대작이어야 한다거나, 대스타들이 캐스팅되어야 한다거나, 자극적이야 한다는 그 대박드라마의 공식들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찬란한 유산'의 성공이 시사하는 점이 크다는 것은 바로 이 깨져버린 공식들 너머에 어쩌면 우리 드라마의 미래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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